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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22
설교 제목: 금생(今生)과 내생(來生)
https://youtu.be/qyCAxWuyJvU?si=aZnT-h6jYlZZI2rz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설교 목적:
나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를 죽은 후에 영혼이 들어갈 세상으로 이해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나의 주장은 내생에 대한 그림을 좀더 분명하게 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나는 크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통하여 금생과 내생에 대하여 좀더 생각해 보고 성경이 말하는 방식으로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특히 이 구절과 관련하여 성경은 세 가지 본문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경건의 유익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반대의 개념인데 둘 다 금생과 내생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나는 이 두 세대의 삶을 그려보고 그런 그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제시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문제 제기: 금생과 내생에서의 하나님 나라
2. 죽은 후에 우리 영혼의 상태
3. 이 세상과 오는 세상
4. 내생에도 중요한 것
***
1. 문제 제기: 금생과 내생에서의 하나님 나라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주님은 기도문을 통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성취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런 주제로 설교를 하면서 보니 어린 시절부터 믿었던 천국의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모두 성경에 나오는 말씀으로서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하늘나라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 들어갈 세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후에 들어갈 천국과 지금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바라는 천국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천국이며, 하나는 죽은 후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바라는 천국입니다.
저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그리고 성경을 연구한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죽은 후에 비로소 들어갈 세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세와 현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주님의 가르침 대로 지금 우리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고 줄기차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청춘시절을 사후 영혼 천국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살아오면서 세상의 일에 무관심했던 것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듣는 예화는 댐 건설로 수몰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계곡에 생길 거대한 댐으로 장차 물속에 잠기게 될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 마을을 가꾸고 단장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장차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진짜 좋은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위의 세상에 있다는 생각을 굳게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을 잠시 머물다가 떠날 여관집과 같이 여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수몰지구에 사는 사람처럼 이 세상이 좀 어그러지고 시끄러워도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중요한 곳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면 이런 생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과 정면으로 반대의 개념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이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신 이유도 세상 만국 만민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준다는 말은 그들에게 빛을 비춘다는 말이며, 그것은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생명의 길로 안내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제사장 나라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시고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다고 그들의 임무를 성경의 가르침대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제자들은 모든 족속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갈 때 번영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줍니다.
기독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양심으로부터 진실된 것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나아가 이웃에게 가진 것을 나눌 때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상에서 빛을 비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칭송으로 되돌아왔으며 전도의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고 선도하는 것과 같고 세상의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세상에 대한 책임과 자신의 소임을 망각할 때 교회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지도하고 선도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이며 죽은 후에 들어갈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과학은 과학자에게 맡기고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교회는 오로지 영혼의 문제만 다루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이 세상이라고 여기고 그 일을 위하여 자신이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 왜곡과 망각을 치료하면 교회는 다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고 나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뜻은 우선 자기 양심에서 이루어지고 가정과 교회에서 이루어지며,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국제관계 등 모든 영역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교회에게도 중요하고 세상에게도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피조물들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고 있다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사후세계 또는 사후의 시간과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2. 죽은 후에 우리 영혼의 상태
우리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사자성어로 전분세락(轉糞世樂)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을 이승이라고 하고, 죽은 후에 세상을 저승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승에 대해서는 우리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지만 저승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저승의 삶에 대하여 별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전도서 3:21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전도서 2:16
동양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지혜자나 우매자나 다 잊혀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 들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16장의 앞부분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십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누가복음 16:1).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도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누가복음 16:19). 이 두 이야기는 미래를 준비한 지혜로운 청지기 이야기이며 또한 자기만 아는 부자가 당할 괴로움에 대한 경고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갔다고 말하는데 나사로는 어디로 갔습니까? 그가 있는 곳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곳에는 꽃향기 가득한 무릉도원과 비슷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누가복음 16:22).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설명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창세기 35:29).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오른편 강도에게 하신 말씀도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였습니다. 그런데 그 낙원이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감지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립보서 1:23).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을 바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에 대하여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바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떤지에 대하여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은 죽은 사람들을 가리켜 ‘잠자는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고전 15:20, 살전 4:13~14).
3. 이 세상과 오는 세상
그런데 성경이 다른 경전과 달리 독특하게 설명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금생과 내생이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승과 저승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성경은 금생과 내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금생이 우리가 사는 이승이며 현생이라면 내생은 무엇일까요? 죽은 후에 산다는 의미일까요?
내생(來生)은 문자 그대로 보면 오는 세상의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금생(今生)이 이 세상이라면 오는 세상의 삶은 무엇일까요? 장차 우리가 만날 세상이라는 의미이며 장차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내생은 사후의 세상을 의미할까요?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말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임사체험 (臨死體驗, Near-death Experience) 합니다. 즉,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인가를 보고 느꼈다는 것입니다. 임사체험의 이야기는 강한 빛을 보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사람들이 본 것과 서양사람들이 본 것은 배경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임사체험은 사후세계에 대한 그림이라기보다는 현세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언급을 자제하는 사후의 세상에 대한 모습을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로 채우는 잘못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기 쉽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자신이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개인의 강렬한 체험으로 남겨 두어야 하며 성경의 이야기를 보충해 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서 종교개혁자 칼빈을 보았다느니 또는 아무개 목사를 보았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오는 세상 또는 내생을 무엇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주심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새롭게 고치시는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그러지고 혼란스럽습니다. 죄와 불의가 있고 죽음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이 세상을 영원히 그냥 두시겠습니까?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하여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렇게 듣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65:17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이사야 65:25
성경에서는 죽은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고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도 주와 함께 있으니 죽은들 주님과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서 그 무엇도 끊을 수 없다(롬 8:39)고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믿는다면 이 세상의 삶도 오는 세상의 삶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성경이 분명하게 여러 곳에서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부릅니다. 새롭게 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세상을 새롭게 만드실 때 그 세상에서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살아 그 새로운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 사는 우리의 삶을 가리켜 왕노릇한다고 설명합니다(계 22:5).
