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9회 애지문학작품상 후보작
이종민, 김정웅, 조순희, 장혜령, 오산하, 임봄, 강익수, 권기선, 강정이, 이선희,
너의 꿈은 내가 갖고 싶었던 가장 아름다운 그림자
이종민
묻지 않은 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세계는 빛의 세계
생각하는 몸은
생각처럼 있고
생각 없음으로
오롯한 정신
식도를 넘어가는 커피
검은 액체가 흰 액체가 되어 나온다
고장난 걸까
우리는 어둠으로 가는 중인데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자
잊으려 들지 말자
헐게 조여진 바퀴
양쪽 모양이 다른 새의 날개
외우지 않아도 알고 있는
이름에 대해
무너지고 뒹구는 몸은 무엇에 대한 대답인가
빛이 있으라
그러면 그늘을 볼 수 있다
----애지, 2022년 가을호에서
유령상념
강정이
나는 유령, 아니 유령의 집이다. 내 등 뒤엔 친정부모, 시부모, 처녀로 죽은 이모, 과부로 살다 간 이모, 사슴같은 외삼촌, 전쟁터의 아주버니, 내 꿈 속에서 울던 두 모자가 비둘기 떼처럼 앉아있다. 때리고 침 뱉는 욕설을 온전히 받으면 내 몸이 아프다. 유령의 집에는 억울하거나 슬퍼하거나 외로운 영혼이 산다. 내 몸은 그래서 넓어야 한다. 유령들은 제 몸의 불로 쓰나미 산불도 거뜬히 견딘다. 저 울타리가 넉넉한 대숲이어서 부자다. 아파트분양, 땅투기, 주식, 코인 등 세상을 몰라도 된다. 유령인 내 몸은 종잇장처럼 가볍다. 호젓할 땐 넋두리도 구수하다. 내가 달빛 같은 유령일 때, 시냇물 흐르는 풍경 속에 내 몸을 누이고 새소리 풀잎소리, 바람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은 내가 유령인 줄 모르고 사람 취급한다
그래서 나는 유령과의 유토피아를 쌓기 위해 소나무처럼 단단해야 한다
----애지, 2021년 겨울호에서
현관의 센서등
이선희
반경 안으로 들어와 움직이는 것들에만 반응하는 습성이 있다
반경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한정되어 있어 밝아지는 일은 드물다
가끔 헛것을 보고 밝아지고
착각으로 밝아지기도 한다
반경 안에 들어와 팔을 휘젓는 물체를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 없이 반응을 하거나 너무 늦은 반응으로 자주 의심을 산다
혼자 켜지고 꺼진다
울다가 웃는다 혼자
좀처럼 반경 안으로 들어서려 하지 않는 물체를 기다리며
오래전부터 준비 완료 상태로 늙고 있다
----애지, 2021년 겨울호에서
별자리 안부
권기선
대륙을 이동하던 그들은 밥보다 밤을 사랑했지 돌칼과 나무로 만든 창으로 무장하고 배를 불리고 살을 찌워 기르는 부족의 힘도 밤 앞에선 무력한 일
보폭을 줄여 서로 가까이 뭉쳐야 해
누구를 더 사랑하는 일도 누구를 더 아끼는 일도 그들은 더 나은 땅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 유랑민이기도 했지
사자나 곰의 포효도 지근거리의 하이에나 무리도 괜찮아
위협보다 위험한 건 공포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으로부터 아무것도 보호받지 못하는 사방으로부터
그들은 동굴로 들어갔던 거야. 한 면만을 경계하면 되는 그곳으로, 들어갔던 거야
하지만 동굴이 없으면 어떻게 해?
