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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실의 상권 제 3편(5-6)
* 3-5 중국 선비가 말한다:
정신이라면 진실로 (오행五行의 물질처럼) 서로 모순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정신이지만 동물(의 혼)은 그렇지 아니함을 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 서양 선비가 대답한다:
그것이 사실임을 증명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것을 증거하는) 이치에는 몇 가지 실마리(단端)가 있으니 스스로 깨닫게 되면 의심을 풀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형체가 있는 혼(魂,matterial soul, 즉 생혼生魂이나 각혼覺魂)은 몸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며, 항상 몸에 의해서 부림을 당하여 (결국 몸처럼) 떨어져 나가 소멸하게 됩니다. 이렇기 때문에 동물의 일상적 행위는 욕망의 부림에 바탕을 두고서, 자기 정욕(情)이 이끄는 대로 쫓아가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기 행위)를 검속檢束하지 못합니다.
유독 사람의 혼만이 육신의 주재자가 되어 우리(인간)의 (자유)의지가 선택하느냐 그만두느냐에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지향을 오롯이 하면, 힘은 바로 그것을 따릅니다. 비록 사사로운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어찌 공리公利가 명령하는 바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은 진실로 한 몸을 (부리는) 권리를 전유專有하는 정신에 속하는 것이기에 형체가 있는 것들과는 다릅니다.
2) 두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생명체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두 마음을 겸하고 있습니다. 수심獸心과 인심人心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또한 두 가지의 본성을 가진 것입니다. 그 하나는 곧 물질성(형성形性)이고 다른 하나는 곧 정신성(신성神性)입니다. 따라서 무릇 서로 모순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또한 일으킨 본성이 서로 모순됨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당했을 때에 또한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함께 일어나기도 하는데, 이 둘이 서로 반대됨을 자주 느낍니다. 마치 우리들이 술이나 여색에 혹시 미혹하게 되면, 일단 (그것에) 미련을 두고 따르고자 하지만 그것이 도리가 아님을 또한 다시 반성하게 됩니다.
전자를 따르게 하는 것을 ‘짐승 같은 마음 수심獸心’이라 하니 짐승들의 마음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후자를 따르는 것을 ‘사람의 마음 인심人心’이라 하니 천신天神(의 마음)과 서로 같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시간에 같은 일에 대하여, 사람은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사태를 (동시에) 함께 존립시킬 수 없습니다.
마치 눈은 같은 시간에 한 물건을 보며, 동시에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귀는 같은 시간에 하나의 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그것을 듣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니다. 이렇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감정은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두 마음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서로 모순되는 두 마음은 반드시 서로 모순되는 두 개의 본성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두 개의 강물을 시험 삼아 맛보니, 하나는 짠물이고 하나는 단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우리들이) 아직 발원한 샘(원천源泉)을 보지 못했다 하여도 그 연원連原이 또한 하나가 아님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물(물物)의 종류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항상 그 (사물의 본성(性))과 서로 걸맞습니다. 그러므로 형체를 가진 것(Material things)의 본성은 오직 형체를 가진 사물(事)을 좋아하거나 싫어합니다. 그리고 형체를 초월하는 것(immaterial things)의 본성은 형체가 없는 것 사물을 좋아하거나 싫어합니다. 제가 만물의 욕구(정情)를 살펴보니, 오직 음식과 성욕과 몸의 편안함 뿐이었습니다. 동물이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은 오직 배고픔과 수고로움과 몸을 다치거나 망치게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저는) 단언합니다. 이러한 여러 부류의 본성은 정신적인 것이 아닙니다(不神). (그것은) 바로 형체를 가진 것 착형着形들의 본성입니다.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싫어하는 것들에는 비록 유형한 사물들이 있으나(유형지사有形之事), (사람은) 선을 덕으로 여기고 악을 죄스러워하는 일에 더욱 신중하니, (이런 태도들은) 모두 무형한 것들입니다. 이러므로 (저는) 단언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유형有形한 것과 무형無形한 것, 양쪽을 함께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인간의) 영혼은 ‘정신’인 것입니다.
