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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 웹튠 만화로 연재되었던 윤태호 선생의 "인천상륙작전"이 2014년 12월 한겨레출판에서 6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네요.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해방 전.후를 시작으로 6.25 전쟁(1.4 후퇴 때까지의) 기간 동안의 정치와 전쟁 이야기 속에 고달프고 힘든 서민의 삶을 리얼하게 녹아내어 정리한 역사 만화이다.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과 좌우 대립, 정치인들의 탐욕과 권모술수, 남과 북의 건국, 6.25 전쟁 등의 진행과정을 철구네라는 가족의 아픔을 통해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를 비교적 객관적 시각에서 정리하였다고 생각된다.
일본패망과 친일 정리. 정치와 권력다툼, 이념대결, 국제세력의 틈바구니에서 힘 없고 나약한 일반 민중의 고통과 아픔을 리얼하게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나 권력, 이념을 위한 인간의 아귀다툼과 탐욕은 똑 같다는 것이 아닐까. 하나도 다름이 없다고 하면 과장일런가. 참........
인천상륙작전_해설(윤태호 만화).docx
인천상륙작전_주석(윤태호 만화).docx
아래는 한번 읽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 아픈 우리의 역사라고 생각되어, 책 뒤장에 구완회 선생이 정리한 역사의 해설내용을 직접 입력하면서 머리속에 정리해 보았다. 책을 읽고난 다음에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을 때 읽어보면 좋지 않을까.
‘인천상륙작전’ 해설 (윤태호 만화)
[해방과 혼란] 1945년 서울, 해방은 짧고 혼란은 길었다
해방은 도둑같이 왔다. 해방 하루 전, 철구는 여전히 배가 고팠고, 어머니는 끼니를 위해 남의 집 일을 도왔으며, 삼촌은 밀정 노릇에 여념이 없었다. 그날도 굶주림이 식민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1939년의 기록적인 흉년과, 그 이듬해부터 시작된 일제의 식량 공출은 말 그대로 살인적이었다. 어머니의 물벼락을 맞은 삼촌이 ‘아새끼 굶겨 죽인 에미가 할 소리요!’ 라고 외쳤던 아이의 죽음도 흉년과 공출 때문이었을 것이다.
철구 아버지가 조심스레 이야기한 일본 패망의 소문을 들은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이들 중에는 해방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43년 11월에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카이로 선언’의 내용이 식민지 조선에도 전해졌다. 해방 1년 전, 당시 전쟁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던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해방 이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를 방문했을 때 연합군의 비행기가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모습을 보고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 해방보다 먼저 그어진 38선
여운형의 판단대로 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국은 유럽 곳곳에서 독일군을 압박했고, 그해 말이 되자 독일은 패색이 짙어졌다. 1945년 2월 얄타에 모인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은 전후 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4월에 히틀러의 자살과 함께 독일은 항복했고, 6월에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일본의 패망도 시간문제가 되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8일에는 소련이 대일본 선전포고와 함께 물밀듯이 밀고 내려왔다. 그리고 8월 10일, 드디어 일본은 미국에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일본의 항복이 미국의 생각보다 너무 빨랐던 것. 소련은 이미 한반도 가까이까지 진격했는데 미군은 여전히 오키나와였다. 그래서 부랴부랴 미군은 38선을 그어 소련에 제안했다. 의외로 소련은 순순히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38선이 해방보다 먼저 그어졌지만, 한반도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해방 자체도 대다수 식민지 사람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받은 찰시루떡 같은 것’(박헌영)이었다. 철구와 삼촌이 사람들의 함성을 들은 것은 일왕의 항복 선언이 있고 나서도 ‘눈치가 필요한 반나절이 지나고 난 후’였다. 여운형은 해방 당일 조선총독부의 행정권 이양 제안을 받아들여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시키고, 다음 날 휘문중학교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가 단 이틀 만에 행정권 이양을 번복해버린 것이다. 그들은 3천 명의 군인을 동원해 특별경찰대를 조직하고, 경찰서. 방송국 등 기간 시설을 다시 접수했다. 해방을 기뻐하기에, 해방은 너무 짧았다. 짧은 해방을 뒤로 하고 모든 상황은 서둘러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 일제가 남긴 금덩이와 권총
자신의 배를 가른 은행장이 금덩이와 권총을 남겨놓은 것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이다. 마치 일제가 해방된 조선에 남겨놓은 탐욕과 무질서를 암시라도 하듯이, 실제로 일제는 해방 직전 시중 통화량의 70%에 달하는 화폐를 찍어 자신들의 조선 탈출 자금으로 사용했다. 해방 후 일주일 동안 재조선 일본인의 현금 인출은 극에 달했다. 권력이 있거나 부유한 일본인들은 조선총독부의 공식 송환선이 뜨기 전에 재산을 챙겨 밀항선을 타기 시작했다. 해방 이틀 후 비밀리에 부산을 출발했던 조선총독 부인의 배는 무리하게 짐을 실은 탓에 다시 돌아왔고, 조선에서 재력으로 손꼽히던 일본인 중 하나는 자전거 튜브에 각종 유가증권을 숨겨 가지고 부산을 빠져 나가려다가 해양경찰에 붙잡히기도 했다. 철구 아버지가 삼촌의 심부름으로 인천에서 잡은 밀항 일본인들도 이런 부류였을 것이다.
이들의 돈이 시중에 풀리자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물론 이러한 돈은 일본인과 가까운 사람들, 친일파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곡식을 사서 쟁여두고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은행장의 집에서 훔쳐 온 금덩이로 물건을 사들인 김 영감(김상호)의 한마디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어허~달포 지나면 쌀이 썩나, 콩이 썩나, 소금이 썩나, 설탕이 썩나, 왜 이리 조급해.” 해방 후 신문들은 연일 악덕상인들의 매점매석 형태를 고발하고 있으나, 이는 그러한 행위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방증할 뿐이었다. 철구 어머니가 아무리 식모 노릇을 열심히 해도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일제 말 억눌렸던 욕망은 해방을 맞았는데, 물가는 뛰고 배고픔은 여전했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욱 커졌다. 해방 당일 물 섞인 막걸리를 받아 든 남자가 “왜정 때는 술 먹고, 해방 되니 물 먹나!” 하고 농담처럼 말한 것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 또다시 좌우로 갈리다
권총으로 상징되는 혼란은 더 심했다. 그 첫 단추는 김상호가 정치 자금을 주기 위해 찾아간 어느 사랑방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의 행정권 이양 제안을 몽양(여운형)은 받아 들이고 고하(송진우)와 낭산(김준연)은 거절했다.” 좌익을 대표하는 몽양은 우익을 대변하는 고하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지만, 송진우는 ‘임시정부를 기다려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했다. 해방 후 처음으로 좌우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좌우 진영은 일제 강점기 내내 똑 같은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함께 신간회를 만들었던 몇 년(1927~1931)을 제외하고는 늘 따로였다.
스스로 점령군임을 선포한 미군이 들어오자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일본인들을 ‘비즈니스 파트너’로 삼았던 미군은 여운형의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부정했고, 송진우가 기다린 임시정부마저 인정하지 않았다. 한 순간에 좌와 우의 구심점을 모두 날려버린 셈이다. 더불어 미군은 모든 것을 빠르게 과거로 되돌림으로써 혼란을 심화시켰다.
