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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고교동문회 사이트에 실었던 내용을 전재하였습니다.)
나의 연구와 답사기
조선시대의 譯官 등 中人活動을 찾아서
김양수
청주대 역사문화학과
명예교수
1. 譯官 등 중인테마의 설정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도 근대화논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사회학에서는 시대전환기에 제1신분이 쇠락하면 제2신분이 그 자리를 담당하게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국문학방면에서는 신분의 제약을 뛰어 넘어 사회평등을 주장한 중인문학이 平民文學의 시초로 연구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제2신분 가운데 譯官(역관)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었다.
譯官에 대해서는 일찍이 대학교 수업시간에 이광린교수님께서 그 중요성을 교시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정치방면이나 사회방면은 물론 여러 방면에 걸쳐 중개역할을 하고, 키포인트를 장악하였던 신분이라고 하셨다. 박사과정에서 이를 주제로 삼았을 때 가장 격려를 해 주신 분은 지도를 맡은 파른 손보기교수님이었다. 그러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김용섭교수님은 자료가 적은 부문이라고 난색을 표하셨다. 역관은 문집 100권을 찾아야 한 대목이 나타날까, 말까 한 정도라고 염려하셨다. 근래에는 당시에 필자를 적극 후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신다.
그러나 역관에 관한 연구 열정을 키워나가면서, 기초 연구부터 시작하기로 작정하였다. 역관에 관한 자료로서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1차로 『譯科榜目』이었다. 연세대학교도서관에 있던 『譯科榜目』을 기초로 먼저 숙종과 경종시기를 분석한 논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1)
사실 목표를 정하고 논문을 작성하였지만, 어떻게 역관에 관한 자료를 더 구해야 할 지는 막연하였다. 그러나 ‘천리 길도 첫걸음부터’ 라고 생각하여 우선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그리고 역사학의 기본이 문헌학이지만, 문헌은 나중에라도 섭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먼저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인멸되기 쉬운 유적들을 찾기로 하였다. 그리고 중인집안들이 職役에 강한 세습성을 특색으로 지닌데 착안하여 각 집안의 족보나 비문 등, 유적을 찾아 나가기로 하였다.
2.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김경문 등 우봉김씨를 찾아서
일단 通文館 고서점에 들러서 역관에 대한 자료를 찾자니, 그런 자료는 거의 없다고 하였다. 마침 옆에서 듣던 김영복 선생이 자신이 거주하였던 고양군 오금리 근처에 白頭山定界碑를 세웠던 金指南 집안의 산소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필자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운 집안이면 상당한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답사 날짜를 정하여 미리 대학원생 황정하 군 등은 연신내 근처 여관에 묵었다. 다음날 김지남 묘비를 찾아 탁본할 때는 백산학회 육낙현 선생도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다. 산소를 돌보던 김운영 할아버지는 우봉 김씨 종무소 일을 맡았던 김용철 선생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거기에서 족보와 자료들을 얻고, 이 집안의 重興始祖 繼仝公의 산소가 있는 진관내리도 답사하였다. 원래 그 산소들은 西五陵 자리에 있었으나, 18세기에 그곳에 왕능을 조성하느라고 代土를 주어 옮겼기 때문에 새로 비석을 해 세웠다. 그중 한 골짜기에 산소가 있는 우봉 김씨 支派는 그전에 중국으로 들어가서 산소를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일찍이 김용섭 교수님이 ‘역관 가운데 똑똑한 집안은 외국으로 이민가기도 하였다’ 고 말씀하신 바와 같았다.
약 세 곳에 흩어져 있는 우봉 김씨 산소를 답사하며, 중요한 碑碣은 탁본하고, 웬만한 것은 사진을 찍어 두었다. 크기가 3~4m에 이르는 큰 烏石으로 세운 金讚門의 비 등도 있었으나, 큰 비석은 내용이 비교적 간단하고, 후대인 1800년경에 金健瑞의 형님 金益瑞에 의해서 세워진 비석이 많았다. 중요한 비석으로 일찍이 金慶門碑가 있었는데 근래에 없어졌다고, 김용철선생은 말씀하셨다. 그런지 몇 년후 김경문비석 탁본의 복사물을 건네받고, 또 얼마 후에 비석의 소재지를 알게 되었다.
백두산 定界 때에 부친 김지남과 함께 파견되었던 金慶門의 비석은 남양주군 진접면 연평 1리에 있었다. 묘비를 관리하던 후손의 며느님은 까만 오석이 중국에서 특별히 가져온 것이라 멀리서도 햇빛을 받아 빛난다고 하였다. 높이는 1m 40cm 정도였다. 내용에는 1712년 백두산 정계에 파견되어 청의 대표 穆克登을 설득하고 변경을 500여리나 넓혔다고 기록되었다. 백두산정계비가 1930년대에 일본장교가 답사한 직후 실종되었으므로 백두산 정계에 관한 자료로서 이 비석은 국보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몇 년전 후손은 이 지역 개발자에게 토지를 매각하고, 비석을 인천직할시 강화읍 삼거리 100번지로 이전하였다. 이런 자료는 족보와 함께 연구한 후 백산학보 논문집에 게재되었다.2)
논문 게재 후 이 집안 요청을 받아, 논문의 별쇄본을 따로 해 준 후, 이 집안의 어른이신 金石桓 옹에게 저녁대접을 받았다. 그분은 구한말 러시아특사 민영환을 수행하였던 漢語譯官 金得鍊의 손자로서 일제 때 고모님이 제주 고씨 집안에 출가하여 동경에 거주하였으므로, 渡日하여 항공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고 들었다. 그런 관계로 해방 후 공군대령이 되고 수색에 있던 한국항공대학장을 역임하셨다고 한다.