그래서 그들은 밤을 사랑하기 시작했지 어두운 하늘에서도 밝게 빛나는 별을 사랑하는 방법을 익힌 거야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더 아끼는 일보다 우리는
같은 별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 그런 의미
그렇게 대륙을 이동하던 그들은
그러다 다른 부족을 만나면 그들은
살고 있던 영역의 별자리를 설명하고 각자가 본 별자리에 관해 나누는 일 그런 일이 서로를 이해하는 일이었어
경계보다 소중한 건 환대
그러니까,
전학 온 그 친구에게 내일은 안부를 건네봐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삼촌
나 이제 졸려
----애지, 2021년 겨울호에서
사계(四季)
강익수
봄
오랫동안 얼음 속에 갇혀 웅얼거리던 시냇물 춤추듯 재잘거리며 흘러가자 웅크리고 있던 송사리 기지개를 켜며 살금살금 양지바른 곳에 모여들었다 종달새는 땅과 하늘을 잇대어 재봉하듯 솟구치며 종알거렸다
집 앞 냇가에서 빨래하는 어머니 손이 참꽃 같았다 징검다리 건너 순이네 집 앞으로 갔지만 누런 바둑이는 짖지도 않고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돌담에 그려둔 눈사람도 녹아버린 듯 흐릿했다 두어 번 기차가 어둠을 지워가는 밤이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결혼하지 못한 것은 이웃사촌으로 지냈기 때문이라는 어머니 말씀에 이불속에서 눈물 흘리다 잠든 적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올 때 얼비치는 물그림자 때문이었을까 이웃사촌은 친척이 아니라 결혼할 수 있다고 어머니는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내 얼굴이 어머니 손같이 붉어져 연거푸 물수제비를 떴다
여름
송사리는 뛰어다니는 것일까 걸어 다니는 것일까 나는 뛰어다닌다 순이는 걸어 다닌다 했다 끝내는 토라져 돌아섰다 누나와 아버지는 뛰어다닌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걸어 다닌다 할아버지는 모른다 하셨다
큰비가 내려 며칠간 냇가를 건널 수 없기도 했지만 징검다리가 훤히 드러났어도 하릴없이 냇가에서 물새나 쫓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다 어머니는 수박을 주며 심부름시키셨다 마음이 앞서가는데 머릿속엔 송사리가 앞서갔다 순이는 배시시 웃기만 하였고 순이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따뜻한 옥수수를 한 바구니 담아주셨다 “송사리는 걸어 다니는 것이래”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순이가 괜스레 냇가까지 뒤따라왔지만 아무 말도 못 하였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우르르 몰려가는 송사리 떼 물속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있고 송사리는 날아다니는 새 떼 같았다
가을
햇살 좋은 곳엔 벌들도 윙윙거리며 가을걷이에 바쁜 날 고추잠자리는 앞산과 다투어 붉게 타오르고 할머니는 지팡이 대신 작대기를 쥐고 콩을 털었다
탁탁 개구리처럼 튀는 콩을 줍느라 나와 순이는 할머니 주변을 맴돌았다 주르르푹 내가 콩을 밟고 넘어질 때 순이도 넘어지고 “저런 칠칠치 못하게 곰보 되면 어쩌려고” 할머니 말씀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이가 두 손 가득 콩을 주워 할머니 앞에 놓으면 “순이는 콩도 잘 줍네” 할머니 칭찬에 슬쩍 질투가 났다가도 우리 셋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다람쥐는 볼록한 뺨으로 힐끗 쳐다보곤 바쁜 듯 지나가고 감잎과 담쟁이 잎은 아버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내려와 땅마저 울긋불긋 물들이고 있었다
겨울
분주하던 다람쥐 도토리와 함께 사라지고 감나무엔 까치밥 두어 개 남았을 즈음 냇가 건너 순이는 겨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해지고 나면 대숲은 밤이 적적한 듯 새들을 불러들였다 어둠이 길을 삼키고 산마저 삼켜버리자 바람은 제멋대로 낙엽을 몰고 다녔다 간간이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에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잠들었다 일어난 아침이면 어머니께 혼이 나곤 하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할아버지 앞에선 꼼짝 못 하였지만 화롯가 군밤 노릇노릇 익어 갈 때 긴 담뱃대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할아버지가 좋았다 가끔 심술궂은 바람이 꼬리연을 가져갔어도 자고 나면 사랑채엔 새로운 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립문 나서서 냇가 건너편 바라보는 사이에 복슬이는 꼬리를 흔들며 앞서갔다 어리어리 졸고 있던 들판을 가로질러 꼬리연 하늘의 꽁무니를 찌르면 마른 하품을 하던 하늘도 눈발을 날리곤 했다
