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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치명적인 누명>의 줄거리:
참으로 질기고 치명적인 누명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따라 다닙니다. 아직 이름이 아브람이던 시절에 하나님의 신실하신 구원을 믿지 못하고 기근이 든 가나안 땅을 벗어나 애굽으로 간 것과 비겁하게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부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 누명이 치명적인 것은 아브라함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입니다. 믿음의 조상을 오해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믿음 그 자체를 오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치명적인 누명
(창12:10~20)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치명적인 누명>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치명적인 누명’
오늘 본문은 그야말로 아브람의 치명적인 실수에 관한 본문이라고 주로 이해되고 있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좀 그렇지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 가나안 땅이 어떤 땅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자손에게 주시기로 허락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그 약속의 땅에 도착했으면 기근이 오더라도 좀 머물고 있었어야지, 거기를 피해서 살겠다고 애굽으로 갑니까? 그리고 또 애굽으로 갈 때에 아내 사래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저는 궁금한 것이 본문에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라고 나옵니다.
원래 사촌지간으로 거짓말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볼 때에, 사래는 도대체 뭐라고 했을지 모르겠어요.
참, 당신은 나 팔아서 목숨 부지하겠다는 것이냐고 대들 수도 있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래는 아무소리 안 했는지 언급이 없어요.
그러나 사래가 뭐라고 했던지 간에 자기 살겠다고 이게 남자가 할 짓입니까?
그러니까 정말 주석서들에 의해서 발견되는 것처럼 아브람이 큰 실수를 한 것이고, 아브람의 이면에 감추어진 인간적인 나약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공통적으로 아브람의 잘못을 정리하면 기근을 피해서 갔다는 것은, 기근은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는데 이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살겠다고 약속의 땅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럴듯해요. 두 번째는 아내 사래를 진짜 누이지만 사실을 드러낸다는 그런 명분아래에 속마음은 자기가 살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에서 지켜주지 못하고, 아무리 정념이 불타는 애굽 족속이라고 할지라도 애굽 족속으로 부터 하나님이 아내를 지켜주시지 못할까봐 그런 거짓말을 인간적으로 생각해냈느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왜 갖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질 수 있는 믿음을 아브람이 정말 이 믿음을 갖지 못한 것일까요?
그러면 어떻게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겠습니까?
보세요.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약한 일면이 있다는 이야기, 그도 역시 죄인이라는 이야기는 맞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본문이 그런 면을 드러내는 본문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본문이 아브람에게 치명적으로 누명을 씌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아브람에게 치명타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주된 이유는 아브람이 누굽니까? 믿음의 조상이에요. 믿음의 조상을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본문이 뭘 드러내는 본문이냐?
우리의 믿음이 잘못 되었고, 오해된 믿음을 믿음으로 알고 있다는 치명적인 믿음의 오류를 드러내는 본문이라는 겁니다.
치명적인 믿음의 오류라는 것은, 그 믿음이 믿음인줄로 알고 있으면서 전혀 믿음이 아닌 상태를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왜?
믿음의 조상을 오해했기 때문에 믿음의 오류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오해로서의 본문에 대한 이해가 맞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 아브람의 행위인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갔고, 자기 아내 사래를 사촌누이로 속여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한 것 같은 이 행위를 어떻게 이해해야 맞느냐?
우선 우리가 느낄 때에 잘못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실 때에 잘못이냐 아니냐가 제일 중요하잖아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비겁한 행동처럼 첫 눈에 알아볼 정도로 명확한 것 같잖아요. 그래서 오해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제로원 복음방송을 열심히 듣고 계시는 연세가 많으신 점잖은 권사님 한 분을 만나서 대화를 하는데, 시즌 1때에 민수기 20장에서 므리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내면서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믿음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잘못으로 인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못 들어갑니다.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한 내용을 듣고 오셔서, 권사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가 막힐 정도의 불신앙적 잘못을 보면 누구나 다 화가 날 수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고 화가 나서 바위를 두 번 쳤다는 그 한 번의 행위를 보고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정말 마음 아파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냉혹하심과 철저하심은 성군 다윗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밧세바를 범한 것에 대해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 들추어내십니다. 그것도 신하들이 다 있는 곳에서 들춰버리십니다. 몰래가서 “이러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라고 한 것이 아니고 신하들이 다 있는 곳에서 들춰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잘못을 덮어두시는 분은 아니세요. 십자가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잘못을 덮어두십니까? 잘못을 못 덮어두시는 분이기 때문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잘못을 잘못으로 들추어내시고 그 잘못을 본인이 인정하고 회개할 때에 용서를 해주시지만, 잘못을 묵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동일한 사건이 창세기 20장에서도 똑같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시는 것은 아브람이 아니고, 애굽의 바로 왕이고, 20장에서는 아비멜렉의 그랄 왕을 문제 삼으십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이 치명적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사건을 반복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단 한 마디도 잘못이라고 지적하시지 않으십니다.
