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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예수의 것이 되어야 한다. / 2017년 6월 4일 주일 예배
본문 / 민수기 8:5-13
저는 가끔씩 우울한 감정이 문득 문득 스쳐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그 트라우마로 우울함을 겪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하는 우울함은 인생의 상처보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것입니다. 고난을 받기 전에도 저는 이 우울함을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성격이 감성적이라 그런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마당에 서서 서산으로 지는 붉은 해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우울하고 외로운지 말입니다. 곧 눈물이 흐를 것 같았습니다.
그때 집 안에는 사랑하는 아내와 한참 귀여운 딸과 아들이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때 제가 작은 시골교회의 가난한 전도사였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세상을 살아가야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때문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인생의 우울함을 이 세상의 것으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세상에 미쳐 살면 존재의 실상을 극복하진 못하지만 잠시 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인간의 우울함과 외로움을 잠시 잊게 할 수는 있지만 결코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아내와 아이들이 곁에 있어도 외롭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우울함과 외로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 던져진 성도의 실존입니다. 그 외로움과 우울함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해결되는 것입니다. 외로움과 우울함은 하나님의 부재와 결핍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돛을 단 배가 바람을 등에 업고 앞으로 나아가듯이 성도는 그 우울함과 외로움으로 인해 아버지가 계신 믿음의 항구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계신 그 영원한 항구에 도달하기까지 그 강도는 약해져도 순간순간 이 허무한 세상에 대한 우울함과 썩어질 육체로 인한 외로움은 있겠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데 더 큰 자극과 소망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 광야에 던져져 인생 광야를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것이 되어가는,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어져 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던 내 중심의 외롭고 허전한 그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사는 믿음과 소망의 삶으로 변하게 됩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성도들을 광야로 불러내어 군사로 징집하고 군대로 편성하신 하나님은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을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민수기는 두 번의 인구조사 사이에 38년 동안의 이동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성도들을 어떻게 구원하는가를 말씀하시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기록입니다.
본문은 레위인을 요제로 드려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라는 지시입니다. 본문 6절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데려다가 정결하게 하라” 말씀합니다.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에게는 게르손, 고핫, 므라리 세 아들이 있었고 그 세 아들의 자손은 성막에서 제사장을 도와 봉사하는 자들로 성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을 구별하신 것은 그들이 다른 지파에 비해 믿음이 탁월하거나 거룩하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들의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성별하고 제사장에게 주어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성도는 그 인생 광야에서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은 애굽에서 구원 받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으로 장자의 죽음이라는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어린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문에 바르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 유월절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의 집의 장자들에게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는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그날 밤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이 된 것입니다.
모든 시작은 장자로부터 됩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육적인 장자입니다. 그 아담으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시작했고 더불어 타락도 기인했습니다.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범죄자가 되었듯이 이스라엘은 유월절 장자의 구원을 통해 그 장자와 함께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장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장자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소에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대속의 원리로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지파를 성별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대속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장자가, 장자를 대신하여 레위인이, 레위인을 대신하여 드려진 제물이 결국에는 모든 성도들을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내 아들 예수로 성도들을 대속하고 구원하겠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본서 8장 19절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말씀하십니다. 레위인은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광야로 나온 모든 성도들을 대표하는 자들로 하나님은 그들은 이제 인생 광야에서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져야 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드려지는 그 예식이 본문에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광야교회로 불려나온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별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성별하셨기 때문에 그 성도들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광야교회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지고 있습니까? 얼마나 드려지셨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올드 팝송 중에 아임 유어 맨(나는 당신의 남자)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 팝송의 내용을 보면 나는 당신의 남자가 아니라 나는 당신의 노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노예가 되는 것도 기뻐한다는 노래입니다.
심지어 당신이 원하면 사라져 주겠다고 말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여자를 주인으로 섬기는 노예가 맞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아임 유언 맨 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 날 대속하시고 그 피로 날 사셨으니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온전히 주님의 것으로 드려져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고백합니다.
어떤 목사님의 말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물론 지금 내 모습이 턱 없이 부족하지만 주님이 원하고 제가 바라는 것은 예수에 미쳐 사는 인생, 예수가 나의 모든 것이 되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의지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성도로 택하시고 그들을 광야교회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7절에서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하게 하되 곧 속죄의 물을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에게 그들의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하게 하고” 말씀합니다.
