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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개척교회 목사님이 유리한 게임>의 줄거리:
개척교회 목사님이 유리한 게임
(고전9;24~27)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개척교회 목사님이 유리한 게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목사님께서 강릉으로 저를 찾아 방문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군소교단에 소속된 개척교회의 목사님이신데, 개척하신 지 10년이 넘은 분입니다.
그분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는데, 군소교단에 소속되어서 개척을 하시고 열심히 목회를 하고 계시는데, 도무지 교인이 늘지를 않는 겁니다.
그분이 경기도 수원 지역에 계시는데, 수원과 천안 지역에 같은 교단에 소속된 동료목사님들의 이야기를 해주시는 거예요.
개척하신 지 9년이 지나도록 교인이 한 명뿐인 그런 교회도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몇 분 알고 있는데, 전부 장로교 통합측 목사님들이십니다.
어떤 교회는 7, 80명 되는 교회도 있고 2, 30명 되는 교회도 있습니다.
2, 30명 되는 교회를 마음으로 생각할 때면, 마음속에 늘 ‘교회가 잘 돼야 할 텐데’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소교단에 소속되어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목사님들 얘기를 들으니까 2, 30명 되는 교회는 큰 교회더라고요, 이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도대체, 그런데 이 목사님이 젊은 목사님인데 주변 동료들보다는 연세가 많으셔서 그분이 아마도 암암리에 리더 격의 위치에 서계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분과 말씀을 나눈 이야기들이 동료 목사님들께 전해질 텐데, 제가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될지 잘 모르겠어요.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제가 느끼기에는, 목사님들이 자괴감에 빠져 계십니다, 자녀들을 볼 때 너무 부끄럽습니다, 또 가족들과 사모님 앞에서 면이 안 서는 거예요.
그런 건 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근본적으로 목회에 패배감을 갖고 계시고, 목회의 영역을 떠나서 인간으로써 열등감을 갖고 계시고 아예 의욕을 상실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여러분?
9년 10년이 됐는데 교인이 한 명이거나 한 명도 없는 교회에 의욕이 생기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제가 한 가지 다시 한 번 새삼스럽게 깨달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풍토는 장로교 통합이나 합동이라고 하는 간판만 내걸어도 웬만큼 교인이 오는 그런 풍토에요, 물론 장로교의 개척하는 교회에 2, 30명의 교인들이라도 오시는 것이 꼭 교단의 이름만을 보고 오는 것은 아니지만, 영향력이 전혀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처지가 현재 교회의 상황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군소교단에 속해서 정말 어렵게 목회를 하고 계시면서 의욕이 감퇴되고, 열등감과 자괴감에 시달리고 계시는데, 제가 보기에는 위로라기보다는 깨우쳐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목회도 일종의 경주에 임하는 의식으로 임하게 됩니다,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이 경주에 임하는 상황 자체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목사님들, 특히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이 잘못된 경주에 뛰어들은 거예요.
내가 뛰어야 될 경주가 아닌 곳에 가서 뛰고 계시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시면서 거기서 패배감과 열등감을 갖고 계시는 거예요.
그 경주에서 뛰어야 될 이유가 없는 건데, 거기서 뛰면서 패배감과 열등감을 갖고 계시고 의욕을 상실하고 계시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어요.
목회를 시작하는 거의 모든 목사님들은 목회라고 하는 경주의 마지막 목표가 대형교회 당회장일 겁니다.
교인 수도 많고 예배당도 수백 억 들여서 지은 큰 교회의 당회장이 목표일 거예요.
그런데 언제나 모든 경우에 그렇듯이 목표나 희망은 목표요 희망임과 동시에 언제나 지금 나의 현재 상황을 패배나 열등한 상태로 받아들이게 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게 참 문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표가 대형교회 당회장인 이 경주는 목사님들이 뛰어야 할 경주가 아니에요.
뛰지 말아야 될 경주에 뛰어들어서 잘못된 목표를 보고 있으니까 패배감을 갖게 되는 것이지, 사실은 9년 되도록 교인이 한 명인 상태가 잘못된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강사가 되시는 목회자세미나에 가보면 ‘5년이 지나도 교인이 열 명이 안 되면 그만 둬라’ 그런 얘기를 한다는 거예요.
