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比(비)
(水地比, 坎上坤下; 물과 땅이 비괘가 되니, 물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
[傳] 比는 序卦에 衆必有所比라 故受之以比라하니라 比는 親輔也[一作比輔比也, 一作比輔也]니 人之類는 必相親輔然後能安이라 故旣有衆則必有所比하니 比所以次師也라 爲卦 上坎下坤하니 以二體言之하면 水在地上하니 物之相切比无間이 莫如水之在地上이라 故爲比也요 又衆爻皆陰이요 獨五以陽剛으로 居君位하여 衆所親附하고 而上亦親下라 故爲比也라
[程頤의 설명] 비괘는 <서괘전>에 “여러 사람은 반드시 친하는 바가 있다. 그러므로 비괘로 받았다.” 하였다. 비는 친애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의 무리는 반드시 서로 친애하고 도와준 뒤에 편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무리가 있으면 반드시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비괘가 이 때문에 사괘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를 이룸이 위는 감(坎)이고 아래는 곤(坤)이니, 두 형체로 말하면 물이 땅 위에 있으니, 물건이 서로 지극히 가까워 간격이 없음은 물이 지상에 있는 것보다 더함이 없으므로 비(比)가 된 것이요, 또 여러 효(爻)가 모두 음(陰)이고 홀로 오(五 ; 다섯째 양효)가 양강(陽剛 ; 양효로 굳셈)으로 임금 자리에 있어서 무리가 친애하여 따르며 위 또한 아래를 친애하므로 비괘가 된 것이다.
比는 吉하니 原筮하되 元永貞이면 无咎리라
비는 길하니 근원하여 점치되 원(군장(君長)의 도리가 있음) 영(변함없이 오래함) 정(바른 도(道)를 얻음)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本義] 比는 吉하나 原筮하여 元永貞이라야 无咎리라
[朱熹의 본 뜻] 비는 길하나 다시 점쳐 원(군장이 도리가 있고) 영(변함없이 오래하며) 정(바른 도를 얻어야)하여야 허물이 없으리라.
[傳] 比는 吉道也라 人相親比는 自爲吉道라 故雜卦云 比樂師憂라하니라 人相親比는 必有其道하니 苟非其道면 則有悔咎라 故必推原占決其可比者而比之라 筮는 謂占決卜이요 非謂以蓍龜也라 所比 得元永貞則无咎리니 元은 謂有君長之道요 永은 謂可以常久요 貞은 謂得正道라 上之比下에 必有此三者하고 下之從上에 必求此三者면 則无咎也라
[程頤의 설명] 비는 길한 도(道)이다. 사람이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함은 스스로 길한 방도가 된다. 그러므로 <잡괘전>에 “비는 즐겁고 사는 근심스럽다.” 하였다. 사람이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함은 반드시 그 도(道)가 있으니, 만일 그 도(道)가 아니면 후회와 허물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친애할 만한 자를 미루어 근원하여 점쳐 결단해서 친애하는 것이다. 서(筮)는 점쳐서 결단하고 헤아림을 이른 것이요, 시초점과 거북점을 말한 것이 아니다. 친애하는 바가 원(元) 영(永) 정(貞)을 얻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니, 원(元)은 군장(君長)의 도리가 있음을 이르고, 영(永)은 변함없이 오래함을 이르고, 정(貞)은 바른 도(道)를 얻음을 이른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친애할 적에 반드시 이 세 가지가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따를 적에 반드시 이 세 가지를 구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不寧이어아 方來니 後면 夫라도 凶이리라
편안하지 못하여야 바야흐로 올 것이니, 뒤늦으면 강한 남자라도 흉하리라.
[本義] 不寧이 方來니 後夫는 凶하리라
[朱熹의 본 뜻] 편안하지 못한 이가 바야흐로 올 것이니, 뒤늦게 오는 사람은 흉하리라.