이런 상황이니 삼촌과 김상호가 과연 어디에 줄을 대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미군정이 왜 이러한 선택을 했는지는 김상호의 동경 유학파 아들이 잘 설명하고 있다. ‘미군은 공산주의를 정말 지독하게 싫어하고’, ‘조선인보다 일본인을 더 신뢰하며’, ‘자신들이 조선을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인공이다 뭐다 나대니 얼마나 어이없겠냐?’ 하는 것이다. 철구 아버지가 일하던 목공소 사장이 보았다는 일본인과 미군의 술판은 미군이 정식으로 상륙하기 이전부터 벌어진 일이었다. 김포공항을 통해 도착한 미군 선발대가 이미 일본인과 흥청거리며 연회를 가졌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면회 요청은 모두 거절했다. 사실 미군이 한국인과 대화를 나누기에 그들은 한국에 대해 너무 몰랐다. 미국은 일본에서 군정을 하기 위해 2천 명의 군정요원을 교육시켰다. 그러나 한국에 온 미군정 요원들은 며칠 동안 벼락공부를 한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교육을 맡은 미군 교관은 ‘한국은 미국에 비해 900년 이상 뒤떨어진 민족’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미군에게 일본인들은 말이 통하는 파트너였으나 한국인은 그저 식민지의 야만적인 백성이었을 뿐이다.
★ 그러니까 결론은, 이승만
미군정의 수장을 맡은 하지 또한 이러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거기다 그는 지독한 반공주의자였다. 김상호의 아들이 한 이야기처럼,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누가 친일파인지가 아니라 과연 누가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것이었다. 한민당은 이 부분을 본능적으로 치고 들어가서 미군정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하여 친일파로 비난 받던 한민당 인사들은 미군들에게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양식 있는 사람’이라는 지위(?)를 따냈던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한민당이 정국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 아직은 지난날 과오 때문에 스스로 눈치를 보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정국을 주도할 수 없었다.
결론은, 이승만이었다. 하버드 석사에 프린스턴 박사,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이끌어왔던 명망가, 철구 아버지의 목공소 사장조차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이랑 친한 양반인데 미국에서 안 도와주겠냐’ 할 정도였으니, 이렇게 생각한 것은 김상호의 아들이나 목공소 사장만이 아니었다. 여운형의 인민공화국이 본인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임명한 것도,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이승만이 주도하는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1945년 10월 4일 뉴욕을 출발한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도쿄에 들러 맥아더를 만나고, 10월 16일 드디어 서울로 입성하게 된다. 하지 장군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다음 달 23일, 오랫동안 임시정부를 책임졌던 김구 또한 김포비행장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이렇게 짧은 해방과 긴 혼란이 이어진 1945년은 저물어갔다.
★ 그래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좌우가 갈리고 외세에 휘둘렸지만, 그래도 해방된 한반도에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 좌우가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나갈 기회, 미소의 분할점령을 넘어서 남북이 하나가 될 기회가, 무엇보다 해방 공간의 이데올로기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가치가 아니라 생존과 욕망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포장지에 가까웠다. 당대를 살아간 약한 자들은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소리친다. “나는 생존당이요, 살아있기만 하면 된다고!” “머슴 취급하는 순간, 확 사회주의 해버릴라니까”.
또 하나, 일제 강점기를 함께 겪은 좌우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오른쪽에 있던 한국민주당 역시 그랬다. 철구 아버지가 목공소 사장에게 읽어준 전단지에 쓰여 있던 것처럼 ‘농민들에게 토지가 그들의 것이고, 공장이 노동자의 것이고, 가게는 점원들의 것이라고 한 건준과 인공을 타도하겠다’고 공언한 한국민주당이지만 정당의 정책에는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같은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포함시켰던 것이다. 역시 우익이었던 임시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토지는 국유를 원칙으로 하고’, ‘토지는 인민에게 분급하여 경작케 하마’, ‘대규모 생산기관은 국가경영으로 할 것’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이것들이 단순히 다수의 사람들을 의식한 말뿐이었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당시의 정치세력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상황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분모에서 출발한다면 좌우가 힘을 합치는 것도 어렵기만 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아무리 막강한 외세가 갈라놓았더라도 38선을 넘어서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와 똑같이 미소에 의해 분할점령 당한 오스트리아는 좌우연합으로 임시정부를 구성했고, 10년 간의 신탁통치 끝에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기회는 동시에 위기였다. 1945년 말을 뜨겁게 장식한 모스크바 3상회의와 신탁통치 문제가 그랬듯이 역사는 수많은 기회, 혹은 위기를 거쳐 해방에서 분단으로, 다시 전쟁으로 치달아갔다.
[잔인한 여름] 남북이 막히고, 좌우가 갈렸다
★ 1946년, 대홍수와 대혼란
해방 후 첫 겨울은 매서웠다. 찬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철구 어머니가 일하는 주인집에서 엿들은 이야기는 이승만의 독촉이 점차 세를 불리고 있다는 것. 독불장군 김구 역시 친일파의 돈을 상당히 받았다는 것 등이었다. 미군정의 시대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승만이 힘을 쓸 거란 사실은 철구 아버지의 목공소 사장도 예상했던 일. 하지만 김구가 친일파의 돈을 받아 썼다는 사실은 조금 예상 밖일지도 모른다.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김구는 조선공산당뿐 아니라 인민공화국의 여운형 같은 중도 좌파와의 만남도 거부했다. 누가 중경에서 서울로 오는 첫 비행기를 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임정 내 좌익 세력인 민족혁명당과 멱살잡이까지 했으니, 좌익이라면 이가 갈렸을지도 모른다. 반면, 친일 자본가이자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는 김구의 한국독립당 재정부장을 맡았다.
처음에는 김구도 친일파의 돈을 받을 수 없다며 한민당의 자금을 돌려보내기도 했다. 한민당의 장덕수가 임정요인에게 따귀를 맞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려면 자금이 필요했다. 결국 김구는 송진우에게 뷰익 승용차를 진상 받았고, 한민당의 자금은 ‘죄인의 세금’이 되어 임정의 금고로 흘러 들었다. 그럼에도 김구의 정치 자금은 이승만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이 ‘죄인’들과 함께 요정에서 기생들의 이마에 지폐를 붙이며 ‘나랏일’을 논하는 동안, 배고픈 철구는 인분 뿌린 배추꽃을 따 먹다 기생충 똥을 쌌고, 43년만의 대홍수를 만난 민중들은 물난리와 전염병, 대기근으로 죽어갔다. 철구 삼촌이 적산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간 김 노인의 저녁 회식상에 있던 수육은 임정요인들과 한민당 핵심들의 국일관 저녁상 위에도 있었으리라. 지난 시절 풍찬노숙, 찬바람 맞으며 독립운동에 힘쓴 애국지사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새나라 건설보다 보상이 더 급했다.
★ 오보가 만들어낸 신탁통치 블랙홀
지도자들은 주지육림에, 민중들은 다락같이 오른 물가와 추위에 허우적대던 해방 후 첫 겨울, 역사의 물줄기는 전례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해방 공간에 혼란 아닌 시기가 어디 있었을까마는, 그해 겨울은 특히 심했다. 발단은 1945년 12월 16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의 3상회의였다. 이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은 1. 한반도에 민주적인 임시정부(a 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를 수립한다, 2.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3. 미소 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최대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제안한다, 등이었다. 결정문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이었으며, 문구만으로 보면 임시정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신탁통치를 안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결정문이 발표되기 하루 전, 동아일보에는 희대의 오보가 실렸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이건 3상회의의 결정과는 상관없는 내용일 뿐 아니라 사실 관계도 정반대인 것이었다.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오히려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던 것이다. 더구나 결정문 발표 하루 전의 보도라니… 이것이 단순한 오보인지 아니면 모종의 음모가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어쨌던 이 오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고, 남한 전역은 들끓기 시작했다. ‘신탁통치’란 일제가 조선의 식민화를 포장했던 용어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사람들에게 신탁통치란 다시 식민지가 되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오보에서 시작한 신탁통치 논란은 모든 정치적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이 블랙홀을 통과하는 것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거듭났다. 친일파도 반탁에 앞장서면 애국자가 되었고, 독립운동가도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면 매국노가 되었다.
