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저작 |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喪禮考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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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명 |
『학봉선생문집(鶴峰先生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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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선생문집(鶴峰先生文集)』 |
『학봉선생문집(鶴峰先生文集)』은 후학 이홍조(李弘祚)와 후손 김시온(金是榲)이 산일되고 남은 가장 초본과 『해사록』 등을 수집하여 조경(趙絅)의 서문과 김응조(金應祖)의 발문을 받아 1649년 여강서원에서 원집을 간행하였다. 그 후 후손 주국(柱國) 등이 원집에 없는 유문을 정리하여 1782년 이상정(李象靖)의 교열을 거쳐 속집을 간행하였다. 이후 1851년에 중간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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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록(海槎錄)』 |
『해사록』은 김성일이 53세 때인 1590년에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돌아올 때까지 지은 시와 서간 및 잡저를 묶은 책이다. 이 책은 일본 사행 기간 동안 있었던 그의 활동 상황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일본 외교에 관련된 사상과 정책을 보여주는 자료이기도 하고, 나아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양국 관계에 관련된 외교사 내지 국제 정치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연구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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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례고증(喪禮考證)』 |
『상례고증』은 김성일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기술된 상례의 근거에 관하여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주자가례』의 미비점을 보충하면서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게 만든 예서이다. 김성일은 퇴계 예학의 기본 정신을 계승하여, 『가례』를 기준으로 했지만 일존주의로 흐르지 않고 실천 예학의 체계를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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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서지 |
권수제 |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
판심제 |
학봉선생문집(鶴峯先生文集) |
간종 |
목판본 |
간행년 |
1851년 간행 |
권책 |
목록(目錄), 원집(原集) 7권, 속집(續集) 5권, 부록(附錄) 4권 합 10책 |
행자 |
10행 19자 |
규격 |
21×17.4(㎝) |
어미 |
上下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소장도서번호 |
奎5500 |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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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명 |
김성일(金誠一) |
생년 |
1538년(중종 33) |
몰년 |
1593년(선조 26) |
자 |
사순(士純) |
호 |
학봉(鶴峯) |
본관 |
의성(義城) |
시호 |
문충(文忠) |
특기사항 |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門人) | |
편찬 및 간행 |
