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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질병은 원수가 아니다>의 줄거리:
왜 복음서들은 그토록 반복적으로 예수님의 질병치유 사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 역시 예수님의 행위적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치유 행위의 말씀의 공통된 핵심 메시지가 궁금합니다. 그 메시지에 따르면 질병은 우선 퇴치하고 봐야할 원수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애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엄청나게 유익합니다.
질병은 원수가 아니다
(마가복음 6:53~56)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질병은 원수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질병은 원수가 아니다’
질병은 애인도 아니지만 원수도 아닙니다. 곁에 두고 아껴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무조건 미워하고 배척해야 될 대상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보게 될 본문의 내용은 압축적이고 개괄적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바다 위를 걸으신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다 서편에 있는 게네사렛으로 가십니다. 마가는 그곳에서 행하신 사역의 내용을 치유 사역으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치유 받는 자들과 예수님의 개별적인 만남을 조망하기보다는 개괄적으로 치유 사역이라는 틀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서술은 열두 해 동안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고침 받은 사건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사건 또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에서 고침 받은 사건 등과 대조적입니다. 이 사건들은 개인의 신앙을 현미경으로 보듯이 자세히 관찰하였습니다. 반대로 게네사렛에서는 개별적인 관심이 제거된 채 개괄적 치유 사역이 통째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근본적으로 질병이 무엇이며 질병에 대한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질병은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유익을 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질병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유익은 바로 예수님을 찾게 한다는 점입니다. 55절을 보면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질병에 걸렸기에 이토록 절실하게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건강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으로 인해 병이 나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마가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개별적인 속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압축적이고 개괄적인 서술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본문의 중심내용은 “예수님이 질병을 고치셨다”가 아니라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질병을 고침 받은 개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예수님과의 만남은 일대일입니다. 예수님과의 사이에 누구도 끼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일대일로 얼굴을 맞대는 만남을 가졌던 것입니다. 한편 본문 56절을 보면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라는 내용도 나옵니다. 손을 대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님에 대한 접촉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접촉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접촉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만남과 접촉의 원인이 된 것은 바로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질병은 원수처럼 여겨집니다. 질병이 생기면 하루라도 빨리 질병을 퇴치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질병 때문에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예수님과 일대일의 만남을 이루게 되었기에 질병을 마냥 원수로 여길 수만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치유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들의 관심 또한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순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필요를 못 느끼던 사람들이 질병 때문에라도 예수님을 찾게 되었고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질병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가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일임을 믿습니다. 실제로 이 세상은 바늘 끝만큼의 틈새도 없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메워져있고 하나님의 주권이 닿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전 세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300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22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하물며 22만 명이 죽은 이 사태가 하나님의 주권과 무관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개체 수까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질병이 생겼다면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이기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있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 주권적 의도의 최우선적 내용은 바로 예수님을 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질병에 걸렸다면 예수님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도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질병에 걸릴 수 있듯이 본문 말씀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도 또한 게네사렛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탄생과 죽음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힌두교의 스승일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태어나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죽게 됩니다. 힌두교의 스승이 질병에 걸렸을 때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내용은 우리에 대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땅 끝까지 예수를 전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들을 수 없다면 예수님을 찾을 기회조차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기의 신에게 의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지구상 75억 명이 질병에 걸릴 때마다 동일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만큼 절대적인 하나님의 철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의사들이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더라면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과 환자가 일대일로 만난 것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라고 확인해야 맞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우리부터 질병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나가야만 합니다. 질병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의도하심으로 주신 사건입니다. 그 의도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무조건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본문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세히 다루지 않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로 압축하여 다루는 이유는 이러한 특징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예수님을 찾아 다녔던 것처럼 질병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질병을 예수님을 향하게 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육체의 질병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지게 된 우리의 마음 상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과 마음이 멀어진 것이 얼마나 큰 사건이고 위기이며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의 중대성을 일깨워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육체의 질병을 허락하십니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상징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과 접촉을 이루고 그것을 지속하는 상태가 곧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과의 밀착은 곧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는 길이 되었습니다.