애당초 여기에는 좌우도 없었다. 한민당의 핵심 인사였던 송진우도 반탁 대책 회의에서 ‘우리가 아직 모스크바 결정문을 본 것이 아니지 않느냐?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하지만 3상회의의 결정은 최대 신탁통치 5년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줄어들 수도 있으니 극단적 반대만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가 다음 날 암살당하고 말았다. 송진우는 회의 참석 전 하지를 만나 3상회의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암살의 배후로 임시정부와 김구를 지목했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반탁운동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임정은 잊혀진 ‘임시정부 법통론’을 되살리고, 해방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몸부림쳤다. 주도권을 잡을 희망이 잠시 보이기도 했다. 임정의 이름으로 ‘미군정 산하 직원들은 임정의 지휘를 받을 것’을 공포하자, 미군정 직원들이 반탁을 외치며 파업에 돌입해 하지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경찰서장들이 김구를 찾아와 충성을 다짐했고, 영하 20도의 추위에 열린 반탁 집회에는 120만 서울 시민 중 30만이 참여해서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외쳤다. 하지와 김구의 면담으로 반탁 파업은 중단되었지만, 반탁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좌우 없이 시작한 반탁운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좌우를 갈랐다. 우익과 함께 반탁운동을 벌였던 좌익이 ‘모스크바 3상회의의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갑작스런 결정이었다. 애초 반탁 집회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 참가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3상회의 지지’ 집회로 바뀌어버릴 만큼, 지금까지 ‘좌익=사회주의자=독립운동가’였던 공식이, ‘좌익=찬탁론자=민족반역자’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헌영은 뒤늦게 해명했지만, 이는 언론에 의해 ‘한반도는 소련의 신탁통치를 통해 소연방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뒤바뀌어버렸다. 박헌영은 악의적 왜곡이라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 세력과 미군정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그해 여름은 괴로웠네
신탁통치라는 블랙홀이 남한의 정치상황을 환골탈퇴 시키는 동안에도 민중들의 고단한 삶은 계속되었다. 삼촌은 철구네 집으로 미제 물건을 빼 왔고, 삼촌의 비밀 심부름 탓에 일자리를 잃은 어머니는 남대문 도깨비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그 무렵 반탁운동을 매개로 이승만과 김구가 손을 잡았고, 평양에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했다. 하지만 철구네의 관심은 온통 ‘오늘 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다. 삼촌의 권유로 청년단을 기웃거리고, 적산 불하에 뛰어들고, 양공주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지만, 입에 풀칠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이웃들의 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해방 다음 해, 1946년의 여름은 일제가 발악을 하던 식민지 말기보다 살기 힘들었다.
여기에는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도 한몫을 했다. 해방된 한반도에 미국식 자유시장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덕분에 쌀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분명 해방과 함께 풍년이 찾아 왔음에도 사람들은 쌀을 구경하기조차 힘들었다. 부랴부랴 자유시장을 포기하고 공출과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배급량은 일제 말기의 딱 절반 수준이었다. 사람들 입에서 ‘차라리 왜정 때가 좋았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여기에 5월부터 창궐한 콜레라는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망자를 낳았고, 6월에 찾아온 ‘43년만의 홍수’는 민중들의 생활에 결정타를 날렸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것처럼 내리는 비는 철구네 초가집마저 무너뜨려버렸다. 그나마 철구네는 삼촌이 가져다 준 감자와 돈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이도 저도 없는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병으로 죽었다.
지옥 같던 그해 여름을 견딘 사람들은 미군정에 쌀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이어졌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자전국평의회(전평)가 임금 인상과 쌀 배급 증대를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인 것이다. 그에 대한 미군정의 대답은 기상천외였다. 미군정 농산부장 헐츠가 ‘시장에는 고기도 있고 다른 잡곡도 있는데, 쌀이 없다고 굶는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미군정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까지 동원해 노동자들의 피를 보고서야 겨우 파업을 진압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배고픔까지 진압할 수는 없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대구 항쟁으로 이어졌다. 초등학생 80% 이상이 도시락 없이 등교하고, 담배공장 노동자가 담배종이 붙이는 풀을 몰래 훔쳐 먹던 대구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들이 모여 쌀을 달라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여기에 파업 노동자들이 합세했고, 경찰의 발포로 한 명이 숨졌다. 그러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대구경찰서를 점령해 무장한 후 파출소들까지 접수해버렸다. 그러고는 눈엣가시 같았던 친일 경찰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계엄령까지 선포하고 전쟁처럼 대구 항쟁을 진압했으나,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은 경상도를 거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전국적으로 90개 군 이상에서 항쟁이 일어났고, 그 가운데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가 주도했던 구미 항쟁도 포함되어 있었다. 구미 항쟁을 이끌었던 박상희는 결국 사살되었다.
★ 38선을 막고 좌익을 때려잡다
그런데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이 이렇게 과격한 양상을 띠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피에는 피, 폭력에는 폭력’이라는 전술로 파업과 항쟁을 주도했던 것이다. 해방 이후 온건하고 합법적인 투쟁에 집중한 것과는 사뭇 다른 전술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전술로 박헌영은 많은 비판을 받지만, 그와 조선공산당의 선택은 상황에 의해 강요된 측면도 있었다.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철저하게 탄압해 지하로 돌아갔던 것이다. 여기에는 공산주의와 대립하는 미국의 노선뿐 아니라,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하지의 개인적인 성향까지 더해졌다.
미군정의 본격적인 좌익 탄압은 1945년 12월에 벌어진 인공 불법화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인공을 불법화했을 뿐 아니라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들을 동원해서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후 신탁통치의 블랙홀을 거치면서 좌익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자 호시탐탐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노리던 미군정은 ‘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이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인쇄하던 정판사에서 대량의 위조지폐를 찍어냈다는 혐의를 씌워 공산당원들을 줄줄이 구속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모두 중형이 선고되었고, 조선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사건이 터지고 며칠 지나지 않아 38선의 자유 왕래를 막아버림으로써 남한의 좌익 세력을 고립시켰다. 김상호 영감에게 정판사 위폐 사건을 알려준 정치권 인물이 ‘조선공산당이 아주 박살이 나게 생겼다’고 말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처럼 온갖 의혹의 집합체이지만, 여전히 최종적인 진실은 베일에 싸여 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은 좌익 세력을 공개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항한 좌익의 전술은 급격히 과격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좌익의 ‘신전술’이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항쟁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탄압하는 한편, 좌우합작을 추진한다. 물론 여기서 좌우합작이란 조선공산당 대신 여운형 같은 중도 좌파를 우파와 한데 묶는 작업을 말한다. 중도 좌파를 좌익으로부터 때어내서 좌익 세력을 고립시키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그래서 좌우합작은 박헌영에 대한 체포령과 함께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중도 좌파와 우파를 대표하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참여했는데, 김규식을 설득해서 좌우합작에 참여시킨 이승만은 다른 행보를 걷는다. 5월에 좌우합작의 첫 회합이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6월에 정읍에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아직 분단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비난했으나, 유독 김구는 이승만의 주장을 지지했다. 몇 달 전 김일성에 대한 백의사의 테러 시도에 연관되었던 김구는 좌익 세력과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승만의 단정론은 힘을 얻기 시작하고, 좌우합작이 결국 실패로 끝나자 더욱 세를 불리게 되었다.
★ 배고프니 청년이다
그리고 해를 넘긴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되었다. 누구보다 앞서 해방을 준비했던 사람. 끝까지 분단을 뛰어넘을 좌우합작의 끈을 놓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결국 좌에서도 우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여운형이 극우청년의 총에 맞고 숨을 거둔 것이다. 사실 여운형의 죽음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일이기도 했다. 그는 줄곧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실제로 열 번이나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테러는 여운형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 테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일상사가 되었고, 그 중심에 여운형을 쏜 청년들, 그리고 그들에게 총을 쥐여준 청년 단체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었던 대한민주청년동맹은 백색테러의 온상이었다. 이들은 좌파 성향의 신문사를 습격하고, 좌익정당의 당사를 폭력으로 빼앗고, 파업 노동자들에게 총까지 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좌익들 사이에서 ‘경찰에 걸리면 살아도, 청년단에 걸리면 죽는다’는 말이 돌았을까?