저자의 시문이 처음 수집, 편차된 것은 廬江書院(뒤에 虎溪書院으로 賜額)의 山長 李弘祚, 從孫 金是榲 등에 의해서이다. 이들은 왜란과 호란을 겪는 와중에서 散佚되고 남은 家藏 手錄本과 1642년(인조 20) 저자의 사위 金榮祖 등이 간행한 海槎錄 등을 수집, 편차하여 原集 8권, 附錄 합 4책으로 만들어 1649년(인조 27) 廬江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초간본》여기서 家藏 手錄本은 본집의 구성에서 그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데, 대개 朝天錄, 北征錄 등과 같이 시기와 활동에 따라 순차적으로 成冊된 것으로, 이를 詩와 文으로 분류하고 그것을 다시 刪定하여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규장각(奎4250, 4292),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7代孫 金柱國, 金柱雲 등이 李象靖과 함께 續集을 간행하였다. 이들은 초간본에서 산절된 詩文을 중심으로 재차 수집하였는데, 133題의 詩를 저작 연대순으로 일괄 편차하고 〈退溪先生史傳草〉, 〈請魯陵復位六臣復爵宗親敍用疏〉 등의 文을 원집의 규례에 따라 편차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李滉이 지은 〈題金士純屛銘〉을 비롯, 崔晛 등이 각기 기록한 〈言行錄〉, 吳澐 등이 지은 祭文, 〈日本陶國興與花山士人趙相觀書〉 등의 부록문자를 붙여, 1782년(정조 6) 虎溪書院에서 목판으로 續集 5권 3책을 간행하였다. 현재 규장각(奎4898), 국립중앙도서관(東谷古3648-文10-328)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重刊은 원집과 속집 板本의 刓缺이 심해지면서 10代孫 金鎭龜, 金鎭華 등에 의해 도모되었다. 이들은 1847년(헌종 13)부터 定齋 柳致明과 함께 臨河縣에 있는 泗濱書院(金璲 主享)에 모여 중간을 위해 문집을 재편, 校正하였는데, (定齋集 年譜) 考異와 頭標를 붙이고 續集에는 拾遺를 더하고 원집의 형태대로 湖堂朔製 등으로 재편하여 원집을 7권 4책, 속집을 5권 3책으로 만들었다. 또 附錄은 世系圖와 年譜, 行狀, 墓道文字를 새로 넣고, 拾遺, 祭文 등을 추가하여 4권 3책으로 편차하였는데, 年譜는 李栽가 찬한 것으로 1726년(영조 2)에 간행한 바 있었다. 이렇게 원집, 속집, 부록을 합하여 16권 10책으로 만들어 臨川書院에서 1851년(철종 2) 목판으로 重刊하였다. 《중간본》현재 규장각(奎5500),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86),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454)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에서 간행한 「鶴峯全書」를 보면 逸稿라는 寫本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또한 원집과 속집에서 산절되고 남은 것을 원집의 편찬 방식에 따라 後孫家에서 編纂 書寫한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에 의하여 완성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본서의 저본은 1851년에 간행된 중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趙絅 撰), 跋(金應祖 撰), 續集序(李象靖 撰), 重刊跋(柳致明 撰)에 의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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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과 내용 |
본집은 원집 7권, 속집 5권, 부록 4권 합 1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原集은 卷首에 趙絅의 序文(1648)과 目錄이 있다. 권1~2는 詩, 賦, 詞, 辭이다. 권1은 詩로, 저작 연대순으로 湖堂朔製, 朝天錄, 北征錄, 海西錄, 錦城錄이 있고, 맨 앞에 기타 詩들이 역시 저작 연대순으로 실려 있다. 重刊 때 첨가한 考異와 頭標가 곳곳에 붙어 있다. 湖堂朔製는 저자가 1576년(선조 9) 湖堂에 있을 때 지은 시들을 모은 것이고, 朝天錄은 1577년 명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풍물을 읊은 것이다. 北征錄과 海西錄은 각각 1579년 함경도와 1583년 황해도의 巡撫御史로 나가 그 지역을 순행하면서 지은 것이며, 錦城錄은 1583년 羅州 牧使로 부임하여 지은 시들을 묶은 것이다. 