----애지, 2022년 가을호에서
풀
임봄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
드러낸 송곳니 휘날리는 갈기
완벽하게 전투태세를 갖춘
굶주린 초록의 호랑이들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낮게 몸을 웅크려
은밀하게 눈알을 굴리다
구름에서 스미는 피 냄새에
두 팔 벌려 뛰어오르며
포효하는 소리
사방 들썩이는 땅에
화단에 모인 꽃들
일시에 숨을 멈춘다
----임봄 외 {마당에 호랑이가 산다}(애지문학회 사화집 2022년)에서
밤의 물속 낮의 물속
오산하
그녀는 이유 없이 탄천을 걷는다. 이유 없이 걸을 때면 이유 없이 다리가 아픈 사람이 된다. 바람이 차니까 금방 들어가야지. 그래도 계속 걷는다. 이유 없이 신호를 건넌다. 이유 없이 모르는 길이 된다. 모르는 길이 생기고 모르는 돌다리를 두드리는 일. 그녀는 비가 와서 잠긴 돌다리를 본다. 다리 위로 올라가도 건너편까지 갈 수 없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본다. 다리는 두 개다. 걸었던 다리. 건널 다리. 돌다리. 전부 탄천 아래에 갇혀있다. 묻혀있는 다리들. 다리를 밀어버린 다리. 이유의 다리. 물이 불어난다. 불어난 물은 계속 불어난다. 다리 너머 다리 너머 다리 너머. 건너편에는 아이 둘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탄다. 뒤축으로 멈춰서는 법. 그녀의 뒤꿈치는 다 닳아있다. 물살이 세다. 바람이 불어서다. 이유 없이 걸어서 다 터진 발바닥. 흰 양말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이유를 생각한다. 그녀는 이유 있이 걸었던 때가 있다. 이유와 걷다가 나무 위를 보고. 이유와 걷다가 물 아래를 들여다보고. 이유와 걷다가 돌다리를 건너고. 이유를 누가 물속으로 밀었나. 밤의 물속. 낮의 물속. 이제 이유가 없어져서 그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해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녀는 물속의 이유를 찾는다. 이유 없이 걷는 사람은 없지. 다 이유가 생기기 마련이지. 그녀는 이유의 다리를 찾는다. 이유의 다리를 건너려고. 그녀는 돌다리를 두드려보다가 발만 물속으로 넣어본다. 밤이 되기까지 잔잔해지기까지 이유를 다시 만날 때까지.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젖은 새
장혜령
오랜 세월
아빠, 너는 비밀문서를 만들었고
그것들은 먹의 피떡처럼 굳어
우리 집에 쌓여 있었다
이사하던 날
아빠, 네가 집 앞에 내다버린
그 활자들이
비에 젖어
저희들끼리 속닥거리다가
젖은 새처럼
오들거리며 떨다가
빗방울에 으스러져 내리는 걸
나는 보았다
버려진 활자들은
도시의 하수구로 흘러들어
지하에서, 이 도시의 연대기를
다시 쓰기를 꿈꿀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빠, 너는 왜 자꾸 버리기만 하니
너의 장갑 한 짝이
또 바닥에 떨어져 있다
꼭, 지하로부터 이 세계를 향해
쓰고 있는 사람의 손처럼
—계간 《시와 사상》 2022년 여름호
투명한 비명
조순희
평생 물밑 지형을 더듬고 다녔을 꽃게 몇 마리,
개수대에 만발하는 입맛을 부려 놓자
발끝에 울음을 매달고 사는 족속들 일제히 아우성친다
입에서 흰 비명을 꺼내는 녀석도 있다
낯선 침범을 경계하는 단단한 미각을 솔로 닦는다
개펄을 놓친 낭패감이 강할수록 거센 버팀들
다음을 손질하려는데 보라색 집게다리 하나 뚝,
딱딱한 습관을 체념하듯 내게 방금 내려놓은 자신을 던진다
옆길만 믿어온 종교는 앞뒤를 재는 일에 서툰 것일까
낯선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남은 한쪽마저 버리고 마는,
어떤 성질 사나운 바다는 전부를 포기하고 몸통만
추신처럼 남겨놓기도 한다, 순간 나의 뒤통수가 후끈하다
불편이 서툴러 숱한 만남을 걸어 잠그고
사고처럼 다가온 아픔을 이유 없이 떠나보냈던,
삶의 퇴적층에 멍울처럼 만져지는 내 집요한
최후 같은 다리 허공에 내어준 개수대 속 꽃게처럼
쉽게 포기해 버린 청색의 그들을 생각한다
들녘 어딘가에서, 숲속 어딘가에서, 바닷가 어딘가에서
지금도 귀가하지 못하는 나의 해묵은 조각들
저녁이 방문한 창가에서 철 지난 후회 하나 독백처럼 집어든다
몸통만 남은 채 최후를 두드리는 기척들을
측은스레 바라보는 봄날,
빛바랜 일기장에서 내 기억 밖으로 밀려났던 숨진 바다가
누군가를 흉내 내며 속울음을 손질하고 있다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
북극 항로
김정웅
깨뜨려야 해
가려는 마음조차도
배가 다닐 곳은 못돼
빙하는 단단한 벽
방위를 잃고 떠다니는 마음들이모인
얼음 기둥들로 가득한 바다를
건너가고 싶어
빠른 길 수에즈 운하를 두고
쇄빙선을 찾다가
결국엔
늦는데도
더 늦을 텐데도
바다를 깨뜨려
나아가야 하니까
배가 달려야 하니까
개척한다는 것은
결국은
누구에게는 등을 보여야 하는 일
등을 돌리는 일보다
등을 보는 일이 힘들었던 기억
번져 가는 뜨거운 상념이
빙하 속에 차갑게 갇히는 시간
나침반이 N극을 잃은 낯선 북극에서
S극만이 서성거리는 우리의 좌표는 해빙되고
----애지, 2022년 여름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