4) 네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릇 (유형한, material)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수용자의 모습(태態)대로 수용됩니다. 비유하자면 질그릇이 물을 받아들일 때에 그릇이 둥글면 받아들인 물도 둥글고, 그것이 원하면 받아들인 물도 모납니다. 세상에서 (유형한 물질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다 수용하는) 사람의 영혼은 (무형한) 정신 임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우리들이 사물을 분명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형한)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물의 형체가 있으면 우리는 반드시 형체를 벗어나서 (즉 추상화하여) 그것을 관념화(神, 즉 정신화)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그것을 마음속에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만일 여기에 누런 소(황우黃牛)가 있다고 합시다. 우리들이 그 소의 관념(성체性體, Ousia, Idee)을 명백히 알려고 한다면 그 누런 색을 보고는, (그것은) 소가 아니라 소의 색깔이라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는 (그것은) 소가 아니라 소의 소리라고 합니다. 그 고기의 맛을 보고는 (그것은) 소가 아니라 쇠고기의 맛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무릇 소(의 관념,Ousia, Idee)란 그 소리와 색과 맛과 같은 형체(形, material bodies)를 초탈할 수 있는 실재(情)를 관념화(정신화)하여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마치 백치白雉의 성곽을 보고서, 사방 한 치(방촌方寸) (아주 작은) 마음속에 이를 가져다 둘 수 있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지극히 (신묘한) ‘정신’이 아니라면 어찌 사방 한 채 조그마한 곳에 백치치白雉의 성곽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받아들이는 사물들을 관념화(神,정신화) 할 수 있는 것(즉 마음의 작용)은 스스로 정신이 아닌 적은 아직까지 없었습니다.
5) 다섯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천주께서 사람을 내시어 이들로 하여금 관장하게 하시는 감각 기관들은, 진실로 그것들의 소속된 것들과 서로 걸맞게 만들어졌습니다. 눈을 보는 것을 관장하니 (눈에) 소속되는 것은 색깔과 모습들입니다. 귀는 듣는 것을 관장하니 (귀에) 소속되는 것은 소리들입니다. 코와 입은 냄새를 주관하고 맛을 관장하니 (코와 입에) 소속되는 것은 냄새와 맛입니다. 귀,눈,입,코는 형체가 있으나 (이들은) 색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의 종류들과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형체가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마음 하나에는 바로 의지(사욕司慾, will)와 이성(사오司悟,reason) 두 개의 직분이 있습니다. ‘의지(욕慾)’가 귀속할 곳은 ‘착함(善)’뿐이며 ‘이성’이 귀속할 곳은 ‘참(진眞)’뿐입니다. ‘착함’과 ‘참’이 (물리적인) 형체가 없다면 ‘의지’와 ‘이성’이라는 직분 또한 형체가 없으니,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의 ‘본성性’은 (유형한, material) 형체들의 ‘본성(性)’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체가 있는 것(사물)들은 진실로 형체가 없는 것(spritual things)들에 ‘본성’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들이 귀신이나 여러 가지 무형한 것들의 ‘본성’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어찌 ‘정신’(의 덕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 3-6:중국 선비가 말한다:
만약 우리 (중국의 문인)들이 “세상에 귀신은 없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또한 (세상 만물에는형체 없는) 무형한(immaterial) 본성이란 도대체 있을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사람 (즉 중국의 지성)들이 어떻게 그것(정신 또는 무형적 본성)을 재빨리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까지 선생께서 설명하신) 이 다섯 가지 이치는 적어도 우리 중국 문인들에게는 적확的確한 근거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 서양 선비가 말한다:
비록 어떤 사람이 “귀신도 있고 무형한 본성(性)도 없다”고 말했다 하여도, 이 사람은 반드시 귀신이나 무형한 것의 실제의 본성을 먼저 명백히 파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이 “있다”, “없다”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본성(性)의 모습(태態)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것의 있음과 없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눈은 희지 검지는 않다”라고 말했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그 검거나 흰 실정(정情)을 알고 난 다음에야 눈이 흰색이고 검은색이 아님을 변별할 수 있습니다.
6) 여섯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감각적 지각(육심지지肉心之知)은 작은 그릇과 같아서 한계가 있고 넓지 아니합니다. (이는) 마치 참새를 끈으로 나무에 매어 놓으면, 날개를 펴고 높이 날수 가 없는 것으로, 끈이 방해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동물은 비록 지각을 얻어 가지고 있으나, 유형한 것 밖으 실정(정情)에 통달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동물은) 사물들을 자기 자신에게 돌이켜보아서 사물의 본성(태態)의 모습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무형한 마음은 아주 크고 아주 광활하여, 작은 그릇(즉 감각기관)에 제한을 받지 않고, 바로 아무런 장애도 없는 지경에까지 통달합니다.