그후 20년이 지나 이 집안에서는 진관내리의 일부 산소가 아파트단지로 개발됨에 따라서 경기도 연천에 새 先塋을 마련하면서 조상의 얼을 찾는 기념사업을 의뢰하였다. 필자는 한국사 관계 전문학자 들에게 의뢰하여 1년 만에 원고를 완성하였다. 2007년 9월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역사실학회 주최로 《조선후기 외교사의 검토》라는 주제를 가지고, 5명의 학자가 논문발표회를 하고, 다섯 분이 토론하였다. 그 결과를 보완하여 다음해에는『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이라는 공동저서를 출간하였다.3) 그후 필자의 원고를 보충하여 『조선후기 中人집안의 발전』이라는 단독저서를 간행하였다.4) 여기에는 우봉 김씨 집안에서 새로 구한 宗契와 宗憲의 제정이 추가되고, 이 집안에서 집필한 16종 이상의 저서에 대한 분석을 추가하였다. 이 집안은 대표적인 역관집안으로 95회의 역과합격자를 배출하고, 조선시대 중인 가운데, 가장 많은 기록과 자료를 남겼다. 이 집안의 선영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김경문이 享祀를 위하여 2만여평의 토지를 기증하고, 『同宗中禊券』이라는 토지문서를 작성하여 한성부의 공증을 받은 후, 선영이 자손들의 공동소유로 등기되어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역관을 연구주제로 정하면서 필자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관련 고서를 모두 복사하여 연구할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참 중인자료를 찾던 와중에 성균관대학교대학원 한문학과에서 「柳下 洪世泰硏究」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상진선생을 만났다. 오경석의 妹弟인 李昌鉉이 편찬한 『姓源錄』이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를 열람하니 『萬姓大同譜』에 없는 많은 성씨의 略譜가 실린 귀중본으로 많은 帖紙가 달려 있었다. 일괄 복사는 허락이 되지 않아서, 마침 오성사 권사장님이 내방한 길에 이것을 영인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오경석의 손자이신 吳一龍 선생을 만나서 관계되는 현판사진을 영인본에 전재하게 되었다. 책의 서문을 부탁받았는데 자당께서 편찮은 와중에 약간 착오가 있었다.
3. 숙종 때 갑부로 이름난 변승업집안을 찾아서
다음으로는 조선 숙종시대에 서울장안의 갑부로 명성이 났던 왜어역관 卞承業의 집안을 탐구해 보기로 하였다. 성균관대학교로 李佑成 교수님을 찾아뵈었더니, 몇 년전에 역관자본에 대한 강연을 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다고 하시며, 조선시대연구에 매우 귀중한 주제가 될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셨다. 대학교도서관에서 『密陽卞氏世譜』를 보고 그것을 간행한 청주 북부의 내수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분도 거기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다면서 조선 초기에 대제학을 지냈던 卞季良의 비석이 있는 계룡산 자락의 한 마을을 찾아가 볼 것을 권하였다. 거기를 거쳐, 그 형님이었던 卞仲良을 모신 거창의 屛巖書院까지 먼 길을 방문하였으나, 거기에도 일반적인 족보만 있었다. 단지 몇 해 전에 변승업의 후손이 방문하여 써 놓은 붓글씨가 있다며 보여주었다. 추운 날씨에 서원에서는 묵을 수 없다고 하여 거창으로 나와서 숙박을 하였는데, 장염이 걸려서 약 열흘 고생하였다.
서울 원효로에 연락하여 후손 卞志文선생을 찾아 뵈었다. 그분께서는 찾기는 제대로 (후손을) 찾아왔다고 하시면서 자료를 보여 주셨다. 그 댁에는 2권으로 된 족보가 있었으나, 더 자세한 족보를 부천에 계신 족친이 소장하고 있다고 하셨다. 약속을 하고, 며칠 후 용산에서 만나서 3권으로 된 족보를 열람하였다. 보통 밀양변씨족보에는 卞承業의 6형제만 기록되어 있었으나, 거기에는 9형제 가운데 막내로 기록되고 자세하였다. 첫째, 둘째 등의 후손은 무관으로 진출한 것이 확인되었다. 변지문 선생은 족보에서 변승업의 부친 卞應星 때부터 이 집안에서는 京城譜라고 족보에 구분되었다고 하셨다. 1985년경이라 근처 복사소에서 습식 복사기로 복사하였다.
변지문선생의 증언에 따라서 상봉동에서 보이는 봉화산 아래 일대를 답사하였다. 역사상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해서는 후대에 어떤 흔적이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믿었다. 옛날 교통의 요지였던 봉화산 아래 일대에 밀양 변씨 묘지가 산재하였던 것으로 보였다. 망우리고개에서 卞邇標의 묘지 상석이 무너진 것을 찾았다. 망우리묘지를 내려와 하루 종일 배 밭 근처를 헤매고 물어서, 육군사관학교 후문에서 남쪽으로 약 1km 되는 곳에서 변승업의 伯父인 軍官 卞應寬과 그 일족의 산소 약 6기를 찾았다. 1m가 넘는 碑碣과 하얀 상석이 양반집안 묘비보다 훌륭하였다. 산소를 관리하던 분을 통하여 변씨 후손 댁을 찾아 갔으나, 은행을 퇴임한 그분 댁에서는 간단한 家乘을 보았다. 변지문선생이 어릴 때 이곳을 와 보셨던 기억으로는 배 밭 아래 지금의 상봉터미널 근처 이화여대 생활관지역에 변승업묘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였다. 또한 과거 묵동에 소재하였던 한독약품 지역이 변씨네 땅이었고, 과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있던 태능지역도 변씨네 땅이었는데, 일제때 수용되었다고 한다. 변지문선생의 소개로 구한말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는데 공로가 있던 卞元圭의 尺牘集인 『北雁尺一』을 구하여 복사하였다. 거기에는 壬午軍亂 이후 청국관헌과주고 받았던 서간이 많이 수집되어 있었다. 그 댁에는 石坡 興宣大院君의 난초 그림과 御史花 및 변원규 일행의 오래된 사진이 소장되어 있었다. 6․25전쟁 때, 후손이 한국방송공사 지프차를 이용하여, 서간집을 특별히 정성을 들여 남쪽으로 피난갈 때 가져간 덕분에 지금까지 보존되었다고 한다. 변지문선생의 기억으로는 어릴 때 영의정을 지냈던 鄭元容대감 등이 변씨 댁에도 와서 함께 시를 읊는 모임을 가졌었다고 한다. 이후 필자는 남양주시 미금읍 과거 원진레이욘회사의 서북쪽 약 5리 언덕에 있던 卞泰禧 등의 묘비석 등을 찾고, 사진을 찍었다. 넓은 언덕 초원 위에 상석과 약 1m가 넘는 오석으로 된 비갈이 잘 갖추어진 산소가 띄어 띄엄 산재해 있었다. 당시가 1985년 정도였는데, 머지않아 이 지역도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계획이 있다고 하였다.