사도 바울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린도전서 15:21~24
여기서 우리는 오는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몸으로 다시 살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세상을 다스리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오는 세상입니다. 죽음도 상함도 해함도 없는 그 세상을 가리켜 오는 세상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사람을 다스리실 것입니다(엡 1:10, 21). 우리도 몸으로 다시 살아 그 세상을 만날 것입니다.
그 오는 세상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아예 땅으로 내려와 이 땅이 하나의 거대한 성전도시처럼 완벽하게 변하고 마침내 하늘과 땅이 하나될 것입니다. 그 말은 하늘과 땅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섬기며 따르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것이 바로 오는 세상에서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인간에게 계획하신 바로 그 충만한 삶을 완벽하게 누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성경을 보면, 죽음 이후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어떤 모습이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하여 성경은 매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오는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새롭게 되는 세상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영광으로 충만한 세상이며, 우리가 다 거룩한 몸으로 다시 살아 맞이하는 세상입니다. 그때까지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을 자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은 그 날을 기다린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개인의 삶이 세 시기로 나뉘어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현세를 삽니다. 그것을 한평생이라고 할 수 있고 현생 또는 금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께 올라갑니다. 그때 우리의 몸은 이 땅에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그때 우리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리고 비로소 오는 세상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현생과 죽음 후의 기다림, 그리고 부활하여 새로운 세상에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는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것은 새롭게 된 세상에서 새로운 몸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오는 세상의 삶, 내생의 삶입니다. 그 모습은 천상에 올라가서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그림과는 다릅니다. 할 일없이 한가롭게 낚시하는 그림과도 다릅니다. 그것은 새롭게 된 세상에서 왕노릇 하는 통치의 모습입니다.
현생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세상을 더욱 사모하고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생에서 하나님의 창조나 섭리 또는 그 위대한 경륜을 마음에 그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그림도 안개와 같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은 오는 세상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4. 내생에도 중요한 것
내생이 새롭게 된 세상이라면, 그것은 현생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현생을 주관하시는 주님이 내생도 주관하시며, 현생을 창조하신 주님이 내생도 창조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생은 현생과 연결성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현생에서 희미하고 미완이던 것이 내생에서는 완성될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의 결핍이 채워지고 왜곡이 수정되는 모습으로 오는 세상의 삶은 그려집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오는 세상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5:13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사야 55:6~7, 10
이처럼 오는 세상의 삶은 새롭게 된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듣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세상은 저 천상의 어디쯤 있어서 우리가 다 천사들처럼 공중을 날아다니거나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세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오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금생에서 어떤 자세로 사는가 하는 것은 오는 세상에서 사는 삶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 두 말씀은 금생에서 사는 삶이 내생에서 사는 삶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32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전서 4:8
말로 인자를 거역할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을까?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다나엘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쉽게 이런 저런 판단을 하고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이해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얻지 못할까요? 성령을 거역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양심을 일깨워주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입견이나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진심을 알게 되면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자기의 생각을 돌아보라고 일깨워줍니다. 그것을 양심의 가책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성령의 감동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역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진리를 거스른다는 의미입니다. 양심을 저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함을 얻지 못한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오는 세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세상에서는 성령을 즐겨 따르는 세상입니다.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는 세상입니다. 그것이 오는 세상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양심을 따라 살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사람은 이미 오는 세상의 삶을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사도 바울은 금생에 유익한 것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연습입니다. 즉,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음식을 절제하고 운동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기 위하여 육체의 연습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내생에도 유익한 것이 있다고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물론 금생에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것은 경건입니다. 경건(敬虔)은 영어로는 godliness입니다. 헬라어로는 유세베이아(εὐσεβείᾳ, eusebeia)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즐거운 마음으로 경배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편 16:8)고 고백했는데, 이는 경건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한달 동안 주일 예배 시간에 찬송가 217장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서 그 가사를 암송해 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경건을 연습하기에 참 좋은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7장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1.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맘을 나에게 바치어라
너 어디 있든지 날 섬기며 기쁘게 날 항상 의지하라
후렴: 바치어라 네 마음을 주께서 나에게 이르시네
캄캄한 죄에서 불러내신 주께서 늘 인도하시리라
2.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맘을 나에게 다 바치고
사악한 죄에서 벗어나면 나 어찌 널 구원 않겠느냐
3.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진 바 모든 것 다 맡기고
네 맘도 기쁘게 바치어라 풍성한 은혜를 더하리라
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다 금생을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내생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내생을 소망하며 기대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내생이 어디 있느냐, 죽으면 그만이지. 그런 마음으로 사십니까? 아무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금생에서 경건하게 사는 사람은 많은 유익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익은 내생에서 더욱 많을 것입니다. 금생에서 양심을 속이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사람은 점점 피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는 내생이 아예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내생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세상을!
오늘 우리의 삶은 내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금생과 내생은 이미 하나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와 함께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사람은 오는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충만하게 사는 삶을 기대하며 현실을 더 아름답게 살아갈 것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