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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
에스라 2장 강해 돌아온 사람들
에스라 2장 1-에스라 2장 70
요절 에스라 2장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1장에는 하나님의 회복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의 성취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이 되었습니다. 세계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2장은 1장과의 문맥 연결이 다소 어색합니다. 왜냐하면 1장에서는 고레스가 성전 기명들을 세스바살에게 넘긴 사실이 기록된 반면에(1:8) 2장 초두에는 스룹바벨의 인도 하에 포로민들이 귀환하는 장면이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스룹바벨과 세스바살을 동일인로 본다면 쉽게 해결됩니다.
[돌아온 사람들]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70년전에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세 차례, 즉 B.C. 605년과 597년 그리고 586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때 그곳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은 대부분 왕족및 귀족 그리고 제사장 계급 혹은 기술자 등이었습니다(왕하 24:14 25:6, 7 단 1:3). 그 자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놓임을 받고 바빌로니아 각 지방을 떠나 유다로 왔습니다. 놓임을 받고는 원문에는 직접 나타나 있지 않은 번역자의 의도적 삽입 문구입니다. 돌아와는 부당하게 빼앗긴 물건을 돌려 받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창 20:7 출 21:34 삼상 6:3 삼하 9:7). 저자는 이러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팔레스틴으로의 귀환이 지극히 당연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돌아온 자들이고 성전을 건축한 사람들입니다.
그 자손 중에 돌아왔다는 것은 바벨론에 살던 유대인들 모두가 돌아오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200만 정도의 포로들 중에 일차로 돌아온 사람은 42360명입니다. 저마다 고향 땅인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왔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의 행선지가 오직 예루살렘만은 아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후 유다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습니다(느 3:2-19 7:20-35). 유다도라고 한 것은 당시 유다가 독립 국가가 아닌 페르시아의 일개 피정복지였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단어입니다(느 11:3). 아울러 이 단어는 유다가 인접 지역에 소속되었다가 그나마 그 자체의 행정단위로 새롭게 인정받은 상태임을 시사합니다.
각기 본성은 문자적으로 각각의 그의 성읍이란 의미합니다. 원래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았던 곳을 말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조상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가 돌아올 때에 함께 돌아왔습니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인물들은 유대인 공동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자들입니다(느 7:7). 여기에 11명이 나오고 느헤미야 7장 7절의 말씀을 참고 하면 12명입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대표를 의미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귀환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스룹바벨 이름의 의미는 바벨론의 자손, 혹은 바벨론에서 태어났다 입니다. 이 사람은 스알디엘의 아들이며(스 3:2 학 1:1). 여호야긴 왕의 손자(마 1:12 눅3:27)입니다. 역대상 3:19에서 그가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스알디엘이 후사 없이 죽은 관계로 그의 동생인 브다야가 고대 히브리인들의 법을 좇아서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스룹바벨을 낳은 때문입니다.(신25:5-10). 이에 따라 스룹바벨은 실제적으로는 역대상 3:19의 언급처럼 브다야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스알디엘의 아들이 되는 셈입니다.
예수아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보다 후기 형태로서,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마찬가지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건축을 완료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5:2). 그의 중조부는 대제사장 스라야로서(대상 6:14),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살해당하였습니다(왕하 25:18-21). 예수아의 부친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사닥입니다(3:2 대상 6:15 학 1:1).
느헤미야는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심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약 한 세기 후에 활약했던 느헤미야와는 별개의 인물입니다(느 3:16 7:7).
스라야는 여호와께서 주관자가 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느 7:7 에서는 아사랴로 나옵니다.
르엘라야는 느 7:7 에서는 여호와께서 천둥을 치셨다라는 의미를 갖는 라아먀로 나옵니다. 르엘라야라는 이름의 의미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모르드개는 바벨론의 주신(主神) 말둑에서 기원한 바벨론식 이름입니다.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에 2:5)와는 동명이인입니다.
빌산은 묻는 사람 혹은 그들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미스발은 수효의 의미로서, 느 7:7 에서는 미스베렛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비그왜는 페르시아식인 이 이름의 의미는 행복스럽다입니다.
한 가족의 족장인 그는 바벨론에서 귀환하면서 약 2천 명의 자손을 데리고 왔습니다(14절 느 7:19).
르훔은 자비로운이라는 뜻입니다. 느 7:7에서는 느훔으로 나옵니다.
