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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출애굽기 20장 17절
하나님께서 명하신 도덕법 ⑬ : 10계명
제 9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이웃의 명예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해설하고 있는 것처럼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거짓 증언하지 않으며, 누구의 말도 왜곡시키지 않으며, 헐뜯거나 모략하지 않으며,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경솔하게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데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거짓말과 속임수를 마귀의 일로 알아서 피하고, 법적인 송사에서와 다른 모든 일에서도 진실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진술하고 고백하며, 할 수 있는 만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시켜 주는 것이 9계명의 내용입니다.
특히 선한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하는 거짓에 대하여도 9계명은 금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 자체가 하나님의 본성, 하나님의 속성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을 동원해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이루실 만큼 무능한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은 부패성과 그 연약함으로 인해 거짓을 내 놓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정도로 하나님의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다만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 때문에 거짓도 괜찮다는 사고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그리고 정직을 드러냄으로 우리가 진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야만 합니다.
오늘은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인 탐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17절을 보시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사실 탐심의 문제는 이웃 사랑과 관련된 다른 계명들 안에서도 다룰 수 있는 내용입니다. 명시적으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모든 계명들은 단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부분도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마지막 계명이 꼭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우르시누스라는 개혁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계명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이 계명은 십계명 전체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과 해석으로 덧붙여 진 것이요, 이에 준하여 다른 모든 계명들에 대한 내적인 순종을 해석해야 하므로, 이 계명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942) 그러니까 열 번째 계명은 다른 계명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이요 해석이라는 입장입니다.
반면 칼빈은 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데, 제네바 요리문답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214문입니다. “목사: 만일 모든 율법이 네가 말한 대로 영적인 것이라면, 즉 다른 모든 계명들이 외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마음의 성향까지도 규제하기 위한 것이라면, 왜 이 계명에서는 특별히 후자에 대해 언급되고 있는가? 아이: 주님께서는 다른 계명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다스리시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어떤 탐욕과 욕망을 품고 있기는 하나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율법을 부과하시기 원하십니다.” 215문 “목사: 그대는 생각 속에서 신자에게 다가오는 아주 미세한 유혹까지도 죄라고 생각합니까? 비록 그가 이에 대해 저항하고 결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아이: 모든 악한 생각들은, 비록 우리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육신의 결함에서 나오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계명이 아직 확정된 의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면서도 인간의 마음을 자극하며 괴롭히는 탐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앞선 계명들이 금한다고 할 때는 외적인 실천과 더불어 확정된 마음의 상태까지라면, 마지막 계명은 확정된 의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도 죄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신명기 설교를 통해서도 이런 내용을 설명하는데, 약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내 이웃의 물건을 보고 탐내어 그것을 갖고 싶다는 유혹을 받았을 때, 이런 탐심과 탐심의 실천으로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한다면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8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웃의 물건을 도둑질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물건에 대하여 가지고자 하는 탐심까지도 정죄하십니다. 그러니까 8계명을 통해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도 다루는데, 이때 내적인 것은 이웃의 물건을 보고 도둑질하고자 하는 그런 탐심의 마음, 다시 말해 의도를 가진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10계명 역시 이런 마음의 상태를 다루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도 다루는데, 의도를 가지지 않은 것조차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동의할 정도로 전적으로 집착하지 않는 또 다른 종류의 탐욕 혹은 욕망이 있는데, 10계명은 그것까지도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현세욕이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할 일이 있는데, 그때 좀 더 상세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도덕법으로서 아홉 개의 계명만 주신 것이 아니라 열 개의 계명을 주셨다는 것이고, 이웃 사랑의 법과 관련하여 많은 부분 외적인 행동을 금하는 표현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열 번째 계명은 그것의 근원이 되는 탐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많은 부분 외적인 행동을 금하는 표현방식으로 되어 있지만 그 뜻은 내적인 마음까지를 금하거나 요구하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율법을 해석하신 마태복음 5장 등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번째 계명을 주신 것은 그런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한다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칼빈의 해석처럼 의도한 것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탐심의 마음까지 죄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더불어 앞선 계명들이 외적인 행동을 금하는 표현방식을 통해 내적인 마음까지를 금하거나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열 번째 계명은 내적인 마음을 금하는 표현방식으로 있지만 단지 내적인 마음만을 금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선 계명들의 해석 원리처럼 내적인 마음을 금하시면서 외적인 행동까지도 금하거나 요구하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탐심만이 아니라 탐심으로 말미암아 결과 되는 모든 외적인 행동들 역시 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해서도 알리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요리문답의 해설을 살펴보면서 열 번째 계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겠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제 10계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제 80문 “제 10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해 완전한 만족을 요구하며, 우리 이웃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에 대해 정당한 사랑의 마음을 요구합니다.” 