권2는 海槎錄 가운데 詩 부분이다. 海槎錄은 1590년 日本 使行 때 지은 詩文으로 저자의 일본에 대한 인식과 당시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인데, 그중 시만 뽑아 놓았다. 그 뒤에 1592년 慶尙右道 兵使로 나가면서 지은 〈漢江留別〉과 晉州城 三壯士에 대한 〈矗石樓〉 詩가 실려 있다. 賦는 중국 사행 때 지은 〈首陽山賦〉 등이고, 詞는 黃海道 巡撫御史 시절 지은 〈瑞興東軒…〉이며, 辭는 일본 사행 때 지은 〈次五山天風海濤辭〉 등이다. 권3은 箚, 啓, 狀, 招諭文이다. 1579년(선조 12)에 掌令으로서 올린 〈申救宋應泂箚〉와 〈請貞陵建閣置官啓〉, 1591년 부제학으로서 올린 〈請遇災修省箚〉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올린 狀啓와 招諭文이다. 권4~5는 書이다. 권4는 趙穆, 權好文, 柳成龍, 郭再祐 등과 왕복한 편지들이다. 趙穆에게 답한 편지 중에는 「退溪集」의 간행과 관련된 언급이 많다. 권5는 海槎錄 중의 편지 부분으로, 正使 黃允吉, 서장관 許筬 그리고 일본인 玄蘇, 平調信, 對馬島主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권6은 海槎錄 중의 雜著 부분이다. 〈朝鮮國沿革考異〉와 〈風俗考異〉는 일본의 僧 宗陳이 「大明一統志」에 실려 있는 우리나라 관계 조항을 물은 데 대해 그 잘못된 내용을 축조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海槎錄의 전승 경위에 대한 崔晛의 海槎錄跋(1613)과 간행 때의 李植의 海槎錄跋(1642)이 附記되어 있다. 권7은 雜著, 祭文, 墓碣銘, 墓誌, 行狀이다. 雜著는 〈奉先諸規〉와 〈吉凶慶弔諸規〉이고, 伯兄과 동생 등에 대한 祭文, 先祖考 등에 대한 墓碣銘, 父母의 墓誌, 부친 金璲의 行狀이 실려 있다. 끝으로 金應祖의 跋文(1649)이 있다. 續集은 卷首에 李象靖의 序文(1781)과 目錄이 있다. 권1은 詩이다. 原集의 구성과 마찬가지로 맨 앞에 기타의 시들을 모아 놓고 그 뒤로 湖堂朔製, 朝天錄, 北征錄, 海西錄, 錦城錄, 海槎錄을 실어 놓았는데, 이는 초간본 속집에 실렸던 시들을 重刊하면서 다시 재편한 것이다. 또 초간 때 빠졌던 시들은 다시 拾遺로 분류하여 뒤에 모아 놓았다. 原集과 마찬가지로 重刊 때 넣은 考異와 頭標가 붙어 있다. 권2는 敎文, 疏이다. 敎文은 〈領相盧守愼辭職不允敎文〉이다. 「蘇齋集」 年譜附錄에 의하면, 이 교문은 ‘修撰 金誠一’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1573년(선조 6)에 副修撰 知製敎로 있었고, 이때 盧守愼의 관직은 右議政이었다. 따라서 이는 領相이 아니라 右相 盧守愼의 辭職에 대한 不允敎文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疏 가운데 〈請魯陵復位六臣復爵宗親敍用疏〉는, 年譜에 의하면 임신년(1572)에 奉敎로서 올린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에서는 신미년(1571)에 올린 것으로 주석이 달려 있는데, 근거 자료의 차이에 의한 것임을 年譜에 頭標하여 밝혀 놓았다. 권3은 箚, 啓, 狀, 公移이다. 箚 1편은 弘文館 재직시 勸勉하여 올린 것으로 일부분뿐이다. 啓는 1573년 5월 正言으로서 金戣의 일로 피혐하며 올린 啓辭를 비롯, 沈喜壽 등을 論啓한 글들이다. 狀과 公移는 모두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올린 글인데, 각기 重刊하면서 拾遺의 형태로 2, 3편씩 보충하였다. 권4는 書이다. 原集에 실리지 않았던 退溪先生에게 올린 편지와 問目들이 맨 앞에 있고, 그 뒤로 趙穆, 琴蘭秀 등과 주고받은 안부 편지 등이 실려 있다. 권5는 雜著, 記, 祭文, 墓誌이다. 雜著는 〈退溪先生史傳〉과 〈退溪先生言行錄〉 등이다. 〈遊赤壁記〉는 同福의 赤壁을 유람한 記文이다. 그리고 李逢原에 대한 祭文과 미완성인 權好文의 墓誌가 있다. 附錄은 권수에 目錄과 世系圖가 있고, 권1은 年譜이다. 年譜는 李栽가 편찬하고, 李野淳이 증보한 것이다. 李栽의 年譜跋(1726)과 柳致明의 年譜後識(1851)가 실려 있다. 권2는 鄭逑가 지은 行狀(1617)이며, 권3은 鄭經世가 지은 神道碑銘(1631), 退溪先生이 지어 준 〈題金士純屛銘〉, 諸賢이 적은 言行錄 등이고, 권4는 賜祭文(1609, 광해군 1)과 祭文, 여러 서원의 奉安文 등이다. 年譜와 行狀, 神道碑銘, 題墓傍石, 墓碣銘, 言行錄拾遺, 賜祭文, 奉安文과 祭門 일부는 重刊 때 넣은 부분이다. 끝으로 柳致明의 重刊跋(1851)이 있다.
필자 : 신승운(辛承云)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