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해산의 우국시
1908년~1909년 최대 의병항쟁지는 전라도였다. 특히, 1909년의 경우 의병 전투횟수의 47.2%가 전라도 땅에서 치러졌고, 전투 참여 인원수의 60.0%가 전라도인이었다. 이에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20일까지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전라도 의병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소위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이다.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라 불린 ‘전라도의병대토벌작전’은 2,000여 명의 정규군을 동원하여 일제가 3단계에 걸쳐 전라남도 지역에 항일 의병들을 진압한 작전이다. 제1단계 작전은 전북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광주, 영광 등으로 이어지는 외곽 지대, 제2단계는 고흥, 광주,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 제3단계는 전라남도 서쪽 지방으로 탈출하는 항일 의병들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본 제국 군대는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로 잔학한 방법을 동원하여, 양민들을 학살하고 민가를 방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병장들만도 103명이 희생되었는데, 그중 항일 의병장 전해산 등 23명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구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항일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보성, 낙안,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에서 하동까지의 도로 확장작업에 강제노역 동원된 것이었다. 뒷날, 일본군들은 이 도로를 ‘폭도 도로(暴徒道路)’라고 명명했다
일제는 한말 전라도 의병을 토벌하면서 남긴 ≪전남폭도사≫라는 책에서 수괴로 최익현, 고광순, 기삼연, 김태원, 김율, 심남일, 전해산, 안규홍 등 8명의 의병장을 지목했다. 이 중 1908~9년에 활동했던 전북 임실 출신의 전해산과 함평 출신의 심남일, 보성 출신의 안규홍 의병장을 3대 의병장이라 일컸었다. 이들 의병장 모두는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다.
전해산은 1909년 12월 18일 변절자 김현규 등의 밀고로 영산포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광주 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대구공소원에 공소한다. 대구공소원에서 또 다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10년 8월 23일 대구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그가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던 것은 당시 한강 이남의 유일한 고등법원 즉 공소원이 대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복심법원의 최후진술에서 일본인 재판장을 향해 “내가 죽은 후에 나의 눈을 빼어 동해에 걸어 두라. 너희 나라가 망하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리라”고 말하였다. 아울러 신문 과정에서도 자신은 "폭도(暴徒)가 아니라 의병(義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정당성을 적극 피력하였다.
전해산 의병장이 옥중에서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서생이 무슨 일로 갑옷을 입었나?/ 본래 세운 뜻이 이처럼 틀려지니 한숨만 나오고/ 조정에서 날뛰는 꼴 통곡하겠네/ 바다 건너 들어온 적 차마 말도 못하겠소/ 대낮에 소리 삼키고 강물이 멀어지고/ 푸른 하늘도 오열하며 실버들에 비 뿌리고/ 이제 다시 영산강으로 못 가리니/ 두견새 되어 피눈물 흘리며 돌아갈거나
구한말 일제에 체포된 남도 의병들은 대구 감옥으로 가기 위해 영산포구에서 배를 탔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떠난 대부분들의 의병들은 일제에게 처형당하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전해산도 그의 시에 표현한 것처럼 다시는 영산강을 건너 돌아오지 못했다.
대구공소원과 대구 감옥 현장을 가다
대구 감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는 전해산 만이 아니었다. 대구 감옥 순국자는 대한광복회 백산 우재룡 선생 기념사업회에서 발간한 ≪묻힌 순국의 터, 대구형무소≫에 의하면 180명이나 된다. 이 중 본적이 광주·전남인 독립운동가는 44명인데, 대부분 의병장 및 의병이다. 우리들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광주 출신인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을 비롯하여 김원국, 심남일, 안규홍, 오성술, 유병기, 이강산 의병장이 대표적이다.
대구 감옥에 들어왔던 남도인들은 이들 의병장만이 아니었다. 1919년 광주 3·1운동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받았던 104명 중 김복현(김철) 등 65명이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하였다. 이들 65명은 대구공소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173명이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이중 장재성 등 86명이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대구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남도인들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농민·노동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된 국내 독립운동가나 해외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도 대구 복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따라서 수백 명이 재판을 받았던 대구공소원(1921년에 대구 복심법원으로 이름이 바뀜)과 재판을 받기 위해 대기했거나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대구 감옥(형무소)에는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의 혼이 서려 있다.
광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한 독립운동가들은 대구에 있는 대구공소원이나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1910년대에는 전해서의 우국시에 보이는 것처럼 영산강의 돛단배를 타고 이동했고, 1920년대에는 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당시 대구공소원은 대구지방법원과 함께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 58번지에 위치했다. 대구법원 건물은 1910년 6월 목조로 완공됐고 1923년 붉은색 벽돌 3층 건물로 개축했으니, 1910년 6월 이후에 재판을 받은 한말 의병장들과 광주 3·1운동 관련자들은 목조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고, 1923년 이후 재판을 받은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항소한 독립운동가들은 붉은 벽돌 건물에서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1973년, 대구법원은 현재 위치인 수성구 범어동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대구지방법원과 공소원이 있던 중구의 옛터에는 2019년 ‘대구법원 옛터 기념비’가 건립되어 백년 전의 역사를 품고 서 있을 뿐이다.