『朝鮮王朝實錄』 가운데 희소한 기록으로는 부족하여 朴趾源의 『許生傳』과 연결시켜도 얼개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제자들이 연구실에 근무하며 『承政院日記』에서 관련사항을 모두 뽑고 자료를 통계처리 하였다. 마침 19세기에 편찬된 舊譜에는 역과합격자와 관직이 상세하였다. 밀양 변씨 역과합격자가 106명이고 조선시대 역관 가운데 가장 많은 堂上官을 배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당시 정리된 논문은 박사논문의 일부로 실리고,5) 나중에 손보기교수님 정년논총에 게재되었다.6) 이것을 일독한 지식산업사의 김경식 사장님은 정말 대단한 논문을 작성하였다고 칭찬해 주셨다. 『朝鮮譯學考』를 저술한 건국대학의 林東錫 교수에게도 박사논문을 보내니, 학계에 크게 보탬이 되는 업적을 세웠다고 답장이 왔다.
이듬해에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中人」이라는 제목으로 강연과 토론회를 하고 논문집에 게재하였다.7)
후에 KBS에서는 역사스페셜 프로에 밀양 변씨 역관 후손의 증언과 함께, 이 논문을 주요한 자료로 사용하고, 변응관의 비갈 등을 취재하였다. 미국에 해외파견교수로 다년 온 후에는 한말에 청국의 北洋提督 李鴻章을 만나고 한미통상조약을 주선하는데 공로가 컸던 변승업의 후손 卞元圭의 외교활동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8)
4. 숙종때 왕비를 지낸 인동장씨 장희빈집안을 찾아서
이즈음에 김용섭 교수님이 정치면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였던 인동 장씨 張禧嬪이 역관의 후손이라는 점을 김용섭 교수님이 제시해 주셨다. 그런데 이 집안 후손을 찾기는 그렇게 수월하지 않았다. 일제 때 학자가 조사한 자료에 장씨가 많았던 안양 남쪽 마을을 찾아갔으나 허탕이었다. 그후 중부고속도로가 착공되기 전에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을 찾아갔다. 옛 일을 많이 기억하시는 노인께서는 인동 장씨가 이 지역에서는 武官 집안으로 알려져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무관은 年老하면 이빨 빠진 사자와 같아서 임금님 곁에서 막중한 역할을 하던 역관에게 비길 바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벌써 몇십 년 전에 장희빈의 묘는 西五陵으로 이장하여 그곳에는 마땅한 유적이 없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서오능으로 가서 장희빈의 묘를 답사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 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장희빈 집안의 족보를 찾았으나, 張希載와 장희빈 이하는 기록이 단절되었다.(不單). 그리하여 부족하지만 『姓源錄』과 『譯科榜目』 가운데 관계조항을 조합하여 논문에 계보도를 게재하였다.9) 이 집안의 역과합격자들은 21명에 불과하였지만 장원한 사람이 많았고, 漢語譯官이 많았다. 특히 張炫은 首譯으로 효종 이래 약 40여 년간 청과의 무역을 장악하였다.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여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취재를 와서, 필자는 논문과 관계 자료를 제공하고 출연하였다. 방송에서는 은평구도서관 근처에서 장희빈 아버지 장경(張絅)의 묘와 비석을 찾고, 대구에 있던 종친회에서 새로 장희빈 이하가 기입된 『玉山張氏世譜』를 취재하였다.
그동안 사회에서 장희빈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갖고, 박종화선생은 장희빈 소설도 집필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잡과중인집안 출신임을 밝히고, 정치, 경제적인 당시 상황을 깊이 있게 천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후 장희빈의 후손으로 대전철도청에 근무하던 분이 필자를 찾아와서 후손들도 규명하지 못한 사실을 필자가 밝혀주어 고맙다고 하면서 회식을 하였다. 그분은 장희빈 사건 후 후손들은 성씨를 玉氏나 王氏 등 다른 성씨로 바꾸고, 서오능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집안의 근본을 숨기고 지냈다고 하였다. 그래서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장희빈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충북대학교 역사교육과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할 때 부연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中人에 관한 사회인들의 인식을 제고하기 위하여 범우사에서 간행하던 『역사산책』 잡지에 나의 譯官家門 논문을 요약하여 4회정도 게재하기도 하였다.