목회 자체를 그만 두고 딴 일을 하라고 한다는 겁니다.
참~ 이건 살인행위입니다.
웬 세미나 비용은 그렇게도 비싼지, 전 한 번도 안 가봐서 잘 모르는데 보통 3박4일이면 3, 40만 원 한대요, 또 어떤 세미나는 2박 3일 하고는 그것으로 설교가 잘되겠느냐 하면서 일 년치 등록하라고 하는데, 그 비용이 500만 원이 넘는 돈을 제시하더랍니다.
아, 대단한 거예요, 그런 일이 교계 안에 있어요.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신앙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이 경주해야 되는 삶,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신앙의 삶을 경주라고 얘기합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이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상을 받기 위해 경주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로 경주함을 통해서 상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일환으로 너희 고린도교회로부터 공식적인 재정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었고, 또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처럼’이라고 하는 투명한 중매쟁이가 되었던 것도 바로 경주에서 상을 받기 위한 일환이었다고 하는 얘기를 지금 결론적으로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달려가야 되는 신앙인의 경주의 본질적인 특성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한 마디로 요약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 31절에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 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리라’
이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말하는 것이 못마땅하셔서 순간적으로 홧김에 충동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천국경주의 본질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가 드러나고 있는 말씀이에요.
신앙인으로서 이 땅에서 살 때 천국경주를 해야 되는데, 이 천국경주의 본질을 염두에 둘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인 너희들이 가장 천박하다고 여김을 받고 있었던 창녀들보다 하늘나라에 더 늦게 들어가게 될 것이다, 창녀들이 더 먼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내가 홧김에 이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신앙경주의 본질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사회에서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의 위치를 요즘으로 환원하면, 군소교단이 아니라 기성 대형교단의 총회장, 총회의 임원, 그리고 대형교회의 당회장으로서 교단의 실세인 목사님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분들과 창녀를 비교하기에는 너무 죄송한 말씀이고, 예수님이나 그렇게 과격한 비유를 하실 수가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대형교회 당회장 목사님들과 개척교회 목사님들을 예수님이 말씀해주신 신앙의 경주의 본질적인 특성을 염두에 두고 비교해본다는 겁니다.
그럴 때, 신앙적 경주에 대한 오해 속에 계시기 때문에 군소교단의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지금 패배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는 것입니다.
실패가 아니에요.
오히려 신앙의 경주에서 아주 유리한 위치에 서계신 겁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깊은 경륜과 사랑과 배려 속에서 주어지고 있는 은총이에요.
무엇이? 9년 동안 목회했는데 교인이 한 명밖에 안 왔다는 이 사실이 그렇다는 얘깁니다.
대제사장이 누굽니까? 하나님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던 자입니다, 백성의 장로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이들 그룹과 연관되거나 속해 있는 자들이 바리새인이요, 율법사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창녀들보다 늦게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경주의 특성이라는 거예요.
쉽게 말해 이 경주는 세상적인 경주와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경주와 신앙경주가 상관없이 따로따로 뛰는 게 아니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어요.
유기적인 연관성을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변증법적 연관성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거냐 하면, 세상경주를 모두가 다 달리고 있는데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출발선에서 많이 나가서 앞서고 있는 자, 출발선에서 조금밖에 못 나간 뒤쳐진 자, 가지각색의 천층만층으로 순위가 정해져서 지금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구원의 길과 상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레이스를 펼쳐내시는데, 그 레이스가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라 바로 세상의 경주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자리에 오셔서 외치시며 신앙의 경주를 새로이 만드신 겁니다.
어떻게 외치셨는가 하면, “뒤로 돌아~ 가!” 하고 외치셨어요.
신앙의 경주는 신앙의 내용상 지금 달리고 있는 세상경주가 뒤돌아서져야만 되는 경주이기 때문에 뒤로 돌아서라는 겁니다, 다른 장소에서 열리는 경주가 아니라는 거예요.
