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바람결에 얼굴을 디밀어 본다. 달콤하게 느껴지는 손길이 범벅이 된 땀을 씻겨준다. 물결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겨본다. 한갓 나무가지에서 떨어진 낙옆처럼 파도에 출렁인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살고 있다. 하늘과 구름과 별빛과 태양이 완벽을 추구하는 도심속에 아무조건 없이 넘실대고 있다. 빌딩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네온싸인에 굴하지 않고 한밤중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 도심의 온도를 결정하는 태양. 푸른물감으로 색칠한 바다같은 하늘. 우리는 자연속에서 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를뿐,,, 추 수 한톨 한톨 여문 벼이삭. 푸른 잎새 사이 옹기종기 모여 있네. 서로 부둥켜 안고 군락 이루며 가을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고 있네. 한톨 한톨 포근한 이불 덮은 채 갓난아기처럼 잠자고, 풀잎사이 부끄러워 고개 숙인 채 숨어있네. 손가락 같던 모종이 봄,여름지나 가을녁 들판을 누런 황금색으로 변하니 황금들판이로세. 개구리 노닐던 논두렁은 개구리 사라지니 고요하기만 하고, 푸른 창공 나는 참새들 재갈재갈 거리며 군침 흘리며 맴돈다. 논두렁 한복판 긴팔벌린 허수아비 주인 행세하고, 벼이삭들 부들부들 떨며 허수아비 쳐다본다. 가을 들녘 평온한 바람 불어오거니 힘다한 벼이삭 들판에 드러눕고 마네. 20여년 어울린 인생. 호남평야. 황금빛으로 화려히 물들일 때, 어는이 석양지는 들판에서 낫들고 애지중지 키운 벼이삭 ‘ 풍년가 ’ 부르며 추수하고 있었네. “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으로 풍년이 왔네. 지화자 좋다, 얼씨구나 좋다. ...... “ ( 안해 친우 따님 결혼식에 즈음하여,,, ) |
덤으로 사는 인생 덤으로 사는 인생. 빗방울 소리에 사그라치게 놀라는 수해 이재민. 노아의 방주처럼 천지개벽 물난리에 사라진 영혼들이여,, 그들은 빗방울 소리에 선잠 깨고 만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선천적 질병이나 고질병으로 종합병원 중환자실에서 암울한 눈동자 드리운 채 창문 밖 쳐다보다 사라진 영혼들이여,, 그들은 망가진 육체 내던지고 훨 훨 어디론가 사라졌겠지. 그들에 비헤 우리는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세월호 웬말이뇨, 삼풍백화점 붕괴되고, 와우아파트 붕괴하고, 성수대교 붕괴되고, 대한항공 비행기 폭파사고 웬말이요. 대통령 시해사건, 영부인 저격사건. 울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명분으로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국가라는 이상주의 몇몇 괴물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민주열사들이여,, 거대한 네스호 공룡과 맨손들고 싸우다 사라진 애국충절들이여,, 그들에 비해 우리는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애완견의 죽음이 애닯고, 닭모가지 떨어질 때 못쓸 짓 한 사형수이려니 하고, 소머리 국밥 먹으며 아프리카 미개인 생각한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봄에 핀 삼라만상의 꽃과 열매와 과실과 곡식이 잎사귀 하나 없이 사라질 때 우리는 덤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덤으로 사는 인생. 부모의 사랑에 모성애 느끼고, 그것을 깨우칠 때 , 부모님이 없으려니 우리는 부모 몫까지 살아야 하는 덤으로 사는 인생인 것이다. |