[傳] 人之不能自保其安寧이라야 方且來求親比하나니 得所比면 則能保其安이라 當其不寧之時하여는 固宜汲汲以求比니 若獨立自恃하여 求比之志 不速而後면 則雖夫라도 亦凶矣라 夫猶凶이어든 況柔弱者乎아 夫는 剛立之稱이니 傳曰 子南은 夫也라하고 又曰 是謂我非夫라하니라 凡生天地之間者는 未有不相親比而能自存者也니 雖剛强之至라도 未有能獨立者也라 比之道는 由兩志相求하니 兩志不相求면 則睽矣라 君懷撫其下하고 下親輔[一作附]於上하니 親戚朋友鄕黨이 皆然이라 故當上下合志以相從이니 苟无相求之意면 則離而凶矣라 大抵人情은 相求則合하고 相持則睽하나니 相持는 相待莫先也라 人之相親이 固有道나 然而欲比之志를 不可緩也라
[程頤의 설명] 사람이 스스로 안녕함을 보존하지 못하여야 비로소 와서 친애하고 도와주기를 구하니, 친애할 사람을 얻으면 편안함을 보존할 수 있다. 편안하지 못할 때를 당해서는 진실로 마땅히 급급히 친애함을 구해야 하니, 만일 홀로 서고 자신만을 믿어 친애하기를 구하는 뜻이 빠르지 못하여 뒤늦으면 비록 강한 남자라도 흉할 것이다. 강한 남자도 오히려 흉한데 하물며 유약한 자에 있어서랴. 사내는 굳세게 선 자의 칭호이니, 전(<춘추좌전>)에 이르기를, “자남(子南)은 남자이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는 나더러 남자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다.”하였다. 무릇 천지의 사이에 사는 것은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하지 않고서 스스로 보존하는 자가 없으니, 비록 굳세고 강함이 지극하더라도 독립할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친애하고 도와주는 도(道)는 두 사람의 뜻이 서로 구함으로 말미암으니, 두 뜻이 서로 구하지 않으면 반목하여 헤어질 것이다. 군주는 아랫사람을 품어주고 어루만지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친애하고 도와야 하니 친척과 붕우와 향당이 모두 그러하다. 그러므로 마땅히 상하가 뜻을 합하여 서로 좇아야 하니, 만약 서로 구하는 뜻이 없으면 헤어져서 흉할 것이다. 대저 인정은 서로 구하면 합하고 서로 버티면 헤어지니, 서로 버틴다는 것은 서로 기다리고 먼저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서로 친애함이 진실로 도(道)가 있으나 친애하고자 하는 뜻을 늦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本義] 比는 親輔也라 九五以陽剛으로 거상지중而得其正하고 上下五陰이 比而從之하니 以一人而撫萬邦하고 以四海而仰一人之象이라 故筮者得之면 則當爲人所親輔라 然必再筮以自審하여 有元善長永正固之德然後에 可以當衆之歸而无咎요 其未比而有所不安者도 亦將皆來歸之라 若又遲而後至면 則此交已固하고 彼來已晩하여 而得凶矣라 若欲比人이면 則亦以是而反觀之耳니라
[朱熹의 본 뜻] 비(比)는 친애하고 도우는 것이다.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가 굳센 양효로 윗괘의 가운데에 있고, 바름(홀수 자리에 양이 있음)을 얻었고, 위아래의 다섯 음효가 친히 하여 따르니, 한 사람으로 만방을 어루만지고 사해로 한 사람을 우러러보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점친 자가 이 괘를 얻으면 마땅히 남에게 친애하고 도와주는 바가 된다. 그러나 반드시 두 번 점쳐서 스스로 살펴 원선(元善 ;군장이 선하고)과 장영(長永 ;변함없이 오래며)과 정고(貞固 ;정도를 굳게 지킴)의 덕이 있은 뒤에야 사람들의 귀의함을 감당하여 허물이 없을 것이요, 친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여기는 바가 있는 자들도 또한 장차 모두 와서 귀의할 것이다. 만일 또 더디어서 뒤늦게 이르면 이 사귐이 이미 견고하고 저 옴이 이미 늦어서 흉함을 얻을 것이다. 만일 남과 친하고자 한다면 또한 이것으로써 되돌아볼 뿐이다.
彖曰 比는 吉也며
<단전(彖傳)>에 말하기를, “비(比)는 길하며
[本義] 此三字는 疑衍文이라
[朱熹의 본 뜻] 이 세 글자는 쓸데없는 군더더기 글인 듯하다.
比는 輔也니 下順從也라
비(比)는 돕는 것이니, 아래가 순하게 따르는 것이다.
[傳] 比吉也는 比者는 吉之道也니 物相親比는 乃吉道也라 比輔也는 釋比之義니 比者相親輔也라 下順從也는 解卦所以爲比也라 五以陽居尊位하고 群下順從以親輔之하니 所以爲比也라
[程頤의 설명] ‘비길야(比吉也)’는 비(比)는 길한 도(道)이니, 물건이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함은 바로 길한 도(道)이다. ‘비보야(比輔也)’는 비(比)의 뜻을 해석한 것이니, 비(比)는 서로 친애하고 돕는 것이다. ‘하순종야(下順從也)’는 괘(卦)가 비(比)가 된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오(五)가 양(陽;양효)으로서 존위(높은 자리; 다섯째 자리)에 있고 여러 아랫사람들이 순종하여 친애하고 도우니, 이 때문에 비(比)가 된 것이다.
原筮元永貞无咎는 以剛中也요
‘원서원영정무구(原筮元永貞无咎)’는 강중(剛中)하기 때문이요,
[傳] 推原筮[一作占]決相比之道하여 得元永貞而後에 可以无咎니 所謂元永貞은 如五是也라 以陽剛居中正하여 盡比道之善者也니 以陽剛當尊位하여 爲君德은 元也요 居中得正은 能永而貞也라 卦辭는 本泛言比道어늘 彖言元永貞者는 九五以剛處中正이 是也라
[程頤의 설명] 서로 친애하는 도(道)를 미루어 근원하고 점쳐 결단해서 원(元;군장(君長)의 도리가 있음) 영(永;변함없이 오래함) 정(貞;바른 도(道)를 얻음)을 얻은 뒤에야 허물이 없을 수 있으니, 이른바 원(元) 영(永) 정(貞)은 오(五 ;다섯째 양효)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양강(굳센 양효)으로 중정(中正; 가운데이고 홀수자리에 양효)에 처하여 친애하고 도우는 도(道)의 좋음을 다한 자이니, 양강(굳센 양효)으로 존위(높은 자리; 다섯째 자리)에 있어서 임금의 덕이 됨은 원(元)이요, 중(가운데)에 있고 정(正; 양효가 홀수 자리)을 얻음은 능히 영구하고 정고(貞固;정도를 굳게 지킴)한 것이다. 괘사(卦辭)는 본래 친애하고 돕는 도(道)를 범연히 말하였는데, <단전(彖傳)>에서는 원(元) 영(永) 정(貞)은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가 굳셈(양효)으로서 중정(가운데이고 홀수자리에 양효)에 처함이 이것임을 말한 것이다.
