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23
창세기 2장 16-17절 [4장 2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은 창조에 대한 고백이고, 1항은 모든 만물에 대한 창조를 고백합니다. 이어 2항에서는 인간 창조에 대한 고백을 하는데, 지난 시간 그 일부를 살폈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정리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는데, 2항 전체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창1:26, 골3:10, 엡4:24)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창2:7, 전12:7, 눅23:43, 마10:28)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1:27).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롬2:14,15) 그것을 이룰 능력을 지니게 하셨으나(전7:29),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습니다(창3:6, 전7:29).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이 법 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창2:17, 3:8-11,23). 그것을 그들이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행복했었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졌었습니다(창1:26,28).
신앙고백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고 고백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명 드렸습니다. 첫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고, 아래로는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아담의 첫 범죄는 이런 관계를 역순으로 바꿔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 사람을 만드셨다고 할 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그 순서가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이후 여자를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일부 피조물들처럼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이것이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자 생령이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단지 생명력만 가졌다는 게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땅의 흙으로 육신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에 의해 영혼이 형성되어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첫 사람 아담이라면 아담의 아내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었습니다. 갈빗대로 만들었다고 해서 남자와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할 때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동일하게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든 여자든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독특성 중 하나가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존재라는 데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더 분명한 차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골로새서 3장 10절과 에베소서 4장 24절을 근거로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설명합니다. 신앙고백서 역시 그렇게 고백합니다.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과 함께 사람은 하나님 지식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지식, 그리고 다른 사람, 다른 피조물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로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와 거룩도 가지고 있는 자로 만드셨는데, 그런 측면에서 맨 첫 사람의 처음 상태는 죄가 전혀 없는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골로새서 3장 10절, 에베소서 4장 24절을 근거 구절로 한다고 할 때 신학자들은 이런 지식과 의와 거룩을 원의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작정하신 유일한 의와 거룩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실 것으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고전1:30).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치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롬14:23b). 그런데 그리스도가 없는 의를 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지식, 의, 거룩과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말하는 반면, 맨 처음 창조될 때의 아담과 하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신앙고백서가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자로서 만드셨다는 것은 그만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그러면서도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된 대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식, 의, 참된 거룩을 가진 자로 만드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식, 의, 거룩은 타락 이후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타락하지 않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식과 의와 거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골로새서 3장 10절이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고 말씀하시고, 에베소서 4장 24절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새롭기 전에는 잃어버렸다는 측면에서 지식과 의와 거룩과 같은 열매들이 인생의 기초와 틀이 되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나머지 내용을 살펴보겠는데, 신앙고백서는 이런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지식과 의와 거룩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은 본성적으로 압니다. 하나님의 법이 무엇인지 압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1장은 일반계시에 대하여 단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1:20)라고만 말씀하지 않고,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까지 말씀합니다. 물론 이 내용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일반계시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면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에 대하여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0절 하반부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 안과 밖으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핑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 지식을 다 심으셨습니다. 당연히 이런 지식은 창조주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의무로 나타납니다.
이웃 사랑은 어떠합니까? 로마서 2장에 보면 타락 이후에도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심겨져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알립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라는 말은 적어도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존재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 사랑과 관련해서는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관련해서는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실천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성적으로 압니다. 살인하는 것이 죄임을, 간음하는 것이 죄임을, 거짓 증거와 도둑질 하는 것이 죄임을 본성적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장이나 2장은 타락 이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타락 이후도 이러하다면 타락 이전에는 더욱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만큼 분명하게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럼 알기만 하는가? 신앙고백서는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이룰 능력을 지니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겨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아래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까지 사람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이러한 능력은 타락 이후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은 자유의지에 대한 내용인데, 1항에서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2항은 타락 이전에 대한 고백입니다. “무죄의 상태에서 인간은 하나님께 선이 되며 그가 매우 기뻐하실 일을 의지하고 행할 자유와 권세를 가졌었습니다(전7:29, 창1:26). 그러나 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상태로부터 타락할 수 있었습니다(창2:16,17, 3:6).” 그러나 타락 이후에 대해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3항입니다.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 인간은 구원을 수반하는 어떤 영적 선에 이르는(혹은 이르고자 하는) 의지의 모든 능력을 전적으로 잃었습니다(롬5:6, 8:7, 요15:5). 따라서 본성적인 사람(혹은 자연인)은 모두 영적 선을 싫어하고(롬3:10,12), 죄 가운데 죽고(엡2:1,5, 골2:13), 그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회심시키거나 그와 관련해 자신을 예비시킬 수 없습니다(요6:44,65, 엡2:2-5, 고전2:14, 딛3:3-5).”
따라서 분명한 것은 타락 이전, 아담이 첫 범죄를 하기 이전에는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을 이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본 것처럼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무죄의 상태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죄의 상태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말은 범죄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고, 변화에 종속될 수 있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어, 그것을 이룰 능력을 지니게 하셨지만,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셨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점에서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상태는 결코 영광의 상태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완성하실 그런 영광의 상태는 처음부터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광의 상태는 범죄의 가능성 자체가 없으며, 변화에 종속된 의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9장 자유의지에 대한 마지막 5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의지는 오직 영화의 상태에서 선만 행하도록 완전하고 변함없이 자유롭게 됩니다(엡4:13, 히12:23, 요일3:2, 유24).”