바아나는 압제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느 7:7과 외경 에스드라상 5:8에서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명단과 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망했지만 그 백성은 살아있었습니다.
“3.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5.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보존이 된 가족들 기록 있습니다. 등록 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명단도 기록 되어 있을 것입니다.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바로스가 언제 살았던 사람인지 또 어느 지파에 속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아무튼 바로스는 가계의 이름입니다.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스바댜는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에스라 8:8과 외경 에스드라상 8:34 에서도 나옵니다.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아라는 여행자라는 뜻입니다. 느 7:10과 외경 에스드라상 5:10에도 나옵니다.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입니다. 바핫모압은 모압의 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모압 지방에서 관리 생활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자손으로서 바벨론에 남아 있던 200명이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기도 하였습니다(스 8:4).
예수아와 요압 자손은 당시 바핫모압 자손을 구성했던 두 가족인 듯합니다.
예수아는 대제사장 예수아와 동명 이인입니다(2절).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라는 뜻입니다. 그의 자손 중의 일부는 후에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였습니다(느 7:11).
“7.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8.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9.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0.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엘람은 높은 지대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은 고라 자손, 곧 레위인들이었던 것 같습니다(대상 26:3 느 12:42).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삿두는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삿두 자손의 일부는 이방 여인과 통혼하기는 했으나, 에스라의 신앙적 권면에 따라 그들과 헤어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10:27).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삭개는 여호와께서 기억하셨다는 뜻의 이름으로서 스가랴의 축약형인 듯합니다. 바로 이 삭개는 신약 시대의 삭개오라는 이름으로 변천하였습니다(마카비하 10:19 눅 19:2). 이 이름은 느 7:14에도 나옵니다. 특히 외경 에스드라상 5:12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코르베로 되어 있습니다.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입니다. 바니는 세우다의 의미입니다. 느 7:15과 외경 에스드라상 5:12에도 나옵니다. 그러나 느 7:15 에서 만은 빈누이로 되어 있습니다.
“11.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브배는 아버지와 같은 혹은 자애로운의 의미입니다.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아스갓은 하나님은 강하시다의 뜻입니다. 이 아스갓 자손의 나머지는 에스라가 귀환할 때 함께 팔레스틴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입니다. 아도니감은 주꼐서 일어나셨다의 의미입니다. 이 자손의 일부는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였습니다(8:13).
“14.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15.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16.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17.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아딘은 즐거운이란 뜻입니다. 이 아딘 자손은 후에 에스라가 제창한 율법 준수 운동에 인(印)을 침으로써 참여하였습니다(8:6 느 7:20 10:16).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히브리 원문대로 할 경우, 히스기야를 통한 아델 자손으로 번역됩니다. 여기서 히스기야는 유다의 명군(名君) 히스기야와는 별개의 인물이며 아델 자손은 42절의 아델 자손과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그 의미는 절름발이 혹은 왼손잡이입니다.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입니다. 베새는 짓밟힌이란 의미입니다. 이 베새 자손은 레위인들로서, 성전에서 비교적 비천한 일을 담당했던 것 같습니다(49절).
“18.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19.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0.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요라는 가을비라는 의미입니다. 이 요라는 느 7:24에서는 하립으로 불리워졌습니다,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하숨은 넓은 코라는 의미입니다. 이 하숨은 에스라가 율법을 낭독할 때 옆에 섰었던 하숨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느 7:22 8:4).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입니다. 깁발은 크다란 의미입니다. 느 7:25에는 기브온이라는 지명으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깁발을 기브온이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1.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23.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 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여기서부터 35절까지에서는 귀환자들이 출신지별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소에 관련된 기록입니다. 그곳에 살 사람들입니다.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베들레헴은 떡의 집이라는 의미이며 이 성읍은 유다 땅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베들레헴 사람은 유다 지파의 후예들입니다.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느도바는 떨어짐이란 의미입니다. 이 성읍은 베들레헴 남동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따라서 느도바 사람도 유다 지파에 속했습니다.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아나돗은 베냐민 지파의 지경 중에서 레위 사람들을 위하여 할당된 6개 성읍 중의 하나였습니다(수 21:18). 이 아나돗이라는 지명은 가나안 족속의 여신 아나드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따라서 이는 이 성읍에서 아나드여신에 대한 숭배가 성했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이 곳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렘 1:1).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4.8Km 지점입니다.