레위인은 정결하게 드려지기 위해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와 싸워야 합니다. 속죄의 물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거룩하게 구별되었지만 그 거룩함은 성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덧 입혀진 것입니다. 성도는 여전히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을 의지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고 있습니까? 훈련을 나가면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가 씻지 못하는 겁니다. 일주일간 위장크림을 바라고 세수를 못한 적도 있습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더러움과 피곤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부대로 복귀하여 목욕을 하고 정비를 하면 모든 군인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미소가 번지면서 행복지수가 높아집니다.
성도의 괴로움은 죄이며 성도의 즐거움은 그 죄를 예수의 피로 씻음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움도 길어지면 익숙해지듯이 죄악도 깊어지면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신 성도라면 죄가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물론 그들도 죄를 짓지만 곧 주님의 십자가 앞에 굴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 있으면서 하나님을 종교의 울타리로 삼은 타락한 죄인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죄인으로 정죄되었으나 그들이 자기 죄를 인식하지 못한 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 종교적인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도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의지하며 죄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죄는 어떤 행위가 나오기 그 이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 예수 이름으로 포장하여 내어놓는 그 모든 행위가 죄입니다. 그들은 성도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그 십자가의 원수가 행하는 전도로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의 피를 간구하는 성도는 그 예수를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을 자신의 몸을 성전삼아 계시는 주님을 위해 죄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죄를 용납할 수 없어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아 입어라 말씀합니다. 속죄의 물은 제사장이 뿌리었지만 삭도와 옷을 빠는 것은 그들이 해야 합니다. 삭도로 온 몸을 미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군대에 입대하는 장정들은 머리를 짧게 자릅니다.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를 때 이제 군인이 되는 구나라는 실감이 납니다. 그 짧은 머리는 잠시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내가 군인임을 드러내는 신분증과도 같습니다. 삭발한 머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매력을 어필할 수 없습니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헤어 스타일이 있게 마련인데 삭발이 유행하는 시대가 올까 모르겠습니다.
전신을 삭도로 미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입니다. 레위기 14장에서 하나님은 문둥병자로 판명되었다가 그 병으로부터 완치되어 정결함을 선언 받을 때 전신을 삭도로 밀라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신을 삭도로 미는 경우는 딱 이 두 가지입니다. 레위인들은 전신을 삭도로 밀 때 우리가 그 부정한 문둥인가 생각했을 것입니다. 문둥이는 진영에 거하지 못하고 진 밖으로 격리되었습니다. 그 문둥이가 치유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습니다.
부정하다 선언되고 진영 밖으로 쫓겨난 문둥이가 하나님의 은혜로 완치되어 정결예식을 할 때 온 몸을 삭도로 밀며 지난날의 부정을 씻어내고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교회로 불려나온 모든 성도들은 부정한 문둥이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교회와 그리스도 밖으로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그들의 부정을 씻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신을 삭도로 밀라 말씀하십니다. 육체의 정욕과 세상의 타심으로 자기만족을 위해 살던 그 부정한 문둥이의 삶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영적 문둥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문둥이의 삶을 회개하는 것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이 문둥인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교회에서 말씀의 검으로 그 부정한 죄악의 털을 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승처럼 털복숭이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무성한 털을 자랑하며 그 털이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세상의 힘과 영광을 자신을 보호할 털로 생각합니다. 털이 무성한 양이 그 털을 밀어내면 안쓰럽게 보입니다. 머리만 밀어도 얼마나 허전한지 모릅니다. 세상에 대한 즐거움과 의지와 소망과 자랑을 다 밀어내면 나는 이제 무얼 의지하고 산단 말인가 말합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털을 다 밀어내시고 너희들이 의지할 털은 나 여호와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세상과 육신의 털은 밀어내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업으로 삼아 사는 인생이 성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욕과 탐심의 털을 밀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밀어내신 자리가 허전하여 그 자리에 다시 무성한 털이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다 밀어내시고 다 뽑아 내셔서 주님만이 나의 의지와 기쁨이 되기 원합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옷이 여러 벌이라 누구를 만날 때 특별히 옷을 빨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특별한 날을 앞에 두고 목욕하고 옷을 빠는 것이 순서였습니다. 특별한 일을 앞에 두고 빨래 줄에 걸린 옷을 보면 마음이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옷을 빨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옷은 물로 세탁하지만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 아들의 피로 그 마음과 영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과정은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옷을 빨아 입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번제는 제물 전체를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고 소제는 곡식 가루를 드리는 것으로 이것은 온전한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로 성별된 성도들에게 온전한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도의 온전한 헌신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레위인으로 수송아지들의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네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 레위인을 속죄하고” 말씀합니다.
