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 거제도 오양의 열부를 애도하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거제시 ‘오양(烏壤)의 열부를 애도하며’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는 조선후기 거제면 지역의 유배인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가 거제도 유배기간인 1689년부터 1694년 사이에 실제 전하는 사건을 기술한 산문(散文)이다. 또한 이 글은 김진규(金鎭圭)가 거제시 거제면에서 귀양살이 할 때 지은 잡저(雜著)로, 김진규의 시문집 『죽천집(竹泉集)』 권6(卷之六)에 여러 유배문학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 1658~1716)는 조선후기 노론의 대표적 정객으로 스승 송시열(宋時烈)의 입장을 고수했던 인물이다. 서포 김만중이 친 삼촌이고 누이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교서·서계 작성을 많이 했으며,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도 능했다. 그는 거제반곡서원 터에서 귀양살이를 5년간 했다. 문집으로 『죽천집(竹泉集)』, 편저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있다. 거제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이다.
그리고 『죽천집(竹泉集)』은 35권 12책, 목판본으로, 1773년(영조 49) 아들 양택(陽澤)이 간행했다. 권두에 양택이 쓴 어제(御製) 서문이 있다. 권1은 부, 권2~5는 시, 권6은 기(記)·제(題) 등, 권7은 주(奏), 권8은 책문, 권9는 반교문(頒敎文)·교서 등, 권10은 옥책문(玉冊文)·전(箋) 등, 권11·12는 제문, 권13은 서(書), 권14~28은 소(疏), 권29는 차(箚), 권30은 계(啓), 권31·32는 묘표, 권33·34는 묘지명, 권35는 행장·비명 등이다.
◉ 산문(散文)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는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거제현 오양역(거제시 사등면 오양리) 산밭 골짜기에서 죽은 모씨 처를 애도하는 이야기다. 거제현 오양역(巨濟縣 烏壤驛) 산골짜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모씨의 며느리가 피공으로부터 절개를 지킨 열부(烈婦) 이야기인데 김진규(金鎭圭)가 그 시어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록한 것이다. 당시 조선 중기에는 양반이나 귀족 권세가들의 열녀비나 열녀문은 조정에서 표창하여 비를 세우고 그 가문을 빛나게 하였지만 일반 평민은 그렇지 못하였다. 다행히 김진규 좌참성이 마침 거제도에 유배와 있다가 이 사실을 열부의 시어머니로부터 전해 듣고 기록하였다. 정절하는 마음은 착하고 고고하고 아름다우며 천성을 그대로 지킨 것이라고 김진규 선생은 말하고 있다.
○ 또한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는 잡저(雜著)이면서 병인(幷引)으로 구성된 산문이자, 거제도의 열녀, 오양 열부를 애도(哀烏壤烈婦)하며 쓴 ‘사(辭)’이다. 먼저 이 글처럼 한문 문체(漢文 文體) ‘사(辭)’는 초사(楚辭)에서 나온 말로, 소(騷)나 부(賦)와 비슷한데, 같은 운을 규칙적으로 다는 운어(韻語)를 쓴다. 또 가사(歌辭)는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의 문학을 총칭한다.
그리고 잡저(雜著)는 한문으로 잡다하게 쓴 여러 가지 저술(글)을 말하며 서(序), 기(記), 잠(箴), 명(銘), 부(賦), 표(表), 책(策) 등이 있다. 병인(幷引)은 서문(序文)과 본문을 아울러 쓴 글을 말한다. 특히 한문(漢文) 문체(文體)의 하나인 인(引)은 일종의 짧은 서문(序文)을 말한다. 자기(自己) 뜻을 부연(敷衍)하여 서술(敍述)하는 글이다.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도 처음 앞부분은 자유로운 형식의 산문으로 글을 썼으며, 사건이 일어난 오양 마을 열부의 이야기를 기승전결로 서술했다. 뒷부분은 모두 사언시(四言時)로 편성하여 열부에 대해 저자가 논찬(論贊)했다. 목숨으로 끝까지 지킨 열부(烈婦)의 절개에 대해 여러 고사(古事)를 예를 들어 칭송하였고 또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킨 사람이었다"고 찬양했다.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 오양 열부를 애도하며>* 김진규(金鎭圭)
열부, 거제현 오양역에서 죽은 모씨의 처다. 가난하게 살면서 부지런히 애써 일을 했다. 갑인년(1674년 숙종 즉위년) 가을에, 산밭 같은 곳에서 목면(목화)을 손으로 따고 있었다.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이웃 사람(皮工)이 있었는데 또 그때 이웃사람(피공)이 나무하려 산으로 향해 가다가 며느리(열부)가 혼자 밭에 있는 것을 보았다. 오줌을 누려고 건너가니 다가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으르고 달래다가 안아서 일으켰다. 며느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거부했으나 옷은 모두 찢어지고 온몸은 터졌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피공(皮工)은 그러는 동안 화를 내었으나, 며느리는 음란함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또한 동시에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 일이 밝혀질까 두려워 칼날을 뽑아 위협하였으나 또 다시 따르지 아니하니 이에 곧 찔러 간음하고 죽이고는 시신을 깊은 산골짜기에 내버리고 돌로 쌓아 숨겼다. 이 때 산 나무 과실 열매를 따 모으는 할머니가 있어 간음 장면을 보게 됐다. 마을로 돌아가 이웃 사람들에게 알렸다. 이웃사람들은 모 며느리의 대낮에 벌어진 허물인지라, (머뭇거리다가) 아침까지 돌아오지 못하니 마침내 마을 사람들이 당연히 하나가 되어 찾아갔다. 사방의 이웃들이 두루 퍼져 찾아 부르니 피공(皮工)은 이웃들이 의심스러워 가지 못하고 두려워했다. 시신을 찾고 보니 피가 옷에 물들고 벗겨 있었고 그동안 역복(상을 당한 후에 갈아입는 옷)은 그 칼날에 없어져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하나로 묶여 있었다.
