수나라군(隋軍)은 속전속결(速戰速決)로 100일 이내에 전쟁을 끝내는 전략을 세우고 진군(進軍)에 장애가 되는 병참(兵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급부대를 없애고 보급품을 병사 각자에게 개인별로 지급했는데 이것이 패착(敗着)이었다. 병사들은 보급품 무게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무겁고 표시가 나지 않는 식량(食糧)을 버려 무게를 줄이는 것으로 요령(要領)을 부리게 된 것이다.
“고려가 대신 을지문덕을 수나라 군영으로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하는 체했다. 그러나 사실은 수나라 부대의 허실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중문은 황제로부터 만일 고원(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밀지[1]를 받았으므로 을지문덕을 체포하려고 했으나 위무사로 파견되어있는 상서우승 유사룡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말렸으므로 우중문은 마침내 유사룡의 말을 듣고 을지문덕을 돌려보냈다.”[2]
“을지문덕은 수나라 부대가 굶주린 기색이 완연한 것을 보고 그들을 더욱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해 도주했다. 우문술은 하루에 일곱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다. 우문술은 여러 번 싸워서 이겼으므로 자신감이 생겼고, 또 주변 사람들 의견에 떠밀려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청천강)를 건넜다.”[3]
“수나라군은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는 척하면서 우문술에게 말하기를 ‘만약 장군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간다면, 내가 고원(임금)을 모시고 행재소[4]로 찾아가서 황제를 뵙고 항복하겠다.’고 했다. 우문술은 수나라 부대가 피로하여 더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쉽게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로 했다. 수나라군은 방진(사각형 진)을 치고 행군했는데, 고려군이 사방에서 공격했으므로 수나라군은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행군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5]
수나라군은 식량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왔으므로 식량이 떨어져 굶주린 데에다가 오랜 행군(行軍)과 여러 차례 전투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굶주리고 지친 부대를 가지고서는 견고한 평양성을 공략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므로 을지문덕의 항복 제안을 핑계 삼아 철군(撤軍)하게 되었는데 사방에서 고구려군이 벌떼처럼 달려어 파상적 공격으로 행군을 방해한 것이다.
“가을 7월 임인일 살수에 도착했다. 부대가 절반쯤 강을 건널 때에 고려군이 뒤에서 수나라 후방부대에 집중공격을 퍼부었다.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했다. 그러자 여러 부대가 한꺼번에 무너지면서 질서가 흐트러져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되어버렸다. 장수와 군졸들은 각자 뛰어서 도주했는데 하룻낮 하룻밤 사이에 살수에서 압록강까지 450리를 도주했다. 수나라 장군 천수 사람 왕인공이 열심히 싸워서 겨우 고려군 추격을 막아내었다.”[6]
수나라 부대가 청천강을 가운데 두고 반으로 나누어졌을 때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후방부대를 고구려군이 집중공격하니 살아남기 위해 갈팡질팡하는 상황에서 지휘관마저 전사하므로 수나라 부대는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목숨을 부지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청천강에서 압록강까지 180km를 평균 시속 7.5km 속도로 24시간 동안 계속 달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당시 수나라 병사들은 오랜 기간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주렸고 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처음 9군(별동대)이 요동을 출발할 때는 총병력이 305,000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오직 2700명만 살아서 돌아왔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모두 탕진되고 말았다. 황제(수양제)가 크게 화를 내면서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서 끌고 계묘일에 수나로 돌아갔다.” {영인}
305,000명 중에서 2700명만 돌아갔다는 것은 말하자면 말을 탄 사람 중 그것도 일부만 살아서 돌아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30만 명이 전사하거나 혹은 낙오(落伍)하여 고구려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사실 을지문덕은 압록강 서쪽에서부터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수나라군을 피곤하게 만들기 위해 거짓으로 패한 척하면서 유인했으므로 대규모 살상전(殺傷戰)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수나라군이 철수하여 돌아갈 때도 고구려군의 공격은 행군을 방해하는 정도이었으므로, 살수에서 수나라 부대가 궤멸(潰滅)할 때까지는 전투다운 전투가 없었고, 수나라군에서 전사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규모 살상전은 살수에서 벌어졌는데 이미 강을 건넌 절반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절반도 굶주리고 지친 병사들이 지휘관이 전사하여 각자도생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붙잡혔을 것이므로 아무리 적게 잡는다고 하더라도 포로 숫자는 20만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에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가 있었다.”[7]하여 고구려 69만 호보다 많은데도 큰 전쟁을 치를 때에 대개 5만 정도 병력을 동원했을 뿐이므로 고구려군 총 병력도 비슷하다고 보았을 때 전체 병력의 4~5배에 달하는 엄청나게 많은 포로를 잡은 것이다.
* 각주 ------------------
[1] 密旨. 임금이 몰래 내린 명령.
[2] 高麗遣大臣乙支文德詣其營詐降實欲觀虛實於仲文先奉密旨若遇高元及文德來者必擒之仲文將執之尚書右丞劉士龍為慰撫使固止之仲文遂聽文德還.
[3] 文德見述軍士有饑色故欲疲之每戰輒走述一日之中七戰皆捷旣恃驟勝又逼群議於是遂進東濟薩水.
[4] 임금이 이동할 때 잠시 머무는 곳.
[5] 去平壤城三十里因山爲營文德復遣使詐降請於述曰若旋師者當奉高元朝行在所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又平壤城險固度難猝拔遂因其詐而還述等爲方陣而行高麗四面鈔擊述等且戰且行.
[6] 秋七月壬寅至薩水軍半濟高麗自後擊其後軍左屯衛將軍辛世雄戰死於是諸軍俱潰不可禁止將士奔還一日一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裡將軍天水王仁恭為殿擊高麗却之.
[7]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七十六萬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