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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 제2차 진주성 전투(晋州城 戰鬪)
임진왜란 중이던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진 전투. 단일 전투 기준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투로 추정되기 때문에 진주성의 혈전(晋州城之 血戰)이라고도 불린다.
마에다 토시이에, 도쿠가와 이에아스를 제외한 히데요시 휘하 아래에서 가용 가능한 일본의 모든 영주들이 이 전투에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동원한 병력 역시 9만명이 넘는 숫자인데 이는 당시 강화협상에 따라 부산포로 퇴각한 일본이 점령지를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전력을 끌어 모은 것과 다름없다. 그야말로 히데요시가 전설이 된 불사신을 쓰러트리기 위해 전력을 바친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경우 승산이 없어보이는 상황에서 상당수의 무장들이 구원을 포기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와 의병장들이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사지에서 목숨을 바쳤다. 이 전투에 대해 일본군을 따라와 조선에 머물던 한 왜승(倭僧)은 "조선의 용감한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었다."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일본으로서도 간담이 서늘했던 전투였다.
내성과 외성이 있고, 남쪽에는 강이, 서쪽에는 절벽을 끼고 있어 평지읍성치고는 공략 난이도가 매우 높은 성이다. 다만 전쟁 직전 확장해 쌓았던 동문 쪽에 대한 방어력 문제가 임진왜란기에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2차 진주성 전투 때 먼저 떨어진 곳은 방어력이 약한 동쪽이 아니라 북장대 쪽이다.
이때에 명나라는 평양성 수복전을 통해 전쟁 목적, 즉 만주로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는데 성공하여 참전의 일차 목적을 달성하자 더이상의 전역 확대를 막고자 일본과 협정을 맺고 조선에서 빨리 떠나고 싶어했다. 조선 측은 이러한 화친 기도에 몹시 반대했으나 상국의 권위를 활용해 주도권을 잡은 것은 명이었다. 단지 유격 오종도(吳宗道)만이 휘하 군대를 이끌고 한양에서 남하했으나 죽산에서 함몰 소식을 듣고 귀환한다.
그때 막 도원수가 된 권율은 진주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영천 군수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말하기를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나 안 쪽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주장(선조 26년 6월 1일)했다.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곽재우도 이런 병력차는 도저히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차라리 자결을 하면 했지 저런데서 개죽음은 못하겠다"면서 진주성 구원을 포기한다.
반면에 일부 장수와 군인, 소수의 의병들은 기어이 진주성으로 들어갔다. 사실 2차 진주성 전투는 딱히 기습도 아니었고 양측 모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주성의 군인들은 충분히 피신할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진주성 방위군 측은 명군과 다른 조선군 장수들의 이러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주에 남아 싸울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일본의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고, 무슨 이유든 진주가 함락되면 전라도가 위험하므로 계속 진주를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1차 전투의 승전으로 인해 영남 지역의 백성들 및 인근의 백성들 사이에 '일본군으로부터 도망치기는 어렵고 진주성은 견고해서 함락 안된다' 라는 소문이 번져 수만의 백성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느린 피난 속도는 일본군의 진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피난처로 진주성을 떠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전라도를 지키는 길목이라는 명분과 함께 수성의 동기가 하나 더 늘었을 수도 있다. 일본군을 피해서 온 백성들을 차마 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즉,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병장과 관군 장수들은 다들 죽을 것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온 것이다. 임진왜란 사상 최대의 혈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3월 10일 경상도 상주 주변, 부산포 주변, 상주와 부산포의 연결선상의 축성 및 병력 배치, 수군 배치와 더불어 진주성 공략군으로 37,100명의 병력을 편성할 것을 명령하고 있었다. 다른 임진왜란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 같은 일본 기준으로 볼 때 애송이 다이묘들이 주력이었으나 이 전투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성을 무조건 함락시키라는 특명을 내렸기에 다테 마사무네 같은 거물 다이묘도 참전하게 되었다. 왜군 10만 대군이 주요 무장 전체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참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응한 조선군은 최소 3,000명, 최대 15,000명까지 추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제2차 진주성 전투 5개월 전 진주에 머물던 김성일 휘하 병력 수는 15,000명에 달하나 이 병력 전체가 진주성 방위군이었을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것을 진주성 방위군 총수로 계산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른다. 일본군이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전사자 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전투 이후 진주성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조선 측 장수는 한명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입성한 관군 및 의병 총 숫자는 아무도 확실히 알지는 못한다.
진주성도
▲ 조선군 병력 추정치
▸ 창의사 김천일 -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 입성, 전사자 파악 수 60명. 의병을 총괄했으며, 동시에 사실상 성의 총사령관으로 방어전을 지휘했고 그의 휘하로 아들 김상건, 공조 좌랑 양산수, 양산숙, 군관 조인호, 의병장 유희진, 서정후, 윤성립, 최희급, 박운 등이 있었다.
