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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사랑합니다
손순늠
갑자기 내 마음이 설레었다.
‘어, 맞다.’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버님 왼쪽 귀에 가까이 가서 더 잘 들리게 왼손을 입에 갖다 대며 속삭이고 있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아버님께서 예전에 “야들아!”하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 올랐다.
20세기와 21세기에 시아버님은 조선시대와 유신시대를 사신 분이다. 이십칠 년 전 신혼 여행을 다녀와서 친정에 들렸다가 시댁에 갔을 때 “설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냥 명절 때 까지 여기 있어라.”하시는 시어머님의 말씀에 열흘을 그대로 새댁에서 보냈다. 하루를 보내고 둘째 날 새벽 6시에 일어 났다. 주안상을 준비해서 새벽 문안을 하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였지만 웃 동서 형님이 일러 주시는 대로 하였다. 한 겨울이라 캄캄한 시간에 일어나서 한복을 입었다. 형님이 차려 주신 주안상을 들고 가서 문 앞에서 “아버님, 어머님 문안인사 드립니다,”하고 기침 하시고 옷을 걸치실 때 까지 기다렸다. 방안에서 아버님께서 “에헴, 에헴”하시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안상을 아버님과 어머님 앞에 가져다 놓고 뒤로 물러서서 큰 절을 올렸다. “아버님, 어머님,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그 후에 다가가 차려온 음식을 드실 때 까지 기다렸다가 들고 나와서 아침 식사 준비를 도왔다. 도운다고 하지만 형님이 하시는 걸 가까이에 가서 손도 못 대고 보고 서 있는 게 고작이다. 뭘 할지도 모르고 더군다나 대구에 살았던 부엌이 아니라 시골에 아궁이에 불을 때고 부뚜막에 서 뭘 하는데 한복 입고 앞치마 두르고 서 있는 것 조차 낯 설었다.
결혼 할 생각도 못했던 나였다.
“설 쉬기 전에 결혼을 못하면 약혼이라도 합시다.”라고 시어머님이 친정엄마를 하도 조르는 바람에 결혼을 반대 하시던 친정엄마 입에서 “예, 그러면 결혼 시킵시다.”라고 승낙하신 게 결혼식 날로부터 십이일 전의 일이었다. 새벽 문안인사와 한복을 입고 하루 종일 생활하는 것 등은 명절이 끝날 때 까지 계속 되었다. 작은 설날 전에는 수북이 빼 온 떡가래를 식혀서 써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 작은 설날에는 나물을 다듬고 전을 굽느라 하루 종일 부엌에 있었다.
친정에서는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방에 앉아 받아먹었다. 명절에는 따로 사는 올케언니가 와서 음식을 할 때는 부엌에 가만히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언니가 제일 먼저 전을 구워서 뜨거울 때 먹으라며 주는 것을 맛있게 먹었다. 친정과 시댁의 명절 음식이 다른 게 많았다. 음식을 하다가 귀퉁이나 꼬투리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야들아!”하시며 부엌문을 열고 아버님께서 부르셨다. 좀 있다가 또 하나 입에 넣는 순간 방에서 부엌 쪽으로 난 작은 문이 열렸다. 또 아버님께서 “야들아! 하시며 부르셨다. 또 한참을 지나고 입에 하나 넣는 순간이면 어김없이 밖에서 일하시던 어머님께서 “야들아!”하시며 문을 여시니 손을 입에 갖다 대고 놀란 토끼처럼 멈춰 있으면 허허 웃으시며 문을 닫으셨다. 하루 종일 부엌문과 방에서 열리는 작은 문이 번갈아 벌컥 벌컥 열렸다. 아버님과 어머님에 이어 시숙까지 보탰다. 하필이면 모두가 입에 음식을 넣는 순간에 “야들아!”하시니 대답하기 힘들어 좌불안석 이였다. 그 때 마다 형님은 “이번 명절에는 동서가 있느니 기분이 좋아서 괜히 한 번 더 문을 열어 보시는 것 같다”며 놀리셨다. 종류별로 강정을 만들고 밤 늦도록 명절 준비로 분주 하였다.
설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한복을 새롭게 갖춰 입고 아버님과 어머님께 세배를 하였다. 떡국을 끓여서 아버님과 어머님 먼저 드시고 우리도 먹었다. 조금 있으니 작은 집 가족들이 모여 들었다. 작은 아버님과 작은 어머님 그리고, 오형제 부부와 아이들이 한 집에 두 명씩 이었다. 한꺼번에 아버님과 어머님께 세배를 하고 떡국을 나눠 먹었다. 제사를 지내고 모두들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시끌벅적 하였다. 뒤늦게 밥을 먹고 막 정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팀 두 팀 손님이 찾아왔다. 아버님께 세배를 하기위해 마을의 일가들이 찾아온 것이다.
