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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십자가 혁명
일자: 2023년 4월 23일 주일
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21~23
설교 목적: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하여 묵상하고 있다. 이 사건을 성경 전체의 이야기 속에서 조명하고 그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학자 톰 라이트를 따라 나는 부활의 의미를 지난 주부터 혁명에 비유했다. 그 이야기를 좀더 발전시켜 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혁명이 십자가의 혁명이라면 우리는 그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이 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우리를 어떤 존재로 설명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이 세상과 우리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것이 이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 개요
1. 십자가 혁명이란?
2.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
3. 요한복음의 위임식: 죄를 용서하는 권세
4. 누가복음의 위임식: 죄사함과 회개
5. 십자가 혁명가의 꿈
1. 십자가 혁명이란?
예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하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결국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는 혁명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시면서 그에게 붙들려 있던 모든 사람을 풀어 자신에게로 이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2:32).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눅 11:20).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면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 권세자들과 통치자들을 몰아내는 일종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혁명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고 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땅에서 들리게 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날이면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죽음이 이 세상의 임금을 몰아내는 승리였다고 골로새서에서 말했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예수님의 혁명은 십자가로 승리하는 혁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혁명을 우리는 십자가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이 얼마나 허약하고 거짓되며 비겁한지를 보여주는 표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만천하에 알리는 증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롬 1:3, 행 2:36).
처음에 십자가는 저주와 실패와 수치의 상징이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는 그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증표였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판결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를 바르게 깨닫고 나자 교회는 십자가를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편지에 잘 나타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23~2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압축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성숙해 가는 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번 설교에서 지난 주에 이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혁명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사실 갈수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무엇을 확신할 수 있는지 더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를 더 간절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과 희망을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2.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신 일이 소개됩니다. 그것은 세족식과 성만찬입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두르신 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동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에 대하여는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잘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톰 라이트(Tom Wright)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으로 소개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으로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처를 삼으신 곳은 성전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몸이 곧 성전이라고 소개합니다(요 2:21~22).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온 사람들은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세족식은 장차 있을 언약식에 참여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유사합니다. 하나님이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실 때 그들에게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출애굽기 19:10~11
이렇게 자신을 정결하게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습니다. 그것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통하여 특별한 일을 이루실 목적으로 체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백성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심으로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일찍이 약속하신 일입니다(창세기 12:3).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겉옷을 벗어 수건을 허리에 동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자신의 죽음이 바로 그와 같이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는 것임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혁명에 동참할 사람들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세족식을 마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언약의 식사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찬식으로 기념하는 이 식사는 본래 유월절의 식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의 식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신 그 식사는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는 의식이며 하나님의 새 언약에 동참할 백성을 세우는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언약 백성으로 태어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던 것처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충실하게 따를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요 13:34~35).
요한복음은 교회를 언약에 동참하는 새 이스라엘로 소개합니다. 교회는 새로운 토라(새 계명)를 받으며, 새 언약에 동참하기 위하여 정결예식을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세족식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처럼 제자들을 하나하나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돌아보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정결하게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성찬식을 행함으로 우리들도 사도들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과 새 언약에 동참했음을 기념하고 확인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도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혁명에 동참한 사람들입니다.
3. 요한복음의 위임식: 죄를 용서하는 권세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로 설명된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이 소개됩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문들을 잠가 놓은 방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손과 옆구리의 상흔을 보고 나서 기뻐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평강이 있으라 말씀하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절).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 장면은 마치 창세기 2장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을 맡아서 관리할 대리인을 지으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 들이시고 그 동산을 경작하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이제 모든 짐승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것을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의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지으시고 낮이라 부르시고, 궁창을 지으시고 하늘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궁창 아래의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바다라 부르시고 드러난 뭍을 육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별들을 지으시고 그 이름을 부르시는 분입니다(시 147:4).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흙으로 들짐승과 공중의 새를 지으신 후에 아담이 무엇이라고 그것들을 부르나 보려고 사람에게 그것들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들짐승들과 공중의 새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것들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겠다고 말씀하신 후에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숨을 내쉬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새로운 대리인으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사셨던 것처럼 이제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셨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요 20:23)
예수께서는 자신의 일을 대신할 제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나 혈루증에 걸린 여인에게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9:2, 눅 7:48). 죄를 용서하는 권세는 본래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 권세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막 2:10, 눅 5:24). 그런데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맡기신 일은 죄를 사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이 바로 세상 죄를 짊어지신 일 아닙니까? 모든 사람들을 묶고 종살이하게 하는 죄의 권세를 깨트린 것이 십자가의 능력이 아닙니까?
