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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나는 신들린 칼춤의 대가(?)>의 줄거리:
선민을 거룩하신 하나님이 택하셨는데, 신들린 것도 모자라 칼춤을 추고 있고 게다가 사람의 목을 베는 망나니라 하면 선민을 이보다 더 강하게 폄훼할 수 있는 표현이 달리 없겠지요. 그런데 이 표현이 에스겔의 입에 담아주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민을 가리켜 사용되었습니다. 선민들을 가리켜 피 흘리는 자들이라 하십니다. 조선시대 망나니는 참수형의 판 위에서만 칼춤을 추는 반면, 선민은 자신의 일상에서 칼춤을 추면서 닥치는 대로 생명을 끊는다는 겁니다.
나는 신들린 칼춤의 대가(?)
(에스겔 22:1~31)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네가 심판하려느냐 이 피흘린 성읍을 심판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이 알게 하라
3. 너는 말하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자기 가운데에 피를 흘려 벌 받을 때가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4. 네가 흘린 피로 말미암아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5.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6.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나는 신들린 칼춤의 대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나는 신들린 칼춤의 대가(?)’
1896년 고종 33년에 조선에서 한 참형 제도가 폐지됩니다. 망나니로 하여금 사형수의 목을 베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망나니는 천민이나 중죄를 짓고 복역하는 사형수들 중에서 뽑아 이 일을 시켰습니다. 사형수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목을 떨군 채로 꿇어 앉아있으면 망나니가 긴 칼을 휘두르며 칼춤을 춥니다. 때때로 입에 물었던 술을 칼에 뿜으면 더욱더 살기가 번뜩이게 됩니다.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한 순간에 망나니는 사형수의 목을 단칼에 내리칩니다.
망나니는 원래 막난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막’은 포악함과 험악함이 함부로 드러나는 성질이 못 돼먹음을 의미합니다. ‘난이’는 젊은이나 어린이처럼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두 단어가 합쳐진 망나니는 성질이 못되고 막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이 망나니를 더욱 천시하기 위해서 개를 붙이면 개망나니라는 말이 됩니다. 술을 먹고 망나니짓을 하는 사람은 술망나니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포를 자아내는 살벌한 칼춤을 추다가 사람의 목을 베는 망나니의 삶을 일상에 그대로 적용해봅니다. 예를 들어 가족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이 망나니가 칼춤을 추는 것이라면 끔찍한 광경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기에 이 광경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 우리가 가족들에 대해서 하는 말과 행동은 망나니의 칼춤과 다름없습니다. 좁은 공간에서 칼춤을 추면 가족들이 칼에 베이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단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애인과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에도 망나니의 칼춤이 일어나는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에 사랑의 마음도 사실은 망나니의 칼춤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얼핏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에스겔 선지자는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피를 흘린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피 흘림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되풀이하지는 않지만 우상숭배로부터 십계명의 둘째 계명부터 마지막 계명까지 어기는 범죄를 피 흘림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피 흘림이란 선민이 행위로 짓는 모든 범죄를 의미합니다. 아홉 계명 중 무엇이든 여겼다면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향해 칼부림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위로 짓는 모든 범죄를 망나니의 칼춤으로 보십니다. 이것이 망나니의 칼춤인 이유는 이러한 범죄에 의해서 타인의 생명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에 따르면 선민들이 바로 이러한 칼춤의 대가였다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앞장에서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의 선민들이 칼로 심판받을 것이 강조되어 예언되었습니다. 한 장에서 칼이라는 단어가 20번이 넘게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칼이 강조된 이유는 선민들이 자신들의 마음에 대해서 칼을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번제에 드려지는 어린양의 각을 뜬 것처럼 선민들이 마음에 칼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마음에 칼을 쓰지 않은 결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칼부림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의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망나니의 칼춤이 되기 때문입니다. 칼춤이 일어나면 반드시 피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량불변의 법칙이 있듯이 칼부림질량불변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는 아홉 계명을 범함이 피 흘림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제1계명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입니다. 피 흘림이란 생명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신앙적 의미에서 생명이란 선민 각자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연결이란 그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생명입니다.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생각하시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과의 연결이라는 혈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흘러들어올 수 있습니다.
생명(生命)이라는 단어는 살도록 명령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해결하자면 연결된 혈관을 따라 들어오는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뜻으로 인해 살아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흘러들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칼춤의 대가들이 되어서 이 혈관을 끊었습니다. 내 마음을 향해 칼부림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칼부림질량불변의 법칙에 의해서 칼부림이 외부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다 끊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내게 흘러 들어와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쏟아져 버려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피 흘림의 의미입니다. 육체의 피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생명이 끊어져서 하나님의 뜻이 피처럼 흐르게 된 것입니다.
부부사이를 생각해봅니다. 마음의 칼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배우자를 대합니다. 내 마음을 향하지 않는 칼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끊어낼 뿐 아니라 나의 말과 행동은 배우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까지도 끊어내게 됩니다. 나와 배우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피처럼 흐르게 됩니다.