아스마웻 사람이 사십이 명입니다. 아스마웻은 죽음은 강하다란 뜻입니다. 예루살렘 북동쪽 약 2.5Km 지점의 베냐민 직경에 위치해 있습니다.
“25.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26.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27.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사람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기랴다림은 여러 성읍 중의 성읍의 의미로서, 베냐민 지경의 남단에 위치한 기럇여아림을 말합니다(삼상 6:21 7:1).
그비라는 마을 혹은 작은 촌락의 의미로서 그 위치는 기브온 서쪽 약 5Km지점이며, 베냐민 지파의 땅입니다(수 9:17).
그리고 브에롯은 우물들이라는 뜻으로서, 그 위치는 기브온 남쪽 약 2.5Km 지점입니다. 라마와 게바 사람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라마는 높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8.8Km이며,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성읍이었습니다(수 18:25). 이곳은 초기 이스라엘의 선지자 사무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삼상 7:16,17 19:18-24).
게바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곳은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된 성읍으로서(수 18:24,28) 예루살렘 북쪽 약 11 Km 그리고 기브아 북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된 직후 남국의 아사왕은 라마에서 가져온 돌로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기도 하였습니다(왕상 15:22 대하 16:6).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입니다. 믹마스는 감추어진이란 뜻으로서 그 위치는 벧엘 동남쪽 약 9.6Km 지점입니다
“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9. 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 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31. 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2.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베델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의미입니다(창 28:19,22). 이곳은 예루살렘 북쪽 약 19.2 Km 지점에 위치하였습니다. 그곳의 언덕 정상 가까이에는 매우 좋은 샘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거주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한편, 아이는 무더기 혹은 폐허의 의미로서 그 위치는 벧엘 동남쪽 약 3.2 Km 지점입니다(수 7:2).
느보 사람이 오십이 명이요, 느보는 놉의 다른 지명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봐야되는 까닭은 본 문단(21-35절), 특히 24-35절 베냐민 지경에 속한 성읍들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느보를 베냐민 땅에 있었던 제사장의 성읍 놉으로 봅니다(삼상 21:1). 이 성읍의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4.2Km 지점이고 그 의미는 번창해짐입니다.
막비스 사람이 백오십육 명이요, 막비스는 그 지명의 뜻이나 그 성읍의 위치가 모두 불분명합니다. 다만 베냐민 지파에 속했던 성읍 정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엘람 사람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하림 사람이 삼백이십 명입니다 다른 엘람은 저자가 다른이라는 형용사를 특별히 사용하여 7절의 엘람이라는 인명과 구별하고 있습니다.
하림은 바친, 혹은 봉헌된이란 의미이며 그 성읍의 위치는 분명치 않습니다.
“33.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34.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
로드와 하딧과 오노 사람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로드는 샤론 평야의 남쪽이며, 욥바 동남쪽 약 18Km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딧은 로드 북동쪽 약 6.2Km에 위치해 있고, 오노는 로드의 북서쪽 약 10.8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편이 세 성읍들의 지명이 갖는 의미들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여리고 사람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스나아 사람이 삼천육백삼십 명입니다. 여리고는 향기의 도시, 달(月)의 고을 그리고 종려나무의 성등의 의미입니다. 올브라이트 교수는 그중에서 달의 고을을 맞는 것으로 보고 여리고라는 지명을 고대 셈족의 월신(月神), 야리 숭배와 관련시킵니다.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동쪽 약 27Km 지점입니다.
스나아의 의미는 가시가 많은 입니다. 그 위치는 여리고 근방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스나아 자손은 후에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에 조력하였습니다(느 3:3).
각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조상들이 준 기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심을 따라서 돌아온 것입니다. 이들은 선진문명을 버리고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돌아오고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에서 돌아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름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무명의 용사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흰옷입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우리 조상들의 기업을 따라서 사명의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합니다.
