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공원에 묻어있는 일제의 흔적
광주의 옛 사람들이 광주를 지켜준다고 믿었던 진산은 무등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도 그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광주인들은 또 다른 진산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광주공원이 있는 거북 형상의 성거산이 그것이다. 성거산은 거북처럼 생겼기 때문에 성구강이라고도 불렸다. 그래서 이곳의 마을 이름도 구동 또는 구강동으로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성거산이 거북 모양이므로 상서로운 거북의 기운이 광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거북의 목에 오층탑을 세우고 등에 절을 세운다. 그렇게 세워진 절이 성거사다. 성거사 건립 전설은 거북이 광주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광주인들의 염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광주 지킴이 거북 모습의 성거산이 광주인에게 또 다른 진산인 이유다.
그러나 광주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성거산은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고난을 겪는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난 직후인 1906년, 일제는 사동 177번지 사직산과 구동 21번지 일대 성거산을 점령하고 포대를 설치한다. 사직산과 성거산은 광주 시내를 한눈에 굽어보는 곳이어서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포격을 가할 수 있는 위치였다. 사직산과 성거산에 포대를 설치했음은 일종의 위협이었고 협박이었다. 1년 전 서울 남산에 대포를 걸어놓고 외교권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일을, 일제는 광주에서 재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8년 일제는 한말 호남 의병과의 전투 중에 죽은 일본 병사를 애도한다며 충혼탑을 세운다. 그런데 그 장소가 광주인들이 진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거사지 오층석탑 부근의 돌산이었다. 광주인들의 지킴이였던 거북, 그 머리에 일제에 저항했던 호남 의병들 대신 일본군을 위한 충혼탑 건립은 만행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우리 손으로 그 장소에 해방 기념탑을 세우고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지만(안 의사 동상은 1987년 중외공원으로 옮겨진다. 짓밟힌 자존심마저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당시 충혼탑은 석축을 쌓고 뾰족한 돌기둥 하나를 세운 것이었지만, 이 탑은 그 후 한 세대 넘게 광주공원이 겪게 될 운명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맨 먼저 일제는 광주~남평 간 신작로를 낸다며 성거산을 두 동강낸다. 그리고 1913년, 성거산 일대 1만 여 평을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저기를 자르고 판다. 일본 국화인 벚꽃을 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성거산이 당시의 지명을 따 구강공원으로 불리게 된 연유다. 1924년 사직공원에 일본 왕태자 히로히토(뒤에 소화 천왕)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을 조성한 후 구강공원은 구 공원, 사직공원은 신 공원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무튼 성거산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1914년 일제는 자신들의 개국시조인 천조대신을 받드는 신사를 짓는다. 광주 공원 정상, 지금의 충혼탑 자리였다. 그 광주신사가 정식으로 신사로 불린 것은 1916년 부터였다. 신사에 내걸린 광주신사란 현판 글씨는 조선주둔군 초대 사령관이자 2대 총독을 지낸 하세가와가 쓴다. 그리고 1924년, 신사 입구에 5.5미터 높이의 거대한 조형물인 일본신사 앞에 세우는 ‘ㅠ’자형의 도리이를 세운다. 신사가 세워지자 당시 광주에 살던 일본인 거주자들은 매년 4월과 10월에 춘추대제를 지낸다고 야단이 난다. 원활한 식민 지배를 기원하는 종이쪽지(오미구지)가 주렁주렁 내걸렸고, 공원 주변에서는 스모나 검도시합을 여느라 연일 부산을 떨었다. 이렇게 광주공원은 30여 년 동안 생경한 일본문화가 판치는 이역의 땅이 된다.
1940년, 신사의 관리권이 전남도에서 총독부로 넘어가면서 광주신사는 총독부에서 신사 운영비용을 부담하고 관할하는 이른바 국폐신사로 승격된다. 국폐신사로 격상되면서 광주신사는 올라가는 계단이 정비되고 광장이 확장되는 등 재정비된다.
신사로 인해 조선인이 겪었던 가장 큰 고역은 참배였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용납할 수 없는 의례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숭일·수피아 학교는 문을 닫는 수난도 겪는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던 날도 일제는 조선 학생들의 신사 참배를 강요했다.
해방이 되자 광주 시민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30년 동안 성거산을 옥죄던 신사의 파괴였다. 이는 신사가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눈엣가시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신사가 들어섰던 그 자리에는 한국전쟁 당시 순국한 경찰관을 기리는 ‘우리 위한 靈(영)의 塔(탑)’이란 글귀가 새겨진 충혼탑이 세워진다(1961).