▸ 경상 우병사 최경회 - 3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했는데 전사자는 420명으로 입성시보다 병력이 많다. 최경회가 임란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의병장 중 한명이며 의병의 관군화 과정에서 경상 우병사가 된 것을 생각하면 입성 당시 그가 지휘한 의병이 파악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군을 총괄했고 그의 휘하에는 최희립, 문홍헌, 김예수, 구희, 최억량, 안기중, 오방한, 김인갑, 김의갑, 문정, 최홍우 등이 있었다.
▸ 충청 병사 황진 -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입성. 전사자 파악 수 97명. 가장 활약한 장군으로 여겨진다. 휘하에 강홍덕, 윤구수, 소제, 양응원, 김사종, 김언종 등이 있으며, 강홍덕은 황진 휘하의 부장으로 종군했다.
- 그외에 태안 군수 윤귀수, 결성 현감 김응건, 당진 현감 송제, 남포 현감 이예수, 황간 현감 박몽열, 보령 현감 이의정, 해미 현감 정명세, 회덕 현감 남경성, 웅천 현감 허일 등 다수의 충청도 수령들이 휘하 병력과 함께 황진을 따라 남았다. 단 이 병력은 황진이 거느린 병력에 포함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오희문의 쇄미록에 의하면 전사한 호서(충청도) 수령의 수가 9인이라고 하는데, 그중 한명인 회덕 현감 남경성은 후에 극적으로 생존했음이 확인된다. 황진 휘하의 군관인 정로위 인발도 극적으로 생존해 이시언에게 이를 보고했다. 또 그밖에 황진의 일가인 6촌동생 황대중이 황진 휘하에 참여했다.
▸ 사천 현감 장윤 - 입성시 300명. 전사자 수 파악 안됨. 휘하에 남응개, 김대민, 김신민 등이 있었다. 당시 황진 다음으로 전투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입성시 파악된 병력의 수와 파악된 전사자 수가 상당히 차이나며, 특히 원래 진주성 방위를 맡았던 '본주군'의 총수가 몇명이었는가, 진주성 방위 준비를 할 때에 이 병력도 헤아려졌는가는 논란거리이다. 현재는 기본적으로 진주성에 배치돼 방어하던 주둔군인 본주군이 어림잡아 2,400명 ~ 3,000명.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입성하면서 끌고 들어가 규합한 병력이 2,800명 ~ 3,000명, 이후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하기 직전까지 입성한 의벙 및 관군 수 미상, 도합 6,000명 ~ 7,000명 정도가 진주성 방어에 나선 것으로 파악된다.
◆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전개
전투 전야(6월 15일 ~ 6월 20일)
일본군은 6월 15일 군을 출발시켰다. 15일 당일 함안을 점령하고, 16일 반성을 차지했으며, 18일 정진을 건너 의령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이 전진해오는 상황에서 이미 늦었다고 판단했는지 명군의 장수 유정의 부장인 왕필적과 상주 목사 정기룡이 19일 성에 들어와 "유 총병(유정)의 군사는 성의 외곽에서 지원하고자 하는데 그 선봉은 이미 삼가에 도착해 있으니 경들은 잘 방어를 하라" 하고 격려하고 돌아갔다.
6월 21일
일본군 기병 200여 명이 동북쪽 산인 순천산에 올라가 성 주변을 정찰하고 군대를 투입해 진주성 주변에 해자를 메우는 일에 착수했다. 또한 인근 제현에 군대를 분산 주둔시켰는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사방 수백 리에 달했다고 한다.
6월 22일
아침 8시경에 일본군 기병 500여 명이 북산에 올라가 군세를 과시했고, 이후 10시에 일본군 본대가 도착했다. 일본군 제 4대, 제 5대 연합군은 개경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외부의 구원군을 저지하는 임무에 들어갔으며, 나머지 군은 향교 길가로 늘어서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동문은 우키타 히에이에가 지휘하는 제 3대가, 북쪽은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제 1대가, 서쪽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제 2대가 포진하였다 전한다.
일본군은 먼저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다. 낮의 1차 공격에 대응해 조선군이 일본군 30여 명을 쏘아 맞추차 일단 물러났고, 초저녁에 다음 부대가 도착하자 일본군은 다시 공격, 저녁 10시에 물러났으며, 밤 12시에 다시 진격했으나 황진, 이종인, 장윤, 김준민, 오유, 이잠, 강희보, 강희열 등 조선군 장수들이 진두지휘로 방어전을 펼친 끝에 새벽 4시에 물러났다. 특히 순성장 직을 맡은 황진이 대활약했다고 한다.