不寧方來는 上下應也요
‘불영방래(不寧方來)’는 상하가 응함이요,
[傳] 人之生이 不能保其安寧이라야 方且來求附比하나니 民不能自保라 故戴君以求寧이요 君不能獨立이라 故保民以爲安이라 不寧而來比者는 上下相應也니 以聖人之公言之하면 固至誠求天下之比하여 以安民也요 以後王之私言之하면 不求下民之附則危亡至矣라 故上下之志 必相應也라 在卦言之하면 上下群陰이 比於五하고 五比其衆하니 乃上下應也라
[程頤의 설명] 사람의 삶이 안녕함을 보존하지 못하여야 비로소 와서 따르고 친애하기를 구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보존할 수 없으므로 군주를 추대하여 편안하기를 구하고, 군주가 홀로 설 수 없으므로 백성을 보존하여 편암함으로 삼는 것이다. 편안하지 못하여 와서 친애하는 것은 상하가 서로 응함이니, 성인(聖人)의 공변됨으로써 말하면 진실로 지성으로 천하가 친애하기를 구하여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후대 왕의 사사로움으로써 말하면 백성들이 친애하여 귀부하기를 구하지 않으면 위태로워 망함이 닥친다. 그러므로 상하의 뜻이 반드시 서로 응하는 것이다. 괘(卦)에 있어서 말하면 위아래의 여러 음(陰)이 오(五 ; 다섯째 양효)를 친애하고 오(五)가 무리를 친애하니, 이것이 바로 상하가 응하는 것이다.
後夫凶은 其道窮也라
‘후부흉(後夫凶)’은 그 도(道)가 곤궁한 것이다.”
[傳] 衆必相比而後에 能遂其生이니 天地之間에 未有不相親比而能遂者也라 若相從之志 不疾而後면 則不能成比하니 雖夫라도 亦凶矣라 无所親比하여 困屈以致凶은 窮之道也라
[程頤의 설명] 무리는 반드시 서로 친애한 뒤에 그 삶을 이룰 수 있으니, 천지의 사이에 서로 친애하고 돕지 않고서 능히 이루는 자는 있지 않다. 만일 서로 따르는 뜻이 빠르지 못하여 뒤늦으면 친애함을 이루지 못하니, 비록 남자라도 흉하다.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바가 없어서 곤궁하고 굽혀 흉함을 이룸은 곤궁하게 되는 길이다.
[本義] 亦以卦體로 釋卦辭라 剛中은 謂五요 上下는 謂五陰이라
[朱熹의 본 뜻] 또한 괘의 형체로 괘의 말을 해석하였다. 강중(剛中;가운데 양효)은 오(五 ;다섯째 양효)를 이르고, 상하는 다섯 음효를 이른다.
象曰 地上有水比니 先王이 以하여 建萬國하고 親諸侯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땅 위에 물이 있는 것이 비(比)이니, 선왕(先王)이 이것을 보고서 만국을 세우고 제후들을 친애한다.” 하였다.
[傳] 夫物相親比而无間者는 莫如水在地上하니 所以爲比也라 先王이 觀比之象하여 以建萬國, 親諸侯하시니 建立萬國은 所以比民也요 親撫諸侯는 所以比天下也라
[程頤의 설명] 물건이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하여서 간격이 없는 것은 물이 땅 위에 있는 것보다 더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비(比)가 된 것이다. 선왕(先王)이 비(比)의 형상을 관찰하여 여러 나라(제후국)를 세우고 제후를 친애함은 또한 선왕이 천하를 친애하여 간격이 없게 한 것이다. <단전(彖傳)>의 뜻은 남이 와서 나를 친애하는 것이요, 여기서는 내가 가서 남을 친애함을 취한 것이다.
初六은 有孚比之라야 无咎리니
초육(첫 음효)은 성신(誠信;성실하고 신의 있음)을 두어 친하여야 허물이 없으리니
[本義] 有孚比也라
[朱熹의 본 뜻] 성신(誠信;성실하고 신의 있음)을 두어야 친하다.
[傳] 初六은 比之始也라 相比之道는 以誠信爲本이니 中心不信而親人이면 人誰與之리오 故比之始에 必有孚誠이라야 乃无咎也라 孚는 信之在中也라
[程頤의 설명] 초육(初六 ; 처음 음효)은 비(比)의 초기이다. 서로 친애하고 돕는 도(道)는 성신(誠信)을 근본으로 삼으니 중심(中心; 마음속)이 성실하지 못하면서 남을 친애하려 하면 사람들이 그 누가 더불겠는가. 그러므로 비(比)의 초기에 반드시 부성(孚誠 ;신의 있고 성실함)이 있어야 허물이 없는 것이다. 부(孚)는 미쁨이 심중(心中)에 있는 것이다.