마치 참새가 (자신을) 얽어매던 끈을 끊어 버리고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날음과 같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의 추리력(靈,iference) 은 사물의 밖으로 드러난 모습(물외형정物外形情)을 알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안에 숨겨진 실체(은체隱體) 추상적 이치)까지도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것들을 자기 자신에게 돌이켜보아서 자기 본성의 모습(태態)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유형한 것에 속하지 않음을 (우리들이) 더욱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은 정신(神)이며 소멸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불멸의) 이치(理)가 있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이) 도리를 닦아야 하는 기반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서너 가지 이치를 들어서 또한 이런 점을 명백하게 증명하고자 합니다.
1)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모두 좋은 이름을 전파하고자 하며 (죽고 난 다음에) 나쁜 평판을 남기는 것을 꺼리니, (이런 심리는) 아마도 환생還生의 논리와는 걸맞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세에서) 자기가 한 일들이 공정한 평가의 부합됨으로써 남들로부터 칭찬이나 상급을 찾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업적을 세우고, 어떤 이는 책을 저술하고, 어떤 이는 기술이나 예수를 도모하고 어떤 이는 (의義를 위해 자기) 한 몸의 생명을 바치기도 합니다. 무릇 좋은 평판이나 광범한 영예를 구함으로써 세상의 이름을 드러내, 비록 생명을 버리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대대로 다 가지고 있습니다.
무릇 좋은 평판이나 광범한 영예榮譽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고, 비록 생명을 버리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그러한 마음은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러한) 마음이 없으며, 어리석을수록 (이러한) 마음이 더욱더 없습니다.
시험 삼아 물어봅시다. 죽은 다음에 우리 (인간)들이 남긴 평판을 우리가 직접 들어서 알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육신을 가지고 말한다면 뼈와 살은 흙으로 돌아가서 썩음을 면하지 못하니 어떻게 평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영혼은 항상 존재하여 불멸하기에, 남겨 놓은 명성의 ‘좋고 나쁨 (선악善惡)을 아는 것’은 실제로 우리 (인간)들이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만일 영혼이 죽음과 (동시에) 따라서 녹아서 없어져 버린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아름다운 명예를 추구하는 일이란, 마치 어떤 이가 신묘한 그림을 두고도 일단 자기가 눈이 멀었을 때에 그것을 보겠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어떤 이가 아름다운 음악을 갖추어 놓고도 일단 자기가 귀가 먹었을 때에 그것을 듣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죽어서 알 수 없는) 그런 명성이 우리 (인간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기에, 사람들마다 그것을 찾으면서 죽기까지 쉼이 없는 것입니까? 저들 효성스런 이들과 사랑스러운 자손들이 중국의 고례古禮에 (따라서) 네 계절(마다) 그 조상의 사당을 보수하고, 그 의복을 차려 놓고, 그 계절의 음식을 올려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기쁘게 합니다.
만약 그 (부모의 육신)과 정신이 모두 없어져서 (그 혼령들이) 우리 인간들이 고하는 애도의 말도 들을 수 없고, 우리 (인간)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절하는 것도 볼 수 없고, 우리 (인간)들이 “죽은 이를 섬기는 것을 산 것처럼 하고, 없는 일을 섬기는 것을 있는 것처럼 한다”라는 (효성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조상 제례祭禮)는 진실로 나라의 임금으로부터 서인에 이르는 중대한 의례가 아니라, 바로 어린아이들의 공허한 놀이일 뿐입니다,
2) 두 번째는 이렇습니다:
‘ 하느님’께서는 만물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니 “사물(물物)이 있으면 법칙(칙則)이 있습니다.” (법칙이 없이) 그저 사물만 (있을 수) 없으며 사물이 없이 공허한 법칙만 있을 수도 없습니다.
또한 삶을 각각(각품各品) 성정(정情)을 두루 돌아보면, 모두가 그 본성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완수하려고 하고, 그 (본성의) 형세도 얻기 어려운 것들을 (본성) 밖으로 구하지 아니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물고기가 자라(별鼈)는 시내와 연못에서 잠수하기에는 즐기지만, 산이나 산마루에서 놀기를 바라지 아니하고, 토끼나 사슴의 본성은 산이나 산마루에서 달리기를 즐겨 하나, 물 속에서 잠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새나 짐승이 바라는 것은 영생永生하는 데에 있지 않고, 내세의 천당에 올라가서 무궁한 복락을 받는 데도 있지 않습니다. 이런 (동물)들의 하급의 성정性情(정情)들이 원하는 것들은 이 현세의 일들을 넘어서지 아니합니다.
오직 우리 (인간)들만은 비록 이단적인 논의(이론理論)를 듣는 데 익숙하여서, “영혼과 육신은 함께 소멸된다”는 학설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역시 오래 사는 것을 바라고 애착하여 즐거운 곳(락지樂地)에서 살기를 원하고 무궁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약 아무도 그런 성정性情을 다 채울 수 없다고 한다면, 어찌 천주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것(희망)들을 그저 헛되이 부여해 주셨겠습니까?
