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炎凉世態(염량세태)
‘더우면 모이고 추우면 멀어지는 세상의 인심’이라는 말로서 ‘세력(勢力)이 있을 때는
달라붙고 막상 권세(權勢)가 없어지면 언제 보았느냐는 식으로 등을 돌리고 푸대접하는
세속 인심(世俗人心)’을 뜻한다.
비슷한 말로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감탄고토(甘呑苦吐), ‘정승댁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문상가지 않는다’라는 우리말 속담이 있다.
중국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권력가 맹상군(孟嘗君). 그는 수많은 선비, 지사(志士)
와 재사(才士)들을 식객(食客)으로 받아들여 대접하고 인재를 발탁하기도 했다.
맹상군의 세력을 불안해 한 제나라 왕이 맹상군을 파직하고 다른 나라로 추방하자
그동안 그의 식객으로 도움을 받던 사람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
그후 왕이 맹상공을 다시 불러들이고 복권(復權)시켜주자 떠나갔던 식객들이
하나 둘 다시 찾아들기 시작했는데
이에 맹상공이 ‘이 사람들은 무슨 염치로 내게 다시 오는가’하며 쫓으려 했다.
그때 그의 측근 한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아침에 시장(市場)에 모이고 저녁이 되면 시장을 떠나는 이유는 아침 시장을
좋아하고 저녁 시장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저녁시간에는 물건이 다 팔리고 살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군(主君)이 권세를 잃었을 때 떠나고 권세를 되찾은 지금 다시 모여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일 뿐입니다’라고 간(諫)하자 맹상군은 이를 이해하고
결국 그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실리(實利)를 따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사람의 마음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다시 돌아온 식객 인사들을 포용(包容)한 맹상군은
가히 대인배(大人輩)의 모습으로서 우리가 배울만하다.
지금 세상에도 어떤 직책에 있다가 그만 두었을 때 늘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져 허전함과 아쉬움, 심지어 괘씸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마음을 관대하게 가질 수
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고사(故事)이다.
추사 김정희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갔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못본 척 하였지만
그 제자중의 한사람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역관(譯官)으로 북경에 갈 때 마다 북경에서 구한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주었다.
추사는 이에 대한 답례로 그에게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을 그려 보내주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라는 공자의 논어(論語) 말씀을 인용하며 ‘송백(松柏)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데
세한(歲寒)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聖人)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던 바,
지금 그대는 나에게 전(前)에도 더함이 없었고, 후(後)에도 덜함이 없구나
(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그의 의리와 인품을 칭찬하였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중국에 갈 때 가져가 북경의
명사(名士)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었는데 세한도에 감탄한 명사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추가로 찬사(讚辭)를 써넣다 보니 가로 족자의 길이가 무려 14m에 달하게 되었다.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고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인정(人情)을 거스른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의리는 세한도와 함께 세세대대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참고: 2018년 5월 22일 워싱턴 한국일보에 필자가 기고한 글]
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비밀
추사체의 창시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어렸을 때 부터
신동으로 불렸던 조선의 실학자로 금석학 연구자요 추사체를 만든 서예가이며
문인화의 대가였고 학자였다.
그에 대하여 막연하게 추사체의 창시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차 메릴랜드대학 화학과의
후배교수인 이상복 교수와 어느날 점심을 같이 하던중 얼마전 한국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씨가 나와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강의한 것이 있는데 무척 흥미로우니 한번 보라고 권유하였다. 과연
그의 강의를 들어보니 추사가 서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청나라 학자들의 존경을 흠뻑 받아 그의 팬들이 중국에 많았던 인물로
어쩌면 한류의 원조중의 원조였던 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흥미를 가장 끌었던 내용은 추사가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린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한도는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생활 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역관(譯官)으로 북경에 갈 때 마다 북경에서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답례로 그려준 그림으로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있다.
추사 김정희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名筆)로 알려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제주도로 유배갔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못본 척 하였지만
그 제자중의 한사람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역관(譯官)으로 북경에 갈 때 마다 북경에서 구한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주었다.
추사는 이에 대한 답례로 그에게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을 그려 보내주고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라는 공자의 논어(論語) 말씀을 인용하며 ‘송백(松柏)은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데
세한(歲寒)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이다.
성인(聖人)이 특히 세한의 후에 그 것을 칭찬하였던 바,
지금 그대는 나에게 전(前)에도 더함이 없었고, 후(後)에도 덜함이 없구나
(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어아 유전이무가언 유후이무손언)’
그의 의리와 인품을 칭찬하였다. 이상적은 이 세한도를 중국에 갈 때 가져가 북경의
명사(名士)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었는데 세한도에 감탄한 명사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추가로 찬사(讚辭)를 써넣다 보니 가로 족자의 길이가 무려 14m에 달하게 되었다.
세한도는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고 염량세태(炎凉世態)의 인정(人情)을 거스른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의리는 세한도와 함께 세세대대로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참고: 2018년 5월 22일 워싱턴 한국일보에 필자가 기고한 글]
추사 김정희 세한도의 비밀
추사체의 창시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있는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어렸을 때 부터
신동으로 불렸던 조선의 실학자로 금석학 연구자요 추사체를 만든 서예가이며
문인화의 대가였고 학자였다.