중간 중간에 음식을 한 상씩 차려서 마을의 친척 집 웃 어른들께 인사를 갔다. 나무로 된 상에 음식을 종류별로 차렸으니 한복을 입고 상을 들고 200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를 이 집 저 집 다니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가 차린 음식을 드시고 남은 음식은 따로 덜어 놓고 빈 접시 위에 음식을 가득가득 담아 주시니 돌아오는 길 또한 극기 훈련 못지 않았다.
시숙과 남편과 삼촌은 명절과 다음 날 까지 친척 집을 돌며 세배를 다니느라 바빴지만 형님과 나는 다음 날 까지 끊이지 않는 손님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명절 연휴가 지나고 다음 날에 신접살림을 준비한 집으로 갔다. 손등은 거칠게 터 있었다. 순간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갔다가 온 것 같았다. 요즘 드라마에서는 여러 번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도 못했었기에 내가 조선시대로 시집을 간 것 같다. 나도 군위군 소보면 골짜기에서 17년간 살았으니 내가 산 시골보다 하양은 도시라고 생각한 것이 착오였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그 당시의 생활과 비교해봐도 환경이나 사고와 생활의 시대적 배경은 확연히 달랐다.
맞벌이를 하던 신혼때부터 아이가 셋이 될 때 까지 십년 동안 주말이면 어김없이 우리 가족은 시댁에 가서 일손을 도왔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봄이 되면 묘목에 접 붙이는 기술을 발휘 하시면서 집안의 농사를 지으시고 어머님은 깻잎을 납품하시는 일을 하니까 우리가 와서 손을 보태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신다. 밤 늦도록 생활의 연장선에서 리모컨을 들고 있던 도시생활에 젖은 우리가 초저녁에 주무시고 새벽 4시면 일어나시는 아버님을 맞추기는 힘든 일이었다.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야들아!”하시며 들어오셔서 애들을 깨우셨다.
구십 수를 넘기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집살이를 하면서 위로 딸 넷을 낳고 아들을 내리 셋을 낳으시며 키우시던 시어머니는 녹록지 않은 생활이었겠다 짐작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알고 있지만 팥을 들고 “이게 콩이다”라시면 절대로 팥이 될 수 없는 시아버님과 함께 오십년 이상을 사신 시어머님이 쌓인 한이 많았던지 치매의 증세를 보이신 일년 반 동안도 식물인간으로 누워계시던 일년 동안에도 “야들아!”의 메들리는 끊이지 않았다.
살아 생전 어머님께서 담당하시던 제사상의 생선 손질은 단연코 “대구 가들이 오면 하게 손도 대지 마라.”하셨다. “야들아! 생선은 광 안에 넣어 뒀다.”하시며 생선을 좋아하셔서 최고의 반찬으로 손질에 정성을 들여 주길 당부 하셨다. 13종류의 생선을 여러 마리씩 이니 큰 솥으로 아궁이에 장작불을 붙여서 4번 내지 5번 정도 쪄 내는 작업이라 오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연세는 있으신데도 건장하신 체구로 농사일을 놓을 수 없다 하시니 웬만한 건 도지를 주고 우리 가족들이 먹을 것만 하시며 혼자 지내셨다. 대구에 살던 형님네도 어머님께서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 계실 때 이미 충청도로 직장 따라 떠나고 삼촌도 그 무렵 경주로 발령 받아 떠나니 홀로 계신 아버님은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되었다. 그 전에도 시숙은 옛 선비의 모습으로 말로만 모든 접대를 하고 동생인 남편이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고 추진을 하니 하루에 이십 삼 만원의 중환자실 병원비부터 아버님을 모시고 누나와 자형들을 동반한 우애 좋은 남매들의 가족 나들이 비용 또한 우리 몫이었다. 주변에 살고 있는 손 위 시누이들의 방문이면 어김없이 큰 손님의 예우를 갖추었다, “야들아! 메주콩은 몇 되를 물에 담그면 되냐?” “야들아! 하양 장날이라 제사장은 일찍 봤다.”하시지만 아버님의 자식은 늘 큰 아들 뿐이셨다. 대구에 살고 있어서 많이 도와 주시는 셋째 시누이께서 “나도 우리 아부지 이지만 짜증나고 화가 나서 한 번 씩 박을 때가 있는데 동사댁은 어찌 아부지 비위를 그리 잘 맞추노,”하셨다. “아버님께서 속에 넣어 놓지 않고 상대방 기분은 아량곳 없이 말씀을 다 하시니 저는 그게 스트레스 쌓지 않고 건강하신 것 아니겠나 싶습니다. 형님, 지금 상황에 제 아이 다섯이고 정신없는데 아버님이 이 만큼 건강하시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만약 아버님이 몸이라도 불편하시면 제가 감당하기 훨씬 더 힘듭니다.”하였더니 형님께서 동감하시며 많이 도와주신 것이다. 물론 근처에 계시는 시누이와 삼촌도 자주 아버님을 찾아 뵈었다.