남 쪽 나 라 무등산 줄기 아래 교정 캠퍼스. 어깨 가방이고 오가며 칩거생활 6년이요. 젊은 시절 보냈거니 어이 그 추억 잊으리오. 바이올린 들고 악보 뒤지던 음율 어디로 사라지고, 캠퍼스에 뒤섞인 발자국 가을 낙옆에 뭍힌다. 다정한 동기생 이산가족 화보에 나오고, 곡성의 기차여행, 섬진강의 꽃게탕, 화개장터의 재첩국, 담양의 떡갈비 어느때 또 먹어볼꼬,, 청춘을 소진한 남쪽고향. 해남 끝자락 따스한 해풍 불어오는 곳. 바다이려니 하면 드넓은 벌판에 한적하기만 한 그곳. 정약용이 유배간 강진에서 어는이 3년 유배생활 하였네. 정약용이 18년동안 집필한 다산초당. 만덕산 진달래꽃 늘어진 능선따라 바다로 향하고 남해바다 물결이 달빛에 출렁일 때 한가로이 낚시대 드리워 본다. 삼합으로 유명한 강진에서 어는이 소주 한잔 들이키며 3년을 보냈네. 그리고 몇 년 후 아부지가 남쪽나라에 어는이 뒤이여 둥지를 틀었네. ( 여기서 “ 어는이” 는 “ 내자식”을 말함.) |
0 시 오전4시. 군사 통제 시절 통행금지 해제시간 이구려. 습관인지 잠자리에서 눈을 뜬다. 서늘한 바람이 창문가 비비고 들어오고 한밤중 “ 메밀묵,찹살떡 ”골목길 메아리 치던 소리 꿈속인가 하려니 청소차량 엔진소리 요란하다. 나는 요사이 새벽4시에 깨는 습관이 생겼다. 잠에서 깨어 형광등 키고 눈을 감은 채 고뇌에 빠져본다. 그리고 묵상한다. 절간에서는 새벽 불공을 위해 오전3시에 기상하니 스님들에 비할 시 늦잠이려니 하고 깊은 명상에 잠겨본다. 나이들면 잠이 없어진다는 어르신들의 선행이 현실이 된 지금. 가련한 목련꽃의 가는 줄기 같은 인생. 새벽녘 초가산가 굴뚝연기처럼 안개 자욱한 인생. 폭포속에 어울린 무지개색채 태양의 본색을 알려니 썬글라스 내던진 인생. 오전6시. 모든 매개체가 진정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뉴스 방송 시작되고 구석구석 자동차 시동소리 요란하다. 오전 7시. 대로상은 늘어나는 자동차로 교통체증 시작되고 지하철 승객들로 넘쳐난다. 묵묵히 생각해 본다. 시간은 누구와의 약속을 위해 필요한 것. 시간,시계의 아라비아 숫자는 무의미 하건만, 우리들이 가질 수 있는 시간. 그것은 0시에 가까운 세상에 누구한테 억매이지 않는 공간이거니. 울들은 생각해 본다.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는 세상. 0시에 초바늘 고정하고 묵묵히 고장난 시계처럼 새벽녘 아니 한밤중 예불 위해 기상하는 스님처럼 살고 싶은 것은 왜이뇨,,, |
억 새 풀 호남평야 들판의 논두렁을 거닐어 본다. 논두렁 사잇길에 들깨수확 하는 노인부부. 경운기 한가득 들깨 싣고 있네. 드넓은 지평선까지 펼쳐진 황금물결 끝없이 이어진 가을 단풍 못지 않는 벼이삭의 황금색. 금광의 노다지 인양 푸른 햇살 아래 반짝인다. 찰랑찰랑 불어오는 가을 바람. 벼수확 날자 정하려니 농부어르신 밀짚모자 눌러쓰고 벼이삭 만져본다. 이세상 풍요로움을 느끼고, 일년의 가르침을 깨우친다. 자연의 섬리에 겸손하고, 생명연장의 근원지를 만나려니 , 설악산 단풍보다 더한 누런들판의 광경은 가을 단풍의 절정이였다. 그때 논두렁 사이 어울린 갈대가 더없이 출렁인다. 옥수수 수염보다 더한 율동으로 버들나무 잎사귀보다 더한 출렁임으로 논두렁을 수놓는다. 억새풀. 무엇이 아쉬워 한적한 야산이 아닌 논두렁 한가운데 억새풀 피었을꼬,, 단풍으로 수놓은 황금들판. 심산유곡 단풍보다 더 아름다워 청산유수 거닐다 호남평야 황금 물결 구경왔는지 모른다. |
귀 향 가을 들판에 웃음꽃 핀다. 하하하. 호호호. 돼지머리 없고, 한자에 붓글씨 휘갈린 상랑식 문구 없거니, 집한칸 들어섬에 웃음꽃 핀다. 자그마한 언덕. 드섬드섬 한적한 동네 한켠에 우두커니 집형체 갖추니 이웃이 반겨주네. 메리아스 사장님도, 자전거 논두렁 타며 암투병하는 황토주택 아저씨도, 농약집 김사장도, 재래시장 한켠 토종닭 주인도, 우체국 명퇴한 빌라 아저씨도,, 모두모두 기원해 주네. 살아생전 고향없는 서울 촌트기한테 부담없이 어울린 사람들. 시골인심 후하거니, 훈훈한 인사말과 고개인사에 이웃사촌 인생의 정다움을 느껴본다. 서로 웃고 사는 인생. “ 겁나게 고생했당께.. 시방 간다께... 암시타네야.. “ 산맥도 없는 평야이거니 사투리가 발달된 방언. 어느새 친근감 있게 느껴진다. 물질만능에 찌든 서울에서 느끼지 못한 정다움에, 매일 이웃간에 고개숙여 인사하는 정다감. 왜 우리는 타락하고 퇴색된 도시를 못 떠날까? 이웃집 주차자리 잡으려고 아우성치고, 이웃소음에 경찰서 전화걸고, 옆집 싸움에 모름쇠하는 서부개척시대 노다지 금광찾는 전국팔도 낙향자들 어울린 도시. 서로 경쟁하고,시기하며 살아간 시궁창 같은 도시. 우린 길거리 배회하며 쾌쾌한 에어콘 뿜는 냄새 맡으며 내 방에 꼭 숨어 여름난다. 