그에 대하여 막연하게 추사체의 창시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차 메릴랜드대학 화학과의
후배교수인 이상복 교수와 어느날 점심을 같이 하던중 얼마전 한국의
<차이나는 클라스>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씨가 나와 추사 김정희에 대하여
강의한 것이 있는데 무척 흥미로우니 한번 보라고 권유하였다. 과연
그의 강의를 들어보니 추사가 서예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청나라 학자들의 존경을 흠뻑 받아 그의 팬들이 중국에 많았던 인물로
어쩌면 한류의 원조중의 원조였던 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의 흥미를 가장 끌었던 내용은 추사가
1844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그린 <세한도(歲寒圖)>라는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이 세한도는 모든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귀양생활 하고 있던 추사 자신에게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이 사제지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역관(譯官)으로 북경에 갈 때 마다 북경에서 귀한 책들을 구하여 스승인
그에게 보내준데 대한 답례로 그려준 그림으로 현재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있다.
이 그림은 추사가 직접 그림 제목을 쓰고 그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써넣어
제자를 위하여 그린 것임을 밝혔다. 그림과 함께 써넣은 발문에서 추사는
전에는 학문적으로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이제 스승에 대한 의리로서
훌륭한 덕목을 보여준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공자의 논어 말씀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칭찬하였다.
중국에서 추사를 흠모하는 친구들과 명사들이 많음을 아는 이상적은 이 그림을 중국에
갈 때 가져가 그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었고 그림과 글에 탄복한 명사 16명이 앞다투어
자신들의 소감을 그림에 적어 넣어 붙이게 되었고
후세 사람들도 추가로 써넣다보니 길이가 무려 14m에 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세한도는1930년대 중엽에 일본인 경성제대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의 손에 들어가
일제 말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서예가 손재형의 노력과 후지쓰카 지카시 가문의
도움으로 국내에 돌아와 국보로 지정되고 국립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다.
그림의 사연도 사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한도에 그려진 두그루의 소나무(오른쪽)와
잣나무(왼쪽), 그리고 가운데 그려진 집에 대하여 많은 분석과 해석을 내놓았다.
미적인 아름다움과 철학적인 의미에 대한 해석이 주를 이루지만, 그밖에 흥미로운 것으로
이 그림이 추사의 치밀한 기하학적 구조에 의해 그려졌다는 해석, 표현주의적이고
간결하여 신남종문인화(新南宗文人畵)를 개척하였다는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붓글씨를 취미로 하는 필자가 이 세한도를 본 순간 떠오른 것은
이 그림이 신남종문인화도 아니요, 치밀한 기하학적 구조의 계산에 의한 그림도 아닌,
바로 추사 자신과 제자 이상적 두사람만을 주제로 표현한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즉,
오른쪽의 소나무를 보면 추사 자신의 호 첫자인 추(秋) 자를 소나무로 표현한 것이요,
왼쪽의 잣나무는 제자 이상적의 이(李)를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오른쪽 소나무의 아래 굵은 둥지 가운데가 늙어서 마치 껍질이 벗겨진 모습으로
그린것은 추(秋)자의 오른쪽 글자인 불 화(火)를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료를 찾아보니 잣나무는 보통 50m까지 자라고 소나무는 30m 정도로
자란다고 하는데 세한도의 잣나무는 소나무에 비하여 훨씬 작고 가늘게 그려져 있다.
이는 스승은 제자들을 어린 자식처럼 마음에 여겨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추사가 이 그림을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각도에서
추리해본다.
그는 이제 권력도 명예도 다 떨어진 자신을 끝까지 생각해준 제자가 고마왔기에
자신과 제자 두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노송(老松)으로 비유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구부러지고 휘어진 가지를 통해
굴곡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추사 자신의 모습을,
젊은 역관으로서 중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성장하는 제자 이상적을
이제 막 커가는 잣나무로 표현하고자 한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소나무옆에 바짝 붙어있는 작고 보잘것 없는 자신의 집을 그려넣음으로써
이 소나무가 자신을 나타낸다는 확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제자를 상징하는 잣나무는
아마도 제주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어 작게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으로 세한도를 다시 보니 추사가 고마운 제자를 다정하게 바라다보는 모습이
떠오르고 그림의 제목과는 달리 따뜻함이 느껴지니 차가움과 따뜻함이 어우러진
이 얼마나 기묘한 걸작인가!
엔지니어인 필자의 이 추리는 기존의 문학적, 미술적, 철학적 해석과는 다른 각도에서
해본 것이어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을 들을수도 있지만 내가 만일 추사였다면 어떤
마음으로 제자를 위한 그림을 그려줄까 생각해 볼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유배지의 추사는 이미 정신적으로도 크게 성숙해져 있어 이 그림을 통하여
어떤 심오한 철학이나 새로운 화풍을 표현하고 유명해지겠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마음의 기름끼를 모두 뺀 겸허해진 성품에서 나오는 제자에 대한 진심어린 고마움과
사랑, 그리고 그런 제자와 자신과의 인연을 표현하려는 순수한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림은 더욱 그 가치가 높다하겠다. 다만 한가지 의문은 과연
제자 이상적과 이 그림을 본 중국의 16인 명사들이 이러한 추사의 뜻을
혹시나 헤아릴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이 쓴 찬문(讚文)을 하나 하난 읽어볼 수 있다면
그 궁금증도 해소될 수 있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