5. 임진왜란때 공로세우고, 조선후기 중인은 수령 등으로 신분상승 기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는 1990년에 이성무 교수 등이 『조선시대 잡과합격자총람 -잡과방목의 전산화-』 를 간행하면서, 그 서평을 의뢰하여왔다. 당시 컴퓨터 수준으로는 잡과합격자의 이름 가운데 僻字를 입력할 수 없어서 쪽자를 조합하여 만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필요한 자료들을 의뢰처에서 빌려서 서평을 간단히 게재하였다.10) 한편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는 그동안 수집 정리하였던 조선시대 曆算家譜 색인을 펴냈다. 당시 원장을 맡고 계셨던 황원구 교수님이 필자에게 도서해제를 요청하여서 해제를 해드렸더니, 몇 달 안에 간행되였다.11)
조선시대에 중인들은 사실상 문과에 응시할 기회가 제한되어 10명 정도 합격한 것이 고작이었고, 이렇게 합격한 사람들도 고관으로 진출하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오히려 중인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양반신분들로 부터도 벼슬다운 벼슬에서 제외되었다. 중인의 윗대 조상은 武官이나 算員집안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았는데, 인동 장씨 집안에서 보듯이 유명한 역관들 후손 가운데 長子 등 먼저 출생한 자손들은 무과를 통해서 守令으로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醫官들은 왕실이나 고관의 질환을 치료한 공로의 보상으로 경기 등, 수령으로 진출한 경우가 많았다. 필자는 『京畿守令案』 등 수령안자료를 기초로 하고, 金斗鐘 교수의 『韓國醫學史』 등에서 추출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통계를 산출하여 발표하였다.12) 다음 해에는 內鍼醫, 議藥同參 등이 수령이 되었던 사례가 더 발견되어 이를 다시 논문에 첨가하여 발표하였다.13) 조선후기에 의관이 경기도 수령에 다수 임명되면서 중인이 약 300여명 경기도 수령으로 진출하고, 그중에 약 반수 이상이 의관출신이었던 사실이 판명되었다. 『朝鮮王朝實錄』에는 경기도가 중인수령의 못자리라는 서술까지 나왔다. 2000년에는 호남 수령선생안을 입수하여 그중 약 100명 정도가 중인출신이었음을 밝혀내었다.14) 그러나 다른 시기에는 물론 같은 시기에도 同名異人이 있는 만큼, 이를 색출하는 데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근래에는 신희철선생이 『外案考』라고 조선시대 각 지방의 수령을 종합한 책이 나왔지만, 당시 까지는 한국정신문화원에 소장된 마이크로 필림에서 복사하거나, 규장각에 소장된 일부 시기의『外案』을 참고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중인의 수령진출 등 신분향상에 대해서는 서울시립대학교 사학과의 초청을 받고 강연을 해 주기도 하였다. 당시 학과 학생들이 만든 신문에는 중인출신 수령을 몇 십명 추출해 놓기도 하였는데, 필자는 몇 백명의 통계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90년대에 들어 새로운 한국사 50여권을 편찬하면서 조선의 사회 편에 중인부분 집필을 필자에게 의뢰하였다. 필자는 잡과전문직을 중심으로 부민층 까지 포함하여 이제까지의 수령진출 등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기술하였다.15) 다음 해에는 한국정신문화원의 정구복교수가 한국고문서학회에서 조선시대생활사 책을 기획하면서 필자에게 중인생활 집필을 의뢰하였다. 짧은 시일이 부여되었지만, 필자는 가능한 자료를 모아 이를 완성해 주었다.16) 이렇게 여러 부분으로 역관활동을 찾아보았지만 시대를 꿰뚫어 역관의 활동을 통찰할 필요에서 필자는 학술진흥재단에 연구과제로 신청하여 조선전기의 역관활동을 논문으로 펴내었다.17) 여기에서 초기에 조선이 만주를 사이에 두고 明의 지배자와 갈등을 겪었지만, 역관들은 무력보다는 원만한 외교관계를 수립시킴으로서 동북아의 평화에 기여하였음을 밝혔다. 또한 일찍이 없던 큰 난리인 임진왜란을 만나서는 洪純彦 같은 역관이 明의 지원군을 끌어들이는데 큰 공로를 세웠고, 동아시아의 연합군격인 明軍의 지원을 받아서 침략군을 격퇴하고, 동아시아에 새로운 무역시대를 열었음을 밝혔다.
6. 왜어역관으로 제일가는 현덕윤 등 천녕현씨를 찾아서
역관집안 가운데 천녕 현씨는 『譯科類輯』이나 『조선시대잡과학격자 총람』에서 가장 많은 倭學(왜어역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일관계사발표회를 개최하였을 때, 어느 일본 학자가 조선시대에 경제적으로 일본이 더 중요하였는가, 아니면 중국이 더욱 중요하였는지 따져 보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할 만큼, 일본으로부터 수입품의 양과 규모는 아주 중요하였다. 따라서 가장 많은 왜역을 배출한 천녕 현씨는 연구해 볼 필요가 컸다. 그러나 이 집안에 대해서는 전화번호부에 기록된 이름으로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고등학교 친구 가운데 현정 씨에게 연락하니, 종친회 사무실이 광화문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먼저 1980년대에 출판된 그 친구 집에 소장된 15권으로 된 족보에서 中郞將公派를 복사하고, 延州玄氏宗親會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곳에도 천녕 현씨 지파의 족보는 따로 없었으나, 몇 년전 까지 사무실에 나왔던 노인이 보관해 둔 역관 玄鐸의 『樊岩日記』(번암일기)를 찾아 복사하였다.
남양주군 화접리의 불암산 아래 선영을 찾아가니, 산소를 관리하던 노인이 약 100여기나 되는 산소에 제초작업을 하고 계셨다. 계획을 세워 청주대학의 제자들을 차에 태우고 가서 玄德潤등 중요한 비갈을 탁본하였다. 해가 지자 곁에 배밭에 위치한 후손 댁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까지 겨우 탁본을 마쳤다. 그 후 탁본내용을 컴퓨터에 수록하였으나, 자료를 모아서 논문을 내기 까지는 몇 년이 더 걸렸다. 후손 댁에서는 새로 집을 지을 때 舊譜인『川寧玄氏世譜』 4권 가운데 마지막권이 유실되고 없어졌다고 한다. 나중에 종친회에서 한권을 더 보충하여 마침 하바드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황경문선생이 자료를 수집할 때 넘겨주었다. 황선생은 이것을 토대로 후에 훌륭한 박사논문을 작성하여 필자에게 보내주었다. 일본 동북대학대학원 학회에서 만났을 때는 당시 L.A.에 있는 Southern California University에 재직하던 Hwang, Kyung Moon 교수가, 2004년에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에서 발행하고, Harvard University Press에서 보급한 BEYOND BIRTH Social Status in the Emergence of Modern Korea 라는 약 490쪽이 넘는 저서를 나에게 증정해 주었다.