팔도 낙향인들이 모인 도시. 그들은 추석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갈 마음은 없을꼬,,, 나는 남쪽나라에 귀향하고 싶다. 물론 나의 태생은 서울이거니, 이방인에 밀려 가건, 나는 서울이 무서워졌다. 수많은 인간들. 눈뜨면 돈찾아 방황하며 삶의 현실 터득하는 공간이려니,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세. 더 늙기전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시냇가에 발담그며 사세. 나는 오늘 생각해 본다. 인생사에 최근 몇 개월동안 인사말 오감에 나도 모르게 고향에 온 것 같네. “ 해남 갈라믄 으디로 간다요,, 와따 우째 그런다요,, ‘ 여기는 내 고향이여. 나는 전라도가 좋당께.. ( 지역 감정 만들지 마세나,,진짜 정깊은 고향이여,, 익산에서 ) |
기러기 아빠 기러기 아빠. 5자 원룸에 갇혀 청국장 끓여드니 조그마한 방한켠 구수한 메주 냄새 로 진동한다.직접 담근 오이소배기 씹어먹으며 자취생활 몇 개월이오. 늘어나는 것은 음시솜씨요, 줄어드는 것은 체중이다. 구수한 안해의 된장 씨레기국이 한없이 먹고 싶고, 신김치에 된장찌개 끓인 냄새 코앞에 아른거리네. 기러기아빠. 어느새 나는 기러기 아빠가 되어 있었다. 짝 잃은 기러기인양 카톡으로 연락주고 받으며 새롭게 피어나는 그리움을 마음속으로 삭혀야 했다. 삶의 현실속에 가족과 결별하고 지역의 개발 한모퉁이에 나홀로 개척하여야 했고, 타지인들과의 새로운 만남은 다정스런 인연이 되었네. 산모퉁이 암자의 스님처럼 한적한 주택공간에서 소설 집필하는 문학가처럼 나는 빈공간인 파란하늘속 상상의 그림을 그리며 차곡차곡 조각가처럼 한 형체를 완성한다. 몇 달만에 완성된 형체는 공개입찰하여 일반인에게 매각되니, 나는 조각가이자,화가인 것이다. 빈 허공에 어느 현실화 물체를 만들어 판매하는 일은 결코 슆지 않은 작업. 그러나 우리 가족은 나를 믿고 의지한다. 나는 오늘도 직접 요리한 덥덥한 음식을 해 먹으며 허공속에 상상속의 스케치를 하며 밭두렁 위에 조각을 하고 있다. 가족의 완성. 그것은 내가 꿈꾼 푸른초원의 그림같은 집. 어는이 살아 생전 집 한켠 지는 것이 꿈이려니 하건만, 나는 그런 집을 짓고 있으니 행복한 사람이구려,, 나는 생각해 본다. 추후 일반인에 매각하는 형상물이 아닌 멀리있는 안해와 같이 살 형상물(집)을 지을때는 언제일까,,,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도 허공에 상상의 스케치를 하며 허공에 노미를 들고 팔을 힘차게 들어본다. ( 익산 황등면에서) |
생존 논리 살아있음을 슬퍼하라. 기나긴 신작로 거닐다 보면 말없이 살다간 수많은 흔적들. 만생의 눈물자국 땅바닥에 흔건하구려,, 살아있음을 괴로워 하라. 한적한 심마니길 지팡이 들고 오르니 물길따라 어울린 고목과 잡초들의 뒤엉킨 뿌리가 온 산을 뒤엎고 있구려,, 살아있음을 음미하라. 눈,비 내리는 하늘아래 방한켠에 몸뚱아리 의지한 채 춘하추동 때깔고 번지르한 헝겊 걸치다 하야디 하얀 수의 갈아 입고 먼길 떠나니 벌거숭이 만물들에게 겸연쩍을 뿐이구려,,, 살아있음을 찬미하라. 구름이란 큰 창살 아래 수많은 만생이 어울리는 동물원과 식물원에 살고 있는 우리들. 과천의 서울대공원 찾음에 울타리에 같힌 동물들을 측은헤 하네... 살아있음을 회상하라. 기억이란 메모리칩에 의지하는 반도체처럼, 인간사 어제, 그제 기억함에 사진 한 장으로 회상하려 하네. 살아있음을 부끄러워 하라. 내 육체 보존코저 말없는 삼라만상 처참히 침탈하여 내몸뚱아리 살 찌우니, 우린 지나가는 들쥐보다 천박한 짐승이구려,,, 살아 있음을 미안해 하라. 죽음에서 시작된 우리 인생. 죽음으로 다시 돌아갈 때 외롭지 않을시 니. 그 곳에는 삶속의 지인보다 더많은 지인들이 있을시니 어찌 삶의 지루함에 견주리오. 살아있음을 기뻐하라. 코스모스 눈빛속에 함박웃음 찾아내고, 백일홍 입가에 미소 찾아내고, 채송화 귓가에 총롱한 음율 찾아낼 시,,, 삼라만상 만남에 기나긴 인생길 외롭지 않을 것이네.. |
