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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베드로전서 5장 12-14절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라
베드로전서 5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과 함께 장로 된 자들에게 권면하고 난 뒤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는데, 젊은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장로들로부터 가르침 받아 순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모든 성도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혹은 모든 성도를 포함하지만 특별히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내용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권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가르치는 장로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권하는데,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서로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겸손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있는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있는 어떤 것이 원인이 되어 주어진다면 그것은 은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공로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아가 성경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겸손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어디까지 겸손하게 만들고자 하시는가? 실제로 이 말씀대로 겸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가 나의 겸손함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하게 만들고자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고 권합니다. 너희는 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 있다는 것이고, 비교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자면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무능이 대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여기에 겸손이 있는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겸손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당연히 갖게 되는 성도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하라고 권하는 것은 우리 안에 교만이라는 죄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런 교만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지식으로 겸손함을 갖출 때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이 자신의 영광과 더불어 우리의 영광, 다시 말해 우리를 높여주시기 위한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계속해서 겸손한 자들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함을 권하는데, 왜 우리의 염려를 다 주께 맡겨야 하는가? 그가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능력은 무한합니다. 때문에 충분히 우리를 돌보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근신할 것과 깨어 있을 것도 권면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를 대적하는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 있는 우리를 마귀가 삼킬 수가 있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유기하신 자가 아니고서는 택자 중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상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 영광에 이르게 된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요, 계속해서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차원에서 근신하라, 깨어 있으라고 권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근신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인가?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더욱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도는 말씀 사역자로부터 가르침 받는 일에 힘써야 하는데,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도 베드로는 너희만이 아니라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받는다는 것으로 성도의 고난이 제한된 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게 보편적인 것을 말한 후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겸손하라,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근신하라, 깨어라고 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달린 문제처럼 여기기 쉽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 하나님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피게 되는 내용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으로 서로가 서로를 문안하면서 성도의 교제, 교통 가운데 있기를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 앞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다시금 한 가지를 강조하면서 정리합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일단 여기 보면 실루아노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사도행전에서는 실라라는 이름의 사람입니다. 실라는 아람어 형태로 된 이름이라 하고, 실루아노는 헬라어 투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외 바울이 쓴 편지들을 보면 실라 대신 실루아노로 소개되고 있는데(고후1:19, 살전1:1, 살후 1:1), 그는 어떤 사람인가?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 선교와 관련하여 발생한 율법논쟁, 즉 할례를 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열린 예루살렘 회의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행15장). 거기서 율법논쟁을 정리하고 난 뒤 문제가 발생했던 안디옥교회로 두 사람을 파송하여 문제를 종결짓도록 했는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실라입니다. 그만큼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5:22). 이런 실라에 대하여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그가 인도자, 다시 말해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요(22), 선지자로 소개하기도 합니다(32). 말씀 사역과 관련된 직분을 받은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서는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러 다닌 것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사도 베드로의 편지를 대필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특히 사도 베드로는 실루아노에 대하여 신실한 형제로 소개합니다. 믿을만한 사람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그만큼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이 편지를 간단히 써서 권했는데, 권한 내용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베드로가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그의 편지를 통해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베드로전서 1장으로 가시면 처음부터 이 편지를 받아보는 주의 몸 된 교회를 향하여 나그네라고 말합니다(1). 나그네란 지금 거주하고 있는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늘에 있는 유업을 이어 받을 자가 너희라고 알리는데(4), 그런 측면에서 히브리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히11:16)하는 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의 삶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6). 베드로전서 3장에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말하기도 하며(14), 심지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17). 나아가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이런 고난에 대하여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12-13). 즉 나그네로서 고난을 받겠지만 그 고난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고난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그런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 고난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너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5절입니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어지는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의 영광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도 말씀하는데(벧전5:1 참조), 이것을 이어지는 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을 말하지만 고난 가운데서도 지키시고 보호하겠다는 것, 또한 고난 이후 영광을 보장해 놓고 있다는 것,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이런 내용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전서 1장 13절 이하에 보면 다음과 같이 권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1:13-16) 베드로전서 2장 1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1-12) 그러면서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위에 있는 왕이나 총독에게, 나아가 종으로 있는 자는 주인에게, 또한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해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8절 이하에서는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하면서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8-9)고 말하기도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서도, 그리고 5장에서도 이런 권면은 계속해서 나옵니다.
이런 권면에 대하여 우리는 듣고 실천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실천하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 하나님이듯 명하신 바를 친히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뚜렷하게 알리는 것이 지난주에 살핀 내용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베드로전서 5장 10절을 보시면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그리고 이 사실의 확고함을 11절에서 이렇게 알립니다.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모든 권능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분은 고난 당한 자들을 얼마든지 온전하게 하며 굳건하게 하며 강하게 하며 터를 견고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10절과 11절 앞에서는 겸손하라,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근신하라, 깨어라는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근신하라, 깨어라고 말할 때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가?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를 온전하게 하며, 굳건하게 하며, 강하게 하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는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9절에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하나님께 의탁할지어다”고 권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시간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고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것처럼 고난은 불편한 것이요, 힘든 것이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복 있다는 것을 놓이지 마셔야 합니다(벧전3:14).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고난을 주시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목적으로 고난을 주시기 때문에 복 있는 것이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입니다. ‘고난이 복되다’, ‘고난이 은혜다’고 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난 뒤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의 고난과 영광이 우리를 위한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고난에 대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비록 불편할 수 있고, 힘들 수 있고, 어려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시는 고난은 영광을 위한 방편인 줄 알고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 12절로 오시면 대필자 실루아노를 통해 간단히 써서 권한 것이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한 증언이라고 말한 후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권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고, 어떠한 내용을 말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을 놓치지 않는 자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언제나 인간의 공로가 차지하는 자리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 않는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경우는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데, 교회 역사는 언제나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은혜에 굳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한 부분이라도 삭제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정리해 두셔야 합니다.
