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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국 | 중국은 서진 말로 이 당시 서진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 침입한 흉노, 갈, 선비, 저, 강의 이민족들이 중국 북부에 세운 16개의 국가를 16국이라 한다. 5호16국 시대는 304년 흉노의 추장 유연이 산시성에서 독립하고 316년 그 아들 유총이 진왕조를 멸망시키고 전조를 건국하여 서진 왕조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동진(317~420)을 세웠다. 이후 북위가 439년 북조를 통일하기 까지를 5호 16국 시대로 부른다. 전연,전진,후연,북연 등이 고구려와 동진이 주로 백제과 관련된다. |
고구려 | 미천왕(300-331), 고국원왕, 소수림왕(371-384), 고국양왕, 광개토대왕(391-413) |
백 제 | 비류왕(304년 ~ 344년),계왕(344년 ~ 346년),근초고왕(346-375),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 |
신 라 | 15대 기림이사금(석씨)-16대-흘해이사금(석씨)-17대 내물마립간(356-402) |
일 본 | 고분시대- 야마토 왕조=닌토쿠 천황 (310년~399년) |
1. 고구려
(1)미천왕(300~331)
①숙부인 봉상왕의 박해를 피해 어릴 적부터 남의 집 머슴을 하거나 소금 행 상으로 보내다가 국상 창조리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②서안평 점령: 중국의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드디어 요동의 서안평을 점령하여 고조선의 옛땅을 회복하였 다.
③낙랑 축출: 낙랑과 대방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어 고고려는 압록강 중류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2)고국원왕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 있던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전연과 요동 지방을 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다가 전연의 선비족 모용씨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고 미천왕릉이 도굴당하고 5만여명의 포로가 발생할만큼 큰피 해를 당하였다. 전연(330~370)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받아 서방 진출이 위축되었다. 또한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으로 고국원왕은 평양성전투에서 전 사하고 대동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3)소수림왕(371-384) ☜중요
①고대국가 완성: 국가적인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여 새로 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여 태조왕때부터 마련된 고대국가의 기틀이 소수림 왕때 완성되었다.
②전진과 수교: 중국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전진(351~394, 수도 장안)의 부견과 수교하였다.
③불교 공인: 372년 전진의 순도가 최초로 불교를 전래하여 374년에 온 아도를 함께 이불란사와 초문사를 건립하고 머물게 하였다.
④율령을 반포: 율령을 반포하였다.
⑤태학 설립: 최초의 국립대학이자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인재 양성을 위해 태 학을 설치하였다.
2. 백제
근초고왕
2. 백제
(1)) ☜매우중요
①부자상속제 확립: 제11대 비류왕(比流王)의 둘째 아들로 계왕(契王)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즉위한 뒤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을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近仇須王)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구수왕 앞에 ‘근(近)’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진씨가문(眞氏家門)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더욱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②마한 지역 복속: 마한지역을 복속하여 전라도 해안선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③낙동강 유역 확보: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영향권에 두게 하였다.
④고구려 공격: 북으로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남방 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 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371년 평양성 전투 전에 태자시절 근구수왕은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조언하기를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더 많은 것을 구합니까?"라고 《노자 도덕경》의 내용을 인용하여 간하니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을 멈추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지금 이후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라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말발굽처럼 틈이 생긴 바위가 있어 '태자의 말발굽'이라 불리기까지 하였다.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기(精騎)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동강 유역 진출하여 대방 지역인 황해도 지역을 완전히 차지하였다.
⑤요서․산동․일본규슈지방 진출: 4세기 중반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하여, 요서․산동․일본규슈지방에 고대 상업세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송서․양서․남제서에 백제의 중국진출 기록).
⑥서기 편찬: 박사 고흥으로 하여금 역사책인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서기』의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 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지금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⑦유학 일본 전파: 왕인과 아직기가 일본에『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 로써 문물을 전파하였다.
⑧동진 통교: 동진과 통교하여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령 낙랑태수라는 작위를 받 았다.
⑨신라와 우호 관계 유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 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⑩칠지도: 근초고왕은 왜의 야마토 왕조와 국교를 수립하고 칠지도(七支刀)와 칠 자경(七子鏡)을 보냈다. 백제가 언제부터 야마토 왕조와 통교하고 있었는지는 정 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활기를 띤 것만은 분명하다.
이 일에 대한 기록은『삼국사기』엔 전무하고,『일본서기』와 『고사기』에 전한다. 현재 남아있는『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근초고왕 즉위부터 20년 (365)까지의 기록이 빠져 있다.
※■영토정리■
요서:고조선은 요서를 경계로 연과 경쟁했다.
근초고왕은 요서에 백제군을 설치했다.
고구려가 598년 말갈군을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으나 점령을 하지 못했다.
(2)침류왕
불교수용: 동진의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를 통하여 불교를 들여왔다. 침류왕은 384년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3. 신라
(1)내물왕(356~402)
①고대국가 기반 확립: 내물왕은 활발한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②김씨 왕위 세습과 형제 왕위 상속:이 때부터 박․석․김 왕위 세습에서 김씨로 왕위를 고정시켰다. 또한 형제의 왕위상속을 확고히 하였다.
③마립간 칭호 사용: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꾸었다. 이 것은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 신라왕호변천 거서간 → 차차웅(무당, 샤머니즘 : 단군,천군,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내물) 왕 : 지증왕 - 중국식 왕명 법흥~진흥~진평~선덕여왕~진덕여왕 - 불교식 왕명(삼국유사에 중고기로 표현) 무열왕 - 최초 진골왕이자 중국식 시호제 실시 |
④전진과 수교 : 382년 전진에 위두를 파견하여 전진의 부견과 대화하였다. 실성을 볼모로 고구려에 보냈다. 이때부터 433년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대비한 백제 비유왕과 신라 눌지왕의 나제 동맹이 결성되기까지 전진=고구려=신라와 백제=가야=왜의 외교 관계가 유지된다.
※ 신라의 전진과의 통교의 근거(기록) (1)우리측 :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26편 (2)중국측 : 진서의 태평어람 ․부견 - 해동의 형편이…… ․위두 - 중국의 변화과정…… |
⑤광개토 대왕의 원조: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400년 광개토왕은 5만 군 사를 보내 백제와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호우총(壺杅塚,경주 대릉원 일원〈사적 제512호 재지정〉)
1946년 국립박물관이 정식으로 발굴·조사했는데, 이는 8·15해방 이후의 첫 발굴이었다. 신라의 전형적 무덤구조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발굴조사 결과 봉토 외곽이 은령총(銀鈴塚)과 맞붙어 있는 쌍무덤[雙墳:瓢形墳]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무덤 이름의 유래가 되었던 청동호우(靑銅壺杅)가 출토되었다. 뚜껑이 있는 합(盒)의 형태인 이 유물의 밑바닥에는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이라는 명문이 예서체로 돋을새김되어 있다. 글씨 모양은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 명문의 을묘년은 415년(장수왕 3)이며 이 유물이 광개토대왕비의 건립(414)과 함께 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에서 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와 고구려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유물이 호우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