작 은 씨 앗 밀려드는 세월. 옛고향 징검다리에 서서 고요히 흐르는 개울인양 쳐다본다. 아련한 수레바퀴 자국 없을꼬, 동네 한켠에서 경운기 바퀴자국 아스팔트에서 찾아본다. 찰랑이는 산들바람 버들가지 뒤흔들고, 코스모스 물결 살아있음 표현한다. 두툼한 해바라기 햇볕따라 고개 돌리고, 소나무 밑자락 송이버섯 그늘속에 숨어있네. 세월의 무상함에 한숨쉴 때 가을녁 넘어지는 석양같은 나무들의 분홍색 치장함에 은행나무 잎사귀 주어 책갈피에 꽂아본다. 단풍나무 분홍색 염색함에 봄에 철쭉,진달래꽃 회상해 본다. 삼라만상이 겨울준비 위해 털갈이를 할려는지. 형형색색의 색채바래메, 온 세상을 석양노을처럼 수놓기 시작한다. 그 화려한 축제가 끝나면 어두운 밤이 찾아오듯, 추운겨울이 찾아오겠지. 나는 오늘 삼라만상이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열고 있는 야산에서 작은 열매를 줏었네. 그 작은 열매는 너무 작아서 내 호주머니에 꼭 들어 갔다네. 그리고 저녁나절 집에 있는 화분에 곱게 심었네. 나랑 같이 추운겨울을 나아야 하기.. 그리고 내년 봄 화려한 봄꽃들이 만발할 때 그 작은 씨앗을 들판에서 자랄때를 기약하며 내 호주머니에 담았네.. ( 그 씨앗은 잉태한 며느리의“ 내 손자 ” 임 ) |
낮 술 살아있음을 알시니.. 내일이 봄이로세. 그윽한 개울가 얼음덩어리 나뒹구니 어는이 술 한잔 권하구려,, 가물며 들리는 스산한 나뭇가지 바람소리에 귀먹은 채 친우 술 한잔 걸치니 내일의 봄이 성큼 다가오는 것 같구려,, 낮술에 드린 겨울나기 어눅한 밤 드리리우니 오늘 일장춘몽이 어제일 같구려 ( 안양유원지에서 낮술 걸치고,,) |
그 리 움 그리워 소리쳐 불러본다. 빡빡머리 깎아 가마수 세어본다. 검은 정장 아닌 교복 걸치고 호크에 모가지 죄어본다. 그때가 그리워 다해진 머리카락 헤아리며 빵짚모자 덮어본다. 그리워 소리쳐 본다. 산이 좋아 크레파스 들고 산넘어 구름 그리던 시절. 푸른 언덕이 좋아 색연필로 엄마 얼굴 그리던 시절. 세상이 요동치고 삶의 스나미가 지나간 오늘. 묵묵히 샤프심 곧게 들고 한편의 수선화 꽃을 그려본다. 그리워 소리쳐 본다. 흑백사진 뒤적이며 빛바랜 사진속에 과거를 회상한다. 시골집 벽에 걸칠 법한 액자속 사진들이 나를 쳐다본다. “ 지금 너가 바로 나여,” 아 ! 세상에 변한 것이 있거니. 나의 얼굴이 아닌 세상풍파에 헤집어 진 내 모습이 흑백사진보다 더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왜이뇨,,, 삶에 지친 소달구지 소처럼 우린 묵묵히 달구지를 끌고 여기까지 온지 모른다. 하나, 둘, 소달구지가 가벼워지니 워낭소리 가냘프게 울리고 우리는 소리쳐 본다. “ 그때가 다시 돌아 온다면 더 잘할 수 있을텐데..” 늙은 소는 송아지를 생이별하며 목청껏 울어본다. “ 음 – 메 ” |
모래와 먼지 푸주간 괘기 저울질에 던져본다. 다섯근 약간 넘으니 월척 잉어 일세.. 올림픽대로의 차량행렬 쳐다보고 한강수 쳐다보니 강물보다 못한 인생들,, 연어처럼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베이터 상하이동에 능숙한 우리들이거니, 어찌 편한길 가는 강 거닐려 하느뇨,, 등산길 마다한코 백운대 올라 비명한 번 불러보니 어찌 북한산 높다하리오.. 가물어진 석양 따라 배 띄어보니 보이는건 물결속의 고은 살결이구려,, 가는 물결 부등키고, 오는 강물 손잡으니 세상만사 구름속인양 황홀하다. 먼지속의 나를 잉태하고 모래알속의 나를 찾아낼 시 우리는 본시 지나가는 먼지를 메만지며 부등켜 안고 울지 모른다. 우린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내 모래를 찾아 울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광화문사거리에 즐비한 흔한 인간들이거니,, 왜 우리는 먼지속 나를 찾지 못하고, 왜 우리는 모래속의 나를 찾지 못하고, 바람에 휘들리고 바닷물에 떠밀려 살을까,, 삶도,사랑도,피도,슬픔도,추억도,, 한갓 지나가는 먼지이건만 아니 스쳐가는 흙한톨 밖에 안되는 모래알 이건만,, 우린 그 속에서 살다, 방황하다 하나,둘 바람과 파도에 휩쓸려 사라질지 모른다. |