신앙고백서는 이런 내용에 대하여 전도서 7장 29절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결국 인간 스스로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다는 것은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강제성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범죄의 가능성도 있었고 변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죄는 결코 하나님이 저자이거나 승인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신앙고백서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에 대한 형벌에 대한 고백 부분에서 살피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이 법 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과 17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17절과 관련되지만, 16절까지 읽은 것은 17절의 금지령이 결코 부당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인색하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임의로 먹는다는 것은 먹고 싶으면 먹어도 되고,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17절, 한 가지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먹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금지령을 통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이고, 너희는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하냐?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원리적으로 보자면 사람 위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명령에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참고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하여 그 나무가 어떠한 나무인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들이 있는데(이하 김병훈 교수 글 참고, http://repress.kr/19696/),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에 대해 아무런 실마리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가서 8장 5절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는 말씀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과나무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사과나무인 듯이 아담과 하와가 유혹을 받는 그림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아마도 라틴어의 악 혹은 불행을 의미하는 단어나 사과 혹은 실과를 뜻하는 단어가 모두 ‘malum’[말룸]이라는 동음이의어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림이 널리 퍼졌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데, 올바른 이해는 아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해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 이름이 나무 자체가 선악을 구별하도록 하는 나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그 자체로 선악을 구별하는 능력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한 마귀의 말(창3:5)을 근거로 열매 자체에 이러한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마귀의 거짓된 미혹을 그대로 진실로 인정하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럼 올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김병훈 교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이름을 ‘결과적’으로, 그리고 ‘성례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라는 말은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그 열매를 먹은 후에 순종의 선과 불순종의 악이 어떻게 다른지를 실제로 경험하게 됨으로 인하여 당하게 될 결과, 즉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얼마나 많은 선을 잃어버렸으며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임을 미리 말하여 준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성례전적’으로라는 말은 하나님께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금지명령으로 인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선악의 순중과 불순종을 시험하는 상징을 갖는다는 점을 반영합니다. 만일 금지 명령을 지켰더라면 하나님께 온전한 사랑의 순종을 드러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악을 드러내고 말았음을 볼 때, 상징성을 갖는 성례전적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개혁주의신학자 튜레틴((Francis Turretin)에 따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결과적’이며 ‘성례전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금지명령을 주신 이유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도록 한 금지 명령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사람은 그의 주권 아래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교훈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외적인 상징을 두심으로써 불순종이 범한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줍니다.
셋째, 하나님의 금지명령은 사람이 의지의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넷째, 비록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실제로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하더라도 그것처럼 땅에 속한 것이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님을 교훈합니다.
끝으로 다섯째,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이 최고의 행복임을 알고 다른 모든 일에 앞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힘을 다하여야 할 것임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교훈에서 우리는 이어지는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을 그들이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행복했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에 대하여 순종할 때만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행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할 때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것은 곧 행복하지 않는 결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맨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거기서 불순종하기 전까지는 에덴동산에서의 삶이 곧 평안한 삶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번민과 고통이 있지 않습니다. 수치스러운 것도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분노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 어떤 것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에덴동산은 마치 지상 낙원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관련된 금지 명령은 그런 장소가 참된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된 행복을 주는 것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도 그 부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행복했었다고 고백합니다. 참된 행복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책과 부패라는 결과를 안고 태어납니다. 죄책과 부패의 결과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첫째 사망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채로 살다가 둘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첫째 사망 이후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신앙고백 제3장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확인한 것처럼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담 안에서 첫째 사망 가운데서 태어나지만 중생의 은혜를 입습니다. 중생의 은혜란 육신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혹은 하늘로부터 태어나는 것인데,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계20:6)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아담 안에서 죄인 된 자로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된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이것이 신앙고백 제9장 자유의지에 대한 4항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여기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행복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구약 성경입니다. 단적으로 시편 1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누가 행복한 자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그 율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보면 늘 주의 말씀을 따르면 평안을 누리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늘 어려움과 고난에 직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사기입니다.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복의 역사까지 오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에 있는 모든 족속을 다 진멸했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사기 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삿2:2-3) 이미 불순종 자체가 그들로 하여금 행복이 아닌 불행의 씨앗이 되게 하심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저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은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어렵게 하시는데, 한 마디로 죄는 불행을 결과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키면 평안을 보장합니다. 즉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거기에는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거기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누누이 말씀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그리고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신앙고백서의 첫 번째 내용,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을 만드셨다고 할 때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만물의 으뜸으로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고, 아래로는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려야 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나 소요리문답의 첫 문항은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또한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한다는 것은 인용 구절이 시편 73편으로 하자면 이것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2-28) 주를 떠나지 않고 가까이 하는 것, 그분만이 내 마음의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임을 인정하는 것, 여기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를 가까이 하는 것, 하나님만을 반석이요 영원한 분깃으로 인정하는 것은 반드시 주의 교훈으로 인도 받을 때만 됩니다. 주의 말씀과 교훈에 순종하지 않는데도 하나님을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을 즐거워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우리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참된 행복은 바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것을 알면서도 이것을 내려놓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다시 신앙고백서로 오면, 그것을 그들이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행복했었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을 가졌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 만드셨다는 내용 속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만물의 으뜸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통치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통치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 있을 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행복이 아닌 불행해집니다. 그런 불행의 결과는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이 아니라, 로마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롬1:23). 다스리는 게 아니라, 섬기는 쪽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명령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의 자리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하며, 그런 행복 속에서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살폈지만, 인간은 지식과 의와 거룩에 있어서 탁월함을 나타내는 존재로만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이처럼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통치권까지 가지게 하셨습니다.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사람은 이러한 능력까지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가능성 아래, 변화에 종속된 그들 자신의 의지의 자유에 놔두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거나 전적으로 타락하여 손상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일은 일어나게 되는데,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요, 좀 더 구별하여 말하자면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함이요 그렇지 못한 자들은 그의 영광스러운 공의의 찬양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생명으로 예정된 자로서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았다면, 그래서 때가 되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자녀로 삼아지고, 거룩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그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참된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떠난 행복은 결코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