필자는 1998년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캠퍼스의 한국학연구소에 연구교수로 파견되었다. 1년 동안 시간을 내어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논문을 작성하고, 그곳 한국학연구소에서 발표하였다. 내용은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판에 컬럼으로 소개되었다. 귀국에 임박해서는 그것을 다시 정식 논문으로 정리하여 연세대학교 『東方學志』에 게재하였다.18) 천녕 현씨는 비교적 늦게 18세기부터 역과에 합격하여 18세기에 13명, 19세기에 13명 도합 26명의 역과왜학을 배출하였는데, 조선시대에 1위로 많은 일본어역관을 배출하고, 일본과의 관계에서 통신사행과 問慰行에 가장 많은 역관이 활동하여 주목되었다. 그리고 탄압기에 玄啓欽 등이 천주교 한양회장 등을 맡아 『己亥日記』 등 순교일기와 천주교 활동기록을 남긴 공로도 많았다. 지방수령을 지낸 인물도 많았고, 玄鎰이 『蛟正先生詩集』등을 남겼으며, 19세기 중반에는 중인들의 通淸運動으로 신분향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구한말에는 독립협회운동에도 가장 많이 참여하였고, 일제 침략후 玄采 등은 계몽적인 저서를 많이 내저술하였다. 이 집안에서 출판사를 세워 약 300여종 이상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역관 중인 가운데 그들의 일상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사례가 없는 만큼 2003년에는 玄鐸의 石樊日記를 논문으로 작성하여 발표하였다.1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는 1998년 2월 조선시대 넓은 의미의 중인에 관하여 큰 학회를 열어 발표와 토론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협의의 전문직 중인 뿐만 아니라, 京衙前 등 행정직중인 및 향리 등에 관해서도 발표가 있었다. 필자는 역관, 의관, 음양관, 율관, 산원, 화원, 악인을 중심한 전문직 중인에 관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부면에 활동이 두드러졌던 중인집안의 활동을 중심으로 발표하였다.20) 17세기 이후 중인집안의 형성을 거쳐 조선후기에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논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근대화의 주체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한 원인은 그들의 성장이 정리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일제 침략에 매몰되었기 때문으로 추정하였다.
7. 조선의 의관집안과 조선의학활동을 찾아서
필자가 미국 버클리 칼리포니아대학에 파견교수로 1년간 다녀온 후,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에서는 당시 부원장 류인희교수를 통하여 한, 중, 일에 걸친 대주제로 학술발표회를 요청하였다. 필자는 먼저 가능한대로 조선시대 의관문제를 주제로 정하였다. 조선시대 의관선발 및 의료제도와 의원실태는 필자와 제자 이규근 등 3명이 맡고, 개항이후는 의사학과 박형규 교수 등 2명이 분담하여 발표하고, 토론을 거쳐 그 내용은 『東方學志』에 게재하였다.21)
무악실학회(현재는 역사실학회로 개명)에서 2000년부터 약 2년간 회장을 맡으며, 논문발표와 간행을 도왔다. 당시 논문 수집에는 서태원 박사가 많이 기여하였다. 그때에 조선시대 역관들이 국가 방비를 위해서 남북에서 화약이나 무기 등을 수입하는 일선에서 많이 활약하였던 점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22) 한편 조선시대의 중인들은 의술 등 과학기술을 직접 담당한 전문인으로 그 업적이 해명될 필요가 컸다. 또한 대전으로 이전한 국립중앙과학관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이에 대한 강연을 요청하여 출장하였다. 필자는 이 방면에 밝지 못한 사정을 무릅쓰고 자료를 모아 논문 한편을 발표하였다.23)
조선시대 중인 가운데 醫官은 가장 많은 지방수령을 배출하고, 18세기 이후 무역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譯官보다 세력이 커갔지만, 의관집안에 대한 연구가 없었다. 필자는 2003년경에 安山 李氏 후손으로 서울 은평구에 살던 이덕규선생의 제보를 받고, 자료를 검토하여 보았다. 고종시대에 御醫를 지냈던 李顯養, 李漢慶 父子를 중심으로 선조들의 行狀이 작성되어 있었고, 몇 장으로 된 家乘 및 敎旨는 남아 있었지만, 연신내 근처의 산소는 일제시기 이후 없어졌다. 이를 정리하던 차에 마침 일본 센다이(仙臺)에 있는 東北大學 大學院의 불평등연구쎈터에서 조선시대 의관에 대한 발표를 의뢰해 왔다. 한국학자 3명과 일본학자 2명이 발표를 맡아서 17세기이후 한, 일 각국의 불평등하였던 신분에 관하여 발표하였다.
충남대학교 사회학과의 김필동 교수는 조선시대 중인 전반에 관하여 발표하고 지방에서는 부유층으로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던 饒戶에 대하여도 주목하였다. 필자는 李顯養(정조 7~철종 3: 1783~1852) 등 안산이씨 의관집안의 사례를 영어로 발표하였다.24) 남칼리포니아대학의 황경문 교수는 조선 말기부터 천녕 현씨 등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한 중인 출신에 관하여 발표하였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중인 후손 가운데 언론인, 문학가, 총리 등 사회, 문화 및 정치적으로 탁월한 인물들이 각계에 배출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일본학자들은 에도(江戶)시대의 武士나 地域有力者 등의 활동을 발표하였다.
그 후 의학관계는 한국한의학연구원의 학술연구부장이던 안상우 박사의 지원을 받아 이현양의 문집인 『谷靑私藁』, 『谷靑冗語』 등을 토대로 조선후기 韓醫學이 중국과 달리 自然治癒나 養生法 등 道家的인 기풍을 갖고, 독자적 이론을 수립한 것으로 증명하였다. 이를 정리하여 논문집에 발표를 신청하였으나, 심사원 가운데는 안산 이씨라도 다른 가계의 인물들을 잘 못 모아 놓은 것으로 의심을 갖는 사람도 있었다. 필자는 마침 국립중앙도서관에 御醫 李顯養이 19세기에 직접 편집한 『安山李氏世譜』를 찾아내어, 이 집안의 계보도를 정확히 그려내었다. 이를 통해서 조선후기의 안산 이씨는 의과에서 18위에 해당한 집안으로, 1660년경부터 1900년대까지 8대 240여 년간 전승되면서 조선후기에 8대 이상 의관이 세습되었던 昇平 康氏 康命吉의 집안과 어깨를 견줄 만한 의관의 명문이었다고 밝혔다.25)
의학을 전공한 연구가들은 의관집안들이 대체로 부유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안산 이씨 집안은 후대에 계속 양자로 이어지면서 선대의 일을 잘 모르고, 이현양이 墓田을 200량에 구입한 사실만 알려져 있다. 또한 의학을 전공한 분들은 조정에서 의관들에게 상당한 혜택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여기에 소개한 이현양은 당시 勢道家로서 고관이었던 趙寅永이 ‘형님 豊恩府院君 趙萬永(1766~1846)의 隨行醫로서 금강산에 다녀오라, 고 하면 거기에 따를 수 밖에 없던 처지로서, 거기에 따르는 부담도 감당해야 하는 권력에 종속적인 지위였음이 드러났다. 이 논문의 2장에서는 조선 역사상 최고 巨富였던 왜어역관 卞承業(1623~1709)의 부인 永川 李氏(1624~1696)가 內醫 正으로 교수였던 李春楊의 딸이었던 점도 주목하였다. 당시 변승업의 재산은 약 100만량에 이르렀는데, 숙종 22년 9월 9일 그녀가 作故하였을 때 外棺에 옻칠을 하여 國喪과 다름이 없었다고 하였다.