“36.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37.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38.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39.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여기서부터는 제사장에 대해서 나옵니다. 4만명 중에 제사장이 4천명으로 많은 제사장이 돌아옵니다. 비록 이들은 레위 지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담당하는 직분상,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신분상 따로 구별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예수아 집안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은 스룹바벨과 함께 바벨론에서 돌아온 대제사장 예수아가 속했던 일족이었습니다. 여기의 예수아의 집은 여다야 자손이 대제사장의 가문임을 밝히기 위한 특별한 언급입니다. 아울러 예수아의 집은 여다야 자손이라는 복합적 명칭은, 포로로 끌려가기 전의 바로 그 대제사장 가문이 포로 후의 대제사장 예수아의 혈통적 뿌리였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여다야는 하나님이 아셨다의 의미로서 그는 다윗에 의해서 두번째로 제사장에 임명된 사람입니다(대상24:7).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임멜은 어린 양의 의미입니다. 그는 다윗에 의하여 당시 24반차로 편성된 제사장 직책 중 16번째의 반차에 배정되었습니다. 그 이래로 그는 그 반차에 속하는 제사장들의 선조가 되었습니다. 포로 귀환 후 그의 후손인 임멜자손 중 하나니와 스바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했다가 에스라의 개혁 조처에 따라 그녀들을 다시 내쫓기도 하였습니다(10:19, 20)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바스훌은 분명치는 않으나, 애굽어에서 파생된 이름으로서 호루스는 신의 몫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의 이 바스훌은 제사장 임멜의 아들로만 명시되어 있고, 역대상의 제사장들 명단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스훌 자손은 독립된 가문은 아니었으나, 포로 귀환 후 그 당시의 형편상 별도의 반차에 배정되었으리라 추측됩니다. 여기의 이 바스훌 자손 중의 일부도 다른 자손들처럼 이방 여인을 취하는 죄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이들의 조상인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그를 때리며 심지어 가두기까지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가 바벨론에 끌려가서 거기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렘 20:1-6).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입니다. 하림은 바친 혹은 봉헌된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하림은 다윗에 의하여 세 번째의 반차에 배정된 제사장이었습니다(대상 24:8). 이 사람의 후손도 에스라 시절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우(愚)를 범했습니다(10:21).
“40.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42.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레위인은 341명이 돌아옵니다. 다음은 레위 사람이 나옵니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이들은 원래 일정한 기업올 받지 못한 채 다른 지파들 중에 흩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민 35:2-7). 그러나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되자, 북쪽 땅에 살던 레위인들이 남쪽 유다로 넘어왔고(대하 11:16), 이에따라 레위 사람들 전체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북쪽에 살던 레위인들이 남쪽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북국의 멸망과 함께 앗수르로 끌려가서 다시 본토로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왕하 17:23).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의 자손들인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입니다. 호다위야는 여호와는 뛰어나시다 라는 의미를 갖는 호드야(느 7:43) 와 동일 인물입니다.
노래하는 사람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노래하는 것도 레위인의 직무 중의 하나였습니다(대상 25:1-7). 따라서 아삽 자손은 레위인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아삽 자손을 별도로 구분시켜 언급한 까닭은 그 직분의 특수성 때문이었습니다. 아삽은 모으는 자 혹은 수집자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다윗과 솔로몬 시절에 찬양의 제사를 주관하였고(대상 16:4, 5, 7, 37), 많은 시편을 짓는 등 이스라엘의 음악 발전에 현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네 아들과 함께 성전 봉헌식에 관계하기도 하였습니다(대하 5:12).
성전 문지기는 살룸 자손과 아델 자손과 달문 자손과 악굽 자손과 하디다 자손과 소배 자손인데, 모두 백삼십구 명입니다. 문지기 레위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독톡한 직분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대상 917-17 시 84:10). 그들의 다른 임무 중의 하나는 창고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대상9:26).
살룸은 보상된 혹은 보상의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렘 35:4에 언급되어 있는 살룸과 동일 인물입니다. 그는 고레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가족들도 함께 문지기의 일을 하였습니다. 아델 절름발이 혹은 왼손잡이란 뜻입니다.
달문은 빛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살룸의 형제였습니다(대상 9:17).
악굽은 추적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사람도 살룸의 형제였습니다. 하디다 - 탐색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소배는 포로로 데려가는 이라는 의미입니다
“43.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4.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45.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느디님 사람들은 레위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성전을 섬기기 위해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전 막일꾼이 나옵니다. 느디님은 주어진 자들이란 의미입니다. 영어개역 성경(RSV)은 이를 성전 수종자(temple servant)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들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전쟁 포로의 후예들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민 31:25-47).