또한 이때 일본군은 진주 대첩 당시 상당히 곤욕을 맛보았던 외곽 해자를 메꾸는 작업에 들어가, 서북쪽과 동남쪽에 둘러친 해자의 물을 빼고 흙으로 매꾸어 공격 루트를 만들었다.
이날 저녁 호위병 부장 강희보가 김천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고, 이에 강희보의 부하인 임우화를 파견했으나 일본군에게 붙잡혔다. 일본군은 이 전령을 결박한채로 공격조 맨 앞에 내세워 심리전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6월 23일
일본군은 해자를 메꾸는 일을 마무리한 다음 죽창 등 공성용 기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격렬한 반격에 격퇴되었다. 조선군은 낮에 세번 싸워 세번 다 격퇴했고, 저녁에는 네번 싸웠으나 네번 다 격퇴했다.
6월 24일
전날의 맹공 직후 일본군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5천, 6천여를 전진 배치해 마현 쪽에 포진했고, 500명 ~ 600명 남짓을 동쪽에 전진 배치했다.
6월 25일
동문 쪽 해자까지 마저 메꾸는 데 성공한 일본군은 이곳에 작은 언덕을 쌓고 정루를 설치한 다음 성을 내려다보며 사격전을 시도했다. 이에 황진이 진두지휘하여 진주성 안에 마찬가지로 언덕을 만들어 현자 총통을 올리고 맞사격전을 벌여 이를 격파했다. 이날의 공격도 23일과 마찬가지로 낮에 세번, 밤에 네번 있었으나 일본군은 모두 격퇴당했다.
이때에 고성의 의병장 최강, 이달 등이 진주성 구원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규모가 크고 경계가 삼엄해 접근에 실패했다. 오히려 최강이 이끄는 의병군 300명은 일본군의 역공에 포위 섬멸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최강의 분전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6월 26일
이날에는 일본군이 생가죽으로 짠 나무 방패(맨틀리트 계열로 추정된다)를 만들어 화살과 총탄을 막으면서 성을 허물기를 시도했다. 이에 성에서 바위와 나무를 아래로 굴려 막아냈다. 또한 동문 쪽에 높은 망루를 만들고 그곳에서 화공을 시도해 성 안쪽 초가집이 상당수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목사 서예원은 겁을 먹고 우왕좌왕했고, 이에 김천일은 장윤으로 하여금 가목사를 삼았다.
직후 장마비가 내려 궁시가 풀어지고 병사들이 피곤해했다. 이에 일본군은 '대국의 군사도 장차 항복할 것인데 너희 나라가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글을 던지자 '우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싸울 따름이다. 천명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무찌를 것이다.' 고 답했고, 이에 일본군은 '당장(唐將)[41]은 이미 모두 물러갔다.' 하는 등 심리전을 지속적으로 걸어왔다. 이날에도 밤낮으로 쉬지않고 공격해온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6월 27일
가토 기요마사 군과 구로타 나가마사 군이 귀갑차를 만들어 성을 공격했다. 이를 김해 부사 이종인이 진두지휘해 격퇴했다. 또한 동문과 서문 양쪽에 언덕을 쌓고 누각을 만든 후 사격전을 벌였는데 이런 공격에 조선군은 전사자가 300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순천 의병장 강희열도 이런 저격에 의해 전사했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북문을 공격해 성문 위로 올라오기까지 했지만 이종인에 의해 격퇴되었다.
6월 28일
전날 저녁 일본군이 공격해왔던 북쪽 성곽 쪽에 일본군이 밤 사이 몰래 성벽에 접근해 성벽을 무너뜨리려 함과 동시에 기습을 감행했다. 이때의 경계를 맡은 것은 서예원이였는데 겁먹고 제대로 돌아보질 않아서 성벽 자체에 심각한 대미지를 입은 것. 이에 이종인은 경계에 소홀했던 서예원을 책망했다. 이날에도 하루종일 일본군은 대공세를 벌였으나 이 또한 격퇴당했다. 그러나 이날 수성전에서 가장 큰 공이 있었던 황진이 전과를 확인하다가 숨어있던 일본군에 의해 저격당해 사망한다.
보다시피 조선왕조실록에 황진이 저격당해 전사했다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다. 50m 이내의 거리라면 조총으로 저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황진의 허무한 전사와 서예원의 무책임함으로 인한 북쪽 성벽의 약화는 사실상 진주성의 운명을 결정지은 치명타로 일컬어진다.
6월 29일
마지막 날, 황진을 대신해 서예원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서예원이 겁을 내며 울고 다닌다고 해서 경상 우병사 최경회는 서예원을 참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고, 대신 장윤을 순성장으로 삼았지만 곧 전사했다.