8. 조선시대 역관의 무역과, 지도층 교회청선생안의 분석
조선시대에 역관 가운데 敎授와 訓導를 거쳐 敎誨를 지낸 인물 기록을 뫃아 놓은 것이 『敎誨廳先生案』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었다. 역관 들 중에서도 지도층으로서 燕行에도 많이 선발되고 핵심적인 세력이었다. 2003년에는 이를 분석하여 통계화한 논문을 조선시대사학보에 게재하였다.26)
서울역사문화원에서 2006년에는 조선후기 역관의 중개무역에 대해서 강연 요청이 있었다. 이후 이를 보충하여 역관의 중개무역과 왜관유지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27) 여기에서는 조선후기에 해마다 대개 청국과 100만량, 일본과는 30만량 정도 무역이 거래되고, 왜관유지를 위해서 경상도 세곡의 약 1/3이상이 소요되었음을 밝혔다.
2008년에는 조선시대 4개 국어 역관 가운데 조선에 국제화폐나 다름 없는 귀금속이 많이 들어오던 것을 취급하던 倭語譯官에 대해서 『譯科榜目』을 기초로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28) 여기에는 천녕 현씨 선영을 함께 답사하였던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이상규 선생이 많이 검토해 주었다.
9. 청주대학교대학원 제자들의 중인연구
청주대학교대학원에서도 필자의 영향으로 잡과중인에 대한 논문이 상당히 나왔다. 김석렬 군은 조선전기 역관, 의관, 산원에 대한 논문과, 조선 영조 정조시대 관상감 관원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였다.29) 황정하 군은 조선후기의 籌學을 연구하였다.30) 과거 태안 이씨 산원집안에서는 산소에 제사흫 올릴 때 옥으로 만든 기구를 사용하였다는 증언을 보면, 그들의 家勢가 부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규근 군은 조선후기 중인 가운데 가장 핵심이고, 신분상 절정을 이루었던 內醫院 醫官에 관해 석사논문을 쓰고, 이어서 2008년에는 같은 주제로 연구를 확대하여 박사논문을 완성하였다.31) 필자는 여기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安山 李氏 및 昇平 康氏 집안 등,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昇平 康氏 족보는 근래 新平 康氏 족보에서 찾아야 하였다. 중인집안의 본관은 전후에 소속과 명칭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아서 연구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에 나오셔서 필자가 족보를 찾는데 항상 협조를 해 주신 김영근선생과 오재일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10. 그 동안의 중인연구와 현대에 탐구되어야 할 전문직중인 테마
필자가 잡과중인활동에 관한 자료를 찾아 나선 것이 거의 30년에 가깝고, 적지 않은 논저를 발표하였지만, 아직 나무만 보고 숲을 개관하지 못한 느낌이다. 앞으로는 이 분야에 적어도 조선시대를 총괄한 저서가 나와야 하겠다. 더욱 年富力强한 연구가들이 나와서 이 방면에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사회에서도 譯官 등 中人 주제의 중요성을 깨닫고, 중점적인 연구지원이 이루어지고, 중인에 관한 유적이나, 유물도 문화재로 많이 지정․ 보호되어야 하겠다. 경기도 남양주군 불암산 아래 있던 천녕 현씨 선영은32) 아파트단지 신축을 위해서 100기 정도가 이전되어 그 사적을 서울 근처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誠信外交를 연구하는 일본학자가 玄德潤 등에 대한 많은 연구를 쌓고, 한․ 일간의 善隣友好 외교를 위하여 묘비를 방문하여 참배하고, 저서를 헌정한 일도 있다.33) 외화획득을 위하여 일본인 관광객을 유치하고, 『亂打』와 같은 한국의 현대연극을 보여 주는 것은 좋다. 하지만 장래 두 나라 국민의 수준 높은 意識의 공감과 교류를 위해서는 과거에 외교를 담당하였던 譯官遺蹟 등을 史蹟으로 보호하고, 일본 방문객들에게 관람시키는 것이 크게 효과를 거둘 것이다. 필자는 조선시대사학회윈들과 올해 봄에 일본에 산재한 通信使 기념관과 유적들을 답사하고, 일본인들이 관계 유물을 재래 목조건물 안에 소중하게 보존한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白頭山定界碑를 세운 金指南의 묘비가 현재 京畿道 高陽市 덕양구 오금동 산 195-1 牛峰金氏 先山에 전하고, 金慶門의 묘비는 강화도로 이전되었는데, 후손들이 이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유적들을 길이 보호하고, 역사의식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국민들이 문화를 사랑하는 문화민족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과거 ‘봉건지배층’ 에 대한 연구를 止揚하고, 신분의 高下보다 능력과 사회공헌도를 위주로 연구방향을 설정하였다. 한국에서도 양반이나 왕실 위주의 연구태도를 止揚하고, 앞으로 전개될 전문가시대에 적합한 전문직중인이나 평민 출신의 활동에 대해서, 더욱 연구 지원이 충실해지고 유적을 보존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다. 앞으로는 사료의 분량보다 연구의 질적 수준을 제고하도록, 사료가 부족한 中人 같은 분야에도 공공기관의 지원이 집중되어야 하겠다.
