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고(古) 동우(東愚) 이탁선생(李鐸先生) 약력
1. 단기(檀紀) 4222년(1889년) 3월 18일 평안남도(平安南道) 성천군(成川郡) 영천면(靈泉面) 노동리(盧洞里)에서 이용규씨(李龍奎氏)의 장남(長男)으로 출생(出生).
2. 단기(檀紀) 4239년(18세) 평양(平壤) 대성학교(大成學校) 졸업(卒業) 후 신민회(新民會)에 입회(入會), 민족운동(民族運動)에 헌신(獻身)하다.
3. 단기(檀紀) 4240년(19세) 평안남도(平安南道) 개천(价川), 성천(成川)등지(等地)에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교육(民族精神敎育)과 계몽운동(啓蒙運動)에 종사(從事).
4. 단기(檀紀) 4242년(21세) 신민회(新民會) 사명(使命)을 받아 가지고 일개년간(一箇年間) 남북만주(南北滿洲)를 시찰(視察)하여 그곳에 사는 동포들의 생활상태(生活狀態)와 토지사정(土地事情)을 조사(調査) 하다.
5. 단기(檀紀) 4243년(1910년 22세) 합병(合倂)직후(直後)인 9월에 만주(滿洲)를 탈출(脫出)하여 4252년 3.1운동으로 망명생활(亡命生活) 하는 동안 동지(同志)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양기탁(梁起鐸), 안동식(安東植) 등 제씨(諸氏)와 협력하여 주로 서간도(西墾島) 일대(一帶)를 무대(舞坮)로 하여 민족해방(民族解放)을 위한 기초공작(基礎工作)을 전개(展開)하다.
6. 각처(各處)에서 소학교(小學校) 20여개와 하이허에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이동녕교장) 쏘빗체에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설립하여 다수(多數)한 혁명투사(革命鬪士)를 양성(養成)하다.
7. 만주(滿洲) 유하현(柳河縣)에 지거우에 개간사업(開墾事業)을 시작하여 그 수입으로 이상 제반(諸般) 운동자금(運動資金)으로 하다.
8. 단기(檀紀) 4251년(1918년, 30세) 봄에 소련 소항영에 계신 선배(先輩) 이갑(李甲)선생의 병세(病勢) 위독(危篤)하다는 급보(急報)를 듣고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갔었으나 불행하게도 선생은 이미 3일 전에 별세하였고 수개월간 그곳에 체류(滯留)하면서 그 지방(地方) 동포들의 사정을 시찰(視察)하다.
9. 동년(同年) 7월에 다시 만주(滿洲)로 돌아온 후 동지(同志)인 의병대장(義兵隊長) 이석대씨가 왜경(倭警)에 체포(逮捕)된 후에 그의 부하(部下) 천 여명을 인솔(引率)하여 직접 무력투쟁(武力鬪爭)을 시(試)하기 위하여 동지(同志) 양기탁씨로 더불어 군자금(軍資金) 모집차(募集次)로 동년(同年) 9월에 국내(國內)에 잠입(潛入)하다가 도중(途中)에 양선생은 체포(逮捕)됨을 면하고(?) 그는 순천군(順天郡) 은산면(殷山面) 문창리(文昌里) 누이 집에 토굴(土窟) 속에 은신(隱身)하여 수개월간 고생하였다.
10. 그러던 중 이태왕(李太王) 국상(國喪)의 보(報)를 접(接)하여 뜻을 결(決)하고 12월 한만국경(韓滿國境)을 탈출(脫出)하여 다시 만주(滿洲)로 들어가 봉천(奉天)(현, 심양)있는 피영준씨(皮永俊氏) 여관(旅館)에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기타 혁명동지(同志)들을 비밀회담(秘密會談)을 열고 전국적(全國的)인 일대혁명운동(一大革命運動)(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국내(國內) 손병희(孫秉熙)씨, 이승훈(李昇薰)씨, 안창호(安昌浩)선생, 소련 이동휘(李東輝)씨, 일본에 이광수(李光洙)씨 기타(其他) 해외지사(海外志士)들과 연락을 취(取)하다.
11. 단기(檀紀) 4252년(1919년,31세) 주병원(朱秉元), 이석(李錫), 안경식(安敬?植), 이상호(李尙浩) 기타(其他) 부하(部下) 27명을 인솔(引率)하고 이태왕(李太王) 인산(因山)을 이용(利用)하여 경성(京城)에 잠입(潛入)하여 역적(逆賊) 이완용(李完用), 성토문(聲討文)을 발포(發布)하고 계속하여 무장폭동(武裝暴動)을 일으키려다가 사전(事前) 발각(發覺)되어 목적(目的)을 이루지 못하다.