겨 울 찬 미 호박덩이 나뒹굴고 눈가 그림 덧붙이니 호박 얼굴 이로세. 동화속 네로황제 현실에 보일지니 굶주린 영혼 거스리고, 무지한 백성 다스리고 순박한 동화속 주인공 되니 올봄의 상춘객 되어본다. 온화함(봄)과 따스함(여름)과 황홀함(가을)을 음미한 울들에게 갑작스레 냉정함(겨울)을 보일지니, 사계절의 가르침이 지엄하게 느껴진다. 인생살이 덧없음에 수십고개 넘었거니 지친몸 견주며 산중턱 쳐다볼시 웃어른 바둑 한수가 묘수로세. 세상 지름길 없거니 홀로 산비탈 헤집어 보았고 나무둥지속 새끼새 지저귐 겨울바람에 뭍히건만, 계곡물 얼어 멈춘 곳에서 발길 멈추고 만다. 허울좋은 겨울이여! 찬바람 불어오고 크리스마스츄리에 눈멀고, 나뭇가지 상고대 보고 햇살에 눈감고 마네. 살아있음을 알지니 어는이 도심 한복판에서 가을낙옆 주운다. 겨울이 추울지니 새해가 다가오고 있다. 한해의 끝자락은 왜 이리 험난할꼬,, 한해의 끝자락은 왜 이리 추울꼬,, 새해의 일광과 더불어 탄생될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자연의 인고를 터득하게 할려는 자연의 울부짖음인지도 모른다. 하물며 인고 하는 생명체 만이 새해의 일광을 볼 수 있고, 새해의 봄을 맞이할 수 있으려니 세상의 가르침은 모두에게 공평 할지 모른다. 삶을 지탱해온 수많은 세월. 그중에는 추운겨울도 있었고, 더운 여름도 있었다. 새해 다감에 한겨울의 순박한 하얀 눈덩이 쳐다보며 우리들은 하늘의 마음을 읽고 있는지 모른다. 어느덧 겨울자락 중턱에 만나는 새해. 그 겨울이 추울지라도 우리들의 끝자락은 아지랑이 피는 들판에서 호미들고 쑥캐는 아낙네를 그리고 있는지 모른다. |
혀(舌) 오감.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의미한다. 육감은 오감이외의 상상으로 느끼는 3차원의 감각을 의미한다. 인간 몸둥이는 오감 이외 온몸에 전위된 신경세포에 의해 통증과 추위와 더위를 느끼며 땀과 눈물을 발산시키기도 한다. 또 몸둥아리는 호르몬에 의해 이성을 찾아내고 추억이란 뇌세포의 도움으로 암기와 기억을 상기한다. 우리 몸둥아리는 머리카락과 손톱,발톱을 화분의 씨앗처럼 키우고 있으며, 우리 몸둥아리는 심장이란 장기로 감동을 느끼고 슬픔을 느낄 수 있다. 또 우리 몸둥아리는 텔레파시즘에 의거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여 서로 모여살길 바라며, 우리 몸둥아리는 샤머니즘에 의거 영혼을 중시여긴다. 하물며 몸둥아리를 지탱키 위해 하루 삼시세끼 먹으며, 물과 알코올과 온갖 생물을 먹어치우며 하루를 연명해 가고 있다. 나는 생각해 본다. 우리 몸둥아리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디라면 나는 단연코 이야기 한다. “ 혀(舌)” 라고,, 우리가 먹는 일차적인 음식을 감미하고 음미하여 음식의 모든 것을 파악한다. 그리고 침샘을 작동시켜 음식소화를 증진시킨다. 그리고 혀는 32개의 이빨로 골고루 분산시켜 음식분해를 촉진시키는 로울러 아니 포크레인 삽처럼 음식을 분산시킨다. 혀(舌)는 우리 몸의 영양소 섭취 최전선에 있으며 그것은 생명연장에 있는 필수 장기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중 혀의 존귀함을 아는 하찮은 피라미도, 긴코를 가진 코끼리 도, 개울가의 개구리도, 창공을 나는 독수리도, 지중해의 고래도 , 모두 모두 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의 혀는 음식을 섭취하는 용도로 쓰이긴 하나, 다름 만상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 말 ” 아니 “ 언어(言語)” 구사이다. 우리 몸을 생존캐 하는 혀가 어느순간 나를 죽이는 병기로 변한 것이다. 그 병기 “혀(舌)”는 음식처리 과정이외 또 다른 임무 “ 언어(言語)” 구사함에 결정적인 실수를 하여 우리 몸둥아리에 결정적인 손실을 발생시키곤 한다. 가히 두려운 “혀(舌)“ 새해에는 혀(舌)의 소중함과 준엄함을 깨우쳐야 하건만,, 새해에는 혀(舌)를 목구멍 깊숙이 숨겨 두어야 겠다. |
폼페이 사상누각에 방황하는 현대인들, 고궁의 왕좌게임 즐기며 양반상놈 재현하는 귀족들의 향연. 사상가,철학자 사멸되고 돈과 권력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호텔의 레스토랑 와인잔이 세상을 지배한다. 문학가는 책동냥에 눈치글 쓰고, 교수 및 학자들은 판돈에 논문 집어던진다. 종교인 신앙이란 두건쓰고 달콤한 단어로 사찰암자 확장에 여념없고,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영화 재방하며 교회헌금으로 만든 아방궁에서 찬송가를 불러댄다. 언론인은 시청율에 얷매어 자극적인 매체 양산하고, 잡지책은 소멸된지 오래다. 서원의 후손인 캠퍼스는 대기업 후배 양성소가 되었고, 느티나무 학당은 약육강식의 축소판이 되었다. 