신앙의 경주는 세상의 경주를 거꾸로 돌아와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행함을 통하여 얻은 것은 세상의 경주에서의 일등 자리였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뒤로 돌아가야 되는데, 창녀들은 뒤로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뒤로 돌아갔더니, 모두가 다 뒤로 돌아선 입장에서 보자니까 창녀가 제일 앞서 있더라는 겁니다.
세상적인 경주에서 꼴찌의 위치에 서있었기 때문에 ‘뒤로 돌아서!’라는 주님의 외침을 듣고 뒤로 서고 보니까 일등의 위치에 서게 된 거예요.
자, 이 얘기를 오늘 본문에 근거해서 자세히 해봅니다.
두 가지 경주를 얘기합니다,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경주와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경주.
이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경주라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경주이고, 아담 이후의 인간세상 속에서 계속되고 있는 경주입니다.
자,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의 마음이 비어진 상태에서 쫓겨났습니다.
에덴 안에서는 비어진 마음이 매일매일 새롭게 영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짐으로써 마음이 부풀어지고 만족하고 마음이 배부르고 기쁨이 넘쳐서 살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 나가면서 삶을 살았던 거예요.
그러던 것이 에덴 밖으로 나가면서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등진다는 것은 내 마음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우기 위한 대상에서 하나님이 제외돼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채워져야 될 빈 마음을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그 다른 것이란 게 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에요, 에덴에서는 하나님을 좋아해서 하나님으로 채웠는데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나서 마음을 채울 좋은 것들을 인간들끼리 만나서 약속을 하고 만들어낸 겁니다, 이게 바로 세상의 가치들이라 거예요.
돈, 실제로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그냥 인간세상이 만들어낸 가치에요.
건강, 무조건 건강하기만 한 게 좋은 게 아니에요, 세상 사람들이 좋은 것으로 치자고 약속을 해서 만들어낸 가치에요.
명예, 사람들에게 내 이름이 나는 것,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인기, 이런 게 실제로 내용상 좋은 게 아닙니다, 그냥 인간세상이 그걸 좋은 것으로 하자고 정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의 경주는 좋은 것을 정하고 목표로 삼아서, 누가 인간들이 정해놓은 인간세상의 가치들을 많이 획득하느냐 하는 경쟁으로 다 뛰어든 겁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그 경쟁에 휘말려버린 것이에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독점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입으로 노래하면서도, 신앙과 신학과 하나님에 대해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권세와 위치를 세상적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으로 바꾸어버린 것처럼, 요즘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깁니다.
사도바울이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교인들 중에 왜 신앙의 경주를 하지 않는 자가 있느냐? 나는 복음을 전하고도 내가 복음에서 버려짐을 당할까봐 몸을 쳐 복종한다.’
이 버려짐은 구원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상 받음으로부터 버림을 당한다는 얘기에요.
상을 받을 수 있는 등수에서 버려질까봐 두렵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경주인데,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앞섰다고 성공했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이런 세상적인 경주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세상적인 경주 안에 있다는 얘기는 세상이 정한 가치들을 똑같이 좋은 것으로 여기면서 그것을 얻겠다는 욕구에 차있다는 얘기에요.
돈이라든지 숫자적 부흥이라든지 명예, 인기,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권력, 이 모든 것들이 다 목회경주에서도 똑같이 목표로 정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숫자가 많아지는 것을 마음이 욕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자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는 등져야 가능합니다.
큰 예배당을 원합니까? 마음속으로 큰 예배당을 원할 때는 반드시 그 마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등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 한다’라고 하신 거예요.
방향을 제대로 정하고 헛스윙 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라야 내 마음에 만족이 이루어지고, 대형교회가 아니면 불만이 가득하다면, 이게 지금 허공을 향하여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이겁니다.
대형교회로 만족하는 것이 헛스윙이라는 거예요, 헛스윙.