이날 폭우가 내려 동문이 무너져 일본군이 난입해오자 이종인이 이를 일시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다시 귀갑차를 활용해 북쪽 성벽도 무너뜨리려 시도, 정오 무렵 기여코 이에 성공하면서 북쪽을 담당하던 창의군이 무너졌고 결국 이쪽으로도 일본군이 난입하면서 진주성은 함락된다. 수성장 김천일과 그 아들인 김상건, 최경회와 고종후, 최기필 등은 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김준민 이하 장수들 대다수는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종인은 적병 둘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했고 목사 서예원은 도망치다가 잡혀 죽었다. (일본측 기록에서는 목사가 싸우다 부상을 입고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공격해 죽였다고 한다.)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죽은 자가 6만여, 일본 측에서는 이것이 과장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일본 측 자신의 사료에서도 음덕기에서는 진주성에 인구가 3만이고 그중 강으로 도망친 수백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죽었다고 기록되 있으면 또한 일본전사 조선역에서는 일본군이 취한 수급만 2만이 넘고 그 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포획했으며 익사한 자의 수도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하고 있다. 실제로 임란 후 진주 일대의 인구가 너무 급감해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까지 했다. 살아남은 자는 황대중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여기서 포로로 잡힌 강우성은 일어 교육책자인 첩해신어를 쓴 바 있다. 전투 후 일본군은 진주성을 철저히 허물어 평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2차 진주성 전투 개황도
▲ 끌려간 포로와 탈출한 생존자
비거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정평구는 비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하지만, 비거가 부서져 그 부상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훗날 군자감정을 역임한 강우황은 이 전투 당시에는 어렸는데, 아버지 강기룡이 전사한 것을 알고 진주성에 들어가 동생 강계황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고 시묘를 하다가 왜적에게 붙잡혔고, 부산 동래까지 끌려갔다가 탈출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황진의 육촌동생 황대중이 이 전투에 살아남았다가 남원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최홍우는 작은 아버지 최경회에게 성이 함락되기 전에 최경회의 그림과 언월도를 받으면서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부탁받아 성을 탈출했고, 의병장 임희진의 아들 임달영, 임준영은 성이 함락되기 전에 탈출했다.
인발은 황진 휘하의 군관으로 충청도 보령에 살았고 6월 15일에 함안에서 진주성으로 들어갔으며, 신북문을 지키다가 화살이 떨어져 성 밖으로 뛰어내려 시체 속에 묻혀 있다가 밤을 틈타 몰래 빠져나와 진주성이 함락된 상황을 조정에 보고했다. 함양 등 인근 군, 현의 병사는 최경회 소속으로 대부분 죽었으나 이인년, 선응남 등 몇 명만 살아남았으며, 회덕현령 남경성은 성이 함락된 날에 왜적에게서 푸른 바지를 빼앗고 머리를 단발로 깎아 왜적처럼 갈고리를 꿰어차고 적에 섞여 웅천까지 돌아갔다.
이로, 이탁영, 하명, 정경운 등이 살아남아 각기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인 용사일기, 용사일록, 진주성일기, 고대일록을 저술했다. 전령으로 파견되었다가 왜적에게 붙잡힌 임우화는 전라도로 공격하는 왜적에게 끌려 다니다가 하동에서 탈출해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 안방준에게 이 전투에 대해 알려줬다.
남원에서 온 3백여 명 중 몇 명만이 겨우 살아남았고, 정기수는 이렇게 산 장령으로 후에 병자호란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하증의 동생 하변은 적에게 붙잡혔다가 하증이 밤낮으로 살릴 계획을 세워 무사히 돌아왔으며, 안몽량, 안광윤, 안몽구는 어머니가 죽으면서 서로 죽으려 하자 적들이 내버려두고 떠나면서 살아남았다.
◆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의령남씨 선조
- 남응개(남응개) : 충경공 충간공 별좌공파 16세
- 회덕 현감(懷德縣監) 남경성(南景星) : ?
- 조선 의병장 정경운 의병활동기록 1593년 가을 8일
명나라 군대가 군(郡)에 들어왔다. 회덕 현감(懷德縣監) 남경성(南景星)이 왜적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왔다. 처음 남경성은 군사를 거느리고 영남에 도달해 진주성(晉州城)을 수비했다. 진주성이 함락되던 날, 일이 어쩔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머리를 깎고는 청의(靑衣)를 입고 칼을 휘두르며 뛰쳐나와 많은 적들 속에 섞여 들어갔다가, 웅천(熊川)에 이르렀을 때 도망쳐 왔다. 의령남씨 선조는 아닌 듯 합니다.
<참고문헌>
나무위키-제2차 진주성전투
선조실록
징비록
의병장 정경운 의병활동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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