물론 좌익도 청년단체들이 있었고, 이들도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당의 외곽조직으로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는 좌익 청년단체에 비해 정치인 개인의 목적에 따라 동원되었던 우익 청년단체들의 폭력성이 휠씬 심했다. 더구나 대한민청에는 당시 종로와 명동을 주름잡던 주먹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고, 이름만 들어도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친다는 서북청년단(서청) 또한 대표적인 우익 청년 조직이었다. 당시 서청 사무실이 있던 동아일보 옥상에는 ‘성분 검사’를 한다며 하루 걸러 피 튀기는 폭력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건 청년단 활동을 하던 삼촌이 주로 하던 일이기도 했다. 또한 삼촌이 노동자 임금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보고 청년단 활동을 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우익 청년단원들은 이념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폭력을 휘둘렀다. 애당초 폭력에는 거부 반응이 있던 철구의 아버지까지 청년단을 기웃거릴 만큼 당시에는 일자리가 부족했던 것이다.
배고픈 청년들은 청년단에서 테러를 일삼고, 미군정과 정치인들은 이들을 이용해 좌익을 탄압하고, 궁지에 몰린 좌익 세력은 폭력 시위를 벌이고, 그걸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청년단은 더욱 가공할 폭력을 자행했다. 생존을 지상 과제로 삼은 빈곤과 폭력의 악순환, 1946년, 해방 이후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극단의 극단의 시간을 지나 폭풍전야로]
★ 38선 봉쇄, 분단의 시작
1947년 여름, 여운형은 테러에 쓰러지고 철구 아빠와 삼촌은 사기를 당했다. 여운형이화두처럼 부여잡았던 ‘좌우합작에 의한 단일정부 수립’은 동력을 잃었고, 남과 북은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각자도생의 길로 달려나갔다. 하지만 이후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 그것은 상생이 아니라 상극의 길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네가 죽어야 하는. 최 주임이 살기 위해 철구 아빠를 협박하고, 철구 삼촌은 최 주임을 협박하고, 다시 최 주임은 철구 아빠와 삼촌을 속인 것처럼. 한반도 점차 ‘극단의 시간’으로 빠져들었다.
극단을 부추긴 것은 강대국들이었다. 한반도의 단일정부 수립을 논의하던 미소공동위원회는 실패로 끝났고, 미국은 한반도 문제는 자신들이 주도하는 유엔으로 가져갔다. 이에 소련은 38선을 봉쇄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소련이 남하 금지령을 내린 것은 한 해 전이었지만 실제로는 남하를 막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이들을 추방하고, 그 속에 스파이를 심어 넣고, 그리하여 남한의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남하를 유도했다. 남북의 분단은 1947년 가을, 소련이 38선을 봉쇄하면서 이미 시작된 셈이다.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유엔 총회는 남북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당시 남한의 인구가 북한의 두 배에 이르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총선거는 소련측이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다. 이미 이것 때문에 미소공위가 결렬되지 않았던가. 1948년 1월에 한반도에 들어온 유엔한국위원단이 소련의 거부로 북한 땅을 밟지 못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엔에 문을 닫아 건 소련과 북한은 조선인민군을 창설했고, 유엔은 남한만의 단독선거결의안을 채택했다.
유엔한국위원단이 남한 땅을 둘러보던 그 겨울, 철구는 먹을 것 없는 집에서 나와 친구와 함께 개구리 사냥에 나섰다. 최 주임이 사라진 뒤로 철구 아빠는 퇴근 후 배달 일까지 하며 ‘투잡’을 뛰었지만, 여전히 식구들은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다. 해방 후 3년, 민중들의 생활 또한 극단의 시간으로 치닫고 있었다.
★ 때늦은 김구의 변신
극단의 시간을 돌이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는 그 유명한 문구가 바로 여기에 등장한다. 유엔이 남한만의 단독선거 결의안을 채택하자 김구와 김규식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그리고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자신의 방북을 반대하는 학생들을 피해 경교장 뒷담을 넘어 북으로 떠났다.
김구의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때는 벌써 유엔의 단독선거결의안까지 나온 마당이니, ‘남북한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배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던 셈이다. 더구나 김구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김구는 이전까지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에 보조를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침몰하는 단일정부의 꿈을 끝까지 지키는 선장의 역할을 자임했을 따름이다.
친이승만에서 반이승만으로, 단독정부 수립에서 남북협상으로 향한 ‘김구의 변신’은 1947년 12월의 장덕수 암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당시 한민당의 지도자였던 장덕수를 암살한 용의자들은 자신들이 김구의 열렬한 추종자들이라고 진술했다. 미군정은 이것을 근거로 평소 눈엣가시였던 김구를 엮어 넣으려고 했고 김구는 급히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자신이 이 일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되는 일만은 막아달라는 읍소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승만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그 기회에 김구와 손을 끊고 한민당과 함께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다. 결국 김구는 암살 사건의 배후 혐의자로 미군정의 법정에 서는 치욕을 당했다. 김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고, 이후 ‘단독정부 절대 반대’를 외치며 이승만과 한민당이 함께 만든 ‘한국민족대표단’의 즉각적인 해산을 주장했다.
물론 김구가 오로지 이승만에 대한 배신감으로 38선을 넘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고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으로 대표되는 김구의 성명이 주는 감동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이 시기 남북이 힘을 합쳐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분명 대다수 민중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구의 변신은 너무 늦었고, 김일성과의 남북 협상은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이미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김구의 방북을 북한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만 했다.
★ 상극으로 향하는 남과 북의 각자도생
김구의 시도는 실패했고,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예정대로 치러졌다. 그러기 위해 폭력과 강압이 동원되었다. 당시 한 신문은 응답자의 90% 이상이 강압에 의해 선거인 등록을 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다수 민중들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투표장으로 끌고 나오기 위해서는 강압과 폭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폭력은 투표 당일까지 지속되었다. 도끼자루나 곤봉을 든 우익 청년단과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이 투표장 안팎을 활보했다. 공천을 받지 못해 출마를 포기한 김상호가 거리에서 삼촌을 만나기 전 찾았던 투표소에도 무장경찰과 청년단이 있었을 것이다. 유엔임시위원단 또한 선거의 공정성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선거 과정에서의 심각한 폭력, 거기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 등은 선거를 보이콧했으니, 당연히 이승만과 한민당의 완승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승만과 한민당에 비판적인 ‘소장파’ 무소속 의원들이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1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7월 17일에 공포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은 평등과 공공복리를 강조했을 뿐 아니라, 주요 산업과 기업을 국유화하고 사기업의 근로자도 회사의 이익을 나눠가져야 한다고 규정하는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조선총독부에서 미군정청(Capital Hall)으로, 다시 중앙청으로 사용된 건물 앞에서 치러진 기념식의 표어는 ‘오늘은 정부 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었다. 그리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식에서 김일성은 “국토의 완정이 가장 큰 당면 과제”라고 역설했다. 남한의 통일도, 북한의 완정도 평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남한의 헌법은 북한을 대한민국 영토라 규정했고, 북한은 서울이 수도이며 평양은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의 임시 수도일 뿐이라 주장했다. 남과 북에서 상대방은 남의 땅을 불법으로 점검하고 있는 ‘괴뢰도당’일 뿐이었다. 상극으로 향하는 남북의 단일정부 하에서 한반도의 시간은 점차 극단의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 극단의 절정 _ 4.3사건과 여순사건
시작은 1948년 4월 3일의 제주도였다. 그날 새벽 2시 남로당이 이끄는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의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했다. 이들은 단독선거, 단정수립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내세웠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봉기의 이유는 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의 탄압이었다. 4.3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47년 3월 1일, 평화적인 3.1절 기념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민들은 관리들까지 참여하는 총파업으로 저항했고, 미군정은 육지의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파견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들은 파업 진압 이후에도 제주도에 머물면서 무차별 검거, 재물 약탈, 부녀자 겁탈과 같은 횡포를 일삼았다. 1년여를 이어온 제주도민의 분노가 4.3으로 폭발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극단의 절정은 아니었다. 토벌을 맡은 연대장 김익렬은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벌였다. 무장대의 봉기가 경찰과 청년단 탓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당시 군대(경비대)와 경찰이 앙숙이었던 사실도 한몫을 했다. 다행히 김익렬과 김달삼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우익 청년단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일으켜서 협정을 깨버렸다. 김익렬은 전격 교체되었고, 토벌대의 무차별 체포 작전으로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갔다.