제 81문 “제 10계명에서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 10계명은 우리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을 금하며, 우리 이웃의 좋은 일에 대한 시기와 슬픔 및 이웃에게 속한 것에 대한 지나친 모든 행동들과 애착을 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탐심은 이웃의 집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웃의 아내, 이웃의 남종이나 여종, 그리고 이웃의 소나 나귀와 같은 소유물들. 때문에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고 설명하고 있고, 역으로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모든 불만족을 금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0계명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한 문항입니다. 113문 “제 10계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에게라도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작은 욕망이나 생각도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지 않게 하고, 언제나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또한 모든 의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계명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는 것이면 아무리 작은 욕망이나 생각도 우리 마음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설명합니다. 오히려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즐거워하는 것, 어떻게 보면 완전함을 요구하신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인간의 모든 욕망이나 욕구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 잠을 자는 문제, 그리고 자손에 대한 본성적인 욕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정죄되는 욕구는 소위 정욕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정욕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카트라이트라는 개혁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웃과 관련된 기쁨이나 유익에 대해서 가지는 모든 불법적인욕구이다. 그리고 그런 욕구들 가운데서 우리 이웃을 해하려는 모든 다른 욕망과 바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너는 탐내지 말라’, 혹은 ‘너는 아내나, 남종 등등을 탐내지 말라’고 간단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너의 이웃의 아내 등등을 탐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히 탐욕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과 관련된 탐욕에 대한 것, 이것을 정욕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정욕이라고 부르는 탐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원인은 아담이 먼저 범한 죄와 우리가 또한 아담 안에서 범했던 죄입니다. 여러분, 로마서 5장에서는 분명 아담이 모든 인류의 대표라고 말합니다. 즉 그의 죄는 그만의 죄가 아니라 그 안에 있던 모든 인류의 죄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어떤 사람은 내가 죄를 범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아담의 죄가 나의 죄가 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세우실 때 모든 인류의 대표로 정하시고 세우셨습니다. 그것도 지금의 우리처럼 점과 흠이 있고 부패성을 가진 자가 아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점과 흠이 없는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바로 그런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함께 불순종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정욕이라고 부르는 탐심이 생겨나게 된 원인입니다.
부차적이고 간접적인 원인도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원죄를 아담이 맨 처음 지은 죄로 생각하시는 분이 있는데, 원죄는 최초의 죄가 아니라 최초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는 죄를 의미합니다. 즉 죄책과 오염 혹은 부패성이 원죄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이 원죄로 말미암아 선을 상실하고 악을 향한 경향을 가지게 되는데, 자범죄가 바로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의 타락, 그리고 태어나게 되면서 가지게 되는 원죄가 우리로 하여금 선이 아니라 악을 향하게끔 정욕이라는 탐심을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헛되거나 사악한 것들에 쉽게 미혹되어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과거 이단 중에 펠라기우스란 이단이 있는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원죄를 부정합니다. 아담의 죄는 아담의 죄일 뿐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로마서 5장에서 언급되는 대표성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모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방이 아니라 우리의 죄는 아담의 타락 이후 본성적으로 있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정욕이라는 탐심을 배워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깊이 뿌리 내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정욕이라는 이 탐심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자리를 잡고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런저런 악한 생각들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악한 생각들이 때로는 밖으로 표출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란 존재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죄를 지어야지만 타락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죄를 짓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는 경우가 있다면, 나아가 그런 악한 생각이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우리 안에서 나온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아담 안에서 함께 타락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율법의 한 면은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분명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완전을 요구하고 있고, 그 완전함을 율법, 다시 말해 이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행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레18:5). 그러나 아담 안에서 타락한 인간이 그것을 지킬 수 있느냐?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만 보게 하실 뿐입니다(갈2:16 참조). 바로 그런 차원에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고 말씀하기도 하시는 겁니다(롬3:20 참조). 