有孚盈缶(부)면 終에 來有他吉하리라
미쁨을 둠이 장군에 가득하듯 하면 종말에 와서 다른 길함이 있으리라.
[本義] 終來有他吉하리라
[朱熹의 본 뜻] 종말에 다른 길함이 있으리라.
[傳] 誠信이 充實於內하여 若物之盈滿於缶中也라 缶는 質素之器니 言若缶之盈實其中하여 外不加文飾이면 則終能來有他吉也라 他는 非此也요 外也라 若誠實充於內하면 物无不信하니 豈用飾外以求比乎아 誠信中實하면 雖他外라도 皆當感而來從이니 孚信은 比之本也라
[程頤의 설명] 미쁨이 안에 충실하여 장군 속에 가득 찬 것과 같은 것이다. 장군은 질박한 그릇이니, 장군이 속이 꽉 차 있어서 밖에 꾸밈을 더하지 않은 것과 같이 하면 종말에 와서 다른 길함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다른 것[他]은 이것이 아니요 밖인 것이다. 만일 미쁨이 내면에 충실하면 남이 믿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어찌 외면을 꾸며 친애하고 돕기를 구하겠는가. 미쁨이 가운데에 꽉 차 있으면 비록 다른 바깥 사람이라도 모두 감동하여 와서 따를 것이니, 미쁨은 친애하고 돕는 근본이다.
[本義] 比之初엔 貴乎有信하니 則可以无咎矣라 若其充實이면 則又有他吉也라
[朱熹의 본 뜻] 비(比 )의 초기에는 신의가 있음을 귀하게 여기니, (신의가 있으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만일 미쁨이 충실하면 또 다른 길함이 있을 것이다.
象曰 比之初六은 有他吉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비괘(比卦)의 초육(初六 ; 첫 음효)은 다른 길함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傳] 言比之初六者는 比之道在乎始也니 始能有孚면 則終致有他之吉이다 其始不誠이면 終焉得吉이리오 上六之凶은 由无首也라
[程頤의 설명] 비괘(比卦)의 초육(初六 ; 첫 음효)이라고 말한 것은 비(比)의 도(道)가 처음에 있기 때문이니, 처음에 미쁨이 있으면 종말에 다른 길함을 이룰 것이다. 처음에 성실하지 않으면 종말에 어찌 길함을 얻겠는가. 상육(上六 ; 맨 위의 음효)의 흉함은 머리(처음)가 없기 때문이다.
六二는 比之自內니 貞하여 吉하도다
육이(六二 ; 둘째 음효)는 친애하여 돕기를 안으로부터 하니 똑바로 하여 길하다.
[本義] 貞이라 吉하리라
[朱熹의 본 뜻] 똑바른지라 길하리라.
[傳] 二與五爲正應이요 皆得中正하니 以中正之道로 相比者也라 二處於內하니 自內는 謂由己也라 擇才而用은 雖在乎上이나 而以身許國은 必由於己니 己以得君하여 道合而進일새 乃得正而吉也라 以中正之道로 應上之求는 乃自內也니 不自失也요 汲汲以求比者는 非君子自重之道니 乃自失也라
[程頤의 설명] 이(二 ; 둘째 음효)는 오(五 ; 다섯째 양효)와 바른 대응(각각 위아래 괘의 가운데로 음양이 대응됨)이 되고 모두 중정(中正 ; 괘의 가운데이며 짝수 자리에 음효, 홀수 자리에 양효임)을 얻었으니, 가운데이고 바른 도(道)로 서로 친애하고 돕는 자이다. 이(二 ; 둘째 음효)는 안(아래 괘)에 처하였으니, 안으로부터 한다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음을 이른다. 인재를 가려 등용함은 비록 윗사람에게 달려있으나 몸을 나라에 허락함은 반드시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자기가 군주를 만나 도(道)가 합하여 나아가므로 마침내 바름을 얻어 길한 것이다. 중정(中正 ; 가운데이고 바른)한 도(道)로써 윗사람의 구함에 응함은 바로 안으로부터 하는 것이니, 이는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 것이요, 급급히 윗사람에게 친애하여 돕기를 구하는 것은 군자의 자중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는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잃는 것이다.
[本義] 柔順中正으로 上應九五하여 自內比外而得其貞하니 吉之道也라 占者如是면 則正而吉矣리라
[朱熹의 본 뜻] 유순중정(柔順中正 ; 음효이고 가운데이며 짝수 자리에 음효임)으로 위로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 임금 자리)에 응하여(음양이 대응됨) 안으로부터 밖을 친하여서(아래 괘와 위 괘가 대응되어 친하는 뜻) 그 바름을 얻었으니, 길한 도(道)이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바루어 길할 것이다.