남북한이 저마다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극단의 시간은 절정에 이르렀다. 제주에서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4.3사건을 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 계엄령 선포 후 약 4개월 동안 재주도 전역에서 벌어진 일은 ‘광란의 살육’이라 부를 만하다. 토벌대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시아버지에게 며느리를 말 태우고, 손자와 할아버지가 서로 빰을 때리게 하고, 총살당하는 가족들을 보며 만세를 부르도록 했다. 1948년 4월 3일 무장대의 경찰지서 습격부터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 6년 이상 지속된 4.3사건의 민간인 학살이 대부분 이 4개월 동안에 벌어졌다. 여기에는 민간인 학살을 ‘빨갱이 사냥(레드 헌트)’이라고 부르며 지원했던 미군의 책임도 크다. 훗날 참여정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3사건 기간 동안 살해당한 사람들은 당시 제주 인구의 10% 정도인 3만명 가량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3분의1은 아이와 부녀자, 노인이었다.
극단의 시간은 제주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제주 4.3사건이 한창이던 1948년 10월 19일, 뭍에서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은 군사반란으로 시작했다.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이 제주 토벌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남로당 소속 군인들이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며 앞장서자 다른 군인들도 동조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여수를 점령하고 순천 일대까지 손에 넣었다. 이 과정에서 수십 명의 경찰과 우익 인사들이 학살당했다. 일주일 만에 반란을 진압한 국군과 경찰은 보복 학살을 자행했다. 모두 2600명 가량으로 추산되는 여순사건 사망자의 대부분이 군경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들 또한 대부분은 반란과 상관없는 민간인이었다. 군사반란으로 시작된 사건이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오히려 반란군들은 여수를 무사히 빠져나가, 지리산 등지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된다.
★ ‘빨갱이 사냥’ 뒤의 폭풍 전야
4.3사건과 여순사건은 대한민국을 극단적인 반공사회로 몰고 갔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말 그대로 ‘빨갱이를 때려잡는 법’이었다. 국가보안법에는 숨겨진 핵심이 있었다. 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빨갱이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든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도 예외가 아니었다. 처음 반민특위가 만들어지자 철구 삼촌에게 몸조심하라며 경고를 했던 김상호가 ‘이제부터는 움츠러들 필요 없이 빨갱이만 때려잡으면 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한 상황 인식이었다.
반민특위에 잡혀갔던 김상호는 풀려 나오고, 오히려 반민특위는 ‘빨갱이 소굴’이라는 죄목(?)으로 친일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반민특위에 열심이던 국회의원들은 ‘빨갱이(남로당) 프락치’라는 혐의로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전향한 빨갱이를 감시하기 위해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이 만들어졌다.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국회 프락치 사건, 보도연맹 결성 등이 모두 1949년 6월에 있었기에 이들을 묶어서 ‘(이승만 정권의) 6월 대공세’라고 부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민특위는 문을 닫았고 국회는 대통령의 눈치만 보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릴까 봐 입을 다물었다. ‘말 많으면 빨갱이’라는 속담 아닌 속담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공세의 6월이 끝나기도 전에 김구가 총탄에 쓰러졌고, 다시 3일 뒤, 500명 가량의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은 채 주한 미군이 철수했다.
주한 미군은 철수했지만 빨갱이 사냥은 계속되었다. 그해 겨울에는 빨치산 동계 토벌작전을 통해 수천 명의 ‘빨갱이’를 잡아 죽였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 국회와 반민특위 뿐 아니라 지리산까지 싹쓸이했지만 여전히 사냥할 빨갱이는 남아 있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명령만 있으면 하루 안에 평양이나 원산을 완전히 점령’하리라 호언장담했고, 이승만 또한 외신과의 회견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3일 안에 평양을 점령하리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38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충돌이 벌어졌다. 황해도 웅진반도에서는 국군과 인민군 수천 명이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1950년 3월 남로당 총책이던 김삼룡과 이주하가 검거되면서, 남한에서는 거물급 좌익인사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휴전선의 충돌도 한풀 꺾였다. 이제 남한은 ‘팍스 이승마나’(이승만 제국)의 시대로 접어든 것일까? 얼핏 그리도 보였지만, 민심은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5월 30일의 총선에서 부글거리던 민심이 폭발했다. 결과는 이승만과 민국당(한민당의 후신)의 참패, 중도파 무소속의 약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을 등에 업고 나온 김상호가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도 낙선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는 남한의 민심뿐 아니라 북한 정권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평화를 되찾은 휴전선과는 달리 북한의 김일성은 4월에 스탈린, 5월에 마오쩌둥을 만나 전쟁 승인을 받아냈던 것이다. 중국에서 실전 경험을 한 수만 명의 베테랑을 포함한 13만의 인민군은 이미 전쟁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제 김일성의 명령 한마디면 북한의 정예군대가 전투기 한 대 없는 남한으로 밀려들 태세였다. 빨갱이 사냥 끝에 찾아온 고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폭풍 전야의 불길한 적막이었다.
[전쟁의 시작] 1950년 6월 25일 4시 40분 지옥문이 열렸다
★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월 24일. 이날 0시를 기해서 전군에 내려졌던 비상경계가 해제되고, 주말을 맞아 군인 셋 중 하나는 외출을 나왔다.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들도 육본장교클럽 낙성 파티를 새벽 2시까지 즐겼다. 바로 그 시간 북한군은 38선 앞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당시 중위였던 김종필이 근무하던 육본 정보국에서 북한군의 이상 동향을 보고했으나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6월 25일 새벽 4시 40분. 북한의 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물밀 듯 밀고 내려왔다.
남한 사람들은 38선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전 병사의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으나,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 것인지는 긴가민가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38선에서의 충돌은 일상다반사였다. ‘전쟁이라도 난 거냐?’는 상배의 물음에 복귀하던 군인이 ‘글쎄요…’라고 얼버무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것은 국군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만취한 채 잠이 든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은 새벽에 북한군이 침공했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다시 잠을 청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아예 연락 두덜 상태였다. 대통령 이승만은 휴일 아침 창덕궁 비원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부랴부랴 열린 오후 2시의 비상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북한의 침공이 전면 공격이 아니라 남로당 거물인 이주하와 김삼룡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다음날 정오 무렵 북한의 야크기가 김포공항을 폭격했다.
★ 대한민국의 우왕좌왕, 미국의 신속 대응
26일 오전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신성모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은 38선의 국군들이 잘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 일주일 이내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상황 파악을 못 하니 제대로 된 대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충성심 하나로 뽑은 장관과 총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댈 곳은 무능한 부하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고, 지금은 장군이 잠을 자기 때문에 통화가 곤란하다는 부관에게 ‘한국에 있는 미국인 2500명을 죽일 것’이라는 위협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은 맥아더와 통화를 했고, 적극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미국은 이미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신속하게 대응했다. 우선 한국에 있던 자국민들을 일본으로 피신시켰고(그러니까 이승만은 한국에 있지도 않은 미국인들을 인질로 삼은 셈이다), 유엔 안보리 회의를 소집했다. 안보리는 소련이 불참한 상태에서 북한군의 군사 행동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전쟁의 즉각적인 중지와 철수를 결의했다. 이때가 한국시간으로 26일 새벽4시.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지 딱 24시간 만의 일이었다. 왜 스탈린이 유엔 주재 소련대사의 불참을 명령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소련은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고, 만약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분명 미국의 신속한 대응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소련이 북한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했다는 사실이다. 북한군의 작전 수행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던 소련 군사고문들은 38선을 넘지 않았고, 이는 초반 북한군의 공격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던 소련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한 발 빼는 모양새였고, 전쟁 전까지 미적대던 미국은 빛과 같은 속도로 빠르게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유엔 안보리 결의가 이루어진 날에 벌써 미군의 제트기가 한반도에 등장했다.