모세의 경우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잘못 같지도 않은 잘못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하나님의 판단을 내보이시면서도, 이 믿음의 조상 아브람에 대해서는 왜 그러실까요?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그런지 모르시겠습니까?
자, 이 사실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앞부분에서 읽었던 6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이 이제 가나안 땅을 지났는데, 9절에 보면 가나안 땅의 중간쯤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계속 남쪽으로 옮겨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던 과정 중에 있었던 일인데,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오셔서 뭐라고 하시느냐?
7절에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고 하시며 약속을 확인하시니까 그곳에서 제단을 쌓게 됩니다.
그리고 8-9절에는 “아브람이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불과 몇 km 떨어지지 않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하면서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애굽으로 간 것도 지금 가나안 땅에 머물고 있다가 기근 때문에 옮긴 것이 아니라, 기근이 있기 전에 이미 아브람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벧엘’이라고 하는 지역은 예루살렘 북쪽으로 20km지점인데,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간다고 하기 이전에 벌써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 지역의 남방 끝 지점에 와 있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남방 끝 지점에서 계속해서 남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데 세 군데 밖에는 갈 수가 없어요. 계속 남쪽으로 가면 사우디아라비아 쪽으로 빠지고, 동쪽으로 가면 자기가 나온 메소포타미아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원래 풍요한 땅이니 그곳에는 기근이 없겠지요. 그리고 서쪽으로 가면 애굽인데, 동쪽의 자기 고향으로 향하지 않고 기근을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향했다는 겁니다.
기근을 피하고 싶으면 남쪽의 사우디아라비아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자기 고향 동쪽의 메소포타미아로 갈 수도 있는데 굳이 자기 고향의 반대 방향인 애굽으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라 뭐라고 합니까?
“그들이 돌아가려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애굽 땅으로 갔는데, 그 발길이 뜻하는 것은 그가 진정으로 하늘의 본향을 사모했다”고 하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애굽으로 갔다는 말을 구체적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그네임을 자처한 것은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아브람의 행동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그게 바로 두 번의 제단을 쌓는 것에서 아브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왜 제단을 두 번 쌓았을까?
그 제단을 두 번 쌓는 아브람의 마음속에 사래를 누이라고 말한 의도도 그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을 오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면 두 번의 제단 쌓기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발로 디딘 땅을 보고 “이 땅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을 해주신 그 땅이로구나”라고 했을 거예요. 감격도 있었을 것이고 감동도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셔서 확인해주십니다.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줄 것이다.”
한 번 더 도장을 찍어주시고 이때에 제단을 쌓습니다.
아벨 이후에 제단은 제사를 위해서 필요한 거예요. 그냥 돌무더기가 아닙니다. 돌로 쌓았지만 굳이 제단이라고 한 것은 아브람이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왜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립니까?
아브람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뭐였습니까?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행위에서 믿음을 찾으면 안 돼요.
그 행위 이전에 어떻게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었는가에서 믿음을 찾아야 해요.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 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실들이 내 주변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마음을 주는 사실이 현실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마음을 주는 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 마음의 심장을 꺼내어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많은 사실들이 있어서 그것들이 아브람의 마음을 빼앗아가려고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방점을 찍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내 마음의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마음을 다 드려버립니다. 이게 아브람의 신앙이었어요.
그래서 나타난 결과가 첫 번째 관심사가 되신 하나님께서 계신 이 땅이 아닌 그곳을 아브람이 그리워하면서, 자기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하나님이 계신 그곳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 곳에 가서 애인과 행복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이.
이게 바로 믿음인데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아브람이 끊임없이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자, 가나안 땅이 너의 자손에게 줄 땅이라고 하시고, 나는 지금 1,200~1,300km의 여행 끝에 그 땅을 발로 밟아서 감동과 감회가 물밀듯이 밀려오는 순간입니다.