그러나 율법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택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말씀처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이루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여러분은 이 율법을 통해 자신의 전적인 타락을 인정한 자인 것이고, 때문에 그리스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또 다른 기능, 바로 신앙의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서게 되는데, 이때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외적으로도 드러나지만 우리 안에 있는 탐심에 대한 부분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할 때 죄에 대한 책임, 즉 죄책만 제거된 것으로 있지, 부패성과 죄에로 기우는 성향까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장차 누리게 될 영화의 자리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의 성도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뜻의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로 그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고자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땅에서의 성도는 끊임없이 부패성의 잔재들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에로 기우는 성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보면 열 번째 계명 이후 곧바로 율법에 대한 순종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하는데, 114문에 의하면 “하지만 하나님께로 회심한 자들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지킬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이 순종을 그저 약간 시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전한 뜻으로 하나님의 계명 중 일부만이 아니라 전부를 쫓아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율법은 지킬 수 없다는 것만 생각해야 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법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분명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아니 어느 한 계명도 완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정확하게 보도록 하는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합니다.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살도록 요구받고 있고,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살도록 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완전히 다 이룰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함으로, 그리고 이 계명들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함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시 계명 자체로 오면,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시는데(이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총회 공과 참조),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은 분명 자신의 처지나 소유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만을 갖는 것을 금하십니다. 또한 이웃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까지 원망하는 것도 금하십니다. 이웃의 소유에 대해서 질시할 뿐만 아니라 탐욕스러운 애착을 갖는 것도 금하십니다. 더 나아가 이웃의 소유를 파멸시키거나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부당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도 금하십니다. 10계명은 모든 악한 의도도 정죄하시는데, 골로새서 3장 5절에서는 탐심은 곧 우상숭배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을 만족할 수 없어 탐심을 가지는데,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까지도 만족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탐심의 마음을 버려야 하는데, 이것은 역으로 있는 바에 대하여 족한 줄 알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입니다. 6절부터 보시면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6-8) 특히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언급하는데, 욥이 욥기 1장에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신 것으로 자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 나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9-10) 돈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에 대한 탐심이 결국 파멸과 멸망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탐심이 아니라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자족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넉넉하게 여긴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은 하나님 한 분과 그분의 뜻과 섭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입니다. 방금 읽었던 말씀으로 하자면 아무도 세상에 올 때 무엇 하나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한 아무도 무엇 하나 가지고 갈 수 없는 존재인데, 그런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주신다면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만족하라는 것, 이것이 자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자족하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를 바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을 설명하면서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십니다. 하나님과 비교하여 더 좋은 상급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교하여 말씀드리자면 이 세상의 물질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장차 거하게 될 천국도 하나님보다 클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보다도 더 크신 분이십니다.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값집니까? 영원한 지옥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이것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조차 하나님 자신보다 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던 것이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어진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실 수도 있고, 건강을 주실 수도 있고, 구원의 은혜를 주실 수도 있고, 천국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 바로 하나님 자신보다는 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요, 우리 아버지요, 우리의 주인이시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욕에 휩싸여 탐심을 품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혹 시험을 주실 때는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도록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고전10:13). 히브리서 13장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13:5-6) 왜 우리가 있는 바에 대하여 자족할 수 있는가?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돕는 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우리를 해할 수 없고, 사람이 우리를 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외적으로는 그것들이 우리를 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도와 선을 이루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자족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탐심이 죄라는 것을 알고 이웃의 소유, 그것이 아내이든 종이든 소나 나귀와 같은 것이든, 무엇이라도 탐심의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내 아내로 족하고, 내 자녀로 족하고, 내게 주신 것으로 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스쳐지나가듯이 하는 생각도 안 됩니까? 