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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4장 46-54절
표적이 아니면 도무지 믿지 않느냐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공개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갈릴리에서 행한 처음 표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오늘 본문 5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면 오늘 본문 역시 문자적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사건을 통해서도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그가 단지 사람이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 앞에서 믿음으로 나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이라 할 수 있는데, 우선 4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장소는 갈릴리 가나입니다.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 계실 때 왕의 신하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는데, 어디서부터 찾아오느냐?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위쪽에 위치해 있고 가나는 거기서부터 남서쪽으로 매튜 헨리 주석에 의하면 대략 15마일 정도, 25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럼 왕의 신하가 왜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는가? 가버나움에 있는 자신의 아들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47절에서는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고 기록합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행하시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유월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말하는데,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아니면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버나움에서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이 아니면 고칠 수 없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찾게 되었고, 그가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는 지체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행하시는 바를 보았든지 아니면 들었든지 그에 대하여 알았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신하의 믿음은 아직까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기 백성을 위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믿는 그런 믿음에 이른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나아가 청한 것이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비교를 하자면 마태복음 8장에는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의 믿음과 관련해서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도록 요청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 그러나 지금 왕의 신하란 사람은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야지만, 아들의 병을 직접 보셔야지만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왕의 신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 행하는 기적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국한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증거 하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 외에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왕의 신하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8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는 왕의 신하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모든 부류에 대하여 책망하시는데, 책망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고린도전서 1장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고전1:22)라고 하면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유대인의 특징처럼 말하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왕의 신하의 경우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왕의 신하로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왕의 신하를 포함해서 유대인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 모습에 대하여 엄하게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실 이런 책망은 좀 낯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책망을 하신 바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적을 원할 때는 친절하게 맞아주셨는데, 왜 여기서는 이런 책망까지 하시는가? 요한복음 1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자기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자신을 영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1:11). 그 사실을 지난주 본문에서는 이렇게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하시고”(요4:44)
실제로 요한복음 3장과 요한복음 4장을 비교해보면 각각 한 사람씩 등장하는데, 한 사람은 유대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입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지도자라면 다른 한 사람은 남편만 여섯 번째를 맞이할 정도로 삶의 굴곡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3장에서의 니고데모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 10절과 11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반면 유대인이 상종하지도 않는 사마리아 여자의 경우 예수님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믿고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런 과정 속에서 유대인들의 믿지 못함, 다시 말해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는, 역으로 표적과 기사만을 찾고자 하는 저들에 대한 책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악한 멸시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이나 저들의 전통과 관련된 내용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잘 아는 것처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고, 그래서 엉뚱하게 가르치고 있는 저들에 대한 질책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소위 은사주의자들에게서 이런 면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능력만 강조하는 신앙! 그래서 여전히 표적과 기사가 아니면 더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신앙!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표적과 기사는 그것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가치는 말씀을 섬기는 것이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계시가 더 이상 없다고 고백합니다. 성경 66권으로 계시가 완성되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고백합니다. 거기에 표적과 기사가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것도 성경을 따라 거절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의 내용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다음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결국 예수님께서 48절과 같은 책망을 하신 것은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나온 아비의 마음을 몰라서도 아니고, 또한 예수님께 나아온 그의 간절함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나마 예수님께 선지자로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나아왔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강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반응은 49절의 증거와 같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책망을 들으면 누구나 기분 좋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살려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여전히 아이가 있는 가버나움으로 함께 가시기를 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나아진 점이라 있는가? 말 자체만 보면 나아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 함께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한다는 책망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표적과 기사만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여기서 죽은 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투의 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기 전에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아이의 아버지는 병이 들었다면 그 병을 낫게는 할 수 있지만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결국 죽은 자에서 다시금 살아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50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리고 그 말씀에 대하여 아이의 아버지는 믿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우선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편협하고 무지한 아이의 아버지를 너그럽게 용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자와 자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서는 이런 자로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편협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용납하시고 너그럽게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 없이는 감히 그분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를 너그럽게 용납하시면서 아이의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아이에게로 가야지만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말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십니다. 이런 점에서 아이의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구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능력에 있어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보셔야지 만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내려가지 않고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어떤 말이나 말의 표현, 혹은 어떤 명령이 없더라도 주께서 뜻하시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말씀에 대하여 믿고 갔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후 내용을 통해 분명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이 살아난 것은 표적과 기사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다고 할 때 이 책망과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의 차별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때 그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이고, 그 믿음의 결과를 표적과 기사로 확인했다는 데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지만 믿을 수 있다고 여긴 것이 아니라, 약속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표적과 기사를 본 것이긴 하지만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을 구분하는 데 있어 무엇을 믿음의 근거로 두느냐 할 때 지금 이 아이의 아버지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처음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온 것인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믿음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책망 이후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를 너그럽게 용납하시면서 아이에게 가지 않아도, 말씀만으로도, 아니 병에 대한 어떤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아도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만약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같이 가도록 요청했겠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고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정리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보면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믿을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요구하는 경우들이 있고, 근거로 가장 좋은 것이 어떤 기적의 역사처럼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결코 기적을 베푼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도록 확고하게 증거 하는 것이 누가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거기 보면 부자의 경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을 먹으면서 호화롭게 즐깁니다. 반면 거지는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되면 부자라고 해서 죽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거지의 삶을 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하냐에 상관없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지만, 그렇지 않다면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거지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다는 것은 비록 이 땅에서는 거지와 같은 삶을 살았으나 그에게는 참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부자의 경우 남부럽지 않을만한 삶을 살았다고는 하지만 이 땅에서 살면서 참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음부에 있던 부자가 얼마나 고통스럽든지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거절이 됩니다.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은 왕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부자가 한 가지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것입니다.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16:27-28) 이때 어떤 말씀이 주어지는가?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9-31)
부자의 요구만큼 더 분명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 죽고 난 뒤 이런 세상이 있는데, 예수를 믿어야지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증거 한다면 그것보다 더 분명한 증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들에게서 듣고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권한다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표적이 있어야 하고, 어떤 이적이 있어야지만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자들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17).
