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조선왕조실록 ㅡㅡㅡ25
소젖을 위한 변명
야마오까 소하찌가 쓴 대망(大望)이란 일본 소설을 보면,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어린 시절 우유를 굳혀서 만든 치즈 비슷한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웃 일본이 16세기에 우유를 먹었다면, 같은 시기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은 이미 개국 초부터 고려시절부터 내려오던 유우소
(乳牛所 : 소젖을 관할하는 관청)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 소젖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전하!! 이건 좀 심하신 거 아닙니까? 우유가 몸에 좋고, 칼슘이나 철분이 많이 들어서 골다공증 예방에도 좋다고 하지만, 인력낭비가 너무 심합니다. 소젖 그 까이거 그냥 대충 소 젖탱이나 주물딱 거려서 뽑으면 되는데 유우소(乳牛所) 라고 관청까지 만들어서 말입니다. 그게 한 서너명 모아놓고, 소 젖이나 짜라면 이해하겠지만, 200명은 너무 한거 아닙니까?”
세종 3년 병조에서 총대를 메고, 장계를 올린 것이었다.
“어쭈, 네들 지금 내가 우유 받아먹는 게 꼽다는 거야 뭐야? 네들은 못 먹는데, 우리만 먹는게 꼽다 이거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궂이 우유를 먹고 싶으시면, 아침마다 배달해서 먹으면 되잖습니까? 그거 받아서 먹으면 되는 걸 가지고 꼭 관청까지 둬서 말이죠…. 그게 또 신하들이나 일반 평민들한테까지 혜택이 돌아가면 모르겠지만, 전하나, 상왕전하, 왕족들 몇 명만 배달해서 먹는건데, 그걸 위해서 공무원 200명이나 투입한다는 건 비생산적이지 않습니까?”
“야이 자식아, 그럼 유우소 말고 우유 생산 하는 데가 어디 있어? 그리고 난 저지방 우유 밖에 못 먹어! 조선 천지에 저지방 우유 생산 하는 데가 어디 있어!”
“아니 뭐, 꼭 전하께서 먹는 걸 탓 하자는 게 아니라, 좀 비생산적이란 거죠. 툭 까놓고 말해서 조선 천지에 우유 받아먹는 사람이 주상전하나, 상왕전하, 왕족 몇 분이랑, 대비마마, 중전마마 정도가 다 아닙니까? 그런데 그 몇 사람을 위해서 200명이나 차출 돼서 덤벼드는거 이거 문제 있다 이겁니다!”
세종3년 병조에서 시작된 ‘유우소(乳牛所) 철폐 운동’은 세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당시까지 소젖 이란 건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는 ‘우유’란 개념이 아니었다.
보양식 혹은 약의 개념으로 생우유를 마시는 게 아니라, 죽으로 만들거나 쌀가루와 우유를 넣어 끓인 뒤 소금으로 간을 한 타락죽을 만들어 먹었다.
(보통 왕의 자릿조반으로 많이 나왔다)
“아니, 내가 꼭 우유에 환장하는 건 아닌데…. 좀 기분이 나쁘긴 하다? 네들 나한테 이럴수 있어? 내가 뭐 우유에 환장한 줄 알어? 엉!”
“아니 뭐 저희가 전하가 우유를 대놓고 먹던, 배달해서 먹던 그런 걸 탓 하자는 게 아니라요. 너무 비생산적이란 거죠. 우유 몇 잔 받겠다고 200명이나 때려 박는다는 거, 이거 전형적인 탁상행정에, 공무원식의 자리 늘리기 아닙니까?
이제 공무원도 구조조정 하고, 체질개선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이 참에 유우소 폐지하고, 전하한테 우유 배달하는 건 예빈시(禮賓寺 : 고려, 조선시절 외국 사절이나, 종실, 재신의 음식을 관장하는 관청)에 맡기면 우유는 안끊길 겁니다.”
결국 세종은 신하들의 이런 주청에 못 이겨 전속 우유 배달부를 자르게 된다.
자, 유우소를 혁파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우유에 대한 논란이 종지부를 찍게 된 듯 보였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끝나지가 않았다.
왜? 바로 조선이 유교국가란 것이 문제를 확대 재생산 했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누군가? 도학(道學)정치를 꿈꾸는 대 조선의 선비들이 아닌가? 이런 우리가 어찌 우유를 먹는 행위를 용납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말이 옳으이 소가 우유를 짜봤자 얼마나 짜겠는가? 겨우 송아지 한 마리를 먹일까 말까한 젖을 짜는 게 소인데, 그 송아지를 먹일 젖을 빼앗아 사람이 먹다니, 이는 인(仁)을 말하는 군자가 할 행동이 아닐쎄!”
“맞네, 어찌 불쌍한 송아지들의 먹이를 빼앗아 사람이 먹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보양식으로 쓴다 하지만, 이는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라네!”
당시 조선의 오피니언 리더라 할 수 있는 유학자들의 생각이 이러했던 것이다.
이 당시 조선에는 젖소가 없었다.
젖을 전문적으로 짜내는 젖소가 아닌 소 (한우) 가 하루에 우유를 짜봤자 얼마나 짜낼까?
그 얼마 안 되는 젖을 송아지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먹으려고 빼앗는 것은 유교의 도리를 거부하는 행동이라며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런 배경 덕분에 조선시대 내내 우유는 극히 제한적인 ‘보양식’으로만 허용되었고, 쉽게 접하는 음식으로 일반에게 퍼지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왕에게 진상되는 우유는 불문에 그쳤다.
나라의 주인인 임금의 건강을 위해선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우유는 조선시대 내내 임금과 극히 일부의 특권층을 위해서만 존재했던 식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