역사는 시대가 전환됨에 따라서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고쳐 써야 한다. 현재와 충분한 대화가 부족하고, 山積한 史料의 단순한 집적 위에서 과거를 反芻하는 역사는 퇴영으로 달릴 뿐이다. 과거에는 유교교양이 지배신분에게 1차적인 중요성을 띠었지만, 현재에는 각 분야의 전문지식이 사회에서 1차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바로 과거에 專門職中人들이 活動하였던 분야이다. 이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는 자라나는 세대의 교과서에도 체계를 잡아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크다.
과거에 다양하고 폭이 넓었던 한국 역사와 문화의 역량이 도외시되고, 역사연구가 근래에는 兩班士大夫 등 일부 지배층에 편중되게 연구가 지원되고, 획일화된 한국문화의 定型으로 고정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특히 신진 세대에게는 부족한 사료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분야보다는, 사료가 많고, 연구비 획득이 수월한 분야에 연구주제가 편중되고, 자연히 이러한 분야에 연구지원 심사위원들이 더욱 높은 평가를 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고, 中人活動의 연구 등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원이 활발해져서 한국문화의 진폭을 넓혀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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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각주)
1) 김양수, 「조선후기 譯官에 대한 일연구」『동방학지』39,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2. 8.
2) 김양수 「조선후기 譯官家門의 연구 -김지남, 김경문 등 牛峰金氏家系를 중심으로-」,『백산학보』32, 백산학회, 1985.
3) 김양수, 이상태, 이영춘, 하우봉, 백옥경, 이민원 공저,『조선후기 외교의 주인공들』, 백산자료원, 2008년 3월 간. 833쪽.
4) 김양수, 『조선후기 中人집안의 발전 -김지남, 김경문 등 우봉김씨 사례-』, 백산자료원, 2008. 3.
5) 김양수, 『조선후기의 譯官身分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87. 2.
6) 김양수, 「조선후기 역관가문의 연구 -변응성, 변승업 등 밀양변씨가계를 중심으로-」,『손보기박사 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 3.
7) 김양수, 「조선후기의 사회변동과 中人」, 『동양학』20,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9. 10.
8) 김양수, 「朝鮮開港前後 中人의 정치외교 -譯官 卞元圭 등의 東北亞 및 美國과의 활동을 중심으로-」,『실학사상연구』12, 무악실학회, 1999. 8.
9) 김양수, 「조선후기 中人집안의 활동연구 -張禧嬪과 張炫 등 仁同張氏 역관가계를 중심으로-」『실학사상연구』1, 2, 무악실학회, 1990~1.
10) 김양수 서평, 이성무 등 편저, 『조선시대 잡과합격자총람 -잡과방목의 전산화-』, 『정신문화연구』 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2.
11) 김양수 도서해제, 『조선후기 曆算家譜 索引』, 한국문화사, 1991. 12.
12) 김양수, 「조선후기 의관의 顯官實職進出」『청대사림』 6, 청주대학교 사학과, 1994. 12.
김양수, 「조선후기 中人의 地方官進出 -경기와 충청도 수령안을 중심으로-」『국사관논총』76, 국사편찬위원회, 1997
13) 김양수, 「조선후기 中人의 경기지방관진출 -守令案과 內鍼醫․ 議藥同參先生案을 중심으로-」『한국전통기술학회지』4․ 5권 합본1호, 한국전통기술학회, 1998.
14) 김양수, 「조선후기 專門職中人의 전라지방관진출 -湖南守令先生案을 중심으로-」『실학사상연구』17․ 18 합집(원유한교수 정년기념호)下, 무악실학회, 2000. 6.
15) 김양수, 「중간신분층의 향상과 분화」『한국사』34권, 근세 -조선후기의 사회 -, 국사편찬위원회 1995. 12.
16) 김양수, 「중인생활」,『조선시대생활사』, 한국고문서학회, 역사비평사, 1996.
17) 김양수, 「조선전기의 譯官活動」,『실학사상연구』 7․ 8집, 무악실학회, 1996.
18) 김양수, 「조선전환기 중인집안의 활동 -玄德潤, 玄采, 玄楯 등 川寧玄氏家系를 중심으로-」,『東方學志』 1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8. 12.
19) 김양수, 「서울 中人의 19세기 생활 -川寧玄氏 譯官 鐸의 일기를 중심으로- 」,『인문과학논총』26, 청주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3. 1.
20) 김양수, 「조선후기 사회변동과 專門職中人活動 -譯官, 醫官, 陰陽官, 律官, 算員, 畵員, 樂人을 중심으로-」,『조선한국근대이행기 중인연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신서원, 1999. 9.
21) 당시 대주제는 [조선시대 의관 선발과 의원실태]. 김양수 「조선시대 의원실태와 지방관진출」,『동방학지』104,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99. 6.
22) 김양수, 「조선후기 譯官들의 武備講究」,『실학상연구』19․ 20 합집, 무악실학회, 2001. 6.
23) 김양수, 「조선후기 專門職中人의 과학기술활동」『실학사상연구』27, 무악실학회, 2004. 12.
24) KIM, Yang Soo, "A Case Study of Official Doctor's Family during the Latter Period of Joseon Dynasty : Ansan Yi's(安山 李氏) Family Line” (朝鮮後期 醫官집안의 一事例 -李顯養, 李漢慶 等 安山李氏家系를 中心으로- ) / 國際 Symposium : 近世․ 近代の 日本 ․ 韓國に おける 中間層/ 東北大學大學院 文學硏究科 21世紀 COE Program「社會階層と 不平等硏究據點」, 2006. 2. 18。
25) 김양수, 안상우 「조선후기 醫官집안의 활동 -李顯養, 李漢慶 등 安山李氏家系를 중심으로-」,『동학학지』136,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6. 12.
26) 김양수, 「조선후기 敎誨譯官」『조선시대사학보』24, 조선시대사학회, 2003. 3.
27) 김양수, 「조선후기 譯官의 중개무역과 倭館維持費」『역사와 실학』32, 역사실학회, 2007. 6.
28) 김양수, 「조선후기 倭語譯官 -『譯科榜目』의 분석을 중심으로-」,『역사와 실학』37, 역사실학회, 2008. 12.
29) 김석렬, 「조선전기 上級技術官의 연구 - 庶孼의 技術職 入屬을 중심으로-」청주대학교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 1990. 12.