이 말씀의 확실성이 무엇보다 강조가 되느냐? 베드로후서 1장 16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이것은 베드로 자신이 변화산 사건에서 예수님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바를 증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것이 중요한 것은 그가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 경험한 바를 성경이 증명할 정도라는 데 있습니다. 결코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보증할 만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19절과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무엇이 더 확실한 것인가? 경험이 아니라, 그것도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보증하고 있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표적과 기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더 확실한 것으로 있습니다.
때문에 믿음을 다른 무엇으로 더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특히 성경 계시의 완성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면 더더욱 우리는 표적과 기사, 우리의 어떤 경험과 체험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으로만 믿음의 근거를 삼아야 하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신구약 성경 66권외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만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오셔서 51절을 보시면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셨고,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말씀에 대하여 믿고 갔습니다. 여기서는 말씀의 권능과 믿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게 하시는데,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종들의 경우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자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갈릴리 가나 쪽으로 향했고,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가다가 중간에서 만나 이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52절과 53절도 보시면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다는 것은 의심보다는 자초지종에 대한 확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이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충동 때문이었다고 주석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표석의 진상이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능력의 빛을 꺼버리려는 극히 악의적인 소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사단은 갖가지 술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도록 기만하기에 바쁩니다. 그러므로 표적이 우리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찬사를 받기 위해서는 표적이 아주 분명하게 확인됨으로 의심의 여지가 근절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의 아버지로 하여금 자초지종을 알도록 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에게 비일비재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은 우연에다 원인을 둡니다. 시간에 원인을 둡니다. 혹은 어떤 수단에 원인을 둡니다. 요즘 한참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력으로 인해 온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고열이 나고, 기침을 하면 해열제를 먹든가 증상과 관련된 약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어야 합니다. 어떤 증상이 있을 때 그 증상에 맞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증상에 같은 약이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소위 예외라는 것이 어디에는 있는데, 이런 예외가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궁극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놓칩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예외라는 부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 사람에게 이 약이 맞도록, 저 사람에게 저 약이 맞도록 정하시고 마련하신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원인자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우연으로 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마음 가운데 자초지종을 확인하게 하셨던 겁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을 확인함을 통해 그가 단지 선지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을, 단지 사람에 불과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이 믿을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의 주체도 아이의 아버지의 증거를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54절은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첫 표적 그리고 두 번째 표적이라는 표현을 사도 요한이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특히 본문 46절에서도 이 일이 갈릴리 가나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데, 왜 사도 요한은 이 두 사건을 연결시켜서 생각하도록 하는가?
우선 첫 표적인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두 번째 표적은 죽어가는 한 아이의 병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첫 번째 표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생명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거기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과 그 변화가 더 좋은 혹은 비교할 수 없는 변화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이 요한복음 10장 10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럼 두 번째 표적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것은 무엇인가? 표적 자체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굳이 그 의미를 찾는다면 죽어가는 자를 살리고자 하시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표적을 보이시지만 표적 자체가 아니라 그의 모든 사역이 말씀을 중심으로 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한다고 할 때 무엇으로 그 일을 하시는가? 표적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48절의 말씀을 하셨던 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참된 생명은, 다시 말해 니고데모에게 알리신 거듭남은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생명의 자라남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이 아니고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기 위해서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말씀으로만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는 더더욱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특별계시로서의 역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더 이상의 표적과 기사를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하게, 또한 충만하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말씀에만 착념해야 합니다.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 표적과 기사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이 있었지만, 그와 그의 가족이 다 믿었다고 할 때 저들의 믿음은 아버지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말씀이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