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사변--원광중 일 때문에 서울 갔다가 6.25 맞아
[503호] 1987년 11월 06일 (금) 원불교신문
나는 허령을 떨치기 위해 정진하면서 다음과 같은 「정진문」을 쓰게 되었다.
有一物於此하니 無形無體하야 取也不得 捨也不得이나 然이나 學者는 要精深硏磨而 得眼卽 其形其體라
取也得 捨也得하여 其聲이 錚錚空劫外하고 其光이 皎皎三千界하야 應現千百億化身하야 廣濟六道 迷輪衆하나니 願諸學者는 爲解決 一大事因緣하야 誓發大信하고 誓立弘願하며 不惜身命하고 不生?貪하야 必以斷斷一直心으로 勇猛精進하고 勇猛精進할지니라.
나는 이 정진문을 써서 읽으면서 한 생각이라도 흩어져 아닌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노력하였다.
어느날 금산사에 이낙신 스님이 원불교에는 공부하는 분이 없다고 했다면서
교도들이 듣고 왜 공부하시는 분이 안계시냐
원평교당에 오시면 뵈올 수 있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얼마 후 이낙신 스님이 오셨다.
나는 「정진문」과 「일원상 대의」「채약송」「無失無得法」등을 써보였다.
그 스님은 그후로 3일을 계속 다니면서 영생의 인연을 맺자고 하고
내게 큰 절을 하며 일원상 대의등은 만대의 조사 못지않은 법이라고 하였다.
그 스님은 후일 거사로 나가 「簫空」이란 호로 달마상을 그리는데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다.
연전에 큰 달마상을 그려 가지고 나를 찾아 오기도 했다.
오며 가며 만나는 인연들은 모두 소중한 것이다.
언제 어느 때 다시 만나 어떠한 어려움과 즐거움을 나누게 될지
또는 힘이 되어줄지 모르는 일이므로 어쨌던 한번 맺은 인연은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내가 서울에 있을 때 하루는 조봉암씨가 한남동으로 찾아 왔었다.
올 때에는 5분만 있다 가려고 했다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1시간이 넘도록 머물다 갔다.
해방 후 정계의 인사들이 수없이 내왕할 때였다.
나는 이때 그분의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을 들으면서
『우리 스승님 계시는 시골에 가셔서 작업복 입고 풀을 매고 생활해 보시지 않겠습니까』하고
의사를 물었더니 그분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나 또한 건강관계로 원평에 내려오게 되므로써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모두가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대종경 초안을 하며 기도하는 동안에 상당히 건강이 호전되었다.
이만갑 구남수 이원형시등의 많은 도움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서울에 가게 되었다.
현재 원광중 자리에서 「유일학림」을 운영하던 시절이다.
원기 31년 대종사님의 유지를 받들어 유일학림을 발족,
지금의 총부 구학림사 자리에서 전문부와 중등부를 나누어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고
원기 34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강의실이 좁아 시내 장소를 알아보다가 현재 원광중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 거기에 있던 건물은 제3연대 군인들이 점령했었는데
마침 비어있어 서류를 갖추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시내 모학교에서 이 건물을 접수하려고 했다.
그들은 관제국에 소청을 하고 3연대 군인들에게도 충동을 하여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인해 헌병대에서는 우리를 오라 가라 했고,
「국가재산을 도둑질해 간다」는 말까지 하며 야단을 떨었다
.
그래서 교단에서는 처음부터 이 일을 주선했던 상산님을 통해서 수습하는 한편
나를 서울로 파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원평에서 산에 다니던 망태를 그대로 놓은 채 신태인까지 자전거로 와서 총부에 오게 되었다.
그리고 정산 종사 옷을 빌려 입고 모자까지 빌려 쓰고 상경하게 되었다.
나는 김법린 문교부장관을 만나 이 일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이 다음에 책임질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상산님의 노력과 나의 이러한 수습책이 헛되지 않았다.
이러한 일로 인해 서울에 머물르게 된 나는 엄청난 민족의 소용돌이를 맞게 되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일어난 6.25사변이 그것이다
. 8.15란 해방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엄습한 전운의 불길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서울교당에 있었다
6.25가 발발하기 이틀 전날인 6.23일 이리보화당에 근무하는 아산 김인용이 올라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가?
우연히 아산이 상경하게 된 것은 어쩌면 내게 있어서는 구원자가 나를 구원하러 온 것만 같았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보내놓고 보니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산은 한약제 구입을 위해 밤차로 올라와 다음날인 24일
사내로 나가 약시세를 알아보려고 외출하고 돌아왔다. 시
중 약값이 계산에 맞지 않았는지 저녁때가 되어 그냥 돌아왔다.
다음날 25일에는 인천에 가 다시 약 시세를 알아본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신중을 기하는 아산은 좀처럼 한 두 곳만 알아보고 처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러곳을 두루 파악한 후에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오늘날 원광대학교를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운명의 날 25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인천에 가서 알아 보기로 한다던 아산은 그만 인천가는 것을 포기하고
마침 일요일이라 교당에서 법회를 보았다.
이미 38선에는 인민군들이 남쪽을 향해 진격해 오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편안했다.
이때까지도 우리는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외출했던 학생들로부터 시내 분위기를 듣고
그제서야 라디오를 들어 뉴스를 듣게 되었다.
방송에서는 곧 수습될 것이라고 해 우리는 특별한 의심을 내지 않았고,
그대로 그날밤을 편히 보냈다.
첫댓글 대산 종사님과 조봉암 선생의 만남, 6.25를 맞이한 이야기 등
참으로 우리 원불교의 산 역사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