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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2: 24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벧전 2: 25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벧전 2: 24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죄라는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께서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과 같았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에게로 돌아왔다. 그는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와 간섭, 그의 보호와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친히 ... 그 몸으로'(호스 아우토스...엔 토 소마티)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관계대명사 '호스'와 강조적 재귀 대명사 '아우토스'가 연결되어 자발적인 의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담당하셨으니'(아네넹켄)은 '제단에 희생 제물을 두다'는 의미를 가진 '아나페로'의 부정과거로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신 것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죄인에 대하여는 제물을 대신하였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공의를 만족시켰다(Kuhl, Bigg).
* 사 53: 12 -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 골 2: 14 -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 히 9: 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왜 십자가를 나무라고 칭하는가?
고대 세계에서 죄수의 처형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고 종종 나무에 매달았다. 구약 성경은 장차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내다보고 나무의 수치를 언급하였다. 신명기 21: 23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라 하였다.
이처럼 죄인이 매달린 나무는 수치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죄수들은 자신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한 반면에 예수님은 다른 죄인들을 대신하여 수치를 당하셨다.
2]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십자가상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이유이다. '죄'(타이스 하마르티아이스)는 복수로, '의'(테 디카이오쉬네)는 단수로 표현되어 죄인이 갖는 죄의 속성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의 법정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 롬 6: 1-23 - ①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②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③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④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⑥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⑦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⑧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⑨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⑩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⑪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⑫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⑬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⑭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⑮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⑯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⑱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⑲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⑳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21)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22)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갈 2: 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에 동참하여 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3] 그(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본문은 사 53: 5의 인용이다.
* 사 53: 5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채찍'(몰로피)는 본래 매질로 말미암은 자국이나 흔적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사 53: 5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셨음을 드러냄으로(Lumby)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범을 바라보면서 순종하고 인내해야 함을 강조한다(Caffin, Leighton, Calvin).
4] 예수님의 최대관심사 : 조용기 목사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 예수님의 찢기고 흘리신 보혈의 공로 의지하면 죄와 멸망에서 구원받고 육신의 질병 치료 받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최대 관심사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종 병과 약한 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똑같은 사역을 12사도와 70인의 제자들에게 명하셨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성도에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인간과 죄의 빚
인간은 가장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바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의 빚을 모태에서부터 짊어지고 태어납니다.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은 그 죄를 빚으로 우리에게 상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의 빚을 걸머진 데다 우리 죄를 또 걸머졌으니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죄 중에서 잉태가 되고 죄 중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 덩어리입니다. 유전된 아담과 하와의 죄의 빚에 더욱 죄를 더하여 결코 청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무거운 죄짐을 짊어지고 우리는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 짐을 벗어 버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빚도 어느 정도면 갚을 수 있지만 너무나 많은 빚은 갚을 수가 없습니다.
한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빚을 청산해주려고 했습니다. 그 신하가 임금에게 준 빚이 대략 우리 생각으로 한 1000억원쯤 되는 것 같습니다. 100만원이나 1000만원이면 갚을 수 있겠지만은 1000억원쯤 되면 개인으로써는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임금이 얼마라도 돈을 건지기 위해서 “네 처자를 종으로 팔아서 가지고 오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땅을 치고 울면서 사정을 호소했습니다. 이에 임금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해주었습니다. 아무리 빚이 많아도 탕감해 줘 버리면 제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탕감을 받고 너무 기뻐서 춤을 추며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면서 나오는데 궁중 밖에서 자기에게 100만원 빚진 친구를 만났습니다. “야 이놈아! 100만원 빚 갚아라!”고 멱살을 잡으니까 “말미를 주면 갚겠다”고 말했지만 신하는 친구에게 “잔소리 말고 안 갚으니 너는 감옥에 들어가라!”고 말하며 감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후에 이를 알게된 임금이 대노 했습니다. “나는 1000억원을 탕감해 주었는데, 단돈 100만원을 탕감해 주지 못하고 친구를 잡아서 감옥에 넣다니 그 놈을 도로 불러 오너라!”라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불려온 신하에게 “네가 탕감을 받았으니 너의 친구도 탕감을 해줘야 마땅하지 않느냐. 이 놈을 감옥에 가둬서 1000억원을 다 갚을 때가지 고생의 떡과 물을 먹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담과 하와로부터 죄의 빚을 상속으로 받은데다가 우리의 빚을 또 보태니 그 빚을 우리가 도저히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빚을 탕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가면 영원히 그 죄 값으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탄다는 것입니다. 