(선비께서는) 하늘 아래 이 넓은 세상에는 가산을 버리며 집을 떠나서, 부모 형제들과 이별하여,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에서 성심으로 수행하는 이들이 많음을 어찌하여 보지 못하십니까? 이런 이들이 모두 현세를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내세의 진복眞福을 바라고 기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인간)들의 영혼이 몸(육신肉身)을 따라서 소멸된다면, (내세의 진복을 바라는) 이들의 의지가 잘못 허비되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3) 세 번째는 이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 가운데에서 사람의 마음(人心)만이 넓고 큽니다. 이 세상의 사물을 다 궁구窮究한다 하더라도 (마음을) 다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내세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천주天主는 가장 지혜롭고 가장 인자하니 무릇 (천주께서) 행하신 것을 우리 인간들은 다시 비난하고 따질 수 없습니다. 저 천주께서는 만물들 각각에 속해 있는 세상의 모습에 따라서 그 사물에 ‘(사는) 모습(태態)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천주께서는) 동물들로 하여금 현세만 그치게 하고자 했으니, (동물들에게) 부여한 욕구들이란 ’한 세상 즉 현세現世에‘ 타락한 집들을 넘지 아니하니, 배불리 먹기를 구하다가 배가 부르면 그만둘 뿐입니다.
(그렇지만 천주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토록(만세萬世) 살게끔 하고자 하셨으니, 이들 (사람)에게 부여한 바람도 그저 이 ’한 세상‘의 순간적 욕망(의 추구)에만 있지 아니합니다. 이에 사람은 한번 배부르기의 추구만을 도모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는) 기필코 얻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험 삼아 장사를 하여 재화財貨를 늘리는 사람들을 봅시다. (그들은) 비록 금이나 옥玉이 상자를 가득 채워도, 그리고 부副가 자기가 살고 있는 주主나 현縣에서 첫째를 가도 마음이 흡족함이 없습니다. 또한 벼슬하는 사람들의 경우, 몸담고 있는 세상의 뜬구름 같은 (헛된) 명성을 쟁취하고, 당대(명시明時)의 (약삭빠른) 지름길로 쫓아 나가서, 오직 귀인歸人의 수레(차車)와 모자와 화려한 도포를 도모하는 것을 영광으로 삼고 있습니다.(*높은 벼슬자리를 말함) (그들이) 곧 조정의 높은 관리가 되고 벼슬이 올라 (황제 곁에) 있게 된다 하여도, 마음은 오히려 만족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극에 달하여, 홀연히 천하를 차지하고 (황제로써) 만백성들의 우두머리로 임하게 되고 복록福祿이 자손(만대)까지 미친다 하여도, 그 마음에 욕심에는 또한 밑바닥의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천주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준 성정(情)이나 욕구들이 원래 무한한 수명과 끝없는 쾌락(의 추구)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현세의 미미한 쾌락 때문에 잠시나마 (사람의 마음이)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리의 모기처럼 작은 것이 용이나 코끼리를 배부르게 할 수 없으며, 미세한 낱알 하나가 큰 창고를 채울 수는 없습니다.
서양의 옛 성인은 일찍이 이치를 깨닫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였습니다. “공번 된 아버지인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참으로 당신 안에서 우리를 창조하셨으니. 오직 당신만이 우리 마음을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께 귀의歸依하지 아니하면 그 마음 편안할 수 없습니다.”(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4) 네 번째는 이렇습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비록 친척이나 친구라 하더라도 일단 죽었으면 아무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 시체에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맹수가 죽으면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본성인 영혼은 스스로 양각良覺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아직 두려워할 만한 혼이 남아 있으나 동물의 호는 전부 흩어져서 우리를 놀라게 할만큼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다섯 번째는 이렇습니다:
천주의 인과응보因果應報에는 사사로움(사私)이 없습니다. 천주는 착한 사람은 반드시 상주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벌합니다.
만일 금세今世의 사람 가운데 악을 행하면서도 부귀를 누리고 평안히 사는 사람이 있으며, 선을 행하면서도 가난하고 천하게 지내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천주께서는 진실로 그가 일단 죽기를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착한 영혼은 택하여 상을 주고, 그 악한 영혼의 택하여 벌을 주십니다.
만일 영혼이 육신의 마침을(죽음)으로 인해서 사라진다면, 천주께서 어떻게 이들에게 상이나 벌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20260516;PM 14:10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