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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도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다(나문사) 원문보기 글쓴이: 志于學士최동군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見義不爲 無勇也 (견의불의 무용야) |
The Master said, "For a man to sacrifice to a spirit which does not belong to him is flattery. To see what is right and not to do it is want of courage." 자기집 귀신(其鬼)이 아닌데도(非而) 제사를 지내는 것(祭之)은 (필시 이익을 노리고) 아첨함이다(諂也). 의로움(義)을 보고도(見) 행동하지(爲) 않는다면(不) 그것은 용기(勇)가 없는(無) 것이다(也). |
非(아닐 비) 其(그 기) 鬼(귀신 귀) 而(말이을 이) 祭(제사 제) 之(갈 지//어조사) 諂(아첨할 첨) 也(어조사 야) 見(볼 견) 義(옳을 의) 不(아니 부(불)) 爲(할 위) 無(없을 무) 勇(용기 용) 也(어조사 야) |
爲政-24 논어의 편집구성 오류에 대한 또다른 단서
앞서 우리는 <교언영색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 이라는 구절이 <학이편 제3장>과 <양화편 제17장>에 반복해서 재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논어의 편집 및 구성에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살펴보았는데 <위정편>의 마지막 장인 제24장의 내용과 그 다음장인 <팔일편> 의 첫번째 장인 제1장의 내용도 문맥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어서 논어의 편집구성 오류에 대한 또다른 단서로 활용될 수 있다. 즉 내용상 같은 편(Chapter)으로 묶여야 함에도 무슨 연유에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른 편(Chapter)로 편성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위정편 제24장의 내용을 보면, "공자 가라사대, 자기집 귀신이 아님에도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필시 이익을 노리고 아첨하는 것이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첨하는 것을 뻔히 봐서 알면서도 이를 제지할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팔일편 제1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八佾-1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孔子謂季氏 八佾舞於庭 (공자위계씨 팔일무어정) 是可忍也,孰不可忍也 (견의불의 무용야) |
Confucius said of the head of the Ji family, who had eight rows of pantomimes in his area, "If he can bear to do this, what may he not bear to do?" 공자(孔子)께서 계씨(季氏)에 대해 이르시되(謂), 팔일(八佾)무를 (감히 자신의) 뜰에서(於庭) 추게(舞) 했다. 이것(是)을 가히 인정(可忍)한다면(也), 누가(孰) (다른 그 어느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고(不可忍) 할 수 있겠는가(也)? |
孔(구멍 공) 子(아들 자) 謂(이를 위//논평하다) 季(계절 계) 氏(성씨 씨) 八(여덟 팔) 佾(줄춤 일) 舞(춤출 무) 於(어조사 어) 庭(뜰 정) 是(옳을 시//이것) 可(옮을 가) 忍(참을 인) 也(어조사 야) 孰(누구 숙) 不(아니 부(불)) 可(옳을 가) 忍(참을 인) 也(어조사 야) |
八佾-1 현재 우리나라의 종묘에서도 팔일무를 춘다.
위정편 제24장이 자왈(子曰)로 시작하는 반면, 팔일편 제1장은 공자가 언급하는 대상이 <계씨>라는 사람으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 차이점이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어딘가 모르게 <데자뷰>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글의 내용에 따르면 계씨는 자신이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했다.
그런데 원래 일무(佾舞)란 문묘(文廟) 및 종묘제례 때 여러 줄로 벌여서서 <정사각형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추던 춤인데, 제례의 대상에 따라 춤의 규모가 달라진다. 즉 천자(天子)의 경우에는 8명씩 64명이 추는 팔일무를 추고, 제후의 경우에는 6명씩 36명이 추는 육일무를 추고, 고급관료인 대부(大夫)는 4명씩 16명이 추는 사일무, 그리고 하급관료인 사(士)는 2명씩 4명이 추는 이일무를 추는 것이 예법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대부계급이었던 계씨는 <사일무>를 추는 것이 아니라 <팔일무>를 추게 했다. 이는 2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자신의 조상을 <천자의 예>로 대접을 했거나 아니면 둘째, 자신의 조상에 대한 제사가 아니라 천자의 제사를 대신 모셨다는 뜻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앞의 해석을 취하고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남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곧 아첨하는 것이라는 위정편 제24장의 내용과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뒤쪽의 해석에 좀 더 무게가 실릴 수 있다고 본다.
공자시대가 아무리 세상이 혼탁했던 춘추시대라 하더라도 형식적인 예법이나마 살아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공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예법의 최고 권위자였다. ) 대부가 감히 천자의 예로 자신의 조상을 모셨을 리는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을 한다. 만약 그랬다면 천자 뿐만 아니라 제후로부터도 멸문지화를 당할 명분을 제공하는 자살행위에 다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은 경복궁이나 창덕궁 같은 궁궐을 조영할 당시 철저하게 그런 예법을 따랐다. 예법(주례)에 따르면 황제의 궁궐은 5문3조, 제후의 궁궐은 3문3조를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중국의 자금성이 5개의 문인 <대청문> - <천안문> - <단문> - <오문> - <태화문>을 거쳐 황제의 중심전각인 <태화전> 에 다다르지만, 조선의 경우 경복궁은 <광화문> - <흥례문> - <근정문> 을 거쳐 왕의 중심전각인 <근정전>에 이르고, 창덕궁 역시 <돈화문> - <진선문> - <인정문> 을 거쳐 중심전각인 <인정전>에 도달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자금성의 궐문은 홍예(아치형의 무지개문)가 다섯인데 비해서, 조선의 궐문은 모두 홍예(광화문) 또는 통행할 수 있는 칸 수(돈화문,흥화문,홍화문,대한문)가 3칸이었다. 만약 조선이 이런 예법을 무시하고 궐문의 숫자나 홍예 또는 통행 칸수를 다섯으로 했다면 이는 곧 중국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팔일편 제1장의 후반부 해석은 "<계씨>가 했던 행위를 인정한다면, 앞으로 누가 그 어떤 예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더라도 막을 수가 있겠느냐" 라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에서 유력 대부계급이었던 계씨는 자신의 세력을 믿고 예법에 어긋나는 일을 이미 벌였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럴 때 공자는 위정편 제24장을 통해 "의로움을 보고나서도(즉 예법을 제대로 따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나서도) 이를 행동하지 않으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정편 제24장과 팔일편 제1장은 <같은 사건>을 추상적으로 표현(위정편)하기도 하고 구체적인 사실로도 표현(팔일편)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종묘에서는 팔일무를 출까? 아니면 육일무를 출까? 조선시대에는 우리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에 육일무를 추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성립되면서 우리도 황제국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 종묘제례 때에는 팔일무를 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