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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하나됩시다
전도서 4 : 7 - 12
오늘 저녁 읽은 말씀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둘이 사는 것이 낫다는 사실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너무 평범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필요한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아름다울 뿐더러 먹기 좋은 과실이 열리는 많은 나무가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이 발원지(發源地)가 되어서 두 강이 흘렀는데 비손강과 기혼강이 아름답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아름다운 동산입니까? 그림처럼 아름다운 동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자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했는데 이는 본래 히브리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흙을 ‘아다마’라고 하는데 아담은 흙에서 나왔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생각한 전도서 3장 20-2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 않아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리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하였습니다. 이 몸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우리의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몸은 이 땅에 엄연히 있어도 그 영혼이 떠나면 곧 생명이 떠나게 되는데 우리는 흔히 “그 아무개 세상을 떠났어요” 혹은 “돌아 가셨어요”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산도 아름답게 만들어 놓으시고 사람도 지으셨지만 다 좋긴한데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하시고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서로 돕게 되었습니다.
한문은 보통 우리 한글처럼 소리 글자가 아니고 뜻 글자입니다. 그래서 한문의 원형들을 보면 대개 모양을 따라 했습니다. 산 모양 뫼뿌리 셋을 그리고는 뫼 산(山)이라 하고, 해 모양을 그리고 날 일(日), 달 모양을 그리고 달 월(月), 시내가 흐르는 모양을 그리고 내 천(川)했는데 사람은 서로가 의지하고 있는 모양을 그려 놓고 사람인(人)이라 하였습니다.
흔히 사람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사실이예요. 로빈슨 쿠르소는 할 수 없이 혼자 살았지마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서로 사귀며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은 절해 고도에 정배를 보내서 혼자 살다 죽게하는 잔인한 형벌이 있었습니다.
옛날 사도 요한도 밧모섬에 정배 갔었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면 안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휴양 갔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외로운 가운데 다른 사람 같으면 좌절감에 빠져서 있을 것이었지마는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의 심령의 눈이 하늘을 바라보고 심령의 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체험을 했기에 우리에게 귀한 계시록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죤 번연을 보세요. 그도 교회의 핍박으로 감옥에 갇혀서 오랜 세월을 지내는 동안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장망성을 떠나 시온성을 향해 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천로역정]에 그려 놓아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이 된 것입니다.
요사이도 가장 가혹한 형벌 중에 하나가 특히 사상범은 감옥에서도 독방을 줍니다. 호텔의 독방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하루 종일 가도 누구하고도 한번 이야기 할 기회도 주지 않고 혼자서 지내게 하는 것처럼 미칠 노릇은 없습니다.
왜 혼자 사는 것이 이렇게 고통입니까? 사람을 본래 하나님이 지으실 때 같이 살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차피 같이 살아야 할 사람들끼리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습니까? 그러한 마디로 말하면 서로 도우며 살아야 합니다.
제 2세기초의 신학자인 터틀리안의 변증론의 한 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보라, 저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 가를! 저들은 이제 서로 죽기도 사양치 않는구나, 저들은 아내 외에는 무엇이나 공동으로 가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터틀리안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서로 도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우리를 핍박하나 우리는 당신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 우리가 당신들이 섬기는 신을 위하여서는 아무 것도 아니하나 당신들 중에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우리가 도움의 손을 펴노라”하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얼바너스 감독은 “로마 전국에 기독교 신자로서 걸식하는 자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생동하고 부흥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었습니까?
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도 부러우리만큼 서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 사랑이요, 참 봉사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때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기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하면서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못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보았느니라.”
이때 오른 편에 있는 양들이 하는 말이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였습니다.
이 축복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하고 있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 무엇을 했는데 하고 자랑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합니까? 선한 일을 하고도 기억하고 자랑으로 삼지 않으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게 주어진 것이 있을 때 없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돕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늘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구의 것이에요?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얼마동안 맡아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는 홍포를 입고 고운 베로 몸에 걸치고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로 연락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옷은 말할 것 없고 온 몸에 헌데까지 있어서 괴로운 생활을 하며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하였습니다.