이때에 제단을 쌓았는데 왜 그럴까요?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브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기 시작합니다. 관심의 첫 번째 대상의 자리가 되려고 합니다. 내 마음이 가나안 땅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얼른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끌려가는 자기 자신을 거기서 양 한 마리를 죽이면서, 이 양이 바로 가나안 땅에 끌려가고 있는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을 거기에서 쌓은 거예요.
그리고 두 번째 제단은 ‘더 내려와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서 장막을 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이야기합니다.
‘벧엘’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아이’는 여호수아가 점령했던 그 아이를 말하는데, 아이라는 뜻은 ‘폐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장막을 쳤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고, 아이는 폐허예요.
그런데 그 사이에 장막을 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 뭘 뜻합니까?
폐허는 사람이 돌보지 않고, 사람이 등지고, 사람의 손길이 끊어질 때 폐허가 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손 떼는 거예요. 그럼 손 떼고 가만히 있느냐?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마음에서 1등을 하시고 나니까, 하나님이 계신 그곳이 그리워요. 그곳에 가서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의 집 벧엘에 계십니다.
폐허는 등 돌려서 손 뗀 것을 말하는 것이고, 벧엘은 하나님의 집을 말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벧엘을 향했다는 것을 뜻하는 거예요. 아이를 등지고 하나님의 집 벧엘을 향했다는 겁니다.
그럼 하나님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에녹이 승천했잖아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거예요. 당신이 계시는 곳으로 에녹을 부르셨으니까.
하늘을 향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벧엘이라고 하는 지역을 향해서 부른 것이라고 모세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아브람의 행동을 이렇게 써 낸 것입니다.
그럼 폐허는 무엇입니까?
남의 땅을 돌보지 않아서 폐허가 되는 것은 내 인생에서 이야기 될 필요가 없어요.
폐허가 되었다는 얘기는 내가 내 것으로 갖고 있고, 내 손을 대서 가꾸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등 돌림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죠.
폐허를 등 돌리고 하나님의 집을 향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 그러면서 남방으로 계속 옮겨갔다는 이야기예요.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고 이름을 부르면서 남방으로 옮기며 애굽으로 간 것인데, 그게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쉽게 말하면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와 예수님을 연결시켜서 모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생활화하려고 하고 있지만, 아브람은 있을 십자가 사건을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서 생활화하고 있는 겁니다, 제단을 쌓고 쌓았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폐허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 동안 내가 갖고 있었고, 내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 손 떼는 작업을 하고 있고, 오직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은 하나님아버지가 계신 하늘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손 떼는 작업이 뭐였습니까? 고향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난 거예요.
누구를 데리고 갔습니까? 아내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아브람의 생활영역이었던 고향 친척 아비 집, 메소포타미아와 하란에 있었던 생활영역은 폐허가 된 거예요. 그런데 사래를 계속 데리고 왔습니다.
이제 이 순간에 사래조차도 폐허로 남기고, 이 땅에서 갖고 있었던 모든 소유를 다 폐허로 남기고 하나님을 향해서 나가는 겁니다.
9절에 “점점남방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는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이 지상의 좋은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브람의 몸부림이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만한 것들을 지어 놓으시고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그것들이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1등자리를 빼앗을까봐 그것들에게 계속해서 등 돌리고 버리는 작업을 합니다. 그것들에 마음이 끌릴 때마다 제단을 쌓고, 그것들에 끌린 마음을 죽여 버립니다. 아내인 사래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니 13절에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라는 이야기는 아브람이 자기가 살려고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래를 위하는 마음이에요. 사래가 아브람을 사랑하고 아브람도 사래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아브람이 아무리 사래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사래 또한 아브람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었어도 사래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브람은 아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인 거예요.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다면 하나님보다 아내가 먼저 나와 연합이 된 상태에서, 마음으로도 아내가 먼저고 그리고 둘이 나가서 손잡고 기도하는 거예요.
손 떼세요!
둘을 우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먼저 하나 되어서 하나님께 나가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몸이 하나 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이 하나님보다 먼저 배우자와 하나 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누가복음 14장 26-27절에 내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하십니까?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내 십자가가 어디 있어요?