★ 서울 시민들은 가만히 있으라
전쟁은 당연히, 국장장관과 육참총장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전쟁 당일 정오는 포천이, 오후 1시에는 의정부가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려오고 있었다. 이제 서울 함락은 시간 문제가 되었다. 27일 새벽 1시에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냐, 서울 탈출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사수파와 탈출파는 마치 병자호한 당시 남한선성의 주화파와 척화파처럼 격론을 벌였으나, 인조와 달리 이승만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서울을 떠나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전 미국대사 오초와의 면담에서 이승만은 미 대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탈출할 뜻을 분명히 했다.
비상국무회의의 결론은 수원 천도였다.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떠났다. 그런데 열차는 수원을 지나 대전을 거쳐 대구까지 이르렀다. 거기서 이승만은 ‘각하, 너무 많이 내려오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멋쩍은 듯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대통령이 떠난 서울엔 오보가 난무했다. ‘적의 전면적 패주’, ‘국군의 일부 해주 돌입’, ‘동해안 전선에서 적의 2개 부대 투항’… 오히려 정부가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는 정확한 보도는 오보로 정정되었다. 오보를 뛰어넘는 거짓 방송의 절정은 27일 저녁 9시에 나왔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했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라디오를 통해 이승만 특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방송은 대전에서 녹음된 것이었다. 김상호의 아들에게 미국인의 탈출 소식을 들은 상근은 이 내용을 믿지 않았지만, 많은 서울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고 가만히 있었다.
이승만이 거짓 방송을 하던 날도 미국은 바쁘게 움직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 해공군의 즉각 지원을 명령했고 미군은 수원에 전방지휘소를 설치했으며 유엔 안보리는 북한의 군사 공격 격퇴와 평화. 안전에 필요한 원조를 결의했다.
★ 서울 함락, 그리고 3일
이승만이 서울 사수를 천명하고 몇 시간 뒤, 인민군의 탱크가 서울에 나타났다. 그 시간 철구네 식구들은 피난민 대열에 끼어 비 내리는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상근이 한강대교를 건너는 순간, 다리는 폭파되었고 그는 불꽃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대한민국 국군의 손으로 이루어진 폭파에는 그 어떤 경고도 없었다. 당시의 전황으로 봤을 때 적어도 6~8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리를 폭파했다. 두 달 뒤 조기폭파의 책임을 물어 공병 대령이 사형당했지만, 그는 훗날 재심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의 진짜 책임자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떤 미군 장교는 수백 명이 폭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고, 다른 증언자는 수천 명이 다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한강대교가 폭파된 날 서울이 함락되었다. 인민군은 더 이상 진군을 하지 않고 서울에 3일 동안 머물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북한군의 행동은 지금도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왜 북한군이 미군의 참전을 원천봉쇄 할 수도 있었던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지금도 수수께끼다. 아무튼 북한이 서울에서 주춤거리는 틈을 타서 미군의 개입은 쏜살같이 이루어졌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당일에 한강 이북을 폭격하기 시작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비행장을 폭격해서 북한 전투기 수십 대를 파괴해버렸다. 7월 1일에는 미 육군이 부산에 상륙했고, 미군 폭격기들은 원산까지 날아가 폭탄을 퍼부었다.
다시 진군을 시작한 북한의 지상군은 승승장구했으나, 한반도의 하늘은 미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폭격에 따른 피해 상황을 보고받던 김일성은 소련대사 앞에서 허둥대며 하소연을 할 정도였다. 7월 20일 대전과 전주가 함락되었으나, 미국은 전쟁을 낙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한 일이라곤, 미국에서 모든 것을 맡긴 것뿐이었다. 그는 대전이 함락되기 20일 전에 탈출해서 이리와 목표를 거쳐 부산으로 달아났다. 그 사이에 미국은 유엔을 움직여 16개국이 참여하는 유엔군을 편성했고, 맥아더는 미 합동참모본부에 핵 사용 검토를 요구했다.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맡아달라고 했고, 맥아더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전쟁은 한국의 전쟁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 되었다. 미군은 대형 폭격기인 B-29를 50대나 동원해 용산을 폭격했고, 부산을 기점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바야흐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세 개의 지옥도 _ 전투, 폭격, 학살
낙동강 방어선을 두고 벌어진 치열한 전투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요충지였던 다부동 전투를 이끈 사단장 백선엽은 ‘나는 지옥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모르나 이보다 더 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남겼다. 전투는 고지마다 쌓인 시체를 방어막 삼아 치러졌고, 수십 년이 지난 후까지 유골이 발굴될 정도였다. 인민군 일부는 참호 속에서 쇠사슬로 발이 묶인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들이 기관총과 함께 받은 것은 죽음으로 전선을 지키라는 ‘옥새명령’이었다.
지옥도는 전선에만 펼쳐진 것이 아니었다. 미군의 폭격기는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았다. 7월초에 이루어진 원산폭격의 사망자 1천여 명 중 여성과 노인, 어린이가 3분의 1 이상이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서울 시민만 4250명에 달했다. 군사시설에 국한해서 정밀폭격을 하던 전쟁 초반에 희생된 사람들이 이 정도 숫자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미군의 작전은 무차별 폭격으로 변했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막 지옥은 민간인 학살로 나타났다. 손가락질 하나만으로 따발총이 불을 뿜는 인민재판은 학살의 시작에 불과했다. 미군들은 노근리에서 4일 동안 폭격과 기총소사 등으로 인간사냥을 하듯 300여 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전주에선 형무소 수감자 1400여 명을 포함해서 모두 4500여 명이 경찰과 헌병, 방첩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7~8월 사이 수원 이남 전역에서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로 적어도 2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초반, 이미 한반도의 전역은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처절한 지옥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팔미도의 밤] 인천상륙작전, 주검의 산을 덮은 신화
★ 노근리의 비극
전쟁은 학살의 연속이었다. 최 주임과 함께 피난길에 나선 상배가 본 것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학살의 지옥이었다. 1950년 7월 26일. 미군의 명령으로 피난을 가던 민간인 위로 나타난 비행기가 폭격과 총알을 퍼부었다. 미군의 비행기였다. 이를 피해 인근 철교의 굴다리 아래로 들어간 사람들을 미군은 다시 무차별 사격했다. 학살은 29일까지 지속되었고, 아이와 여자, 노인을 포함한 민간인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아마도 미군은 피난민들을 위험한 존재, 혹은 귀찮은 존재로 여겨서 죽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미군의 인종 차별적 태도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노근리 학살은 44년 동안이나 ‘잊혀진 사건’이었다. 좌파신문이었던 <조선일보>가 1950년 8월 보도한 이래, 1994년 연합뉴스가 보도하기 전까지 노근리학살은 공식적으로 언급된 적이 없었다. 1994년 노근리사건 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같은 해 <월간 말>7월호에서 상세한 보도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노근리사건은 이슈가 되지 못했다.그러다 1999년 미국의 AP통신이 보도하면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한 달 뒤 미국과 한국의 대통령이 진상조사를 명령했고, 2001년 1월 미국의 대통령 빌 클린턴은 사과성명을 냈다.