고을현(거제현)관아에 고하고 이 후에 증좌를 찾기에, 곧 의복을 보냈다. 이로써 피공을 잡아 하옥하니 스스로 목을 매었다. 참고 견디지 못한 그 죄를 가려 판단해야하지만 이를테면 또다시 명백히(상세히) 아뢰지 못하다 보니 공로에 대해 표창은 했으나, 고로 있어야 할 게 없어 아쉬워 탄식하였다. 거제도는 어찌 이리도 멀리 위치하고 있는가. 속된 류의 미개한 오랑캐 풍습이 있고 그리고 일반 여염집 며느리는 인품이 낮고 번지럽다. 태어나 자라면서 그동안 밭이랑을 갈며 가르치는 부모(스승)가 없지만, 이로써 강하고 사납고 지조가 있기에, 능히 일에는 실패하지 않는다. 생명을 버리고 다른 곳에서 쓰러지니 이에 어찌 바탕이 곧고 성품이 굳세지 아니한가? 여쭈노라, 타고난 천성이 그러한가? 그러나 구석지고 외따로 떨어진 곳에는 벼슬아치의 사리가 어둡다. 내가 어리석게도 장려하고 기뻐했으니 탄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동안 사람들을 욕보이게 하였다. 힘써 애써도 인간의 한평생을 살다보면 어찌 할 수가 없는 일도 있다.
애석하지만, 만일 옛날 열부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전해 내려오지 않았다면, 자취도 없이(이야기가) 사라졌을 것이다. 다행히 시어머니가 기억하고 있다가 토착민의 이야기로 전해져 듣게 되었다. 무지한 백성의 풍속이 썩 부지런하거나 게으르지 아니하더라도 그로부터, 글(문체)로 기록해 애도하고자 한다.
/ 열부사(哀烏壤烈婦辭)에서 생각하며 말한다(辭曰). "과부(며느리)가 지아비를 향해 따라 갔다"고. "오로지 두 마음을 갖지 않고 한결같았다"고. 자식과 아비, 신하와 군주 사이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위해 관계한다. 누가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 하리오. 어떤 경우는 목숨을 잃음으로서 깎아 아로 새기지만, 지혜로운(아름다운) 여자가 열부(烈婦)라 할 것이다. 그 성품에 홀몸으로 어찌 온전했겠는가?
머리에 쪽을 올린 여자가 몸을 사내에게 맡기고 도적과 질병으로 가난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중국 기주의 들에 들밥을 내오고 중국 천추전국시대 회계산 사건의 치욕을 잊었는가? 치마를 드러내도 가히 편히 할 수 있다면 오직 생각하라! 지아비가 어렵고 가난하면 이에 그 햇솜(목화솜)을 주워 모으려고 밭이 있는 산으로 향해 갔는데 저 땔나무꾼(皮工)이 한없이 어리석었구나. 골짜기가 나를 맞이하고 중국 강수와 한수가 넓었네. 이를 일컬어 물과 강 이름이 같다 한다. 강력하게 핍박하여 꾀어 즐기고 탐하려 행하였으나 정절하는 마음은 맑고 깨끗했다. 원통하게 부르짖고 꾸짖어 분노하지만 칼날 밟듯 변하는 게 불가했다. 절개가 완전하니 자신이 죽는구나. ‘고고하고 밝게 빛남을 거울삼아라’고 말한다. 죄인은 이에 도망치지만, 인간은 항상 유언(자신만의 논리)이 있다. 선과 악의 가르침에 따르는 이유다.