한편 여호수아시대에 이스라엘에 의해서 멸망받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여호수아를 기만했던 기브온 족속들은 나무 패며 물긷는 자들이 되었습니다(수 9:23-27). 주어진 자들이라는 의미인 느디님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까닭은,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졌듯이 (민 8:16), 이들도 레위인들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그 레위인들에게 드려졌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8:20).
이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입니다.
시하 자손도 혈통상 이스라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이 이름이 이스라엘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그 주변처, 즉 애굽이나 아람 계통 민족에게서 어느 정도 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수바는 날씬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풍(風)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사람도 혈통상으로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답바옷은 도장 혹은 반지의 의미입니다. 게로스는 발목이 굽은의 의미입니다.
바논은 구속(救束)이란 뜻입니다.
르바나는 옷을 입다란 의미입니다. 하가바는 여치 혹은 메뚜기란 뜻입니다.
악굽이라는 이름은 레위 사람들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42절). 이것은 이 악굽 자손이 문지기의 직분을 수행하던 악굽 가문의 레위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46.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47.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48.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입니다. 하갑은 메뚜기란 뜻입니다.
하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는 뜻입니다.
깃델은 건장한 이란 의미입니다. 가할은 잠복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르아야는 하나님께서 보셨다란 의미입니다.
르신이라는 이름은 견고한 혹은 안정된의 의미로서, 이스라엘의 주변 민족들에게서 많이 발견됩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다메섹 왕 르신일 것입니다(왕하 15:37 16:5-9). 느고다는 구별된의 의미입니다. 갓삼은 삼키는 자의 의미입니다.
“49.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50.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51.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입니다.
웃사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세아는 절름발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스나는 나(Nah)에게 속한 자란 뜻입다. 나가 애굽의 신임을 볼 때, 아스나는 애굽 출신의 이스라엘인임이 분명합니다.
므우님은 에돔의 동쪽 그리고 사해의 동남쪽에 거주하던 소수 민족의 명칭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므우님은 그 소수 민족 출신의 이스라엘인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거주입니다. 추측컨대 이들은 웃시야 왕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포로로 끌려온 자들일 것입니다(대하 26:7).
느부심은 이스마엘 족속의 한 분파였던 나비스 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창 25:15). 박북은 병(甁)이란 의미입니다. 하그바는 구부러진이란 의미입니다. 할홀 갈가마귀란 뜻입니다.
“52.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3.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4.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입니다.
바슬릇은 껍질을 벗김이란 뜻입니다.
므히다는 노예로 산이란 의미입니다.
하르사는 벙어리의 혹은 말이 없는의 의미입니다.
바르고스는 코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코스가 아카디아 및 아람 계통의 신(神)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 바르고스는 이방인임이 분명합니다.
시스라는 전장(戰場)이란 의미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다가 사사 바락과 드보라에 의해 궤멸당했던 가나안 동맹군의 지도자 이름과 동일하다는 점에서(삿 4:1-22 5:19-31), 이 시스라는 가나안족 계통의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느시야는 뛰어남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디바 - 유년기에 포로로 잡혔다는 뜻입니다.
“55.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56.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7.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58.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여기서부터는 솔로몬의 종들입니다.
솔로몬을 섬기던 종들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스바댜 자손과 핫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입니다.
이상 성전 막일꾼과 솔로몬을 섬기던 종의 자손은 모두 삼백구십이 명입니다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의 일부는 틀림없이 가나안 원주민들의 후예일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곳 원주민을 자신의 역군으로 삼은 바 있기 때문입니다(왕상 9:20, 21).
또한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들 중 상당수는, 솔로몬의 군대에 의하여 포로로 잡혀온 자들의 후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앗수르 왕 산헤립(B.C. 705-681)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강대국의 국왕이 타민족을 포로로 잡아다가 자신 혹은 자국의 신에게 봉사토록 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풍습이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산헤립은 타민족과의 전투 중 한꺼번에 41 명을 붙잡아 가서 그들을 자신의 신 자바에게 봉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소대는 배회하는이란 의미입니다.
하소베렛은- 서기관이란 뜻입니다.
브루다는- 분산의 의미입니다.
야알라는- 야생 염소란 의미입니다.
다르곤은 거친 혹은 엄격한이란 뜻입니다.
깃델은- 건장한이란 의미입니다. 이 자손들은 느디님 자손들 가운데서도 발견됩니다(47절).
