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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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이>
* 그 사람은 끊임없는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 그의 천직은 철새, 사라지는 자이다. 그런데 사랑하고 있는 나, 나의 천직은 반대로 칩거자, 움직이지 않는 자, 그 사람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않는, 마치 역 한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유보된(en souffrance)' 자이다. 사랑의 부재는 일방통행이다. 그것은 남아 있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지, 떠나는 사람으로부터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따라서 그 사람의 부재를 말하는 모든 남자에게는 모두 여성적인 것이 있음을 표명하는 결과가 된다. 기다리고 있고, 또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남자는 놀랍게도 여성화되어 있다.
* 이 잘 견디어낸 부재, 그것은 망각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간헐적으로 불충실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망각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기에. 가끔 망각하지 않는 연인은 지나침, 피로, 기억의 긴장으로 죽어간다(베르테르처럼).
*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Himeros)'가.
* 역주: 그런데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라캉은 욕망을 욕구 ․ 요구와 구별하는데, 욕구란 생리적인 것이나 특정 대상과 관계되는 것으로 충족 가능하며, 요구란 말로 표현되어 타자에게 건네지는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존재의 원초적 결여로 인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욕구는 실제적인 대상과 관계되지만, 요구에서의 대상은 비본질적인 것으로 그것은 사실상 사랑의 요구이다. 욕망은 이런 욕구와 요구의 틈 사이에서 생겨나는데, 실제적인 대상과 무관하다는 점에서는 욕구로 환원되지 않으며, 언어나 타자의 무의식을 고려함이 없이 자신을 강요하고, 또 타자에 의해 절대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점에서는 요구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근사해!”>
* “어젯밤 X…는 근사했었어.” 그것은 무엇에의 추억일까? 그리스인들이 카리스(charis)라고 불렀던 것? 그런데 카리스란 ‘눈의 광채, 육체의 빛나는 아름다움, 욕망하는 대상의 광휘’를 뜻한다.
* 일생을 통해 나는 수백만의 육체와 만나며, 그 중에서 수백 개의 육체를 욕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백 개의 육체 중에서 나는 단지 하나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보여준다.
그 선택은 그렇게도 엄격하기에 유일한 것(unique)만을 취하며, 바로 이 점이 분석적 전이(轉移)와 사랑의 전이의 다른 점이라고 말해진다.
<다루기 힘든 것>
* 달리 사랑해라, 좀더 잘 사랑해 보라, 사랑에 빠지지 말고 사랑해라 등등, 그 ‘지각 있는 말씀들’의 합창곡 아래서 조금 더 오래 지속되는 고집스런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즉 다루기 힘든(intraitable) 연인의 목소리가.
* 사랑에는 두 종류의 긍정이 있다. 우선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났을 때 느끼는 즉각적인 긍정(심리적으로는 현혹 ․ 열광 ․ 흥분, 충일된 미래에 대한 미친 계획들. 나는 행복해지고 싶은 욕망과 충동으로 휩싸인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예라고 말한다. 그 뒤를 잇는 긴 터널. 나의 첫 번째 긍정은 의혹으로 찢겨지고, 사랑의 가치는 끊임없이 평가 절하될 위험에 처한다. 그것은 서글픈 열정의 순간이요, 원한과 봉헌이 대두되는 순간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제거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다. (중략) 첫 번째 만남을 그 다름 속에서 긍정하고, 그것의 반복이 아닌 회귀를 원하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과거의, 또는 지금의)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코에 난 작은 점>
* 나의 욕망이 아닌 다른 욕망은 모두 미친 것이 아닐까?
<고 뇌>
* 고뇌는 이미 저기 준비된 독약(질투 ․ 버려짐 ․ 불안)마냥 놓여 있다.
<사랑을 사랑하는 것>
*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며, 사랑의 대상은 단지 그 도구에 불과하다.
<기다림>
* 기다림의 고뇌가 계속 격렬한 것만은 아니다. 침울한 순간도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고, 내 기다림을 둘러싼 모든 것은 비현실적인 것에 휩싸인 듯하다. 이 찻집에서 나는 들어오고, 수다를 떨고, 농담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들,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 않다.
*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呪文)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 그리하여 사랑의 관계가 진정된 오랜 후에도,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환각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 때로 전화가 늦어지면 여전히 괴로워하고, 또 누가 전화를 하든지 간에 그 훼방꾼에게서 나는 내가 예전에 사랑했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나는 절단된 다리에서 계속 아픔을 느끼는 불구자이다.
*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며,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 기다리게 하는 것, 그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요,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이다.”
* 중국의 선비가 기녀를 사랑하였다.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흔아홉 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
(25쪽에서 69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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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메나리조회 수 490 댓글 0
사랑에 대한 이 많은 생각들.
사랑이란 무엇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때로는 사랑이라고 정의한 말들, 그 많은 말들에 세뇌되어
그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이 세상에 사랑이란 것이 있기는 할까?
사랑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사랑이란 어쩌고 저쩌고,
저쩌고 어쩌고......자꾸만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쨌든, 사랑이란 말이 주는 따스하고 흡족한 느낌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열심히 읽고 열심히 들려주는 우리 착한여자 님께
"그 열정을 사랑해"
라고 하면 틀림없이 그 가슴속이 따스해질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보여줄 수 없어도
그렇게 뭔가 가슴속을 따스하게 차오르게 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드는 아침이다.
사랑해, 라는 말을 들으면
신상조조회 수 206 댓글 0
가슴이 따스해지고 말고요.^^
보리밥조회 수 449 댓글 0
착한여자님 안뇽
겨울방학은 어떻게 잘 보내고 있습니까
알콩달콩은 아닐테죠?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여자님, 처음엔 작품인가
하고 진지하게 읽어내려갔어요 "사랑의 단상" 누군가
빌려주었지만 읽다말았어요
부탁이 있습니다, 다음모임때 제가 볼 책
몇 권 가져오시면 깨끗이 보고 돌려 드릴께요
너무 많으면 질려버린 답니다 그러니
한 두권만, 요즈음도 긴 밤 새우나요?
젊을 때 부지런히 하세요
내 몫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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