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41-48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예수님
성경본문 : 누가복음 19:41~48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43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수많은 무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십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우시게 만들었을까요?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심판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고 가슴을 들먹일 정도로 비통해 하면서 우셨습니다. 제자들은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루살렘과 성전의 모습에 정신이 팔렸으나 (막 13:1),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고 통곡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멸망은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지만 예루살렘은 곧 멸망과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되었으며, 성전은 파괴되고 성전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받게 된 것입니다.
‘권고 받는 날’은 ‘하나님이 방문하신 때’ 혹은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신 때’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권고하며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아들을 외면하고 회개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아시고 통곡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슬픔은 불신 가운데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성전과 종교지도자들 때문에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멸망하게 될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신 후에 성전으로 가셔서 성전개혁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의 형편을 보면 예수님께서 왜 통곡하실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곳인데, 강도의 굴혈이요 인간들의 탐욕의 장소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당시 성전의 제도를 악용하여 성전 뜰에서 장사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많은 뇌물을 받음으로 강도와 같은 짓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은 우실 수밖에 없으셨고, 장사하는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성전을 떠나지 않으시고 무지한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가르치시는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세속화된 성전을 보시며 우시고 개혁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교회와 마음의 성전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혹 탐욕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지, 사업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돈벌이나 성공의 기회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기도하는 집이기보다도 친교의 장소로 여기고 있지 않은지, 냉철히 돌아보고 개혁해야할 것은 과감하게 쫓아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 2009년 06월 28일
살며 생각하며 : 이용도 목사의 교회개혁 사상
이용도 목사는 당시 한국교회의 영적 모습을 교리와 신조만이 생명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남았다고 비유했으며 그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버린 화석에 비유했다.
따라서 “교회의 표면에 처 놓은 신성의 장막, 평화의 포장을 걷어치우고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분쟁, 시기, 냉정, 탐리(探利)의 마(魔)가 횡행”하며, “그 속에서 천국”이나 “신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탄식한다.(일기, 1932년 12월초)
이용도는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것은 예수에 대한 잘못된 상(象)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한국교회가 가공된 “괴이(怪異)한 예수”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 계시된 본래적 예수는 영(靈), 천(踐), 빈(貧), 비(卑)의 예수이지만, 한국교회는 영(榮), 부(富), 고(高)의 예수를 가공해 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용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현대의 교회는 괴이한 예수를 요구하며 현대 목사는 괴이한 예수를 원한다. 참 예수가 오시면 꼭 피살될 수밖에 없다. 참 예수는 저희들이 죽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리고 죄의 요구대로 마귀를 예수와 같이 가장하여 가지고 선전하는구나. 화 있을진저. 현대교회여! 저희의 요구하는 예수는 누구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富)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성경적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賤)의 예수, 빈(貧)의 예수, 비(卑)의 예수였나이다.”(일기, 1930년 2월 20일자)
허명섭 칼럼 부분발췌 - 크리스천투데이 -
우리가 괴이한 예수를 전하므로 빚어진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괴이한 모습속에 당신의 교회와 당신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은가?
마 8: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출처: 주님의 시선
질문하며 적용하며
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41~44절)?
2.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셨으며(45~47절),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47~48절)?
3. 눈물의 의미는 여러가지이지만, 진정한 눈물은 왜 누구 때문에 흘러야 할까요?
행하기
확신하며 간구하며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곳에 저의 마음이 있기를 원하며, 아버지의 눈물이 있는 곳에 저의 눈물도 있기를 원합니다.
불신과 죄악이 가득한 땅이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며 더욱 복음 증거에 힘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