갚을 수 있는 빚이 아닙니다. 영원히 지옥 불에서 타면서 그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력으로써는 구원이 불가능하므로 구원받는 길은 죄를 탕감 받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값 주고 사기 위해서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 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교적인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형식이나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대속물로 내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의 죄를 청산해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종교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라고 가르치니 좋은 것 아닙니까?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빚을 갚아준 이는 예수님 밖에 없으니 예수님 옷자락을 붙잡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죄의 빚이 탕감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어 갚아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이렇게 고난 당할 것을 미리 알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8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에 주님께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아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채찍에 맞아 산산으로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실상을 보면, 이사야 52장 13절로 14절에 확연하게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지혜롭게 행하리니 전에는 그의 모양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보다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하여 놀랐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사람들에게 버림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 당했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형통해서 받들어 높이 들리어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 간지 사흘 만에 부활해서 주님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임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은 하루 이틀 만에 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에 아담이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보라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된 대로 우리에게 사람으로 오셔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려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 죄를 청산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라도 예수님 옷자락 붙잡고 예수님 끌어 안고 예수님 쳐다 보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나오면 일절 다 용서를 받고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남녀, 노유, 빈부, 귀천 할 것 없이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의 사랑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짜로 받습니다. 너무나 값이 비싸서 계산할 수 없는 것은 은혜로 공짜로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 은혜로 값없이 속량을 얻었다는 말을 귀 기울여 들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는 주시는 분이 좋아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 받는 사람은 아무 값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지불하는 값이 없기 때문에 공짜로 받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은데 예수 믿는 사람은 적고, 구원이 길은 열려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받아 들이지 아니하니 정말 가슴이 답답하고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값없이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기뻐 춤추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예수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짐을 맡아 주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죄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른데 가지 마라. 방황하지 마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서양 사람, 동양 사람, 흰 사람, 검은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이 다 예수께 의지하고 나오면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받아 주셔서 용서와 의와 영광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의 인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데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 들이고 입으로 시인하면 즉시 그 자리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놀라운 기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이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길인줄 안즉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전도하고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였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채찍에 맞으심과 치료
우리 주님이 하시는 사역은 두 가지 중대한 사역인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다” 하시고 곧장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이 죄요, 병인 것입니다. 병은 주님께서 가는 곳마다 고치셨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그 사역의 3분의 2를 병 고치는데 보낸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잘못 해석해서 병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는데 병은 축복이 아니고, 형벌인 것입니다. 병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이란 영적인 사망은 지옥에 가는 것이고, 육체적 사망은 몸이 병들어서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모든 병은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내린 심판의 채찍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해서 갚아주셨으므로 주님께서는 기어코 병을 고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에 대해 심각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주님은 빌라도의 뜰에서 말뚝에 묶임을 당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맞아 등허리와 가슴이 다 찢어져서 선지피가 흘렀습니다. 이것은 병을 주님께서 청산하시기 위해서 그 병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을 보면 주님은 병 고침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 것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너는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 내가 살이 찢어져 살 뭉치가 떨어져 나가더라도 너는 고침을 받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병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병이 있든지 작은 병이 있든지 고쳐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병은 청산과 치료의 대상이지 축복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병고치기를 원했던지 모든 믿는 자들이 예수 이름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면 주님이 고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믿음이 너무나 사라졌기 때문에 우리 보통 믿는 자들이 병자에게 손을 얹어 기도할 때 나을 것을 확실히 믿지 않고 될지 안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지만 주님은 우리들이 믿음으로 손을 얹어 기도하면 나음 받을 것을 믿고 기대하고 계십니다. 