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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문제보다 문제의식이 문제다>의 줄거리:
삶의 현장에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문제 그 자체가 아닙니다. 항상 더 시급한 실제 문제는 문제의식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로서 이 땅 위의 내 삶의 현장에서 발생한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는 한 문제란 성립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언제나 내 문제의식만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문제보다 문제의식이 문제다
(누가복음 5:20~26)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문제보다 문제의식이 문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문제보다 문제의식이 문제다’
제목을 풀어보자면 문제의 해결보다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급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문제의식이 없는 것을 문제시합니다. 부정부패의 척결이나 일의 성취를 위해서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지금을 개선시키고 발전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지 않는 이방인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몸에 심각한 질병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해결하고자 하는 태도가 문제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병을 문제로 여기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기준에서 보자면 문제의식이 생겼다는 것은 이미 마음의 평강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이 괴로운데 마음까지도 부담과 걱정에 시달립니다. 원치 않는 상황이 주어진 것에 대한 원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제반 요소들입니다.
이 상황의 문제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무 대신에 숲을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자 창조주이심을 믿는다면 몸에 생긴 병 또한 하나님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 중에 병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쏟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몸의 병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로 여기지 않는 일을 문제로 여기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문제의식을 문제로 여기십니다. 문제의식은 삶에서 돌출된 상황에 마음이 붙음으로써 생겨납니다. 그 상황을 의식으로 포착하여 마음을 과녁삼아 쏘게 된 것입니다. 혹은 마음이 강물처럼 상황을 향해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재정적 문제가 생긴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재정 상황을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받아들일 때에 문제의식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재정 상황에 붙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써 이 상황을 보실 때에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무엇을 문제로 여기시는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정 상황에 마음을 붙인 동안에는 하나님께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6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이 지켜질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재정 상황이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나도 문제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황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문제가 아닌 하나님께로 마음을 보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마음을 하나님께로 보내지 않기에 이것을 문제로 여기시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시며 병을 주기도 하시고 재정 문제를 주기도 하십니다. 문제의식이 생길 수 있는 상황으로 이끄심으로써 믿음을 확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문제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상황으로 몰고 가시는 이유는 평소에 하나님보다 처한 상황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재정 상황에 문제가 생기게 하신 이유는 돈에 마음을 가까이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가까이 있는 돈에서 문제의식이 생겨나게 하심으로써 마음의 평강을 깨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처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이 생겨날 때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문제의식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강이 깨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마음을 짓누르게 되었다면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하나님보다 돈을 더 가까이 두었음을 확인함으로써 하나님과 마음의 거리가 있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남으로써 문제의식이 생겼다는 것은 평소에 마음이 하나님보다 몸에 더 가까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가까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병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병을 문제로 여기실 리가 없으므로 나 또한 문제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병을 주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문제의식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드신 것은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붙어있지 않은데도 문제로 여길 일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셨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문제의식을 느낄만한 상황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짜 문제인가를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를 들여다보면 항상 문제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마음의 거리가 벌어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문제의식이 생길만한 상황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의식이 생길 때에 우리의 깨달음은 문제해결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재정 상황이 어렵다고 여기는 것 자체를 문제시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는 곧 재정 상황을 하나님보다 더 가까이 보고 있고 더 크게 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재정 상황을 의식의 뒤편으로 밀어두고 하나님을 의식의 전면으로 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바라시며 문제의식이 생기는 상황을 주신 것입니다.
상황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풍랑 속에서 주무셨던 예수님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에게 풍랑은 충분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풍랑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풍랑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도 문제로 여기실 필요가 없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지 않고 있는 제자들은 하나님의 관점을 염두에 둘 수 없었기에 문제의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문제로 여기게 된 자신들의 모습을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거리가 떨어져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마음을 보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는 선민이었으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지 못한 상태였던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로 가고자 지붕을 뜯었던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마음상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을 잘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들면 문제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없는 삶은 결코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삶이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본문을 기록하였습니다.
