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생활의 표준(生活表準)
요한복음 7:14-24
중앙교회 삼일 저녁
凡事有表準, 彈有彈道, 矢有矢道, 百發百中者, 有表準故也. 信者亦然, 生活有表準, 主責無表準者曰 風葦無表準故常變易, 或商或農或東或西, 終身無成, 此無他無表準故也. 生活無表準者, 雖多金多識且高位, 幷無所用也. 故生活表準必要也. 主一立表準, 終身不改, 不以己意而動搖, 不以人言而變易也. 猶人問曰 爾何爲者? 主答曰我與父遺體云, 猶人反主排斥者, 主不似猶人之故也. 猶人不知主之表準, 主立于監司及祭祀長之前, 彼問曰 爾果猶大之王乎? 答曰爾言是也. 此果無表準而能如是乎? 彼薄志弱行朝變夕改者, 不可同日而語也. 無表準者無可否, 聞甲之言則甲言是, 聞乙之言則乙言是, 是無表準故也. 表準如鏡照物, 能示姸醜, 表準一立則雖童稚, 能知可否, 吾家幼兒往校見先生吸煙, 歸問曰吾校果信之校乎? 答曰然, 然則先生吸煙何故也? 有表準則幼兒亦有此等知覺也. 無表準則雖先生失行. 主說猶人之生活曰 表準必要, 爾等之表準果何也? 祭祀長老果有表準乎? 喪邦而不知救, 喪身而不知濟, 宗敎皆流外飾, 但廣衣立街間安, 亦不知非吹角救濟, 使蒙救之人, 面報不能受, 使施濟者現于世人之前, 徒取名譽, 亦不知是非, 當獻于父母者獻于神前, 曰고로반(Corban?), 事神則雖不事父母可云. 而亦不知非, 皆無表準故也. 主曰猶人之表準在行神旨也. 不欲行神旨則雖百聞經言不能知, 非徒不能知, 禮拜時徒生厭證也. 古代新羅之王曰麻立干, 是何志也? 一國人之表準也. 民衆之東之北, 望其表準而集會故曰麻立干, 吾人之思想如雲散霧飛, 而心中有表準則會在一處. 如群臣望麻立干而來朝也. 萬知生於此, 萬能生於此, 安望不着. 使此心望, 對物處事何事不成也? 吾等知五十年後, 或四十年後, 其時朝鮮果何如也, 在今日吾人之立表準如何也. 故不可如旣往之朝鮮人無表準, 至於滅亡, 身家良貝, 國家良貝, 民族良貝, 以耶蘇爲表準, 進進不已後, 光榮之未來垂手可得也. 不然 暗黑地獄皆其結果也.
모든 일에는 표준이 있습니다. 총알은 총알이 갈 길이 있고, 화살은 화살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표적을 백발백중으로 맞추는 것은 그 표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도 그러하여 생활에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표준이 없는 자를 나무라시기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표준이 없으므로 늘 변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상업을 하다가 농업을 하고, 동으로 가다가 서로 가고 그렇게 하면 죽을 때까지 해도 이루어지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표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활에 표준이 없는 자는 아무리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활에 표준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한번 표준을 세우시고 종신토록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의사 때문에 동요하지 않았고, 남의 말 때문에 바꾸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묻기를 ‘당신은 어떤 자요?’하니, 주께서 ‘나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주님을 배반하여 배척한 것은 주님이 유대인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주님의 표준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감사(監司)와 제사장 앞에 섰을 때, 그가 ‘그대가 과연 유대의 왕이냐?’고 묻자, ‘네 말이 맞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표준이 없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의지가 약하고 행동을 종잡을 수 없어서 아침 저녁으로 바뀌는 조변석개의 저 사람들과 똑 같은 수준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표준이 없는 자에게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갑의 말을 듣고는 갑의 말이 옳다고 하고, 을의 말을 들으면 을의 말이 맞다고 합니다. 이것은 표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표준은 거울로 물건을 비추어보는 것 같아서 곱고 미운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표준이 한 번 서면 아무리 어린 아이라도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집 어린 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 돌아와서 묻기를 ‘우리 학교가 과연 믿을 수 있는 학교입니까?’ 하고 묻기에 ‘그렇다’라고 답하였더니, 아이는 ‘그런데 선생이 왜 담배를 피웁니까’라고 하였습니다. 표준이 있으면 어린 아이도 이러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표준이 없으면 선생님도 행동에 실수를 합니다.
주께서 유대인의 생활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의 표준은 무엇인가? 제사장과 장로에게는 과연 표준이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도 구할 줄 모르고, 몸이 상하여도 구제할 줄 모르며, 종교는 다 겉치례에 흘러서 단지 넓은 옷을 입고 큰 거리에 서 있는 것을 편히 여기고, 호루라기를 불며 남을 구제해주는 것을 알리는 것이 그릇된 줄을 모르니, 구제를 받은 사람으로부터는 직접 고마움의 보답을 받지 못하고, 구제를 해 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사람 앞에 드러나도록 하려고 합니다. 이는 오로지 명예만 취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몰라서 마땅히 부모에게 드릴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면서 ‘고르반(Corban)’이라고 하면서 ‘하나님만 섬기면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잘못인줄 모르니 다 표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유대인의 표준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경>의 말을 백번 들어도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예배할 때 염증만 생기게 합니다.
고대 신라의 왕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슨 뜻입니까? 나라의 표준이라는 뜻입니다. 민중들이 동으로 가든, 서로 가든 그 표준을 바라보고 집회를 했기 때문에 ‘마립간’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사상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안개처럼 내려가지만 마음에 표준이 있으면 한 곳으로 모입니다. 마치 여러 신하들이 마립간을 바라보면 조회를 하러 오는 것과 같습니다.
만 가지 지식이 여기서 생기고, 만 가지 능력이 여기서 생기는데어디를 바라본들 보이지 않을 것이며, 이 마음의 바람으로 물건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어떤 일인들 성취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들은오십 년 후, 혹은 사십 년 후, 그 때 조선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우리가 표준을 어떻게 세우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지난날의 조선인이 표준이 없어서 멸망에 이른 것과 같이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몸과 가정이 낭패되고, 국가가 낭패되고, 민족이 낭패되었으니 예수를 표준으로 삼아앞으로 앞으로 그치지 않고 나아가면 영광의 미래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흑과 지옥이 다 그 결과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