★ 댄스홀과 돼지몰이
노근리 학살을 목격한 상배가 부산으로 향하고 팔다리 잃은 상근이 가족과 해후하는 사이, 미군은 마산과 대구, 포항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북한군 사이의 혈전이 되풀이되었다. 김일성의 독려를 받은 북한군은 8월 대공세를 펼쳤고,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으로 뭉친 국군은 전우의 시체를 방패 삼아 적들과 싸웠다. 강물은 붉게 물들고 골짜기는 시체는 메워졌다. 낙동강 전선은 노근리의 굴다리 못지 않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지옥으로 둘러싸인 부산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퍽치기로 돈을 빼앗은 상배가 찾은 유곽도 별천지였지만, 당시 부산으로 피난 온 고위층, 부유층이 드나들던 댄스홀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김두한이 ‘출전 자금을 빼앗기 위해 찾은’ 댄스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지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안에는 군대에 가야 할 적령기에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싼 사람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한창 ‘엔조이’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선이 뚫릴 때를 대비한 대책도 이미 세워놓았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여차하면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을 간 상태였다. 당시 부산에는 이승만 정부가 망명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고위층이 일본 밀항을 준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일본으로의 밀항은 ‘돼지몰이’로 불렸는데, 밀항 주선비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50만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밀항을 위한 선박 대절비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에 이르렀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의 천국은 ‘인간 청소’를 통해 안전이 보장되기도 했다. 대구에 있던 정부가 부산으로 옮기기 8일 전인 1950년 8월 10일, 경남지역 계엄사령부는 부산시내의 검문검색 강화를 발표했다. 헌병, 경찰, 청년방위대원들, 민간극우단체들이 부산시내를 샅샅이 뒤지면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체포해 특무대로 넘겨 살해했다. 7월에서 9월 사이에 이렇게 살해당한 사람들이 모두 1만 명에 이르렀다.
★ 상륙작전이라는 필연
미군의 요청에 따라 이승만 정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던 1950년 8월 18일. 미 극동사령부 정보처 소속의 특수부대인 켈로부대원들은 영흥도에 들어갔다. 이날은 철구네 가족이 영흥도에서 외조부와 상봉한 날이기도 하다. 이날 밤 철구네 가족이 북한군 몰래 먹던 식량은 켈로부대원들이 준 것이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왔다. 정보 수집은 쉬웠다. 굶주린 주민들은 쌀만 주면 뭐든 알아왔으니까. 그중에는 철구 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철구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정보를 모으고 다니는 동안, 부산의 상배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인천으로 향한다. 곧 인천으로 미군이 상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군이 상륙작전을 펼칠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으로 몰린 유엔군에게 상륙작전은 성공만 하면 한 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카드였다. 더구나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은 이미 2차세계대전 중 여러 번 성공적인 상륙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있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을 만난 중국의 마오쩌둥은 직접 인천과 원산을 가리키면서 미군의 상륙작전을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소련대사와 만난 김일성은 미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한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도 했다.
상륙은 필연이었으나 인천을 선택한 것은 맥아더의 의지였다. 맥아더가 처음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한 것은 개전 초기인 6월 29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의 구상에 반대했다. 인천지역은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크고 인천 앞바다의 월미도를 비롯한 섬들이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상륙을 위한 수심을 확보하려면 3~4시간 정도의 밀물 때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적의 저항이 완강하면 자칫 상륙을 해보지도 못하고 배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 알고도 당한 북한군
상배에게 상륙작전의 소문을 전한 사람은 그 대상지로 인천과 원산, 군산을 꼽았다. 실제로 미국은 인천의 대안으로 원산을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원산은 너무 멀어 상륙작전의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반대로 군산은 너무 가깝다. 결국 맥아더는 인천을 선택했다. 여기에는 적들의 혀를 찌르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상배도 알았던 인천상륙작전을 북한군은 모르고 있었을까? 분명 예전 국사시간에는 인천상륙작전이 ‘극비리에 추진된 전격적인 기습’이었으며, 덕분에 ‘북한군의 혀를 찌르고 단숨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고 배웠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하지만 지금은 북한이 인천상륙작전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 근거 중 하나는 1950년 8월 28일 북한군이 설치한 인천지역 방어지구다. 김일성의 극비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극비리에 추진된 인천상륙작전에 맞서는 북한군의 극비 방어작전이 상륙 18일 전에 이미 시작된 것이다. 이는 적어도 8월 28일 이전에 북한 지도부가 인천상륙작전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북한군 지도부는 대부분의 전력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고 있었다. 남은 지역만 점령하면 38선 이남을 거의 다 장악한다는 장밋빛 희망이 약 두 달 동안 낙동강 전선에서 수많은 군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북한군은 점차 열세를 드러냈다.
국군은 포항에서 26Km까지 전진하는,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함병선 부대는 창녕에서 북한군 1개 연대를 섬멸했다. 미군은 북한군의 별다른 저항 없이 낙동강 도하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런 상태에서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부대를 인천으로 빼낸다면 연합군이 물밀 듯 밀로 올라올 것이 확실했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를 끊기는 것 만큼이나 두려운 일이었다. 북한은 올인한 낙동강 전선에서 전력이 소진되어,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알았지만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이다.
★ 9월 15일, 그날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의 날짜까지 알았던 것은 아니다. 상륙작전의 디데이가 9월 15일로 정해진 것은 1950년 8월 12일이었다. 이날 미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정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8월 24일에는 일본에 극동군 주일군수사령부가 만들어지고 이틀 후에는 상륙부대인 제10군단이 창설되었다.
9월 10일, 인천지역에 대한 사전공습이 시작되었다. 항공모함을 출발한 전폭기 편대가 네이팜탄으로 월미도를 초토화시켰다. 상배와 어머니가 봤던, 인천 하늘을 까맣게 수 놓은 전폭기가 출격한 것은 12일이었다. 드디어 9월 13일, 상륙부대가 부산에서 인천으로 출발했다. 이미 인천 앞바다에 도착해 있던 구축함과 순양함들은 함포사격을 시작했다. 북한의 해안포들도 반격에 나섰으나, 위치가 드러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사이 함정들은 기뢰를 발견하는 족족 제거하고 있었다. 9월 14일 밤 팔미도 등대를 점령한 켈로부대는 연료 노즐이 빠져 기름이 새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천신만고 끝에 등대에 불을 밝힌 시간은 9월 15일 새벽 2시 20분. 등대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출발한 미군 선발대는 인천 앞바다에 접근했다. 첫 상륙정이 월미도에 도달한 것은 오전 6시 33분, 사전공습으로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북한군은 제대로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항복했다.
어마어마한 함포 사격 후에 미군이 인천에 상륙한 시각은 오후 5시 30분이었다. 엄청난 폭격과 포격으로 얼이 빠진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다. 15일 하루 동안 미군의 피해는 사망 21명, 실종 1명, 부상 174명이 전부였다. 16일 새벽 1시 30분,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선언했다.
인천상륙작전의 빛나는 승리는 민간인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중에는 영흥도에서 북한군에게 살해당한 사람들도 있었고, 미군의 폭격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한 폭격에서 민간인의 안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월미도의 민간인 학살은 수십 년 동안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에 가려져 있다가 최근에야 사건 규명과 함께 보상 논의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노근리 학살에서와 같은 미국의 사과도 없었다.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의 신화는 여전히 수많은 죽음을 은폐하고 있다.
[아비규환] 인천상륙작전, 그 후…
★ 또다시 세상이 바뀌고
인천에 상륙한 지 하루 만에 미군은 인천을 완전히 장악했다. 같은 날 유엔군도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린 북한군은 남쪽에서 밀려오는 유엔군에게 샌드위치가 되어 궤멸될 판이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겨우 피할 수 있었다. 인천에 상륙한 미군과 한국군이 서울을 되찾기까지 13일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저항은 예상 외로 완강했다. 북한이 나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대비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까지 가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서울 접경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데만도 3일이 걸렸다. 그 사이 상당수의 북한군은 북으로 후퇴할 수 있었다.