象曰 比之自內는 不自失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친하기를 안으로부터 함은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傳] 守己中正之道하여 以待上之求하니 乃不自失也라 易之爲戒嚴密하니 二雖中正이나 質柔體順이라 故有貞吉自失之戒라 戒之自守以待上之求하니 无乃涉後凶乎아 曰 士之修己는 乃求上之道니 降志辱身은 非自重之道也라 故伊尹武侯 救天下之心이 非不切이나 必待禮至然後出也라
[程頤의 설명] 자기의 중정(中正)한 도(道)를 지켜서 윗사람이 구하기를 기다리니, 이는 스스로 지조를 잃지 않는 것이다. 주역의 경계함이 엄밀하니, 이(二 ;둘째 음효)가 비록 중정(가운데이고 짝수자리에 음효)하나 체질이 부드럽고(음효이므로) 실체가 순종적이므로 ‘곧바르면 길하나 스스로 지조를 잃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지켜서 윗사람이 구하기를 기다리라고 경계하였으나, 이는 뒤늦으면 흉함에 해당되지 않겠는가? 선비가 자기 몸을 닦음은 바로 윗사람을 구하는 길이니, 뜻을 낮추고 몸을 욕되게 함은 자중하는 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윤(伊尹 ; 상나라 탕왕의 재상)과 제갈무후(諸葛亮 ; 삼국시대 촉한의 재상)가 천하를 구제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나 반드시 임금의 예(禮)가 지극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나갔던 것이다.
[本義] 得正則不自失矣라
[朱熹의 본 뜻] 정도(正道)를 얻으면 스스로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다.
六三은 比之匪人이라
육삼(셋째 음효)은 나쁜 사람과 친하는 것이다.
[本義] 比之匪人이로다
[朱熹의 본 뜻] 가까이 있는 바가 좋은 사람이 아니로다.
[傳] 三不中正而所比皆不中正이라 四는 陰柔而不中하고 二는 存應而比初하여 皆不中正하니 匪人也라 比於匪人이면 其失可知니 悔吝[一作咎]을 不假言也라 故可傷이라 二之中正而謂之匪人은 隨時取義 各不同也일새라
[程頤의 설명] 삼(셋째 음효)은 중정(中正)하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바가 모두 중정(中正)하지 못하다. 사(四 ; 넷째 음효)는 음유(陰柔 ; 부드러운 음효)로서 중(中 ; 가운데)하지 못하고, 이(二 ; 둘째 음효)는 응(應 ; 둘째 음효는 다섯째 양효와 응한다)이 있고 초(初 ; 첫 음효)와 가까워 모두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나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하면 그 잘못을 알 수 있으니, 후회와 부끄러움을 굳이 말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해로운 것이다. 이(二)는 중정(中正)한데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때에 따라 의(義 ; 뜻)를 취함이 각기 같지 않기 때문이다.
[本義] 陰柔不中正하고 承乘應이 皆陰이니 所比가 皆非其人之象이라 其占大凶을 不言可知라
[朱熹의 본 뜻] 음유(陰柔 ; 부드러운 음효)로 중정(中正)하지 못하고 승(承 ;위 효를 이음)과 승(乘 ; 아래 효를 탐)과 응(應 ; 다른 괘의 같은 자리와 응함)이 모두 음(陰)이니, 가까이 있는 바가 모두 좋은 사람이 아닌 형상이다. 그 점(占)이 아주 흉함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象曰 比之匪人이 不亦傷乎아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나쁜 사람을 친애함이 해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傳] 人之相比는 求安吉也어늘 乃比於匪人이면 必將[一无必將字]反得悔吝이니 其亦可傷矣라 深戒失所比也라
[程頤의 설명] 사람이 서로 친애하고 도와줌은 편안함과 길함을 구하기 위한 것인데 마침내 나쁜 사람을 가까이 한다면 반드시 장차 도리어 후회와 부끄러움을 얻을 것이니, 이 또한 해로울 만한 것이다. 이는 친애할 바를 잃음을 깊이 경계한 것이다.
六四는 外比之하니 貞하여 吉하도다
육사(六四 ; 넷째 음효)는 밖으로 친애하고 도우니 똑발라서 길하다.
[本義] 外比之니 貞이라 吉하리라
[朱熹의 본 뜻] 밖으로 친애하고 도우는 것이니, 똑발라서 길하리라.
[傳] 四與初不相應而五比之하니 外比於五 乃得貞正而吉也라 君臣相比는 正也니 相比相與 宜也라 五剛陽中正하니 賢也요 居尊位하니 在上也니 親賢從上은 比之正也라 故爲貞吉이요 以六居四하니 亦爲得正之義라 又陰柔不中之人이 能比於剛明中正之賢은 乃得正而吉也요 又比賢從上은 必以正道則吉也니 數說相須라야 其義始備니라
[程頤의 설명] 사(四 ; 넷째 음효)는 초(初 ; 첫째 음효)와 서로 (둘 다 음효이므로) 응하지 않고 오(五 ; 다섯째 양효)가 가까이 있으니, 밖으로 오(五)와 친애함은 바로 정정(貞正 ; 짝수 자리에 음효라 똑바름)함을 얻어 길한 것이다. 군신이 서로 친애함은 정도(正道 ; 바른 도리)이니, 서로 친애하고 서로 더부는 것이 당연하다. 오(五 ; 다섯째 양효)는 양강중정(陽剛中正 ; 굳센 양효이고 괘의 가운데이며 홀수자리에 양효임)하니 어진이이며 높은 자리(임금 자리)에 있으니 위에 있는 자이니, 어진이를 친애하고 윗사람을 따름은 친애하고 돕는 바른 도리이므로 바르고 길함이 된 것이요, 육(음효)으로서 사(四 ; 넷째 자리)에 있으니 이 또한 (음효가 짝수자리에 있어서) 바름을 얻은 뜻이 된다. 또 음유(陰柔 ; 부드러운 음효)로서 중도(中道)에 맞지 못한 사람이 강명중정(剛明中正 ; 굳세고 밝고 가운데이며 바름)한 어진이를 친애함은 바로 바름을 얻어 길한 것이요, 또 어진이를 친애하고 윗사람을 따름은 반드시 바른 도리로써 하면 길한 것이니, 여러 해설이 서로 있어야 그 뜻이 비로소 갖춰진다.