주님께서 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이 갈보리 십자가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가 내 마음의 자리를 1등자리로 차지하려하고 빼앗아가려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그들에 대해서 죽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버려서 마음에서 하나님이 1등 하실 수 있도록 유지해나가라는 겁니다.
그리고 너희 마음속에서 진짜 하나님이 1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계신 곳을 너희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유일한 처소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꾸 돌아다니면서 기뻐하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닙니까?
사래의 입장을 생각해준 거예요. 사래가 사랑하는 것을 아브람이 압니다. 그 사래의 입장에서는 애굽의 왕이 나를 탐내서 남편을 죽이려고 할 때에, 내가 어떻게 남편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가 마치 솔로몬의 재판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거예요.
솔로몬의 재판에서 어린 아기를 반으로 자르라고 했더니, 그 진짜 생모가 그러지 말고 그 아이를 저쪽 엄마에게 주라고 했던 것처럼, 애를 죽이느니 내 자식이 저쪽에 가서라도 사는 것이 좋다는 것 아닙니까? 사래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래의 마음을 아브람의 입으로 표현한 거예요.
사래가 나 때문에 남편이 죽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니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래의 입장을 생각해서 “여보! 나를 당신의 누이라고 해.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염려하는 것처럼 내가 죽지 않을 수 있지 않겠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자기 살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왜 꼭 우리 수준에서 생각을 합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사래를 사랑합니까?
아기를 못 낳는데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데리고 다니잖아요.
또 한 가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 내가 이 땅에서 갖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아브람의 믿음의 여정에서 보면 처음부터 갖고 있는 걸 지켜주십니까?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브람은 계속 놓는 겁니다. 마음에서 놓는다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니지만 입에서 버릇이 되어버렸어요.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그것을 붙잡는 나를 죽이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죠. 내려놓는 것도 내가 주체잖아요. 내가 주체가 되었다는 것 자체부터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애굽의 바로로부터 사래를 지켜내셨잖아요. 아브람에게 사래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람은 사래를 여전히 자기의 아내로 소유하고 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소유인줄 알고 있던 사래를 사래가 자기 마음속에서 1등자리를 차지하는 게 싫어서 하나님 앞에 내놓고 자기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사래는 이제 아브람에 의해서 아브람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브람의 주체성으로 내 아내라고 붙들어서 아내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가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고, 아브람이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지키시려고 사래를 지키신 것입니다.
내게 어떤 사업체가 있고 돈이 있어서 이것을 지켜달라고 하잖아요. 이걸 지켜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마음이 벌써 그것에 1등자리를 내주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1등이 아니고 내 마음이 하나님을 물리쳐버린 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얻게 된 그것을 가진 거예요.
“하나님! 내 자식을 지켜주세요.”라고 할 때에는 내 자식이 1등이에요. 하나님보다 먼저예요.
“내 사업체를 지켜주세요. 내 건강을 지켜주세요.”라고 하면 사업이 1등이고 건강이 1등이라는 이야기죠. 이건 믿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 대고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내인 사래를 지켜주지 않으실까봐 거짓말을 한다고 하면 기독교의 믿음이 완전히 거꾸로 되고 잘못되어버리는 것이죠.
무슨 말이냐?
내 마음에서 1등이 아내인데, 1등인 아내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나 안 지켜주시나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니까 이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라서 아내를 내 옆에 두는 것이지, 내가 내 아내를 붙잡아서 지켜달라고 기도해서 지켜주시는 겁니까?
사업체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업체를 붙드시는 것이지, 내가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붙들고 있기 때문에 나를 봐서 지켜주시는 겁니까?
그런 믿음은 없다는 겁니다. 아브람에게 치명적인 누명을 씌운 거예요.
그런데 아브람이 치명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치명적인 누명을 씌우는 동안에 우리가 치명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우리처럼 죄인이죠. 그러나 이 본문에서 보이는 아브람은 왕짱입니다.
어디다대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 본문에 가져다 붙입니까?
아브람도 죄인인 것은 맞지만 이 본문에서 말하는 내용은 왕짱이라는 내용이에요.
아브람은 믿음의 왕짱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참으로 철저한 십자가의 생활화의 원조의 모습을 아브람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내 마음이 붙잡게 되는 현실이 주어질 때마다 붙잡는 내가 미워서, 목숨까지 미워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앞당겨서 실천했던 아브람의 제단 쌓기가 우리의 삶에서도 순간마다 이어져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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