그 은혜는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다른 사도들보다 더한 열심으로 주를 섬겼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도 돌아보니 그것도 은혜라고 말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은혜에 감사하여 내 열심, 내 수고라고 말할 수 있는 바들을 행했지만, 내 열심, 내 수고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조차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내 열심, 내 수고보다 앞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앞서 있지 않으면 내 열심, 내 수고라고 할 만한 것도 사실은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아는 것,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진정한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13절과 14절을 통해 서로 문안할 것을 권하는데, 우선 13절입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먼저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되어 있는데, 바벨론에 있는 교회란 이방에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구체성에 있어서는 실제 바벨론에 있는 교회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로마에 있는 교회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해석이 있는데, 여기 바벨론을 로마로 해석하면서 가톨릭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로마 교회의 머리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런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한 베드로의 편지와 전혀 맞지 않습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어떻게 해서라도 사도 베드로를 로마 교회의 머리로 만들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다음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8절에서 12절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물론 말씀 사역자와 관련해 지도자, 혹은 다스리는 자, 선생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우셨다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라는 측면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말씀 사역자는 윗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따라 윗사람으로 세우신 자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들도 사실은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누구로부터 가르침 받아야 하는가?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도 자기의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자로 있다는 내용이 마태복음 23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인 의미에서 유일한 교사, 유일한 지도자는 누군가? 그리스도 외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먼저 태어난 자와 늦게 태어난 자가 있고 부모를 통해 자녀들이 태어나지만, 그들 모두를 만드신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유일한 아버지는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따라 윗사람으로 세우신 자들이 있는데, 그들을 그렇게 세우신 목적은 어디 있는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말씀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는 자이지, 결코 군림하는 자가 아닙니다. 가톨릭의 경우는 베드로를 다른 사도들 위에 세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인 것처럼 하여 모든 교회 위에 군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며, 지금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였다고 말하는 내용과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 다시 말해 이방 땅에 있는 교회인데 사도 베드로는 택하심을 함께 받은 교회로 소개합니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수신자인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도 표현은 되고 있지 않지만 택하심을 받은 것이고, 그들만이 아니라 바벨론에 있는 교회 역시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장소는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 그리고 택하신 그들을 교회로 부르신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 교통의 핵심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다시 말해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에게 문안한다는 것은 거리상 교회와 교회가 떨어져 있을 수 있지만 그들 모두는 서로가 서로를 문안하는 성도의 교제 혹은 교통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이 먼저 밝혀지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문안하라, 다시 말해 성도의 교제와 교통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고 교통한다는 것이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문안한다고 해서 “식사는 하셨습니까?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런 식으로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제하고 교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은 사도 베드로가 편지를 쓸 당시의 교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본도에 있는 교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있는 교회들이 지금은 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지역에 있던 성도들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이 땅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말씀으로 권면을 받았고 우리가 이 말씀으로 권면을 받고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교제하고 교통하고 있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거리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간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서 얼굴조차 한번 보지 못한 관계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동일하게 받고 있다면 거기에는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통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하나의 몸으로 모든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만이 아니라 내 아들 마가도 문안한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그가 요한으로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리아요(행12:12) 그는 바나바의 조카입니다(골4:10). 이런 마가에 대하여 지금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아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향하여 ‘아들’로 부른 것처럼(딤전1:18, 딤후1:2, 2:1) 실제 아들이란 의미가 아니라 영적인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마가를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마가의 내용을 보면 안타까운 내용도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전도 여행을 떠날 때 마가를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행13:5), 오래지 않아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행13:13).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두 번째 전도 여행을 하려고 할 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되는데, 왜냐하면 바나바와는 달리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가라도 이후 사도 바울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생질이란 누이의 아들로 바나바의 누이의 아들, 즉 조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옥중에 갇혀 있을 때 아리스다고란 인물과 함께 마가도 또한 함께 갇혀 있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갇혔다면 아리스다고란 인물도, 그리고 마가란 인물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에 대하여 골로새 교회로 하여금 영접하라고 말한 만큼 그를 인정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런 마가에 대하여 지금 사도 베드로는 내 아들, 다시 말해 영적인 아들이라고 칭할 만큼 그를 귀하여 여기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때는 연약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 연약함 때문에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 그를 거절하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로 있게 만든 것, 그래서 바울과 함께 갇힌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은혜의 말씀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본문 14절을 보시면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면서 본 편지를 마칩니다. 사도 바울 역시 그의 편지들에서 거룩한 입맞춤에 대하여 언급하는 바가 있는데(롬16:16, 고전16:20, 고후13:11, 살전5:26), 서양에서 뺨에 입 맞추는 것처럼 베드로가 편지 쓸 당시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13절과는 달리 실제로 사랑의 입맞춤을 할 수 있을 만큼 가깝다는 것인데, 멀리 있던 가깝게 있던 서로 문안하라,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제하고 교통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입맞춤으로 하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으로 교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문안하라는 말을 하고 난 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편지의 배경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있는 그런 시기입니다. 그래서 자주 고난에 대하여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해 시기 가운데서도, 고난 가운데서도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이 있기를 소망하는데,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도 버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도 베드로는 그의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벧전1:1-2) 그리고 편지를 마치면서 지금까지 쓴 편지의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한다고 하면서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고 말한 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나그네 된 교회에게 있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은 시작이요 끝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것이고, 그의 은혜 없이는 그의 평강 없이는 아무도 주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야 할 것이고, 그 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된 성경을 통해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