김석렬, 「英․ 正祖時代 觀象監 官員硏究 -관직과 科試 합격자분석을 중심으로-」『牛岩論叢』5집, 청주대학교
대학원, 1989. 3.
김석렬, 1989. 12「朝鮮後期譯官 金尙堯墓誌硏究」『청주대학교박물관보』3. 청주대박물관, 1989, 12.
30) 황정하, 「조선 영조 ․ 정조시대의 算員硏究 -籌學入格案과 泰安李氏 분석을 중심으로-」, 청주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1988.
황정하, 「조선후기 算員집안의 연구 - 泰安李氏 사례분석을 중심으로-」, 『한국사연구』66, 한국사연구회, 1989.
황정하, 「조선후기 算員집안의 활동연구」, 『청대사림』6, 청주대학교 사학회, 1994.
황정하, 「조선후기 畵員집안의 활동연구 - 慶州李氏를 중심으로-」, 『예성문화』13, 충주 예성동호회, 1992.
31) 이규근, 「조선후기 內醫院 醫官硏究」, 중앙대학교 대학원 과학사과정 박사학위논문, 2007. 6.
이규근, 「조선후기 內醫院 醫官연구 -《內醫先生案》의 분석을 중심으로- 」 청주대학교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 1996.
이규근, 「조선후기 內醫院 醫官연구」 『조선시대사학보』3, 조선시대사학회, 1997. 11.
이규근, 「조선후기 醫藥同參연구」 『조선시대사학보』19, 조선시대사학회, 2001. 12.
32) 경기도 남양주군 화접 3리 산 35번지 36 (낙원농장)에 중인출신 進士 鄭來僑가 지은 현덕윤 묘비가 있었으나 2007년경 밀양으로 이전되고 . 연주현씨 종친회에서 여주에 약 100여기 산소를 이전하였다.
玄德潤이 세상을 떠난 후 중인출신 進士 鄭來僑가 그의 묘비에 기록하였는데 내용만 대강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玄德潤은 嘉善大夫로서 龍壤衛 副護軍을 지냈다. 貞夫人은 昌原黃氏이다. 국가에서 부산에 譯學訓導를 두고, 왜국과 수호하였는데 왜인이 조급, 교활하여 변동을 많이 하니, 반드시 사건이 생겼다. 錦谷 玄公이 정색을 하고 왜인을 대하니 존경하고 감히 어쩌지 못하였다. 倭館을 크게 수리하고, 조정에 수백석 쌀을 받치니, 參上에 올라 재임명되었다. 해마다 倭館에 송부하던 쌀을 100석 감축하고, 오랜 폐단을 제거하여 종2품에 올랐다. 귀임할 때 부산사람들이 비석을 세워서 그 덕을 칭송하니 역학훈도를 설치한 이래 없던 일이었다. 대개 玄公이 司譯院에 40년간 삼가며 근무하고, 중요한 일을 사양 않고, 변고에도 잘 주선하여 틀린 일은 억제하니, 國勢가 銅柱와 같고 심히 떨쳤다. 詩에 능하고 草書와 隸書를 잘 쓰고, 항상 손님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柳下 洪世泰가 玄公이 쓴 역사책이 쌓여 있다고 하였다.”
국내외에서 천녕 현씨에 대해 논저를 집필한 학자는 김현영, 이상규, 김영경, 한규무, Southern California대학의 Hwang, Kyung Moon 교수 등이 있다.
33) 信原修, 『雨森芳洲と玄德潤』, 明石書店, 2008. 1. 1.
信原修,〈釜山訓導, 玄德潤の 墓碣碑銘を よむ〉《朝鮮學報》181, 朝鮮學會, 2001(平成 13年).
信原修, 2002, 〈玄德潤と 川寧玄氏 倭學譯官の 後裔だち -近世日朝交流を 支えだ 朝鮮側 一家系の 系譜-〉,《지역과 역사》, 11,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2.
雨森芳洲(아메노모리 호슈, 1668~1755)는 상대국을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誠信으로 교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損得의 이해가 아닌 성의 있는 교류를 주장하였다. 이 말은 권모술수를 본질로 하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불신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규범으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은 ‘신뢰외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재에도 생명력을 가지고 장래 한 ․ 일 우호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전제이다. 그는 대마도에 외교의 眞文役으로 파견된 이후, 倭館에도 주재하고, 대마도의 일방적 외교방식을 경계하였다. 그는 조선어를 배우는 교과서로 『交隣須知』를 쓰고, 외교에 관해 『交隣提醒』을 썼다.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아메노모리 호슈의 성신외교를 높이 평가한 이후, 일본에서도 그의 고향이 성역화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학생과 관심 깊은 분들이 그곳을 방문하여 서로 역사와 민속을 연구하고, 학술관계 발표를 하는 등, 양국 문화교류의 본보기가 되었다.
『역사와 실학』39집, 2009. 8. 31, 역사실학회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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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제가 약 30년간 연구한 경험을 토대로, 2000년도에 회장을 맡았던 역사실학회( 당시 이름은 역사실학회였음) 총무의 부탁을 받고, 작년에 『역사와 실학』학술지에 게재하였던 것입니다. 원래 58회 경기동창회 사이버 사이트에 게재하였을 때는, 본문과 주석이 함께 주입되지 못하여 따로 게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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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수 지음
김양수 교수의 공저 및 관련 원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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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 적으로나 보통사람 들의 상식선을넘어 귀중한자료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양수 博士 님
조선에서 사역원, 偶語廳 등 역관 양성제도는 어느 외국보다 우수하게 설정되었고, 대마도에서도 후에 이를 본 따서 조선어역관을 양성하였습니다. 역관들이나 의관들의 활동은 중국보다 대민활동까지 오래 지속되어 유교의 애민정신을 실현하였습니다. 일본과 조선, 중국을 잇던 중개무역활동은 은의 길, 비단무역의 길을 열며, 홍삼을 수출품으로 개발하고, 그 영향이 막강하였습니다.
세계적인 연구과제로서, 본인도 KBS TV <<역사스페셜>>에 두번정도 출연하여 그 중요성을 인식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