서두에서 10계명에 대한 이해로 칼빈은 더 깊은 뜻이 여기에 들어 있다는 것을 말했는데, 앞선 계명들이 금한다고 할 때는 외적인 실천과 더불어 확정된 마음의 상태까지라면, 열 번째 계명은 확정된 의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런 생각이 의도하지 않고 일어났을 때도 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교리 가운데 현세욕이라고 해서 그 마음에 욕심이 밖으로 표현되지만 않으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있는데, 분명 열 번째 계명은 이런 이해가 정당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칼빈의 신명기 설교 내용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도 선동과 자극을 받아 악한 욕망을 갖게 된다는 것이 저주 받아야 할 죄이며, 그것은 원죄와 우리가 우리의 조상인 아담에게서 받은 부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세례를 받은 후에는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또 하나님에게 원한을 품고 불평해도 그것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살인, 독살, 간음, 그밖에 온갖 죄와 이 세상에 있는 온갖 난폭한 짓을 하라는 유혹을 받았을지라도, 만약 그가 그것에 동의하거나 찬동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가 그 문제에 대해서 나는 나의 악한 의도를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결심을 확고히 하지 않거나, 또는 그와 같은 악한 감정에서 기쁨을 얻겠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저들만이 아니라 앞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입장이기도 했습니다(이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p.943-945 참조).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정욕이 죄라는 것을 부인하는데, 고의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주장합니다. 저들의 주장을 조금 더 상세히 언급하자면, 우선 본성적인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정욕은 본성적이기 때문에 결코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무절제한 정욕은 타락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타락 이후에 우리의 본성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욕은 타락 이후에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 잡은 것이고, 그때 본성은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행하는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인간의 전적 타락,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여기에 대해 다시금 반론을 펼치는데, 사람의 보존에 기여하는 그런 일들을 이루며, 또한 사람에게 해로운 것들을 피하는 본성적인 욕망이나 성향은, 부패한 본성에 속하여 있다 할지라도 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인간의 모든 욕망이나 욕구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먹고 마시는 문제, 잠을 자는 문제, 그리고 자손에 대한 본성적인 욕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런 욕망은 그 자체로 악하다고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금하신 대상들에게로 향하는 무절제한 욕망들은 경우가 다릅니다. 바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취향과 욕망들 모두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땅히 향해야 할 대상들에게로 향하지 않거나, 혹은 합당한 방식과 의도를 갖지 않거나 하므로, 그것들 모두가 부패하고 죄악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욕을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 스스로가 산출하거나 막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하는데, 시편 51편은 어떻게 말합니까?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어머니 태 중에 있을 때는 스스로 산출하거나 막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고까지 고백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한 정의는 우리 스스로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기준입니다. 그 율법에 반하는 것은 사람이 피할 능력이 있든 없든 간에 무엇이든 다 죄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면 저들은 원죄가 세례 시에 제거되었다고 봅니다. 정확하게 가톨릭의 주장과 같은데, 가톨릭은 공식적으로는 펠라기우스주의를 정죄하면서도 그들의 교리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모순입니다. 어쨌든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정욕은 세례를 받은 자들에게 죄가 아니라고 하는데, 세례 자체에 어떤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세례가 의미하는 중생은 부패와 죄로 기우는 모든 성향까지 다 제거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중생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신자들 안에는 부패함이, 그리고 죄로 기우는 성향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패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며, 죄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십계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열 번째 계명인 탐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 알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과는 구별된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알리십니다. 비록 부패성이 남아 있고 죄로 기우는 성향이 남아 있지만, 그래서 이 땅에서는 자주 그리고 끊임없이 넘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 계명들에 대하여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경우는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악한 정욕이 그 마음에 끊임없이 나오는 것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간이라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못할 때 겸손한 마음으로 한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데도 마치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포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자신의 모든 허물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계명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에 힘입어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살펴보셔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부패성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을 통해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말씀과 기도라는 방편을 통해서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한탄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탄함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명하신 도덕법으로서의 십계명을 우리가 살펴보았는데, 무엇보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죄가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항상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것만을 위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율법에 의해서 항상 정죄 받지만, 그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유일한 은혜와 긍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너무나도 감사의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의요, 그가 우리의 거룩이요, 그가 우리의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롭지 않지만 그분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주시고, 거룩하지 않지만 결국에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거룩하다고 여겨주실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은 정죄는 없는 것입니다. 더불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율법은 신앙과 삶의 규범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떠오르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우리 밖으로 나타나게 되는 일도 많겠지만, 우리는 그런 죄와의 싸움을 싸워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