글 씀에 좌판 두드리고 붓으로 늘어진 사군화는 스마트폰에 참탈되고, 길거리에는 온갖 물건들이 가격표 앞에 걸고 온도시를 덮고 있다. 모든 것이 정리된 세상은 가격으로 정해진다.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도, 길거리에 즐비한 자동차도, 인도를 거니는 인간들도 모두 돈이란 가격표로 정해진다. 스포츠 선수의 년봉. 영화배우의 광고료. 여의도 증권가의 수만은 기업체도 모두 가격표에 의해 정해진다. 옆전 몇냥 구걸하는 사당패가 된 우리들,, 신발,의류,안경,자동차,주택, 모두 모두 가격표에 의해 정리된다. 인간들 겉치레가 인간판도의 척도가 된 지금. 우리들은 책 한권 걸친 거넝뱅이 찾지못해 청계천 헌 책방을 잊어버렸다. 우리들은 포석정에 둘러앉아 시읆조린 시인들 찾지못해 한자풀이 포기한다. 우리들은 춘향전의 사랑 잊은지 오래거니 싸구려 일일연속극 보며 첫사랑 타령에 실패한다. 우리들은 문학가를 찾지못해 사상인고에 빠지고, 철학자를 찾지 못해 인생의 별 은하수에 버리고, 문필가를 찾지 못해 컴퓨터 좌판기만 두드린다. 돈! 그 가치는 자본주의라는 달콤한 현실에 모든 것이 사장되고 파괴되였거니 어는이 자신의 호주머니 돈 헤아리며 긴 세월 방황하리오. 감세. 새해에는 짐승처럼 삼시세끼 먹고, 비오면 비피할 보금자리 있고, 추우면 나를 감쌀 옷한벌 있으면 그것이 행복의 시작인지 모른다. 감세 새해에는 남의 떡 크게 아니 보이고, 내 떡이 더 커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것이 행복의 시작이 아닐는지.. 새해에는 호주머니 털털 털어 가볍게 살게하여 주십시오.. |
매일생한불매향 (梅 一生寒 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梅 一生寒 不賣香). 매화나무는 일생동안 추운 밖에서 자라고 겨울을 나고 이른봄에 꽃을 피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결코 향을 팔지 않는다는 뜻이다. 추운 겨울 견디면서도 가장 먼저 봄을 준비한다. 한겨울 눈을 헤집고 붉은꽃 한파에 가냘픈 잎이 동빙 될지언정 눈꽃속에 홀로 향기를 뿜어댄다. 그 향기는 너무나 가련해 힘없이 눈밭위를 너닐다 사라진다. 한겨울. 진정한 홀로서기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거니 매화꽃은 누구를 찾는지 추운바람에 향기를 띄어본다. 어눅한 겨울밤. 달빛아래 그 고귀함 가눌 수 없어 옛조상들은 장원급제 할시 매화꽂은 모자를 쓰곤 하였다. 봄에 흩어진 꽃들은 엄두도 못낼 사군자에 군림하니 그 향기 더할길 없구려,, 새해에는 한송이 매화꽃이 되고 싶다. 홀로 외로운 곳에서 그윽한 향기 뿌리고 싶다. 새해에는 한송이 매화꽃이 되고 싶다. 장원급제 모자에 앉아 만백성을 거느릴 매화꽃이 되고 싶다. 새해에는 한송이 매화꽃이 되고 싶다. 추디고 추운 곳에서 내 향기 남몰래 뿌리고 싶다. |
새드 엔딩 “ 취화선”에서 도자기의 완성을 위해 불구덩이 가마로 들어가던 “ 최민식”의 영화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 편지 ‘ 의 마지막 장면 . 암으로 죽은 ” 박신양“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며 한없이 울던 ” 최진실“ 이 떠오른다. “별들의 고향” 한겨울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길거리에서 싸늘한 시체가 된 “ 경아 ‘ 가 떠오른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마지막 장명인 ‘ 초원사진관”의 “ 심은하” 사진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이별”입니다. 죽음이란 이별앞에 모든 것이 정지되고 맙니다. 사랑도,미움도,슬픔도,기쁨도 나눌 수없기 더한 고독에 휩싸입니다.외출시 귀가할 발자국 소리도, 따스한 손마디의 체온도, 다감한 목소리도, 순박한 웃음소리도, 식탁위의 수저도, 옷장속의 옷들도, 신발자의 신발도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한사람의 빈자리가 사라진 공간에는 메꿀 수 없는 공허와 잔재의 혼돈속에 방황합니다. “ 이별”은 우리가 선택한 마지막 단어입니다. “ 죽음”은 우리가 겪어야 할 마지막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별” 단어 쓰기를 거부합니다. 