광주·전남 출신의 독립운동가 중 대구공소원에 항소한 독립운동가들이 대기하거나 형량을 받고 복역했던 곳은 대구 감옥이었다.
대구 감옥은 1908년 경상감영에 설치되었다가 1910년 4월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102번지(현 삼덕교회 일대)로 옮긴다. 그리고 1923년 이름이 대구형무소로 바뀐다. 따라서, 한말 광주·전남 의병장이나 광주 3·1운동과 관련되어 공소한 독립운동가들은 대구 감옥에서, 이후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들은 대구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장소는 같았지만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대구 감옥에는 수백 명이 넘는 광주·전남의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현장이고, 이중 양진여·양상기 부자 의병장을 포함한 심남일, 전해산, 안규홍 의병장 등 44명의 광주·전남 출신의 의병과 의병장이 교수형을 당한 곳이다.
지금 대구형무소는 중구 삼덕동에 없다. 1971년 6월 1일, 달성군 화원읍 천내리 472번지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자랑하는 삼덕교회가 들어서 있다.
현장인 삼덕교회 안에는 대구형무소 사적 안내라는 이름이 붙은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는 1920년대의 대구형무소 사진을 비롯하여 관련 사진 몇 장과 대구형무소 배치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저항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의 시 ‘광야’가 벽면에 붙어 있다. 그리고 벽돌 조형물에는 이육사를 비롯한 순국자 30여 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중 전라도 출신으로는 강무경을 비롯하여 신남일(심남일의 오기)과 심수택, 안규홍, 양진여·양상기, 오성술, 이석용, 전해산과 전수용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새겨진 이름 중 심남일과 심수택, 전해산과 전수용은 동일 인물이다. 심남일의 경우 이름이 수택이고, 남일은 호이다. 전해산의 경우 수용은 이름이고 해산은 호이다. 바로 잡아져야 한다.
대구 감옥에는 새겨진 분들만 수감된 곳은 아니었다. 광주·전남 출신만도 수백 명이 넘었다. 이중 순국자만 44명이나 된다. 그리고 옥고를 치른 수백 명 중에는 3·1운동으로 6개월이나 옥고를 치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강진 출신 김영랑도 있다.
독립운동에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대구형무소에 남은 남도인들의 독립정신이 경상도의 독립정신과 함께 오늘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 가치로 재탄생되길 바래본다.
광주·전남 독립운동가들, 달성공원에서 사진을 찍다
대구 달성공원은 광주·전남인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공원이다. 일제 강점 시기 대구 감옥를 출소한 광주·전남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이 찾아 사진을 찍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달성공원은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에 위치하고 있는 공원인데, 본래는 달성토성이었다.
달성공원 자리는 본래 달성 서씨의 세거지(世居地)였는데 세종대왕 때 문중에서 토지를 국가에 헌납하였다. 세종대왕이 이를 포상하려 했지만 ‘서침’은 그 대신 국가에서 서민의 환곡을 탕감해줄 것을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대구의 상환모곡은 1석당 5승씩 감면케 되었으며 조선 말까지 그 특례가 존속되었다. 대구부민은 이와 같은 ‘서침’을 숭모하여 1665년 대구 구암서원에 봉향하였다. 한편 세종대왕은 회화나무를 심어 서침의 마음을 기리게 했는데 현재 달성공원 내에 있는 ‘서침나무’가 그 나무로 알려져 있다.
달성공원 자리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토성으로 달불성이 있었다. 선조 29년(1596)에 석축으로 개축하고 상주에 있던 경상감영을 현재의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곳에 두기도 했다. 1905년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달성공원 안에 대구신사(大邱神社)가 세워지기도 했다.
대구 감옥을 출옥한 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소개한다. 한 장은 3·1운동을 모의하고 준비한 김복현 등 핵심 인물들이 출옥하고 찍은 사진으로 김태열, 최한영, 김범수, 김기형, 최정두, 서정희, 박일구, 최병준 등이 함께 찍었다. 김복현, 최병준, 김태열은 1919년 3월 6일 남궁혁 집에 모여 모의하고 준비했던 분들이고, 최한영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김범수, 박일구, 최정두 등은 장성 김기형의 집에서 정광호가 일본에서 가져온 2·8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고, 서정희는 3·10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등을 광주천으로 운반하는 등 광주 3·1운동의 핵심 인사들이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광주학생독립운동사≫ (사단법인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지회, 2012)에 실려 있는 사진이다. 촬영일은 1931년 6월 16일로, 책의 사진 아래에는 대구형무소에 갇혀 옥중 생활을 한 뒤 출옥한 광주지역 학생들이 대구 달성공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사진 속 구체적인 인물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장을 사진을 통해 당시 대구 감옥(형무소)에서 출감한 광주·전남의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모여 사진을 찍고 회포를 풀면서 새로운 다짐을 했던 곳이었음은 분명하다.
백여 년 전 광주·전남의 독립운동가들이 거닐었던 달성공원에는 이를 알려주는 어떤 표지석도 없다. 단지 수백 년 된 나무들은 이분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 나무들은 이곳을 찾는 남도인들에게 독립운동가들의 혼을 귓속말로 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