아~ 열부가 멋지다! 어찌 받아들이고 어찌 가르칠까? 이러한 흔적(사건) 하에 덮어버리고 살아가더라도 풍속(관습)은 이런 부끄러운 일로부터 두터이 될 것이다. 시와 예를 배운 것이 어둡고 지도와 사서가 모자라 보이지만, 생명과 함께 의리를 분별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이 배우고 외어 알면 단단하게 굳어진다. 맑은 혼백은 한결같은 바, 특별히 진심으로 믿는다.
구슬(옥)을 생산하는 병장기의 땅 거제도에 오랑캐로부터 진주가 나왔다. 오히려 원한을 덕으로 여겨 비길 데가 없도다. 만물이 어찌 홀로 다 그러하겠나마는 다녀보니 공자가 선(善)하고 아름답다 하겠구나. 오랑캐 같은 바를 칭찬하는 것은 미치지 아니한만 못하다. 나는 인(仁)을 이미 얻어 배웠다. 며느리가 흠잡을 데가 없어도, 마음에 차지 않으랴. 진실로 착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더러운 후손에겐 어찌 벌하지 아니하랴.
나는 글을 지어 고하노니, 백성들에게 영향을 줄 것이다. 온갖 여러 가지 일로 통해 백성에게 와 닿으리라. 지어미나 계집이나 열부를, "타고난 천성을 그대로 지킨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라.
[烈婦 巨濟縣烏壤驛卒某之妻 窮居力作 歲甲寅秋 如山田擷木綿 隣有皮工 亦樵于山 見婦獨在田 便欲滛之 抱持誘刦百端 婦力拒 衣皆裂破 終不從 皮工旣怒不從滛 又懼婦歸發其事 抽刃䝱之 亦不從 乃亂刺以殺 抛屍深壑 積石掩之 會山木摘果之嫗在焉 歸語隣人 隣人陽言某婦朝出不還 隣里當共往尋 徧召四隣 皮工恐不往人疑 脫漬血衣 易服以往 則計紿奪其刃 共縛之 告于縣 令驗問卽輸服 而下獄自經 不克决其罪 令又不爲奏白 旌褒故闕焉 噫 海島遐遠 俗類蠻蜑 而婦匹庶賤陋 生長田畒之 間 非有傅姆之訓 而乃能不敗於强暴 舍命靡他 此豈非烈性貞質 稟乎天者耶 然而吏憃地僻 未蒙奬嘉 可勝歎哉 余僇人 力不能顯之世 而惜其久將湮沒無傳 姑記得於土人者 爲辭以哀之 仍欲以風厲甿俗
辭曰 惟婦于夫 一而不貳 子父臣主 參爲人紀 孰無秉彛 或斲以喪 懿厥烈婦 獨全乎性 結髮許身 窮窶匪患 冀野之饁 會稽之案 帬布可安 唯念夫寒 爰掇其緜 于山之田 蚩蚩彼蕘 要我乎谷 江漢之廣 謂如淇濮 偪以强力 訹用美利 貞心皭如 寃號憤詈 蹈刃莫渝 節完身殞 高高監昭 罪人安遯 世恒有言 善惡由敎 猗嗟烈婦 焉受焉斅 跡下處荒 俗厖業鄙 學昧詩禮 觀乏圖史 辨義與生 若固講識 淑靈攸鍾 信篤而特 玉産戎土 珠出于蠻 德尤無類 物豈獨然 行之孔媺 褒胡不及 旣得吾仁 婦無未慊 善苟不彰 陋裔曷刑 作辭以予 以告黎甿 凡百黎甿 有女有婦 念爾烈婦 秉彛人有]
◉ 「애오양열부사(哀烏壤烈婦辭)」의 배경이 된 사등면 오양(烏壤) 마을은 거제도 유일의 역원인 오양역(烏壤驛)이 있었던 유래 깊은 곳이다. 여기는 왕조시대까지 육지에서 거제도로 들어오는 모든 물자와 사람들의 관문(關門) 역할을 하였다. 고려시대 995년 성종 14년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모두 525곳의 역이,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 통제영 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 중에 마지막 역이었다.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은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까지 연결되었다.
역은 죄인의 체포, 수감, 석방의 공문서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정치 상황, 집안과 지인의 편지, 해배 사면서까지 가장 먼저 정보를 전달하던 곳이라, 거제도로 유배 온 수많은 분들에게는 절망과 체념, 그리고 환희와 희망의 공간이었다. 그래서 김진규 선생 또한 소식을 듣고자 오양역에 들리었다가 마을의 노파에게 오양열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잊혀 질 뻔한 열부(烈婦)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그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