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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7-29
하나님이 싫어질 때 / 김영주 목사
1. 서론
송명희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의사의 실수로 태아의 뇌를 집게로 잘못 건드려 일생 동안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된 분입니다. 이 분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을 들여다보면 너무도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었다합니다.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힘겨운데 또한 너무도 가난해서 분유 한 병 제대로 먹을 수 없었고, 일곱 살 때까지는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열 살이 넘어서야 겨우 밥숟가락을 스스로 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결핵에 시달렸습니다. 그녀는 모든 것이 절망스러운 나머지 자기가 태어난 것을 저주해 사춘기 때에는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믿었던 하나님 때문에 그냥 죽을 수가 없었다합니다.
17살이 되었을 때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고 죽어야겠다며 하루에 몇 시간씩 목숨 걸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을 왜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지 절규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만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에 몇 시간씩 기도하는 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시'가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학교 문턱에도 가 본 적이 없었던 그녀에게, 문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그녀에게 완전한 예술가이신 하나님은 시를 불러주셨습니다. 이때 떠오른 시를 온몸을 뒤틀어가며 받아 적었습니다. 이때 쓴 시가 바로 ‘나’라는 시 입니다. 제가 이 시를 읽었을 때 제일 맘에 와 닿았던 구절이 바로 ‘공평하신 하나님이’ 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아니 공평하긴 뭐가 공평해?, 남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손 발 멀쩡하고, 밥도 먹을 수 있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고, 가고 싶은 곳 다 갈 수 있는데 난 이게 뭔가? 이거 처음부터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닌가? 이러면서 원망, 서운함, 불평으로 가득차야 할 사람이 자신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공평하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여러분 어떠세요?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것 가졌으니/
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나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가끔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참 맘에 안 드는 경우 있을 것입니다. 그런 때는 하나님이 싫어지기까지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싫어지는 분 없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의 사람들도 그런 때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이 싫어졌던 사람들
①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했는데, 안 갔습니다.
니느웨는 과거 이스라엘을 아주 괴롭혔던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 아니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을 외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상, 만약 그들이 회개하면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재앙을 내리지 않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요나가 생각해보니 이건 도저히 할 일이 아닙니다. 내 나라를 그렇게 괴롭혔던 사람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재앙을 받아야 합니다. 회개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용서받아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안 갈려고 그랬습니다. 그랬다가 풍랑을 만나고, 바다 속에 던져지고, 물고기에게 삼켜져, 물고기 뱃속에 삼일을 지내고 하는 과정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아 그런데 그 강팍한 니느웨 백성들이 왕부터 동물에 이르기까지 금식하고,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을 보는 요나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저렇게 회개하면 안 되는데, 저것들 망해야 하는데, 저런 모습 보면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해주시고 심판을 보류 하실텐데...저 놈들은 망해야 하는데....
적어도,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을 괴롭힌 그 대적들은 징계,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이 니느웨도 당연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나의 기대처럼 안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하실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될까봐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안 가려고 버티다 버티다 안 가면 죽을 것 같아서 마지못해 갔습니다. 가서 선포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킵니다. 심판대신 용서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요나는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하면서 하나님께 화내고 불평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맘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② 조용기 목사님 일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본 선교에 대한 부담을 주셔서 일본에 복음 전하러 갔습니다. 수많은 일본 목사님들, 사역자들이 모였는데 설교를 하려니 옛날 일본 사람들이 한 일이 너무 밉고 괘씸해서 이런 맘 가지고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설교 전, 강대상에서 고백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설교를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일본 목사님들이 나와서 울며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고, 서로 울면서 용서하고 집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경우를 경험합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봐도 나쁜 사람입니다. 심판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잘 될 때, 잘 나갈 때 우리는 고민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때,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지? 하나님의 공의(정의)는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신 하나님인지 이해가 안 갑니다.
또 성경을 읽어보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고, 먼저 화해의 손 내밀고, 그들을 축복하라고 까지 합니다. 용서도 한 두 번 하는 것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는 것입니다. 또 핍박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합니다. 도대체 말도 안 되어 보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이 싫어집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입장이 안 되어 봐서 모르십니다. 안 당해봐서 모르십니다. 그 인간 때려 죽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용서하라구요? 축복하라구요? 한두 번도 아니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구요? 저는 못해요, 하나님은 되지만 나는 못 합니다.
이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이 정말 싫어집니다. 또 하나님이 싫어질 때는 말씀대로 믿고, 순종한다고 했는데 결과가 영 아닐 때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3. 왜 하나님이 싫어질까요?
1) 하나님의 입장에서가 아닌 내 입장에서만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들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지어, 깨어진 형상이지만, 그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타인 특히, 죄인들도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불만은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면 좋겠는데 다른 사람들(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들)까지 사랑하신다는 게 싫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본래는 다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 큰 아이, 동생 태어나면 더 어리광 부립니다.
2) 내 감정이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상처 받았고,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한 그 사람을 용서, 화해, 사랑, 축복하라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내 감정이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왜요?