질병은 마치 비상 신호와 같습니다. 비상 신호는 위험이 발생할 때에 울리게 됩니다. 비상 신호를 원수로 여겨 꺼버리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비상 신호를 포착하면 그 원인을 해결하고자 하게 됩니다. 따라서 질병이 비상 신호라면 우리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과 마음의 거리가 멀어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비상 신호부터 끄고 보려는 태도를 취해왔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인해 마음의 평강이 깨어진 사태를 해결하기보다는 그로인해 발생한 비상 신호인 질병을 퇴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원수는 질병이 아닌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입니다. 오히려 질병은 유익이 되는 내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뼈가 부러지면 깁스를 하게 됩니다. 깁스는 굳으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석고를 붕대에 발라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깁스를 한 상태에서는 씻을 수도 없고 가려워도 긁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깁스가 불편하다고 해서 깁스를 원수로 여겨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깁스를 깨뜨려 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치료를 방해하는 원수일 것입니다. 뼈가 붙을 때까지 깁스는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질병의 역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질병을 주신 이유는 비상 신호이자 깁스입니다. 뼈가 부러진 것처럼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벌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뼈가 부러지면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가 벌어진 상태에서는 무엇을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비상사태는 달리 없습니다. 돈이 없는 것은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비상사태는 아닙니다. 사업이 안 되는 것도, 자녀가 대학에 떨어진 것도, 승진이 안 되는 것도, 목회가 안 되는 것도 비상사태는 아닙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과의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이야 말로 마음의 비상사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알려주고 회복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 질병입니다. 따라서 질병이 생긴다면 질병을 퇴치하는 일에 앞서 질병의 원인이 된 마음의 비상사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그 해결 방법이 바로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삼위일체를 이루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밀착은 곧 하나님과의 밀착이 됩니다. 그러므로 질병은 원수로 여길 대상이 아닌 뼈를 붙이는 깁스와 같이 불편하지만 유익을 주는 대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사탄의 가시라 부를 만큼 괴로운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 질병을 고치고자 진지하게 세 차례에 걸쳐 기도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의 질병을 고치면서 전도를 하고 다녔으나 정작 자신의 병은 고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에게 깨달음을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보면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주시는 것으로 부족해서 아예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기를 바라시며 질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밀착하기 위해서라면 사탄의 가시라 부를 정도로 고통과 괴로움을 주었던 질병을 끌어안고 살아감은 물론이고 자랑까지 하겠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에서도 드러나듯이 질병은 원수가 아닙니다. 질병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부러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깁스입니다. 그렇기에 질병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찾도록 밀어붙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서 보자면 질병은 너무나도 감사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한편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질병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다면 질병은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질병의 역할은 예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저도 죽을 만치 아팠던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만 몸이 극도로 괴로울 때에는 돈 걱정, 자녀 걱정, 부모님 걱정을 할 틈이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은 병을 낫게 해달라는 기도조차도 싫어합니다. 너무나 몸이 아픈 나머지 빨리 죽어서 고통이 없는 하나님 나라로 가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러한 질병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도를 바로 안다면 예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밀착하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밀착하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과 밀착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밀착하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밀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틈새 없이 밀착을 하게 되면 질병이 지속될 이유는 사라지게 됩니다. 질병의 완치 확률은 크게 높아지게 됩니다. 확률을 언급하며 무조건 낫는다고 확신할 수 없는 이유는 각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으며 사도 바울과 같이 질병이 지속되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과 같은 상황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평생을 질병을 염두에 두고 살았던 바울은 신약성경 절반을 기록하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될 필요는 없으나 바울과 같은 입장이 될 필요는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병을 계기로 삼아 십자가의 예수님과 밀착을 이루게 되면 질병의 목적은 다하게 됩니다. 따라서 질병의 완치 확률도 극도로 높아질 수 있음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오해를 하나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질병은 하나님과의 밀착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의 밀착을 이루지 못한 죄적인 상태의 벌과 징계로써 질병이 주어진다고도 생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일부 맞는 것 같으나 틀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스스로 하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 중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의 사이를 좁힐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고 그것이 질병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은 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질병은 퇴치해야 될 원수로 여길 수 없으며 나를 돕는 지원군으로 여길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비상사태를 제거하기 위해 동원된 지원군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병자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일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사람과 영구히 만남과 접촉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만드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늘 기억하며 질병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작은 질병이든 큰 질병이든 예수님과의 접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신호에 크게 반응하여 예수님과 밀착을 이룰 수 있다면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의 몸은 신호기입니다. 하나님과의 간격이 벌어지면 질병이라는 이상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질병은 우리와 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시기 위하여 평생 질병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사랑임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질병이라는 신호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밀착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하였고 이것도 부족해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는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살면서 많이 아프셨고 지금도 아픈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질병은 애인도 아니지만 원수도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질병은 깁스와 같이 불편하지만 도움을 주는 대상입니다. 나와 가까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에 따라 질병은 주어지기도 하고 낫기도 할 것입니다.
이 질병이라는 신호에 정확하게 반응할 때에 질병의 목적은 달성됩니다. 그럴 때에 질병의 완치율 또한 극적으로 향상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병이 낫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강하게 밀착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한 병이라면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마가는 이러한 내용을 본문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아프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늘 지켜보시며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기를 바라신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연합하기를 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밀착을 끝까지 유지해나가도록 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