12. 단기(檀紀) 4253년(32세)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의하여 동삼성(東三省) 외교위원장(外交委員長) 및 광복군(光復軍) 참모총장(參謀總長) 겸(兼) 총사령관(總司令官)에 임명(任命)되다.
13. 동년(同年)에 미국 시찰단(視察團) 래조(來朝)를 이용(利用)하여 무장폭동(武裝暴動)을 일으켜 대한민족(大韓民族)의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과 반일사상(反日思想)을 전 세계에 발포(發布)하여 한국 문제에 대한 국제적(國際的) 관심을 얻기 위하여 부하(部下) 결사대(決死隊) 주병원(朱秉元), 안경식(安敬植), 장덕진(張德震?), 안경신(安敬信), 이괄인(李适人) 등(等) 30여명(餘名)을 국내(國內)에 파퇴(破退)하여 신의(新義), 선천(宣川), 평양(平壤) 등지(等地)에서 옥문폭파사건(獄門爆破事件)을 일으켰다가 경성(京城)에서 사전(事前)에 발각(發覺)되어 실패하다.
14. 이 사건(事件)에 대하여 평양(平壤) 관계자(關係者) 안경신(安敬信) 여사 외 4-5명과 경성(京城) 관계자(關係者) 주병원(朱秉元) 등 8명이 체포(逮捕)되고 이탁선생(李鐸先生)은 주모자(主謀者)로서 경성고등법원(京城高等法院)에서 동년(同年) 8월 6일에 내란죄(內亂罪)로 기소(起訴)되어 결석판결(缺席判決)에 의해 무기징역(無期懲役)을 언도(言渡)하다.
15. 단기(檀紀) 4254년(1921년,33세) 상해(上海)에서 개최(開催)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 등 비회(備會) 의장(議長)으로 피선(被選)되어 2년간(年間) 계속하다가 2년 후인 4256년 8월에 개최(開催)된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에 평안남도(平安南道) 대표로 참석.
16. 동(同) 8월에 태평양(太平洋) 외교회의(外交會議) 외교후원회(外交後援會) 간사(幹事)로 피선(被選)되다.
17. 그 후 계속하여 상해(上海), 북경(北京), 만주(滿洲) 등지(等地)에서 혁명운동(革命運動)을 하던 동안 4260년에 정의부(正義府) 총사령(總司令)인 오동진(吳東振)씨 왜경(倭警)에게 잡혀 간 후 당국(當局)의 간청(懇請)에 의하여 그 후임(後任)으로 있다가 이청천(李靑天)씨에게 위임(委任)함.
18. 단기(檀紀) 4262년(1929년,41세) 장개석(蔣介石)의 영도(領導)하는 국민정부(國民政府) 군사비밀(軍事祕密) 고문(顧問)으로 활약(活躍)하면서 4262년 5월 17일 상해(上海) 하비대(霞飛坮?)에서 심장마비(心臟痲痹)로 서거(逝去).(42세(歲))
우(右)는 이탁선생(李鐸先生)의 이력인데 내가 4286년(1953년)에 진해에 와서 1년간 피난생활로 있는 동안 나는 감리교회 진해교회에 예배 보았다. 그 교회 자매 이해은(李海恩) 여사는 신앙이 돈독하고 사상이 건전한지라. 더불어 믿음이 통하여 자기 역사를 이야기하던 중 고 이탁선생(李鐸先生)이 자기의 실부(實父)라 말하여 나는 놀라며 한편 반가웠다. 이선생(李先生)은 나의 동지이고 서울 오면 가끔 신앙과 사상을 토론하여 많이 용맹(勇猛)을 주던 친구이다. 나이는 나보다 후생(後生)이라도 사상이 초월하여 배울만한 점이 많았다. 그의 최후를 들은 후 나는 그의 자녀가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의 아들 및 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 나는 그 자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다가 오늘 이해은(李海恩) 여사를 통하여 들었고 동 여사는 자기 아버지 약사(略史)를 가지고 다니다가 나에게 보였다. 나는 고인을 만나는 듯 반가워 그 약사를 달라하여 이 책에 기록하였다.
참고
* 주병원은 주병웅의 오기임으로 바로잡는다. 주병웅은 오적과 칠적을 고종인산을 계기로 암살하려다 8년 징역형을 받음,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받음.
* 결석판결(궐석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