병 고침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입니다.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 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아 몸이 갈기갈기 찢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병을 청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갈기갈기 찢어지도록 얻어 맞게 하셨는데 병고침은 하나님 뜻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야훼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상함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네가 질병 대신 짊어지고 내 백성의 병을 고쳐라! 내 소원이다” 오늘 병 낫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병을 고치면 하나님께서 그 뜻이 성취 되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병이 고쳐질지 안 고쳐질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병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고치는데 있고 하나님은 고치는 것을 기뻐하시고 심지어는 우리를 고치기 위해서 예수님이 제물로 그 몸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인 것을 알아야 되는 것은 성령이 그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6월 20일자 순복음가족신문에 실린 성북지교회의 송정심 집사님의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송 집사님은 동생들의 간절한 기도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만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실까? 정말 병 고침이 있을까? 의심을 하여 교회 왔다 갔다 해서 큰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두 달 밖에 안 된 아이가 자꾸 경련을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데려가니까 의사가 하는 말이 아이가 간질병에 걸렸는데 이 간질은 약을 먹으면 조금 안정은 될지 몰라도 평생토록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아니면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고 난 다음에 밤새 울고 괴로워 하다가 비로소 교회에서 주님이 병을 고친다는 설교를 들은 것을 기억하고 ‘나도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리라’는 결심과 함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빠짐없이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 2년 동안 그 딸을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100일을 작정했는데 99일 날 되는 밤 꿈에 그는 찬송가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송가가 입술에서 나오면서 시편 91편 말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서 우리 딸 예은이가 간질이 치료 되었다고 확신하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병원에 찾아가서 검사를 하니까 의사가 고개를 갸웃갸웃 하면서 “당신 혹시 예수 믿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 아니고는 이 간질이 나을 수가 없다. 이것은 기적이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약을 안 먹어도 경련도 안하고 뇌파에 이상도 없고 잘 자라서 지금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습니다. 병 고침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끝까지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고 믿음으로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구원 받고 치료 받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채찍에 맞으심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 세대는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구원사건을 우리는 듣고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몰랐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하고 고행을 하고 괴로움을 당했어도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난 다음 믿음으로 구원받는 새로운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는데 그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치료를 받는다는 새로운 소식도 듣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은 의사를 통해서도 고치고 약을 통해서도 고치고 좋은 환경을 통해서도 고치지만 또 우리가 믿으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도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병에서 고침 받아 건강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도적이 오는 것이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어 행복하게 살기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사 주께로 불러 주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값없이 용서와 구원을 받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와 의와 영광을 얻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치료하셔서 건강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입술로 증거하고 믿음으로 원수 귀신을 물리치고 병을 고침 받아 치료를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벧전 2: 25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1]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본문은 사 53: 6의 인용으로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낸다.
* 사 53: 6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구원받기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길을 인식치 못하고 습관적인 방황에 빠져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Blum, Leighton).
2]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베드로는 상반절의 '전에'와 본문의 '이제'(뉜)를 대비시켜 구원받기 이전의 죄의 노예 상태에 머물러 있던 영적 죽음의 상태와 생명을 얻은 현재의 상태를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목자'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었다.
* 시 23: 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사 40: 11 -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 겔 34: 23 -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신약성경에서는 구원받은 자들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 마 25: 32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 요 10: 14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 요 13: 20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또한 '감독'은 '목자'와 거의 같은 의미로 목자의 기능적인 면, 곧 돌보고 감찰하는 면을 나타낸다.
* 행 20: 28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죄인으로서 죄의 종노릇을 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우리의 목자와 감독되신 그리스도에게 그 영혼을 보호받는다(4:19, Bengel, Leighton, Bigg).
* 겔 34: 23 -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해야 한다.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구원받은 자인 우리의 말과 행동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경건하고 선한 말과 행동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님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 사회, 즉 우리나라의 통치자들과 관리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선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은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救贖)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친히 그런 고난을 당하셨고 길 잃은 양 같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까다로운 윗사람에게도 순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