부모자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마음을 어린양처럼 각을 뜨지 않고 자녀를 대한다면 망나니의 칼춤을 추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끊어냄과 동시에 또 자녀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칼춤이 되어서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끊게 됩니다. 피 흘림의 칼부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을 끊어내고 피를 흘리는 망나니 칼춤을 추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외부로 향하는 칼부림의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서 피 흘림의 행위가 아홉 계명을 어김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확대해서 보면 아홉 계명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모두 칼춤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나에 대한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까지 끊어내는 삶이 나타나는 이유는 우리 마음속에 다른 신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언제나 타락한 아담과 타락전의 아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타락후의 아담으로 인한 결과를 극복하시려는 제2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타락전의 아담의 첫날이 첫 번째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처음 눈을 떠서 하나님을 만났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바로 다른 신을 두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장치로써 선악과를 마련해두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다는 것은 스스로 판단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판단해야 살 수 있기에 필요한 판단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살았습니다. 인격체이시고 주체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 후에는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을 담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담은 것을 통해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이 다른 신을 만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본래 죽어야 할 나를 대신하신 것이었습니다. 죽어야 하는 나의 상태가 골로새서 3장 1~2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서도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땅의 것을 마음에 담았기에 생각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생각과 느낌과 의지도 이로부로 발생합니다. 바로 이렇게 다른 신을 마음에 담은 상태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죽어서 타락 전의 아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아담의 첫날처럼 되어서 하나님을 모셔 들인다면 나머지 계명들은 따라서 지켜지게 됩니다. 모든 율법과 계명과 규정들이 하나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마음에 담은 채로 살아간다면 망나니의 칼춤을 추게 됩니다. 다른 신이 들어왔으니 신들린 망나니가 되는 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다른 신이 된 상태로 묵인하고 살아갑니다. 돈과 마음이 하나가 된 것은 돈에 신들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돈이 있어야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동안에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망나니의 신들린 칼춤이 됩니다. 배우자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돈이라는 신에 들려서 칼춤을 추게 됩니다. 이때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끊고 배우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끊어내면서 피를 흘리게 합니다.
마치 무당이 빙의로 죽은 사람의 말과 행동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선민들이 이렇게 되었음을 에스겔은 오늘 본문을 통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돈이라는 다른 신이 들려서 돈을 추구하기 위해 장사도 하고 사업도 합니다. 그 와중에 돈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망나니의 칼춤을 추면서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는 혈관을 끊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에 자녀를 들여놓으면 자녀가 다른 신이 됩니다. 자녀의 형통을 기쁨으로 삼는 부모의 삶이란 온통 자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자녀라는 신들린 칼춤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뜻이 형통함으로 임하기를 바라지만 이것은 완전한 모순일 뿐입니다. 자녀를 마음에 담은 상태에서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권을 마음에 둔 정치인이 입으로는 국민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가장 좋은 하나님의 뜻을 끊는 칼춤을 추는 춤의 대가들입니다. 아담이 눈뜬 첫날에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인 것과는 반대로 마음에 대권이라는 다른 신을 들여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신들린 망나니가 되어버린 정치인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그 피해는 엄청납니다.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고관은 각기 권세대로 피를 흘리려고 네 가운데에 있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피를 흘리려고 우리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권력만큼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끊어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끊어버릴 수 있는 위치에서 가장 긴 칼을 가지고 있는 망나니인 셈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아담이 첫날에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은 이해가 되지만 우리가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복음방송을 듣는 대학생 두 명이 각각 메일로 저에게 이러한 내용을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십자가생활화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음에 무엇인가를 담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첫 번째 대상으로 돈을 담습니다. 돈을 들여놓은 채로 학교생활을 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리포트도 쓰고 학교생활도 하고 애인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에 애인을 들여놓은 채로 학교생활도 하고 과제도 수행하고 MT도 갑니다.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은 애인입니다. 돈이 마음의 첫 번째 자리에 들어와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애인이 들어와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모신 마음 상태에서 학교생활이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요? 이게 바로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물론 마음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모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를 거쳐야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만이 마음을 하늘로 보내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죄의 체질로 인해서 돈이나 애인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대상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들어온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에 첫 번째로 하나님을 담게 된다면 똑같이 리포트도 쓰고 학교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이 임하게 됩니다. 천국의 그림자로써 이 땅의 삶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돈이나 애인 등의 세상의 가치를 마음에 담으면 하나님의 뜻을 끊는 신들린 망나니의 춤을 추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일지라도 실은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뜻이 끊어지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끊어내는 것은 물론이거와 나와 함께 있는 사람의 하나님의 뜻도 끊어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생활화하면서 내 마음에 칼부림을 집중시키시길 바랍니다. 아담의 첫날에 하나님을 담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담기 위해서는 세상을 담은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번제단에 드려지는 어린양의 각을 뜨듯이 세상 것들이 자리 잡은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칼을 들이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내 마음에 다른 신이 들어온 상태를 계속 칼부림을 하지 않으면 말과 행동은 망나니의 칼춤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칼로 삼아서 내 마음의 다른 신을 계속해서 죽여야 합니다. 이 기도를 통해 마음에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직 좋은 것은 유독 하나님뿐이십니다.
이것을 믿고 먼저 시간을 들여서 이 세상에 대한 걱정을 십자가 칼로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대학생들의 마음이 맞았습니다. 그 다음은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과 평강으로 채워질 때까지 기도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계적으로 되지는 않습니다. 하면 할수록 반드시 점점 빨라지고 점점 잘되고 점점 충만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기쁜 상태에서 주어져 있는 과제들을 하며 학교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시간을 들여서 아담이 첫날에 하나님을 만났던 것을 재현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서 다른 신이 들어와 있는 상태를 묵과하면 다른 신들린 망나니의 칼춤을 추게 됩니다. 더 이상 다른 신들린 칼춤의 대가로서의 삶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중지시켜야만 하고, 진짜 하나님의 뜻만이 성취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언제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미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닌다고 했고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럴진대 우리 같은 죄인들은 얼마나 더 다른 신이 들어와 있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마음의 칼부림을 하게 하시고 그리하여 밖으로 향하는 다른 신들린 칼춤을 추는 망나니의 삶이 온전히 중단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