본문 전체의 분위기를 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집에 들어가셔서 병자를 고치기도 하시고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당시 이스라엘의 집은 사각형 형태로 벽을 쌓고 슬라브식의 지붕을 얹은 형태였습니다. 벽을 따라 침상이나 부엌 등을 배치하고 가운데가 비어있는 구조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고 집 바깥까지 가득하였습니다. 더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할머니를 따라 한얼산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 고인이 되신 이천성 목사님께서 집회를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방언하고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 안수를 하시며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을 잘 받았다고 칭찬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귀신이 준 방언을 받았다고 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예수님께서도 빽빽하게 몰려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병자를 고치시며 말씀을 전하시는 모습이 이와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와 친구들로 인해 이 상황은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지붕이 뚫리고 침상에 사람이 실려서 내려오는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군중들도 중풍병자와 친구들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씀을 하십니다. 20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믿음을 보신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병 고침이 아닌 죄 사함을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군중들 사이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논쟁이 터져 나옵니다. 죄 사함이 병 고침이라는 주제를 물리치고 메인 이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소문이 퍼짐에 따라 병자들뿐만 아니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언하자 이들 사이에서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라고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예수님을 두고 이단이 아니냐는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24절을 보면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죄 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천명하심으로써 현장에서의 논쟁의 주제가 되어버린 죄 사함의 문제에 대한 매듭을 지으십니다. 이렇게 죄 사함의 문제가 일단락되자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의 논쟁이 되는 동안 중풍병자는 소외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의 진리가 실체로 드러나면서 중풍병이라는 문제는 자동으로 딸려오는 것처럼 해결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현장의 분위기를 만든 계기가 되었던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한 일이라고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한 것뿐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본래 중풍병이라는 문제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에 의해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병은 두 번째 관심사가 됩니다. 병이 낫든지 않든지 우선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것이 이들의 마음에서 첫 번째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결심이 지붕을 뚫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게 하였고 예수님은 그렇게 발버둥 치는 마음을 믿음으로 보시고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이로부터 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죄는 하나님께 마음이 붙어있지 않는 상태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중풍병은 마음이 날아가 꽂힐 과녁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의식을 통해 마음이 향할 대상을 포착하게 됩니다. 마음은 비어있기에 채워짐으로써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의식이 포착한 대상을 과녁삼아 날아가 꽂히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으로 포착한 대상을 통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기 어려워졌다는 판단이 생길 때에 문제의식이 생겨납니다.
사람은 항상 의식과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의식은 기쁨과 만족을 갈망하는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을 포착하게 합니다. 의식이 대상을 포착하면 마음은 채워지고자 그 대상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죄의 성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죄를 의미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에서 빗나거나 잘못된 과녁에 맞춤을 의미합니다.
앞서 신명기 6장 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과녁 삼아 날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이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의 의식은 중풍병을 포착하고 있었고 마음은 그것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이라는 과녁에서 마음이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병이 나아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병 고침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잘못된 문제의식으로 인해 죄가 활성화된 상태였습니다.