공산군이 쫓겨간 인천에서 철구는 꼬마 가장이 되었다. 감자를 줍기 위해서라면 폭격현장의 피 흘리는 시체쯤은 무섭지 않았다.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폭격 맞은 집에 아무도 없었다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할 줄 알게 되었다. 세상이 바뀌니 또다시 피의 보복이 일어났다. 그전까지 공산당에 당했던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던 것이다. 생존을 위해 공산당에 협력했던 철구네에게 인천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부역자라는 혐의를 받고 린치를 당하거나 즉결처분을 받았다.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국회에서 부역행위특별심사법을 통과시켰으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다.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던 철구네는 서울행을 결정하게 된다.
★ 부역자 처벌이라는 적반하장
서울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역자에 대한 처벌이 가장 많이 벌어진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9월 28일 서울을 되찾자, 국민을 속이고 서울을 버렸던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 말을 믿고 서울을 지켰던 ‘잔류파’들을 단죄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뒤를 따라 한강을 건너갔던 피난민들은 ‘도강파’라는 특권계급이 되었다. 잔류파는 실제로 부역을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반정부 감정 포지자’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 남아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잠재적 부역자였다.
부역자를 처벌하는 데는 군과 경찰, 민간인의 구별이 없었다. 서울에서 구걸하던 철구 부모를 알아본 사람이 빨갱이라고 소리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집단 린치를 가하는 장면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다. 사정이 이러니, 사적 원한이나 재산 탈취를 위해 잔류파를 부역자로 모는 일이 허다하게 벌어졌다. 사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자 장창국 한병사령관은 “부역자를 불법 구속하여 구타할 경우 그 책임자는 물론 담당자를 엄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지만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부역자 처벌은 이승만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을 속이고 도망간 이승만은 부역자 처벌이라는 적반하장을 통해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 결과는 또 다른 민간인 학살이었다.
민간인 학살은 이승만 정권 하의 서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후퇴하던 북한군은 대전형무소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들과 포로들을 학살했다. 서울을 떠나던 북한군들도 미아리고개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조금 뒤의 일이지만 황해도 신천에 머물던 미군도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복 후 서울에는 이른바 ‘시민증’이라는 것이 생겼다. 이는 양민과 적색분자를 구별하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아무한테나 발급해주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받을 수 있었다. 소설가 박완서의 증언에 따르면 “시민증이 없다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단 서울뿐만 아니라 전쟁 중엔 신분증이 생명과도 같았다. 시인 서정주도 처가인 정읍에서 신분증 없이 통행금지를 어겼다가 총살 일보 직전까지 간 일이 있다.
★ 38선을 넘어 압록강으로
서울에서 부역자 처벌이 시작될 무렵, 미군과 한국군은 38선을 넘었다. 9월 29일 유엔군총사령부는 모든 작전부대에게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같은 날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은 미군의 38선 돌파를 승인하는 명령에 사인했다. 덕분에 미군과 한국군은 10월 1일 38선을 넘어서 진격했고, 이날은 ‘국군의 날’이 되었다.
진군을 거듭하던 국군은 10월 19일 드디어 평양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평양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준비 없이 이루어진 북진이었기에 점령지에 대한 통치도 우왕좌왕이었다. 더구나 미군의 주력이던 미8군과 맥아더 사령부의 직속부대인 제10군단은 상충되는 행보를 보였다. 미8군은 유엔군 평안남도 지사를 임명함으로써 혼란은 가중되었다. 국군과 미군을 환영하던 평양 시민들도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자신의 수족인 대한청년단을 파견하여 행정을 담당하게 한 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극우테러단체였던 서북청년단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대한청년단은 행정대신 무자비한 학살과 보복을 일삼았다. 유엔군의 임명을 받은 김성주는 이승만의 조직과 갈등을 빗다 나중에 보복 살인을 당하게 된다. 상황이 이 지경이었으니 평양시민이 겪은 고통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엉망인 행정과 잔혹한 테러, 악착 같은 약탈은 평양뿐 아니라 점령당한 북한지역의 일상이 되었다.
혼란의 와중에도 국군과 미군의 진격은 계속되었다. 10월 15일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이 절대 없을 거라고 장담했고, 트루먼은 북진 명령으로 화답했다. 10일 뒤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한 한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압록강 물을 군용 수통에 담아 이승만에게 보냈다. 이승만의 지론이었던 북진통일이 바로 눈앞에 온 듯 보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빠른 북진으로 인해 유엔군은 보급선과 멀어졌으며 전선의 부대들은 고립되었다. 게다가 10월 이후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는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유엔군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이었다. 중국의 참전은 불리해진 전황에 쐐기를 박았다.
★ 중국의 참전, 반전의 반전
사실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남는 순간부터 지속적인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중국 외상 저우언라이는 10월 1일 “중국 인민은 이웃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침략을 받을 경우 강만 있지 않을 것”이라 경고했다. 다음 날에는 “한국군만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지만,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의용군의 형태로 참전할 것”이라며 수위를 높였다. 하지만 미국은 무시하고 38선을 넘어 진군을 계속했다. 미국이 중국의 참전을 우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중국과의 전쟁은 자칫 소련의 개입을 불러올 수 있었고, 그것은 곧 3차세계대전을 의미했다. 그래서 트루먼 대통령은 미 지상군의 진격도, 공군의 공습도 한반도 안에서만 하도록 못을 박았다.
맥아더를 비롯한 강경파들이 중국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 주장한 것도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당시 국민당과의 내전을 막 끝낸 중국 공산당에게 미국과의 전쟁은 버거운 일이었다. 10월 2일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고민이 그대로 드러난다.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한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저지하려 했다. 저우언라이가 10월 9일에 스탈린을 만나 군사 원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고민하던 중국 지도부는 10월 13일 전력적으로 참전을 결정했다. 미국이 북한지역까지 점령할 경우, 대만과 한반도 양쪽에서 포위될 수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 했다. 그리고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한 10월 19일, 중국군 12개 사단이 압록강을 넘었다.
처음에 중국군은 별 성과를 얻지 못했으나, 11월 중순 북한군과 함께 총반격을 시작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유엔군을 몰아 붙였다. 추위가 심해지면서 중국 내전에서 갈고 닦은 중국군의 게릴라 전술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군과 미군은 후퇴를 거듭했다. 12월 중순에는 수십만 명이 배를 타고 철수하는 흥남철수 작전이 벌어졌고, 다음해 1월 1일에는 38선이 뚫렸다. 그리고 3일 만에 다시 서울은 북한군의 손에 떨어졌다. 서울수복 후 약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시작된 빛나는 승리는 이제 옛 일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동안 민간인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었고, 전쟁고아 또한 눈에 뛰게 늘었다.
★ 미국에 간 철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꼬마 가장이었던 철구도 전쟁고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렇게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다 중국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미군 병사의 눈에 띄어 겨우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여전희 아비규환인 한국 땅을 떠나 미국으로 입양되어 간다. 한국전쟁 기간 중 전쟁고아는 모두 5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외국, 특히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 땅을 밟은 전쟁고아는 5348명에 달한다. 대다수는 미국사회에 잘 적응했으나, 한인사회와의 교류는 적은 편이다. 이 시기에 미국으로 간 한국인 중에는 전쟁신부(war bride)도 있다. 같은 기간 동안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간 전쟁신부의 숫자는 약 6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 또한 한인사회와의 교류가 적은 편이다.
철구가 떠난 이후에도 전쟁은 2년 반이나 지속되었다. 중국군에게 밀린 미국은 핵폭탄 사용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다행히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새롭게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반격에 나섰다. 이번에는 상황이 중국에 불리했다.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물자 부족에 시달렸던 것이다. 거기다 10년 만에 몰아친 한파는 담요 한 장 없이 야외에서 자야 하는 중국군에게 치명적이었다. 결국 중국군은 후퇴했고, 1951년 3월 14일 국군과 미군은 서울을 재탈환했다. 하지만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고착되었고, 그해 6월부터는 휴전협정이 시작되었다. 2년이나 끌던 휴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이로써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3년여 만에 긴 휴지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