[本義] 以柔居柔하여 外比九五하니 爲得其正이니 吉之道也라 占者如是則正而吉矣리라
[朱熹의 본 뜻] 부드러움(음효)으로서 짝수자리(음효의 자리)에 있어 밖으로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와 친하니, 바름을 얻음이 되니, 길한 도(道)이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바루어 길할 것이다.
象曰 外比於賢은 以從上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밖으로 어진이를 친애함은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傳] 外比는 謂從五也라 五는 剛明中正之賢이요 又居君位어늘 四比之하니 是는 比賢이요 且從上이니 所以吉也라
[程頤의 설명] 밖으로 친애하고 도움은 오(五 ; 다섯째 양효)를 따름을 이른다. 오(五)는 강명중정(剛明中正 ; 굳세고 밝고 가운데이며 바름)한 어진이이고 또 임금 자리에 있는데 사(四 ; 넷째 음효)가 그와 가까이 있으니, 이는 어진이를 가까이 하는 것이요 또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길한 것이다.
九五는 顯比니 王用三驅에 失前禽하며 邑人不誡니 吉하도다
구오(다섯째 양효)는 친애하고 도움을 드러나게 함이니, 왕이 삼면(三面)에서 몰이함에 앞에 있는 짐승을 잃으며 읍인(고을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도다.
[本義] 失前禽하고 邑人도 不誡니 吉하리라
[朱熹의 본 뜻] 앞에 있는 짐승을 잃고 고을 사람도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리라.
[傳] 五居君位하여 處中得正하니 盡比道之善者也라 人君比天下之道는 當顯明其比道而已니 如誠意以待物하고 恕己以及人하며 發政施仁하여 使天下蒙其惠澤은 是人君親比天下之道也라 如是면 天下孰不親比於上이리오 若乃暴其小仁하고 違道干譽하여 欲以求下之比면 其道亦狹矣니 其能得天下之比乎아 故聖人以九五盡比道之正이라하여 取三驅爲喩曰 王用三驅에 失前禽邑人不誡吉이라하니 先王이 以四時之畋을 不可廢也라 故推其仁心하여 爲三驅之禮하니 乃禮所謂天子不合圍也요 成湯祝網이 是其義也라 天子之畋에 圍合其三面하고 前開一路하여 使之可去하여 不忍盡物하니 好生之仁也라 只取其不用命者하니 不出而反入者也요 禽獸前去者는 皆免矣라 故曰 失前禽也라 王者顯明其比道면 天下自然來比하나니 來者撫之호되 固不煦煦[一作呴呴]然求比於物하니 若田之三驅에 禽之去者를 從而不追하고 來者則取之也니 此王道之大니 所以其民皞皞而莫知爲之者也라 邑人不誡吉은 言其至公不私하여 无遠邇親疎之別也라 邑者는 居邑이니 易中所言邑이 皆同하니 王者所都와 諸侯國中也라 誡는 期約也니 待物之一하여 不期誡於居邑이니 如是則吉也라 聖人以大公无私로 治天下를 於顯比見之矣니 非唯人君比天下之道如此라 大率人之相比莫不然하니 以臣於君言之하면 竭其忠誠하고 致其才力이 乃顯其比[一作比其]君之道也라 用之與否는 在君而已니 不可阿諛逢迎하여 求其比己也라 在朋友에도 亦然하니 修身誠意以待之요 親己與否는 在人而已니 不可巧言令色하고 曲從苟合하여 以求人之比己也라 於鄕黨親戚과 於衆人에 莫不皆然하니 三驅失前禽之義也라
[程頤의 설명] 오(五 ; 다섯째 양효)은 임금 자리에 있어 (괘의) 가운데 처하고 정(正 ; 홀수자리에 양효)을 얻었으니, 친애하고 돕는 도(道)의 좋음을 극진히 한 자이다. 임금이 천하를 친애하고 돕는 도(道)는 마땅히 그 친애하고 돕는 도(道)를 드러내고 밝게 할 뿐이니, 예를 들면 성실한 뜻으로 남을 대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며 훌륭한 정사를 펴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천하로 하여금 그 혜택을 입게 하는 것은 임금이 천하를 친애하고 돕는 도(道)이다. 이와 같이 하면 천하에 그 누가 윗사람을 친애하고 가까이하지 않겠는가? 만일 작은 어짊을 드러내며 도(道)를 어기고 명예를 요구하여 아랫사람이 친애하고 가까이하기를 구하려 한다면 그 도(道)가 또한 좁으니, 어찌 천하의 친애하고 가까이함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가 친애하고 돕는 도(道)의 바름을 극진히 했다 하여, 삼구(三驅 ; 천자가 사냥할 때 다 포위하지 않고 삼면(三面)을 열어 놓아, 한쪽으로 오는 짐승만 잡고 달아나는 짐승은 몰지 아니함)를 취하여 비유하기를, “왕이 삼면에서 몰이함에 앞에 있는 짐승을 잃으며 고을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니 길하다.” 한 것이다. 