①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사람을 보면 볼 때마다 화나고, 생각해도 화나고, 누워도 화나고, 잠 안 오고, 거친 말과 욕이 나옵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만 봐도 화가 납니다. 이게 무슨 현상입니다. 용서하지 않음으로 생긴 노예현상입니다. 그 사람이 항상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나를 짓누르고 화나게 만들고 즐거움을 빼앗아갑니다. 노예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70번 x 7=490번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에게 7은 완전수입니다. 끝까지 하라는 말입니다. 왜요? 용서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어려운 것은 용서에 대해서 몇 가지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면 나쁜 상처가 사라집니까? No. 상처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럼 나쁜 기억이 사라집니까? No. 기억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도자기 같아서 한번 깨지면 회복하기 힘듭니다. 그럼 용서란 무엇입니까? 용서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것도 한번 하고 마는 것 아니라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0번*7번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한번으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의지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아픈 감정,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상처도 줄어듭니다.
예) 코리텐 붐 여사와 그 여동생이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고발당해 나치의 감옥에 갔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고문 끝에 여동생이 죽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와보니 이들을 고발한 청년은 지도자로 부상했습니다. 그를 볼 때마나 너무 힘들었고 용서 안 되었습니다. 목사님과 상의했습니다. 목사님이 아주 지혜로운 답을 해줬습니다. “종을 치면 여운이 남듯이 용서해도 상처는 남으나, 계속하면 점점 없어집니다”
용서는 복수하지 않겠다는 의지적 결단이고 반복입니다. 용서하고, 나아가 축복을 빌어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자유해집니다. 분노에서, 복수심에서, 미운 감정에서. 이후엔 그 사람을 만나도 자유스러워집니다.
예) 대개 남의 말 한마디에 너무 영향을 받습니다. 노예가 됩니다. 왜 남의 말 한마디에 지배를 받습니까?
② 상처 준 사람은 기억도 못하고 잘 살고 있는데 당한 나만 괴롭습니다.
상처 준 사람은 잘 살고 있고, 기억도 못하고 있는데, 당한 나는 여전히 그로 인해 인생을 낭비하고 힘들어 하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 풍성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비우고, 맡기고, 잊고, 용서하고 너 자신이 평안한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게 남겨진 남은 삶에 대해 새롭고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입니다.
③ 내 기분, 감정조차도 하나님께 복종시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감정의 노예 되기 원치 않으십니다. 사랑, 기쁨, 감사, 평안, 찬송, 즐거움이 넘치기 원하십니다. 잘못된 감정은 잘못된 언행을 낳고, 우리 삶의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이런 감정대신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4. 이렇게 하나님이 황당한 것 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크게 3가지입니다.
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십니다.
먼저는 그분의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용납, 용서, 긍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②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악인은 심판을 받습니다. 잠시 연기된 것이지 없어진 것 아닙니다. 그러나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도 재판하기 전, 조정의 시간을 갖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심판하시기 전 사람이 회개할 기회,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합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지, 그가 죄 지은 것을 안 지었다 한 것 아닙니다. 죄는 죄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회를 주시는 기간에 우리 인간이 나서서 재판장 노릇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③ 내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겸손, 회개는 하나님의 진노도 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잘못에도 회개하고, 늘 겸손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갈 곳이 없습니다. 죄인인데 교만까지 하면 이 사람은 소망이 없습니다. 자아가 센 사람은 참 고난을 많이 겪습니다. 그 자아 때문에 본인이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자는 인생이 순적합니다. 아합 같은 악한 사람도 회개하고 겸손하니까 하나님이 봐주셨다면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오죽이나 더하겠습니까? 늘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면 우리 인생은 훨씬 평안합니다. 이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5. 본문의 경우
이스라엘 역사 중 가장 악한 왕인 아합이 회개하는 내용입니다. 아무 이유 없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아합은 당시 왕이었기 때문에 이런 악을 행했지만 누구도 건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고 아합과 그 부인 이세벨 그리고 그 가문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덴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엘리야 통해 이 심판의 말을 들은 아합이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강퍅한 아합 왕이 회개한다는 것도 생소했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도 의외였습니다.
(27절)“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그냥 회개하는 척 하지 않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눕고 풀이 죽어서 다녔습니다. 그 천하의 강퍅한 아합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 듣고 어쩐 일인지 정말 회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9절)“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어떤 죄인도 회개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용납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이런 장면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싫어지기도 합니다.
‘아니, 저런 죄인을 그냥 두시나?‘
’저렇게 죄 짓기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을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는가?’
‘죄 지은 것은 엄청난데 한 번 회개한다고 해서 그 많은 죄를 덮어두고 넘어갈 수 있는가?’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생각 있는 분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합은 용서하면 안 된다.’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고 내 죄를 덮어주시는 것은 좋아하지만,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죄는 용서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심각한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에!
뒤로 아합 왕은 쭉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살지 못 했습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죄악을 즐기던 사람이 한 번 회개했다고 해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했습니다. 회개한 후 삶의 태도를 바꿔야 하는데 그렇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어쨌건 아합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쁜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할 때 우리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분노하거나 하나님께 반항하면 안 됩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는, 나도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도 하나님이 죄를 물으시면 그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죄인이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구원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장 잘 알아서 처리할 줄 믿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마음에 안 맞아 하나님께 서운했거나, 하나님이 싫어졌다면 모든 것을 공의롭게 처리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찬송하며 나아갑시다. 용서하거나, 기도해주거나, 축복해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합시다. 그것이 결국 내 삶을 풍성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