스바댜는 여호와께서 심판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일한 이름이 4절에도 언급되지만 본절의 스바댜 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딜은 동요(動搖)란 뜻입니다.
보게렛하스바임은- 가젤 영양(아프리카와 서남 아시아에 서식하는 작은 영양)을 올무로 묶는 여자란 의미입니다. 학자들은 보게렛하스바임 자손을 영양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직업 여성의 후예들로 봅니다.
아미는 건축자란 의미입니다. 이 사람은 느 7:59 의 아몬과 동일 인물입니다. 58절은 느디님 사람(43-54절)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55-57절)이 신분적 위치에서 동일함을 시사합니다. 신복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종을 말합니다.
“59.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60.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여기는 족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밖에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 등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왔지만, 가문이 밝혀지지 않아서,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인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인데, 모두 육백오십이 명입니다. 델멜라와...임멜에서 올라온 자들도 역시 세스바살의 영도 하에 바벨론에서 함께 귀환한 자들이었습니다.
델멜라는 현재의 프톨레마이스의 텔마를 말하는 듯합니다. 이곳은 페르시아만 근처에 있으며 심각한 염분(鹽分) 피해로 인하여 현재는 폐허로 변해 있습니다. 그 지명의 뜻은 소금의 언덕입니다.
임멜은 어린 양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곳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룹은- 천사란 뜻입니다. 이곳은 현재의 프톨레마이스의 치리파임에 해당합니다.
앗단은 확고한이며 느 7:61의 앗돈과 동일지역으로 추정합니다. 그 종족과 보계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인지의 여부를 밝히는것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무리가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경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배교(背敎)의 자리에 들어서도록 만들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율법을 통하여 이방인들과의 교제를 금하신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출 34:12-16 고후 6:14). 증거할 수 없으니 의 증거할은 고하다 혹은 보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나가드의 사역형으로서, 본질적인 문제를 분명히 풀어서 밝히는 행동을 말합니다(삼상 8:18 욥 33:23 미 3:8 6:8). 이때 델멜라 등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한 자들이, 자신들이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임을 증명치 못한 까닭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아오긴 했으나 실재로는 혈통상 이방인들이거나, 실제는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자신들의 혈통이 어디에 속하는지를 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名數)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2-58절).
들라야는 여호와께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도비야는 여호화는 선하시다란 뜻입니다. 여기서 도비야 자손은 B.C. 586년의 예루살렘 몰락 이후 암몬으로 도망쳤던 유대인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렘 41:15). 그러나 그 사실이 입증되지 못한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2절)에 포함되지 못한 것입니다.
느고다는 구별된의 의미입니다. 비록 이 이름이 느디님 자손들 중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48절 느 7:50), 본문의 느고다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61.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제사장 중에 족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제사장의 자손 가운데는, 호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도 있는데, 이들 가운데서 바르실래는, 길르앗 지방 사람인 바르실래 집안으로 장가를 들어서, 장인의 이름을 이어받은 사람입니다. 제사장은 - 앞의 언급(59, 60절)이 일반 서민들의 경우였던 것과 약간 대조됩니다. 본절에 언급된 자들은 스스로가 제사장의 후예들임을 주장하였습니다.
하바야는 여호와께서 숨기셨다란 뜻입니다.
학고스는 가시 나무란 뜻입니다. 이 자손들은 자신들이 다윗 시대의 제사장이었던 학고스(대상 24:10)의 후손들임을 자처하였을 것입니다.
바르실래는 `강철이란 뜻입니다. 바르실래라는 인물은 압살롬의 반역을 피하여 도피하던 다윗을 정성스럽게 도와준 사례가 있습니다 (삼하 17:27-29). 그러나 본절의 바르실래는 그 사람의 사위입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알길이 없으나 그는 길르앗 출신의 바르실래의 딸과 결혼하면서, 장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바르실래의 유산을 물려 받았을 것입니다(민 27:4 36장).