특히 “ 죽음”이란 단어는 능동적이건 , 수동적이건 결코 쓸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쓸 경우가 생기시는 한없이 방황하며 울부짖습니다. 시네마 “ 새드엔딩”의 공통점은 죽은이의 고통과 애환을 기리기 보다는 산자들이 느낄 그리움과 아픔을 더 강조하는지 모릅니다. 삶의 윤회속에 고인의 시계가 멈출시 우린 경험해 보지 못한 또다른 세상을 살지 모릅니다. 죽은이의 그리움과 삶의 고독속에 발버둥 칠주 모릅니다. 고인의 체온이 그립고, 고인의 목소리가 그립고, 고인의 웃음이 그리워 술한잔 걸친 채 꿈속에서 고인을 만나려 할 겁니다. 사랑도 사라지고, 미움도 사라진 그 때. 우린 남몰래 울어봅니다. 나는 어제 그 눈물을 보았습니다. “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조병만”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하얀 눈꽃속에서 한복 입은채 어엉 우시는 “ 강계열” 할머니 목쉰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아른거립니다. 그리움에 한없이 우시는 할머니는 우리가 몇십년후 경험해야 할 장면은 아닐는지,, 희미해진 눈가를 메만지며 안해손을 잡고 영화관을 나오며 나는 생각해 본다. “ 새해에는 안해 손 꼭잡고 다녀야지.. 새해에는 안해 얼굴 한없이 보다듬어 주어야지.. 영원한 사랑 . 그것의 종말은 ‘죽음’ 이란 것을 안해에게 알려주어야지,,“ 하며 다짐하였다. |
korea 우리들은 영문국호를 “ korea” 라 하며 “ 고려”를 영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 탄생된 국가이기도 하며 ,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로 탄생된 나라가 무역통로 개방으로 “ 꼬리아”로 개명되 전세계에 알려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 korea” 한국에서 탄생된 수많은 국가명이 있거늘. 왜 우리는 지금도 “ 고려”를 절대국으로 칭하는 “korea”를 영문표기로 쓰고 있을까? 서울 성북구 안암동 “ 고려대학교” 명칭도. 중앙박물관의 “ 고려청자”도,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모두 480여년의 “ 고려”에 그 바탕을 두건만, 벽란도 무역으로 아라비아인의 무역 활성화로 비춰진 고려는 징기스칸한테 멸망 하기전까지 완성되지 못한 한반도를 영토로 삼았다. 함경남북도를 점령하지 못한 미완성 국가이었다. “ 두만강”을 점령치 못한 고려는 여진족에 갇혀 천리장성을 쌓으며 버티었고, 고려는 중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었으며, 왕족이 근근이 연명해 가는 소국으로 비춰주었다. “ 고려인삼”이 으뜸이요. “ 고려청자”가 으뜸이로세. 나는 생각해 본다. 국호를 칭함에 많은 논리와 근거를 바탕으로 그역사 유래를 판가름 함에 어찌 그 유래 찾을길 없으리오. 사실 “ 코리아”는 선진국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 개발국”도 아닙니다. “코리아”는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함경도의 여진족을 막기위해 “ 천리장성”을 쌓듯 ‘38선“ 에 ’DMZ”을 만들었고, “중국”이 아닌 “ 미합중국”의 속국으로 살고 있습니다. “ 고려인삼( 스마트폰 ) ” 으뜸이오. “ 고려청자( 자동차 )” 으뜸이로세. “KOREA” 국호 칭함에 그 옛날 “고려”가 생각나는 것은 웬말이뇨.. 새해에는 “고려의 ” 선죽교“의 비명을 상기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구로동의 “ 조선족”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 무슨말이여,, “고려” 멸망시킨 “조선”) 새해에는 “고려”의 “삼별초”를 기려야 합니다. ( 민국역사이래 가장 가슴시린 독립투사임) 새해에는 기억해야 합니다. “made in korea” 외국에서 판매되는 제품만이 아니다. 국내에서 우리들이 쓰는 단어도, 우리들이 가꾼 영토도, 우리들이 만든 가정도, 우리들이 부른 노래도, 모두 모두 made in korea 다. 다문화가 보편화 되고, 조선족이 고려인을 도륙할지언정 우리 고려인은 영원할 것이다. |