후에 부자도 거지도 다 죽었습니다. 아마 부자는 장례식도 굉장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어떻게 땅에 묻히기나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부자의 영은 음부에 가고 나사로의 영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얼른 생각할 때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부자는 성경에서 보는대로 무슨 특별한 나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 가지고 자기 혼자 살다가 죽었는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에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라”고 했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돕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일 당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매월 넷째 주일 봉사 주일로 지키는데 여러분이 참여하여 돕습니다. 그런데 모두 참여하시는 것 같지는 아니합니다. 우리 교회가 생동하는 교회 되기를 원합니까? 서로 돕는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구경만 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합시다.
물질적인 것으로 돕는 것 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이 서로 맞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한사람이면 패하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모두가 다르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싸우라고 다르게 태어난 것이 아니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게 살게 하려고 다르게 보내신 것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신앙의 방법이 다르다고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어떻게 하든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보세요!
전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빌리 선데이라는 분이 시카고에서 대중 전도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야외 집회를 하는데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빌리 선데이는 하늘을 향해서 큰 소리로 입에 손을 대고,
“베드로 선생님! 거기 천당에 장로 교인이 얼마나 됩니까? 장로 교인은 없다. 그래요, 그러면 감리교인은 얼마나 있습니까? 감리교인도 없다. 아니 그러면 구세군이 있습니까? 구세군도 없다. 베드로 선생님 그러면 천당에는 누가 있습니까? 천당엔 예수 믿는 사람만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사람에 따라서 그 환경과 성격 그밖에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교파 저 교파에 속해서 신앙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가 조금씩 다른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매력이 있습니다. 누가 어느 교파에서 신앙 생활하였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해서 거듭나 새 사람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좀 다른 것이 있다고 백안시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집에는 그릇도 여러 가지 있고 재목도 여러 가지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에베소 4장 1-3절 말씀을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람의 양을 치는 목자와 그 조카 롯의 양을 치는 목자가 여러분 아시는대로 베델 근방에 풀도 많지 않고 물도 마르고 하다 보니까 목자들 사이에 서로 다투는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브람이 롯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한 골욕이라고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여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있어. 만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지 못하고 다툰다고 하면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겠느냐?”
아브람은 참으로 훌륭한 분입니다. 그 분의 말씀이 꼭 맞습니다. 그때 뿐만 아니라,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겸손과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 참고 사랑으로 용납하고 하나되기 위하여 힘쓰지 아니하면, 내 편에서는 조그만 손해도 안보려고 달려들면 결국 싸움 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귀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믿는 사람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왜? 하나로 뭉치면 힘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아니하고 될 수 있는대로 갈라놓으려고 이간을 부치고 싸움을 부칩니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불평 생기면 이것 마귀 역사구나 생각하고 기도하며 잘 참으세요. “마귀야 물러가라 하지 마세요. 속으로 하세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한가지입니다.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 개인 개인 보면 얼마나 우수한지 모릅니다. 이번 국제 기능 올림픽에서도 한국 선수가 전 종목에 입상을 하고 금메달이 22개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제패한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 민족이 이렇게 훌륭합니다.
이제 힘 쓸 것은 하나로 뭉치는 일입니다. 모래알 하나 하나를 현미경으로 보면 굉장히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래 자체는 뭉치는 힘이 없기 때문에 진흙보다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래가 시멘트와 결합해서 뭉쳐지면 바위처럼 굳어지고 힘을 쓸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알알이 굴러다니며 잡으면 솔솔 새는 모래알 같은 우리를 성령의 시멘트로 하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앞에 형제자매 한자리에
크신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주예수 본을받아 모든 사람 내몸같이
환난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사랑하는 주님예수 같은주로 섬기나니
한피받아 한몸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되어
우리주의 크신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시편 133편 1절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려 가다가 형제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 제물을 길가에 놓아두고 그 형제에게 가서 화해하고 그리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피묻은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 듣지 않으시고 귀를 막으시겠다고 이사야서에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려 합니다. 고요히 나 스스로 내 이웃 내 형제와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생각하십시다.
가난한 이웃을 등한히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할 책임을 다 했습니까?
내 형제 자매, 부모, 자녀, 이웃이 사랑의 관계 협력의 관계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직도 그 아무개만은 좋아할 수가 없어’ 하고 생각되시는 분이 안계십니까?
그것 용서하고 화해하기 전에는 하나님께 아무리 열심히 아무리 오래 기도 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상달할 수 있는 기도 드립시다. 주안에서 하나 되기 위해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