속죄가 해결되지 못한 봉사와 열심은 자기만족에 불과합니다. 레위인의 속죄는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얻는 안수는 전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속의 원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성도들을 대표하는 레위인들이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기 전 이미 그들은 이스라엘 회중들로부터 안수를 받았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레위인을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안수하게 한 후에” 말씀합니다.
결국 안수와 안수를 통하여 제물에 전가된 것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죄와 저주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무죄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 모든 성도들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동물 희생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지만 내 죄를 짊어지고 죽을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얻고 안수할 때의 그 마음은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찾아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어 내 머리에 얻으라고 말입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감히 주님 머리에 손을 얻는단 말입니까? 주님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만 네가 내 머리에 손을 얻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감히 주님의 머리에 손을 얻어 우리의 죄와 저주를 주님께 전가 시킬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들입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생의 현실이며 세상에 던져진 성도의 실존입니다. 주님이 해결해 주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가슴을 치며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날마다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인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본문 13절에서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 앞에 세워 여호와께 요제로 드릴지니라” 말씀합니다. 레위인들 성별하는 과정은 요제로 끝이 납니다. 요제는 제물을 드리는 방법 중의 하나로 제사장이 양손 위에 제물을 올려놓고 제단 앞에서 앞뒤로 흔들어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제로 바쳐진 제물은 전부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갑니다. 요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고 그것을 받으신 하나님께 되돌려 받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레위인을 받으시고 다시 그들을 제사장에게 선물로 주시기로 계획하셨습니다. 본문 11절에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흔들어 바치는 제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에게 여호와께 봉사하게 하기 위함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광야교회로 불려나온 모든 성도는 모두 요제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성도들을 요제로 흔들어 하나님께 드렸다가 다시 되돌려 받은 분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몸을 드려 성도들을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대제사장인 아론에게 레위인을 선물로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그 힘이 다할 때까지 봉사해야 합니다.
레위인의 인생은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로 성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요제로 자기 것으로 삼으신 성도들을 아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들에게 주신 선물은 승리의 전리품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다시 오셔서 모든 어둠을 영원히 심판하시고 아버지가 주신 선물을 가득 안고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봉사하며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를 요제로 받으시고 다시 그들을 대제사장이신 주님께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그 은혜로 성도를 부르시고 그리스도께 선물로 주신 것은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를 도와 봉사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고 은혜와 은사를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레위인을 성별하여 제사장에 주시는 것과 성도들을 그 은혜로 불러 그리스도께 맡기시는 목적은 동일합니다. 성도를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여 그리스도를 돕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연약한 인간이기에 레위인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신데 연약한 성도가 무엇을 도와야 하는 걸일까요? 성도가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계획이 지연되고 철회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돕고 봉사하는 것은 이미 그분이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와 부활의 그 속죄제와 번제와 요제를 믿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가 주님을 돕고 봉사할 것은 주님을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그 믿음은 야고보의 증언처럼 행함이 없는 지식이 아니며, 바울의 증언처럼 올바른 지식이 없는 열심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장을 도와 봉사하는 믿음은 레위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도와 법궤를 어깨에 메고 성막을 운반하고 제물을 잡고 성소를 지키며 세상에 기업을 두지 않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아 그 위로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져 성별되었음에 긍지를 갖고 믿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산 하나님께 속한 하늘의 시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돕고 봉사하는 믿음의 성도로 부름 받은 것을 아십니까? 농촌의 작은 교회를 섬기는 어떤 목회자가 어느 날 아들이 자신에게 ‘나는 가난한 목사가 싫어요’ 라는 말을 하더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가난한 목사인데 우리 애들도 가나한 목사인 나도 싫어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난이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가난을 주셨다 할지라도 그분은 그 가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도 주셨습니다. 그 영광은 가난과 고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하고 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와 주님의 것이 되어 그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에게 세상을 부러워하고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하나면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 앞에 세상은 그 실체인 배설물로 드러납니다. 배설물에 미혹당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 그 이름으로 사는 것이 주님을 도와 봉사하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것으로 되어져 갑니까?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