서 광 사라진 빛이 나타납니다. 부활의 근원적 표망이 재현됩니다. 꿈속에 방황한 하루밤 꿈의 실현처럼 새천년 한발자국 내밉니다. 차가운 운해속을 넘어 어눅한 우주공간을 헤어져 다가온 빛줄기는 누구의 손길에 메만져지며 삶을 연장합니다. 수만년의 서광이 오늘도 다시 시작합니다. 한갓 빛의 그림자에 숨어 지낸시절 부끄러워서 빛에 그슬린 팔뚝 걷어 올려봅니다. 잘 익은 곡식 창고속에 간직한 입술가는 먹다말은 빵가루 너절 합니다. 가냘픈 빛줄기 온세상을 헤집고 다니고, 우리는 그져 빛줄기에 빨래 널어봅니다. 빛의 잔존이 운해속에 넘실대고, 산중턱 계곡물에 반사되니, 그윽한 빛그림자 계곡을 덮어버립니다. 배신감에 지친 만생을 포옹하며 암자의 고요함에 넌지시 정착하고 맙니다. 빛의 잔존이 살아 숨쉬고, 빛의 생명력이 외계물체인지도 모르고 온세상을 휘젓고 다니거니, 인간사 셈함에 지쳐 연필 낙서에 의지합니다. 유일한 외계물체인 빛의 타락이 온세상을 방황시키고, 빛의 향연에 사라져 버린 작년의 그림자들,, 수억년 셈함에 새로 셈하는 오늘. 재작년의 그림자를 되새겨 봅니다. 새해에 빛나는 빛줄기. 그 줄기 한가닥 오른손으로 잡고 새해 출발해 보렵니다. 그 빛줄기 화려하여 나의 길을 편안히 인도 할 것이니, 수억만년의 하루 시작함에 한가닥 빛줄기 절대 놓치지 않겠습니다. ( 새해 아침에... ) |
오전 3시 “ 바스락” 소리에 잠에서 깨어본다. 보일러 공전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안해의 코고는 소리가 유별나다. 아라비아 숫자의 벽시계는 모든 것이 공허한 오전 3시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새해 일출 본답시고 아우성치던 이들은 모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호들갑치며 새해에는 금연 선언한 이들도 잠들어 있다. 한겨울 스산한 바람을 막아주는 유리창 넘어 골목길 전경도, 고양이 한 마리 얼씬 안하는 적막의 공간이었다. 인테넷에 오간 수많은 지명인들도 지금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시끌거린 시장바닥 같은 인생길. 정치인,경제인,범죄인, 세상이야기 보따리 꺼집어 내놓고 와글와글 떠들어 댄 우리들이 잠자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정지된 그 시간.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릴법한 그 시간.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그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두운 이불속인양 침침한 공간이 마치 깊은 심해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여의도 증권가의 전화벨소리도, 노량진 시장의 경매인 손놀림도, 마을버스의 시동소리도, 유명세 주인공인 구치소의 “ 조”씨 아줌마도, 장레시장의 불빛도, 고요한 시간. 모든 것이 정지해 버린 그 시간. 우린 그 시간을 “ 수면”으로 소진해 버린다. 요술사의 마법지팡이처럼 모든 것이 마법에 의해 마취된 그 시간. 우린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마법에 걸려 정지된 시간. 만약 우리가 홀로 있길 원할 시는 심산유곡 찾을 것 없이 새벽녘에 촛불하나 키고 명상에 잠겨 보라. 고요한 세상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정지된 세상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마법에 걸려 잠이든 허잡한 인간들이 보일 것이다. 우린 어울려 본다. 새벽녘 약수터에 걸린 바가지보다 못한 허울좋은 인간들이 일어나기 전에 나홀로 할 수 있는 일을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내마음의 고향이 아닐는지.. 내일부터는 “ 새벽3시”에 모닝콜 하기로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