“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족보를 뒤져보았지만, 그들은 그 조상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직분을 맡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 직분을 맡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61절에 나오는 하바야 자손, 학고스 자손 그리고 바르실래 자손들을 가리킵니다. 세 자손들이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되었던 결정적 원인은 족보에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은, 제사장들의 후손임을 주장했으나 그것을 문서상으로 증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성직을 박탈 당하고 말았습니다. 보계는 문서화된 족보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족보 기록은 한 인간의 혈통적 뿌리를 밝혀 준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히 여겨졌었습니다(대상 5:17). 한편 이름은 자신들에 대한 기록의 의미입니다. 유다 총독은 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지고 판결을 내릴 제사장이 나타날 때까지는, 가장 거룩한 음식은 먹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총독 티르솨타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임명된 고위 직책의 소유자를 뜻한다고 봐야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사람은 목백 세스바살, 곧 스룹바벨을 가리킵니다. 그 당시에도 예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2절).
다만 여기서는 그 당시에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어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추측컨대 우림과 둠밈의 판결 수단이 부착된 에봇(삼상 23:6, 9, 10)은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또한 제사장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과정에서 없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세스바살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림과 둠밈의 판결 수단을 다시 찾으려고 노력한 듯합니다. 그런 후에 세스바살은 바르실래 자손등의 혈퉁적 정통성을 하나님께 물어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연대기적으로 본서 이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성경 어디에서도 우림과 둠밈을 언급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스바살의 시도는 무위(無爲)로 끝났으리라 봅니다.
지성물은 가장 거룩한 중에서도 가장 거룩한 것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희생 제사후에 제사장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가리킵니다(레 2:3, 10 7:33, 34). 이는 특별히 구별된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거룩히 구별된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단순히 제물의 분배에서 제외되는 것만을 의미치 않으며 제사장 역할 전체를 수행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할 것입니다.
에스라는 먼저 제사장과 레위인과 섬기는 자들을 기록하여 이들이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임을 기록합니다. 이들은 전임으로 섬기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핵심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살아있어야 이스라엘이 살아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무너집니다. 우리 가운데 전임 사역자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이들이 구별되어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합니다.
그러나 족보가 분명치 않은 사람들은 섬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임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왕같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야합니다.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66.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67.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돌아온 회중의 수는 모두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입니다. 폐르시아 잡혀간 사람들은 2백만쯤이 되었습니다. 소수만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후손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항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르치며, 절대신앙을 가르쳐야합니다. 자녀를 위해서 항상 기도해주어야합니다.
본절의 숫자는 3-60 절에 언급된 모든 숫자의 합인 29,818 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많은 견해들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3-60 절에서는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만을 나열하였으나 합계에서는 어린이 및 부녀자들까지 집계했습니다. 그들이 부리던 남녀 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고, 그 밖에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입니다. 또 말이 칠백삼십육 마리요, 노새가 이백사십오 마리요, 낙타가 사백삼십오 마리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 마리입니다.
노비는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노예들입니다. 이들은 가축 등과 같은 재산과 함께 언급된다는 점에서, 위의 42,360명에 안 들어감이 분명합니다.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은 이스라엘 백성의 총수 42,360명에 비하여 대단한 숫자입니다. 전체 인구의 약1/6 에 달하는 노비들이 함께 귀환했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이 노비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 하였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신 24:14, 15 참조).
노래하는 남녀 에 대해서는 성전 예배와 관계된 노래를 하는 자라기보다는 부유한 자들이 흥을 돋우기 위하여 고용한 자들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포로 귀환 직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의 경제적 형편은 꽤 괜찮았음이 분명합니다. 이 같은 상황은 약19년 후에 학개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의 그것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학 1:6). 이 같은 상황 악화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진 극심한 천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학 1:10, 11).
말은 팔레스틴으로의 귀향 길은 말이 다니기에 적절한 평원 지대였으므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로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팔레스틴에서 사용되기에는 적절치 못했습니다(암 6:12).
노새는 번식력은 전혀 없으나 강한 적응성 때문에 팔레스틴과 같은 산악 지대에서도 짐 운반용으로 매우 적절한 가축입니다.
약대는 팔레스틴 땅 안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은 짐승이나 팔레스틴으로 돌아오는 귀로에 짐 운반용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나귀는 귀인(貴人)들에 의해서 애용되었습니다(삼상 9:3).
저자는 노새와 약대와 나귀까지 기록하였습니다. 돌아온 짐승들의 수까지 기록하여 짐승 하나하나도 소중함을 가르쳐줍니다. 저자는 짐승들까지 기록하여 사람들의 귀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쳐줍니다.