그리고 방향을 제대로 잡으라는 것은, 출발점에서 돈을 벌기 위해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 인기를 얻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달음박질하고 있는 그 레이스의 출발선에서 180도 뒤로 돌아서 달려가라는 얘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담 이후에 세상 사람들이 경주를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등지고서 마음의 빈속을 하나님 대신 자기들이 좋다고 결정한 가치들을 얻어서 채워 넣기 위해 시작한 겁니다.
그러므로 출발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있는 자리입니다.
근데 주님께서 오셔가지고 십자가를 세우시면서 ‘뒤로 돌아!’ 하신 거예요.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는 얘기와 같은 얘기라는 겁니다.
몸을 쳐 복종한다고 해서 금욕적인 수련이나 훈련을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얘기를 한 거예요.
십자가가 하는 일이 뭡니까?
지금 내 마음에 대형교회를 갖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제시하십니다.
대형교회에 대한 욕구를 십자가에서 죽이고, 오직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움으로써 대형교회 때문에 만족하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것으로 바꾸라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사건의 의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만족할 것 같은 마음이 있으면, 돈 대신에 하나님을 많이 벌어서 만족하라고 하는 것이 십자가사건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대형교회를 이루어서 대형교회를 이룬 맛에 빠져있는 사람이 그 대형교회의 맛을 십자가에서 버리고 죽이고 마음에서 다 비워버린 다음에, 비워진 마음에 하나님으로 채워 넣기라는 것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에요.
때때로 뉴스 같은 것을 통해서 대형교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 대형교회 담임목사님이 마음으로부터 교회를 깨끗하게 버리고 떠나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에요, 하나님이 주신 기회.
하나님과 대형교회를 바꾸고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교정 작업이 들어간 겁니다.
이유 없이 교인들이 나를 미워하고 목사님을 밀어내려고 할 수도 있어요.
근데 그게 이유 없는 게 아니라, 대형교회라는 것을 하나님 대신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정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도 아닌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한 겁니다.
그러면 그 기회를 잘 활용하셔서 깨끗하게 물러나면 좋은데,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특징이 ‘내가 이 교회에서 나가면 어디 가서 뭘 하고 살 수 있겠나?’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라는 얘기죠.
9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교인이 안 옵니까?
왜 그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습니까?
‘뒤로 돌아가!’
계속 앞만 보면서 대형교회만 바라보며, 내 개척교회의 상황이 모자라다는 생각만 갖고 계시는 겁니다.
실제로 결승점은 주님이 오셔서 뒤쪽에 라인을 쳐놓고 계시는데, 그래서 ‘뒤로 돌아 뛰어!’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계속 보던 대로 앞쪽을 향하고 있는 겁니다.
대형교회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의 처지가 패배인 겁니다.
그런데 뒤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많이많이 마음속에 채워 넣는 것이 승리인 것을 알게 되는 그런 경주에 임하자마자, 지금 9년이 지났는데 한 명밖에 교인이 안 온 게 얼마나 큰 은혜라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것을 은혜로 알고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채움에 매진하는 거예요, 교인이 오거나 말거나.
그래서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가득가득 차게 되는 일이 계속 날마다 새롭게 반복될 때, 교회라는 곳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과 섭리를 따라서 오게 하실 교인은 오게 하시고, 막으실 교인은 막으시고, 알아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대한민국교회의 미래는 대형교회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2, 30명 교인도 안 되는 수많은 개척교회의 목사님들이 참 신앙의 경주에 뛰어들어서, 한 사람 한 사람 목사님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 배부르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독점하던 대제사장이 창녀보다 하늘나라에 늦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 신앙경주의 영적 원리를 우리가 분명히 깨닫고, 세상적인 가치가 결핍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이 하나님을 벌기에 얼마나 유리한 상황인가를 깨달으며 감사하고, 하나님 벌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하루하루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대형교회가 되었든지 개척교회가 되었든지 십자가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은 다 무효입니다.(죄악입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가진것이 많아서 십자가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척교회는 다 버리고 십자가로 돌아오기가 너무 쉽지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로 채우신 뒤에 그리스도가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지요.
내가 먼저 하나님이 드실 수 있는 밥이 돼야 성도들에게 먹일수가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