본래 사람은 의식으로 하나님을 포착하고 지속적으로 향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의 공백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없는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중풍병자에게 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마음이 기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중풍병이 나음으로 기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종교심입니다. 친구들의 마음 또한 이와 동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들의 마음에 변화가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됩니다.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대상으로 포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일시적인 것이었을지라도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야만 기쁨과 만족이 주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도달하는 것을 첫 번째 관심사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대상으로 포착하게 되었고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날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십니다. 죄는 바로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이 첫 번째 대상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포착해서 마음의 과녁으로 삼게 된 상태가 죄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일체로써 이들의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게 됨으로써 상황이 바뀌게 되었기에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내려와 움직이고 계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나타내게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9~1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장갑과도 같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이었기에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밀착을 이루신 상태였고 단 1초의 쉼도 없이 하나님의 계획이 흘러들어 오시는 상태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예수님 안으로 흘러들어 오기에 예수님이 오른팔을 드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른팔을 드시는 것이었고, 예수님이 왼팔을 드시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왼팔을 드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언하셨다면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입을 통해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하나님을 보일 방법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영이시고 빛이시고 형체가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렇게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식으로 포착한다는 것은 곧 영이시고 빛이시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포착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갖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죄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의식이 예수님을 포착하는 것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과녁으로 삼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 사함이 이루어지게 되자 결과적으로 중풍병 또한 낫게 됩니다. 중풍병은 첫 번째 대상으로부터 밀려났고 예수님이 첫 번째 의식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마음이 날아가게 됩니다. 중풍병자와 친구들은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것이 곧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는 일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자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죄가 없는 상황이 되자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중풍병도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환자에게 하나님께서 중풍병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몸에 마음을 향합니다. 그 사람들 중에 특별히 이 사람을 택하셔서 몸에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가 없어지자 죄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중풍병은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고 봄바람에 눈 녹듯이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제의식이 문제입니다. 문제의식이 유지되는 동안에 하나님과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습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하는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의 핵심적 본질입니다. 죄가 활성화되는 중에 이루어지는 기도는 종교의식일 뿐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돈 문제가 발생했을 때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죄입니다. 마음이 하나님보다 돈에 더 가까운 것이 문제입니다. 돈 문제를 뒤로 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통째로 들어와 계신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대상으로 포착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구리 뱀 장대를 들었던 사건을 십자가 사건과 일치시키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포착할 때에 죄의 문제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돈 문제는 죄가 없는 상황 안에 놓이게 됩니다. 더는 돈 문제가 유지될 필요가 없으니 하나님께서는 돈 문제를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이 있든 없든 돈을 문제시 하지 않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때문에 생겨난 문제의식의 핵심 또한 죄입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보다 몸에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암에 걸렸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로 끌어당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식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하나님을 찾을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문제의식이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진 죄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문제의식의 알맹이가 되는 문제를 붙잡고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문제를 지워버려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기적과 능력을 베푸시던 공생애 때의 예수님만 바라보고자 한다면 문제의식은 문제해결을 위해 예수님을 끌어들이려는 종교심이 발동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대해 죽으신 자리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볼 때에 나 또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통하여 문제의식을 소멸시킬 때에 죄 사함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의식을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씩 소멸시켜 나감으로써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을 따라 하나님 보좌우편까지 올라갈 때 의식으로 하나님을 포착하고 마음에는 하나님이 들어오시게 됩니다.
그러면 죄가 없어졌기에 문제 또한 유지될 수 없습니다. 재정이 넉넉지 못함을 문제로 느끼던 마음이 사라지고 재정이 넉넉지 못함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가 더는 문제로 여겨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강릉에 오시는 분들과 상담을 하게 되면 반복적으로 확인하게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마음에 지옥을 안고 오십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이 아버지시고 주권자시며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서 모든 문제가 지옥이 아닌 은혜와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옥 같은 마음으로 왔다가 천국으로 바뀌어서 돌아가십니다.
삶에서 문제의식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가 벌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돌이키기를 바라시며 세상과 가까워진 마음에서 문제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십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려서 하나님 아버지와 가까워지면 세상에 어떤 일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정치나 국가의 문제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여당을 지지하든 야당을 지지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비록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일지라도 하나님보다 가까워졌다면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몸에 병이 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하나님보다 몸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종교라는 이름으로 동원하게 됩니다. 더는 이런 죄악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죽여 갈 때에 문제는 오히려 축복과 은혜였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있는 마음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지금 처한 상황은 개선되거나 수정되어야 될 나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최고이자 최선의 상황임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이가 벌어진 것이고 마음이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향해 날아가는 것입니다.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문제라는 상황에 마음을 향하는 것입니다. 죄가 활성화되는 상태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문제의식을 하나씩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문제의식에 대해 죽을 때에 문제였던 상황들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이었는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복지를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수님은 지혜가 많고 기적과 능력을 행하시던 공생애 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을 의식의 첫 번째 대상으로 포착함으로써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거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제의식의 원인이 된 상황들이 실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였음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함으로써 아버지와 간격 없는 마음이 되게 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복지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