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잡는 특무대장 김창룡 제20회》
20. 타공(打共)의 1인자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죽음
■제 1부
김칭룡은 6.25 전쟁과 그 이후에도 부산 임시수도에서 수많은 간첩을 색출하여 처단하였으며, 환도(還都) 후에는 군 내부의 부정부패 사건도 수사하여 군을 정화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그가 1956년 1월 30일(월) 07시 30분경 출근하다 원효로 1가 자혜병원 앞 노상에서 괴한들로 부터 권총 저격을 받고 숨졌다.
그날 아침에도 차 안에서 원면(源綿)사건과 고위장성들의 축첩(蓄妾)에 관련된 조사결과를 검토하면서 출근하던 길이었다.
원면사건이란 장병들 월동용 침구류와 방한복 제작용으로 군에 보급해 준 피복 재료인데 이것을 할당 받은 군 상층부에서 시중에 팔아 부당이득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성들 일부가 축첩을 하여 말썽이 있었다.
이 두가지 건에 대해 밝혀 달라는 진정서가 경무대로 들어왔는데 특무대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대통령의 하명이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그날 이승만 대통령에게 대면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김창룡이 저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잠옷바람으로 김창룡의 시신이 안치된 수도육군병원으로 달려가 "김장군은 나를 대신하여 죽었다"며 신속히 범인을 잡으라고 하명하였다.
하명을 받은 특무대는 범인으로 허태영 대령과 그의 부하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를 검거하였다.
허태영 대령과 그 공범들은 모두 특무부대에서 김창룡의 부하로 근무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4명의 범인 중 운전병 이유회가 허태영 대령의 차로 특무부대장의 차를 가로 막아 정차하자 전봇대 뒤에 숨어 있던 신초식과 송용고가 뛰어나와 순식간에 권총으로 저격(실탄 6발 발사)하고 도망쳤다.
허태영은 이들을 사주하였으며, 이유회는 허태영 대령의 운전병이었다.
이들은 56년 8월 모두 사형언도를 받았다.
허태영과 이유회는 군법회의에서 신초식과 송용고는 문관으로 민간인 신분이라 대법원에서 각각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은 소장에서 중장으로 추서 되고 육군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범인들은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허태영 대령의 부인이 자기 남편은 상부의 지시를 받고 한 일이라며 억울하다고 재심을 요구하였다.
#다음 이야기는 21회에서 계속하겠습니다.
-月 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