광주공원 광장에는 오쿠무라 이호꼬라는 일본 여인의 동상도 세워진다. 오쿠무라 집안은 대대로 한국을 정탐하던 세작 집안이었다. 그녀의 7대조는 임진왜란 때 부산에 와서 일본 불교를 포교하며 조선을 정탐했던 오쿠무라 죠싱이었다. 300년이 지난 1897년, 본원사 승려였던 그녀의 오빠 오쿠무라 엔싱이 포교 활동을 명분으로 정보수집을 위해 광주에 들어오자 그녀도 뒤따른다. 포교를 가장한 둘은 1898년, 불로동 1번지(옛 동명호텔 자리)에 오쿠무라 실업학교와 본원사라는 일본 절을 짓는다. 이호꼬는 친일 세력을 키우고 일본인의 광주 정착을 돕기 위해 금융조합을 세우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 등 광주 침략의 선봉에 나선다. 1926년 식민지 조선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던 일본 애국부인회 전남지부는 재광 일본인들과 함께 이호꼬를 기리는 동상을 광주 공원 광장에 세운다. 일본 제국주의가 영원할 수 없듯, 이호꼬의 동상도 시련을 겪는다. 1940년 광주 신사 개수작업 때 구동 실내체육관 자리로 옮겨진 후 태평양전쟁 말기 군수물자난이 가중되던 1944년 일제에 의해 징발된다. 그리고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1962년 조지훈의 시를 새긴 광주 4·19 혁명 당시 숨진 7인을 기리는 4·19 의거 영령 추모비가 들어선다.
향교에서 공원 광장으로 올라오는 길 오른편에 어린이 헌장탑이 세워진 체육공원이 있다. 오래전 이곳은 과거에 1차 합격했던 생원과 진사들이 기숙하며 공부하던 향교의 사마재 터로, 이곳에서 근대 광주의 초등교육이 시작된다. 지금의 서석초등학교의 전신인 관찰부 공립소학교가 1896년 이곳에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이 자리마저 일본인의 차지가 된다. 농협의 출발점이 된 한국 최초의 지방금융조합이 이곳에 들어섰고, 1909년 이를 기념하는 조선금융조합창립기념탑이 세워진다. 일제 제국주의의 힘을 상징한 로켓 모양을 닮은 이 비는 해방 이후까지 존재했지만 이후 일제 잔재물로 철거된다. 지금 그 자리에는 어린이 헌장탑이 서 있다.
일본 병사를 위한 충혼탑, 신사와 도리이, 오쿠무라 이호꼬 동상, 조선금융조합창립기념탑 등은 일제가 30여 년간 광주공원에 남긴 지배와 복종을 강요한 흔적들이다. 지금 이 흔적들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잔재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확인해 볼 일이다.
광주공원에 깃든 의로움
광주공원은 일제의 잔재만이 남아 있는 공간은 아니다. 그곳은 주권을 찾기 위한 몸부림의 현장이었고,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한 포효의 현장이기도 했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민비가 시해되자 장성 출신 기우만은 광주향교에 본영을 두고 의병을 모집한다. 고종의 해산 조칙에 의해 해산되고 말지만, 일제를 몰아내겠다는 의지는 의로움의 실천이었다.
광주공원에는 호남 제일 의병장이었던 함평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을 기리는 의병장 남일 심공 순절비도 서 있다. 1962년 심남일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게 되고, 그 며느님은 꼬박 꼬박 받은 연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광주향교에 가져온다. 그 연금에 향교 유림들이 돈을 보탠다. 함평 출신인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가 광주공원에 세워진 연유가 감동이다.
광주는 서울·마산과 더불어 4·19 혁명 전국 3대 발상지 중 하나다. 또한 광주는 4·19 혁명의 단초가 된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전국 최초의 항쟁지이기도 했다.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고, 금남로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다. 오쿠무라 이호코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 쓰러진 영령들을 기리는 4·19의거 영령추모비도 세워진다.
또한 광주 공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훈련장이자 시민군 편성지였다.5월 21일 전남 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나오자 오후 4시경 자위수단으로 인근 시군 지역에서 총과 탄약을 가져와 시민군을 편성하고 사격 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지도부가 결성되어 24일 도청으로 통합될 때까지 시민회관을 본부로 삼고, 시내를 순찰하고 시민군 차량에 번호를 써서 등록하는 등 치안 업무를 맡는다. 해태상을 지나면 당시의 모습을 기리는 5·18표지석이 서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수많은 열사들이 민주주의에 제단에 몸을 바친다. 지금 어린이 헌장탑이 서 있는 곳 아래에 있던 신광교회 목사의 아들 류동운(당시 20세)도 그 중 한분이다. 마지막 도청을 향하면서 “나는 이 병든 역사를 위해 갑니다.” 라는 일기를 남기고 5월 27일 도청에서 숨을 거둔다. 지금 그곳에는 그를 기억하는 작은 비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