선왕(先王)은 사시(四時)의 사냥을 폐할 수 없으므로 어진 마음을 미루어 삼구(三驅)의 예(禮)를 만들었으니, 예(禮)에 이른바 “천자(天子)는 완전히 포위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성탕(成湯 ; 상나라 시조)이 그물을 치고 축원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천자의 사냥에 삼면만을 포위하고 앞의 한 길은 열어 주어 짐승들로 하여금 도망가게 하여, 차마 짐승을 모두 잡지 않으니, 이는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어짊[仁]이다. 다만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잡으니 이는 나가지 않고 도로 들어오는 자이며, 앞으로 도망가는 짐승들은 모두 죽음을 면한다. 그러므로 ‘앞에 있는 짐승들을 잃는다.’고 말한 것이다. 왕자(王者)가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도(道)를 드러내고 밝게 하면 천하가 자연히 와서 친애하고 가까이할 것이니, 오는 자를 어루만지되 진실로 작은 은혜를 베풀어 남에게 친애하고 가까이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사냥에 삼면에서 몰이함에 짐승 중에 도망가는 자를 따라가서 잡지 않고 오는 자만을 잡는 것과 같으니, 이는 왕도(王道)의 큰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호호(皞皞 ; 廣大自得함)하여 어떻게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읍인불계길(邑人不誡吉)’은 지공무사(至公無私)하여 원근과 친소의 구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읍(邑)은 거주하는 고을이니, 주역(周易) 가운데 말한 읍(邑)은 모두 똑같으니, 왕자(王者)가 도읍하는 곳과 제후의 국중(國中; 首都)이다. 계(誡)는 기약함이니, 남을 대하기를 똑같이 하여 거주하는 읍에만 약속하고 경계하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길하다. 성인(聖人)이 대공무사(大公无私)함으로 천하를 다스림을 현비(顯比 ; 드러내서 가까이함)에서 볼 수 있으니, 이는 단지 임금이 천하를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도(道)가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사람이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것도 모두 그러하다. 신하가 임금에게 있어서의 경우로 말하면 충성을 다하고 재주와 힘을 바침이 바로 군주를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도(道)를 드러내는 것이요, 등용의 여부는 군주에게 달려있을 뿐이니, 아첨하고 영합하여 자기를 친애하고 가까이해 주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 붕우에게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니, 몸을 닦고 뜻을 성실히 하여 붕우를 대할 것이요, 자기를 친애하고 가까이하는가의 여부는 상대에게 달려있을 뿐이니,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여 곡진히 따르고 구차히 영합하여 상대가 자기를 친애하고 가까이하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 향당과 친척, 중인(衆人)에 있어서도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삼면에서 몰이함에 앞에 달아나는 짐승을 잃는 의(義;뜻)이다.
[本義] 一陽居尊하여 剛健中正하고 卦之群陰이 皆來比己하여 顯其比而无私하니 如天子不合圍하고 開一面之網하여 來者不拒하고 去者不追라 故爲用三驅失前禽而邑人不誡之象이라 蓋雖私屬이나 亦喩上意하여 不相警備以求必得也니 凡此皆吉之道라 占者如是則吉也라
[朱熹의 본 뜻] 한 양(다섯째 양효)이 임금 자리에 있어서 강건하고 가운데이며 발라서 괘의 여러 음이 모두 와서 자기에게 친애하고 가까이하여, 그 친애하고 가까이함을 드러내어 사사로움이 없으니, 이는 마치 천자가 사면을 완전히 포위하지 않고 그물의 한 면을 열어주어 오는 자를 막지 않고 가는 자를 쫓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삼구(三驅)의 예(禮)를 써서 앞에 달아나는 짐승을 잃고 고을 사람도 경계하지 않는 형상이 된다. 비록 하인이라 하더라도 또한 윗사람의 뜻을 깨달아서 서로 경계하고 대비하여 반드시 얻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은 모두 길한 도(道)이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이 하면 길할 것이다.