그렇게 십 수년의 세월이 흐르고 연세가 구십이 다 되가니 아버님께서 불안하신지 땅의 소유를 큰 아들에게 옮겨 주셨다. 아버님께서 가지신 땅의 대부분은 시숙의 몫이고 시동생과 우리 몫은 일부분이라 시동생이 경주로 갈 때 집을 사라고 우리 몫도 보태 주었다. 그러고 나니 형님이 눈치가 보였던지 제사를 가지고 가고 이듬해 아버님을 모시고 가셨다. 몇 년 후 “야들아! 내 너거 집에 일년 살면 안 되겠나?” 하셨는데 선뜩 대답을 못했다. 설을 세러 갔더니 아버님과 아주버님께서 원 룸을 얻어서 따로 살고 계셨다. 서울에 사시는 큰 시누이와 아주버님께서 아버님을 모시고 가서 모시다가 노환으로 집 옆에 있는 요양 병원에 모시며 간호를 하셨다. 물론 병원비와 시누이 형님 생활비를 삼형제가 보탰고 주말에 번갈아 가면서 방문 하였다. 토요일이라 내일 휴일 새벽에 서울에 아버님께 방문하기로 예정 되어 있었다.
아버님의 부고와 함께 하양에 있는 병원으로 모셨다. 아흔 넷의 고령이라지만 돌아 가셨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버님께서 편안한 모습으로 고요히 잠들어 계셨다, 하직 인사를 하고 염을 할 동안에 빈소에서 읽다가 마무리 못한 금강경을 열심히 읽었다. 마지막으로 귀만 남았다. 사람은 죽으면 귀가 가장 마지막에 닫힌다는 설명을 하였다. 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용수철에 튕기듯이 달려가 아버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더 잘 들리게 왼손을 오무려 입을 감쌌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가슴에서 솟구치는 그리움이 콧잔등을 통해 눈망울로 맺혔다,
그 동안에 “야들아!”하시면서 많은 사랑을 주셨던 그 모습이 누워 계시는 아버님 얼굴 위로 겹쳐졌다. 이 말 한마디로 다 할 수는 없겠지만 꼭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십 수년 전에 준비 해 두었던 대 다라니경을 빈소에서 가져와 덮어 드렸다. 공단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순간 밝은 빛이 환하게 위로 올라 오는 것을 보았다. 염 하시는 분께서 가족들을 가까이 불러서 한 마디 덧 붙였다. “지금 며느님께서 가져오신 이 대 다라니경은 저승 길 49일 동안 심판을 받으시는 것을 생략하고 바로 좋은데 가시는 것입니다.”라며 하나 하나 짚어 가며 설명 하셨다. 지금은 어머님과 청도의 산수 좋은 곳에 누워 계신다. 이십년 째 다니던 절에 아버님과 어머님 그리고, 친정아버지와 친정어머니를 영가당에 올려 놓았다. 초하루와 보름에 스님과 모든 신도들이 다 함께 축원을 한다. 생전에 좋아하시는 꽃을 생각해 절에 꽃꽂이를 전담하여 공양 올리는 기쁨으로 이 겨울이 따뜻하고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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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쓰다보니 분량이 좀 많아졌는데 괜찮은지 아니면 줄여야 되는지 살짝 걱정입니다.
글을 띄워쓰기 등 전반적으로 수정했습니다.
그래도 자꾸 읽으면 수정 할때가 많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프로필 사진도 파일로 보내주셔요
프로필 방에 올렸습니다.
안경을 안겼습니다.
제목 : 손순늠 프로필 사진입니다.
프로필 사진 아래에 약력도 간단하게 넣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