이제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을 전하면서 이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으니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말고 하나님의 빛나는 자녀로 살자고 초청했을 것입니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선언은 사실 구약성경에서 예언자들이 전한 복음입니다. 이사야 40장을 보면 하나님이 그 예언자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죄사함의 복음이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이사야 40:2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제 노역은 끝났고 해방을 얻는다는 약속이며 선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혁명에 동참하는 제자들이 전할 소식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면서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4. 누가복음의 위임식: 죄사함과 회개
십자가의 혁명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맡은 일에 대하여 누가복음에는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까요? 부활하신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임무를 맡기셨다는 이야기를 누가는 이렇게 들려줍니다: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누가복음 24:36, 45~48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경을 풀어주시면서 자신의 고난과 부활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임을 설명하시고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과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성경을 들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는 이사야 40장의 메시지를 인용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41장과 42장을 이어서 보면 하나님은 이방나라들을 초청하시고 자기의 의로운 종을 통하여 세상에 정의를 베푸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 끝에 사는 사람들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대열에 합류하라고 초청하는 말씀이 나옵니다(사 42:10).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죄 사함과 회개의 복음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의 권세를 이기신 사건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제 죄가 용서되었으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의 권세를 깨트렸으며 사람들을 종살이하게 하는 세력들을 쫓아내셨음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모든 묶임에서 풀려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마다 구원을 받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묶고 있는 죄와 욕심과 저주의 권세를 깨트렸으며 이제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죄 용서를 받으며 구원을 받는다고 전했을 때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사도들은 경험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는 호텔 등지에서 집단으로 마약을 투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도시 켄싱턴에서는 좀비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는 것은 마약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죽이는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그 하나는 맘몬(Mammon)신으로 소개되는 돈이며, 두번째는 아프로디테(Aphrodite)로 소개되는 쾌락이며, 세번째는 마르스(Mars)로 소개되는 전쟁입니다.
이 세 가지의 권세가 얼마나 강력한지 돈을 위해서라면 수치나 불법도 개의치 않습니다. 공직사회나 군대, 그리고 교사들의 모임에까지 성적인 일탈을 관행으로 여긴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한 청년이 말하기를, ‘세상은 밀림이며 정글이에요!’라고 합니다. 주중에 만난 경찰관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경찰관에게 소원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돈이고 하나는 승진입니다!’ 그 두 가지가 최고의 관심사이며 그것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보복과 폭력은 우리의 일상에서 나타나며 동시에 국제적인 문제입니다. 보복운전과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을 해결하지 못할 때 상해를 입히는 일이 발생합니다. 국가 간에도 갈등이 고조되어 전쟁이 발발하면 무고한 백성들이 수없이 죽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불구덩이 속으로 몰고가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 세력들은 사람들을 교만하게 하고 복수심에 불타게 함으로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맡은 임무는 죄 사함과 회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물리쳤으며 누구든지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면 자유를 얻으며 구원을 받는다고 힘있게 전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제자 또는 십자가의 혁명가라고 하겠습니다.
5. 십자가 혁명가의 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 누구입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미래가 있습니까?
성경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제사장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앞으로 들어갈 땅을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열명의 정탐꾼들과 많은 백성들은 자신들을 메뚜기처럼 약한 존재로 여기고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성경의 사람들과 동일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경찰관의 제복을 입었지만 오직 승진과 돈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어렵게 교사가 되었지만 교사로서 신념과 소신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말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청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이 모든 설명이 현실이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말도 맞으며 예수님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을 십자가로 물리치셨다는 말도 맞습니다. 좀비 마약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사람도 이 땅에는 있으며, 당장 승진과 돈이 모든 것인 것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도 이 땅에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묶고 눈멀게 하고 두렵게 한 세력들을 이미 쫓아내셨으므로 자유로운 심령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이 땅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을 새롭게 만들었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새로운 세상을 누리고 새 사람으로 살 수 있음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도 현실입니다.
이 두 가지 현실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현실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당당하고 따뜻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돌보고 권면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때로는 희생과 눈물을 요구하고 인내가 필수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조차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일깨워 주십니다.
오늘도 어떤 사람들은 마약을 코로 들이마십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어서 부자가 되어서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가득 담아서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견딥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언약의 식사로 이끌어 주셨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의미를 소개하는 성경 이야기를 배우고 묵상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죄와 두려움에 점령당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배우고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며 세상과 우리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우리의 순종과 십자가 혁명을 통해서 현실이 될 것을 바라봅니다.
이 그림을 가슴과 생각 속에 선명하게 그리며 사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혁명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꿈과 비전을 포착하며 마음에 품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노력에 교우 여러분들이 함께해 주실 것을 권면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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