象曰 顯比之吉은 位正中也요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드러내어 친애하고 가까이함의 길함은 자리가 바르고 가운데이기 때문이요,
[傳] 顯比所以吉者는 以其所居之位得正中也니 處正中之地는 乃由正中之道也라 比以不偏爲善일새 故云正中이라 凡言正中者는 其處正得中也니 比與隨是也요 言中正者는 得中與正也니 訟與需是也라
[程頤의 설명] 드러내서 가까이함이 길한 까닭은 그 처한 바의 자리가 바르고 가운데를 얻었기 때문이니, 바르고 가운데인 자리에 처함은 바로 바르고 가운데인 도(道)를 행하는 것이다. 친애하고 가까이함은 편벽되지 않음을 선(善)으로 여기므로 바르고 가운데라 말하였다. 무릇 바르고 가운데라 말한 것은 그 바름에 처하고 가운데를 얻은 것이니 비괘(比卦)와 수괘(隨卦)가 이것이요, 가운데이고 바르다고 말한 것은 가운데와 바름을 얻은 것이니 송괘(訟卦)와 수괘(需卦)가 이것이다.
舍逆取順이 失前禽也요
거역하는 자를 버리고 순종하는 자를 취하는 것이 앞의 짐승을 잃는 것이요
[傳] 禮에 取不用命者하니 乃是舍順取逆也니 順命而去者는 皆免矣라 比는 以向背而言하니 謂去者爲逆이요 來者爲順也라 故所失者는 前去之禽也라 言來者撫之하고 去者不追也라
[程頤의 설명] 예(禮)에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취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순종하는 자를 버리고 거역하는 자를 취하는 것이니, 명(命)에 순종하여 도망간 자는 모두 잡힘을 면하는 것이다. 친애하여 가까이함은 향배(向背 ; 좇음과 등짐)로써 말하였으니, 도망가는 자를 역(逆)이라 하고 오는 자를 순(順)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잃는 것은 앞으로 도망가는 짐승인 것이다. 이는 오는 자를 어루만지고 가는 자를 쫓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邑人不誡는 上使가 中也일새라
고을 사람을 경계하지 않음은 윗사람의 부림이 중도에 맞기 때문이다” 하였다.
[本義] 上使中也일새라
[朱熹의 본 뜻] 윗사람이 그로 하여금 중도에 맞게 하기 때문이다.
[傳] 不期誡於親近하니 上之使下 中平不偏하여 遠近如一也라
[程頤의 설명] 친근한 이에게 기약하고 경계하지 않으니, 윗사람이 아래를 부림이 가운데이고 평평하여 편벽되지 않아 원근을 한결같이 대하는 것이다.
[本義] 由上之德이 使不偏也라
[朱熹의 본 뜻] 윗사람의 덕이 편벽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上六은 比之无首니 凶하니라
상육(맨 위의 음효)은 친애하고 도와줌에 시작이 없는 것이니, 흉하다.
[傳] 六居上하니 比之終也라 首는 謂始也라 凡比之道는 其始善則其終善矣니 有其始而无其終者는 或有矣어니와 未有无其始而有終者也라 故比之无首는 至終則凶也라 此는 據比終而言이나 然上六이 陰柔不中하여 處險之極하니 固非克終者也라 始比에 不以道하여 隙於終者 天下多矣라
[程頤의 설명] 육(六 ; 음효)은 상(上 ; 맨 위)에 거하였으니, 비(比卦)의 종(終 ; 끝)이다. 수(首)는 사작을 이른다. 무릇 친애하고 가까이하는 도(道)는 처음이 좋으면 끝도 좋은 것이니, 시작이 있고서 끝이 없는 자는 혹 있으나 시작이 없고서 끝이 있는 자는 있지 않다. 그러므로 친애하고 가까이함에 시작이 없음은 끝에 이르면 흉한 것이다. 이는 비괘의 끝을 근거하여 말하였으나 상육(上六 ; 맨 위의 음효)이 부드러운 음(陰)으로 가운데로 하지 못하면서 험난함(윗괘가 坎卦임)의 극에 처하였으니, 능히 끝을 잘 마치는 자가 아니다. 처음 친애하여 가까이할 때에 도(道)로써 하지 않아 종말에 틈이 벌어지는 자가 천하에 많다.
[本義] 陰柔居上하여 无以比下하니 凶之道也라 故爲无首之象이요 而其占則凶也라
[朱熹의 본 뜻] 음유(陰柔 ; 부드러운 음효)로 상(上 ; 맨 위)에 거하여 아래를 친애하고 가까이함이 없으니, 흉한 도(道)이다. 그러므로 ‘무수(无首 ; 시작이 없음)’의 형상이 되고 그 점괘가 흉한 것이다.
象曰 比之无首는 无所終也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친애하여 가까이함에 시작이 없음은 끝마칠 바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傳] 比旣无首하니 何所終乎아 相比有首라도 猶或終違어든 始不以道면 終復何保리오 故曰无所終也라하니라
[程頤의 설명] 친애하여 가까이함에 이미 시작이 없었으니, 어찌 끝마침이 있겠는가. 서로 친애하고 가까이함은 시작이 있더라도 오히려 혹 종말에 어그러지는데 시작을 도(道)로써 하지 않았다면 종말을 어찌 다시 보존하겠는가. 그러므로 끝마칠 바가 없다고 한 것이다.
[本義] 以上下之象言之면 則爲无首요 以終始之象言之면 則爲无終이니 无首則无終矣라
[朱熹의 본 뜻] 위아래의 형상으로 말하면 시작이 없음이 되고, 끝과 시작의 형상으로 말하면 종말이 없음이 되니, 시작이 없으면 종말이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