“68.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 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69. 힘 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이들은 성전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드린 자들입니다. 가문의 우두머리 가운데는,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성전 터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성전을 옛 터에 다시 세우는 일을 도우려고, 자원예물을 바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은 B.C 586년 바벨론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왕하 25:10 대하 36:19). 그러나 이것은 건축 때에 사용된 재료가 특별한 관계로(왕상 5:17), 비록 파괴된지 약 50 년이 지났지만 그 흔적이 역력했을 것입니다. 그때 몇몇 족장들은 많은 다른 무리들보다 앞서서 성전 터에 도착한 듯합니다.
유대인들이 본토로 돌아온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전건축입니다(1:2, 3). 한편 그곳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 했던 모리아 땅(창 22:2 대하 3:1)이었으며, 다윗이 인구 조사라는 결정적 실수(대상 21:1)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 마당(대상 21:18-22)과 동일 장소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성전의 건축지로 지정된 곳이었습니다(대상 21:18, 19 22:1).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의 건축을 위해서 많은 재물을 헌납한 것(출 35:5, 21-29)과 동일하게 예물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는 성막 건축을 위한 헌물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사실을 나타내는 말과(출 36:21) 동일합니다. 저마다 힘 자라는 대로 건축 기금을 마련하니, 금이 육만 천 다릭, 은이 오천 마네, 제사장의 예복이 백 벌이나 되었습니다. 역량대로는 노력하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파생된 부사로서 자신이 바칠 수 있는 최대한의 분량 만큼을 말합니다.
이 같은 자세는, 신약시대에 어려운 형편에 처했던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서 연보를 한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 원리와 동일합니다(고후 8:3). 우리는 기쁨으로 힘 자라는 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역사하는 곳간에 드린 것에서 역사는 봉사하다 혹은 공급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일, 사업, 수고, 부(富)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곳간은 창고지기를 임명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단순히 재물 창고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하는 곳간은 성전 건축 사업의 수행을 위해 필요한 재화를 모아두는 창고의 의미로 이해됩니다.
금이 육만 일천 다릭에서 다릭은 고대 페르시아에서 금의 무게를 잴 때 통용된 중량의 단위였으며 훗날에는 화폐의 단위로 쓰였습니다. 금과 1 다릭이 영화(英貨) 약11 파운드 정도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육만 일천 다릭은 약 671,000 파운드, 금이 오백킬로 정도 됩니다. 대략 6억 7천만 원쯤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은이 오천 마네에서 마네는 바벨론에서 주조된 은화로, 은화 1 마네는 약 34 달러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천 마네는 미화(美貨)로 약 170,000 달러 정도 됩니다.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인 것은 특별히 지어 바쳤을 것입니다(삼상 2:19). 일백 벌은 느헤미야서의 육십 칠 벌(느 7:72) 과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본서의 기록자 에스라가 대략의 숫자만을 기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7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백성 가운데서, 일부는 (예루살렘과 그 부근 마을에 자리를 잡고,) 노래하는 이들과 문지기들과 성전 막일꾼들은 그들의 고향 마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머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사장 니디님 사람들은 모두 성전 봉사와 직간접으로 관련되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을 본성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본성은 예루살렘과 그 주변 마을을 가리킵니다. 백성 몇은 제사장 및 레위인과 대조되는 서민들로서 예루살렘이 고향인 백성을 뜻합니다.
노래하는 자들은 레위인의 한 부류인 아삽 자손올 가리킵니다(41절).
문지기들도 레위인의 한 분파 자손들입니다(42절). 이스라엘 무리들은 남쪽 지파와 함께 돌아왔을 북쪽 지파만을 의미치 않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들 이외의 나머지 전부를 가리킬 것입니다(2절 3:1 6:16, 17 7:13 8:29, 35) 예루살렘이 고향인 자들과 성전 봉사에 관계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에, 그 나머지 백성들도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거하였느니라는 쉬다 혹은 거주하다의 의미로서, 삶의 터전으로서 쉼을 얻으며 정착하는 것을 말합니다(창 20:15 수 21:2 삼하 7:5).
하나님은 이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그들을 격려하십니다. 이들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족보가 지켜졌습니다. 다양한 그룹이 참여하였습니다. 기쁨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에스라 2장 강해 돌아온 사람들
에스라 2장 1-에스라 2장 70
요절 에스라 2장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에스라 2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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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안 UBF 오요한 목자의 성경 66권 강해서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