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품
아버지의 유품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에 와 있다. 장례를 치른 후 눈에 보이는 대로 대충 정리를 해 뒀지만 구석구석 쌓인 세월의 흔적이 만만치 않다. 6개월 만에 다시 안양 집에 돌아와 보니 여전히 방마다 소중히 보관된 물건들로 가득하다. 하나씩 열어보자 우리들 것도 제법 많았다. 이불장 한켠에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만든 베갯잇과 중학교 때 수놓아 만든 이불깃, 솜씨 좋은 언니의 작품들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버리려고 한쪽으로 모았다. 아버지 집에는 거의 오래된 것들이어서 가능한 버리는 쪽으로 물품들을 분류했다. 그러다 작은 방 선반 위에 소중히 보관된 빵 기계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소복이 앉은 기계를 열자 향긋한 버터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잠시, 그 냄새에 취해 있는 순간 오래 전 옆집에 살던 한 젊은 청년이 떠올랐다. 제임스 딘.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남긴 인상 때문에 미국 배우의 이름으로 기억 속에 남겨두었던 젊은이였다.
그를 떠올리자 퀴퀴한 냄새가 난다며 버리라고 잔소리했던 아버지의 물품들이 보관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호주로 이주 후 아이가 생기면서 처음으로 단독주택을 구해 이사를 했다. 오래된 동네였다. 옆집에는 가슴 설레게 잘생긴 총각이 살았다. 시원스런 마스크를 지닌 그는 우리가 이사를 한 첫날, 허물어져가는 담장 너머에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의 훤칠한 외모를 보는 순간 이사 오기 잘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시 새로운 비즈니스 구역으로 개발이 시작되던 파라마타, 오래전 광활한 농지였던 동네가 서서히 이주민들을 받으며 도시의 흔적을 갖추고, 이어 시드니 제2의 도시로 부상할 때였다. 대부분의 집들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지어진 상태를 1990년대까지 그대로 품고 있는 그 동네의 허름한 반쪽 하우스로 이사하는 내내 투덜거렸다. 옆집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삶이 한심한기도 하여 공부만 하고 있는 남편을 있는 대로 미워하는 중이었다. 한 트럭도 안 되는 남루한 세간살이와 침대 그리고 갓 태어난 아기용품이 전부여서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오후의 햇살이 넘어가는 그때, 밥 짓는 냄새가 담을 넘었는지, ‘음. 야미…’ 하는 소리에 이어 한 남자가 노랑머리를 뒤로 넘기며 얼굴을 내밀었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듯한 부엌 창 건너편으로 콧날 오뚝한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은 그가 보였다. 그날 이후 빵이 주식이었던 호주 청년은 우리 집에서 흘러 들어가는 한식의 다양한 냄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바스러질 듯 서 있는 담장 사이로 우리는 작은 접시를 주고받으며 문화를 나눴다. 영화 속 같은 날이 이어졌다.
하루는 출근하려던 남편의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출근시간이라 자동차 보험사 서비스 직원을 부르니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옆집 총각이 부시시한 눈을 부비며 문을 열었다. 그동안 알게 된 그는 출근시간이 9시, 파라마타 정부기관의 공무원이었다. 아직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인 오전 6시40분. 우리의 부산함이 그를 깨운 셈이다. 그가 우리 집으로 건너오더니 자동차의 본네트를 열고 몇 가지를 만졌다. 새파랗게 젊은 너가 뭘 아냐? 남편은 한국말로 면박을 줬다. 그 말을 알아들을리 없는 그는 만면에 웃음을 짓더니 잠시 후 뒷뜰에서 커다란 손수레를 끌고 나왔다. 맙소사. 손수 만든 수레에는 자동차 엔진오일부터 차를 들어 올리는 기계까지 다양한 공구들이 담겨 있었다. 완벽한 이동식 정비소였다.
남편은 엔진오일이 부족한데다 차에 대해 워낙 모르는 탓에 그냥 타고 다녔고, 아직 점검시간이 남아있어 잡음이 들려도 무시했단다. 옆집의 그는 마치 자동차 정비사처럼 차 밑으로 잭을 넣고 들어 올리더니 자동차 밑으로 들어가 한동안 손을 보았다. 그런 후 수레에서 엔진오일을 꺼내 남편 차에 듬뿍 넣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차량 서비스 직원이 도착했다. 서비스 직원은 차를 점검하더니 별 문제 없다며 그의 활약에 ‘엄지 척’을 해주고는 가 버렸다. 총각은 흩어진 공구와 기름걸레, 다 닳은 손 빗자루까지 수레에 담고는 자기 집으로 밀고 갔다. 그 모습은, 제임스 딘이 청바지에 슥슥 손을 닦은 후 기름 묻은 걸레를 휙 던지는, 영화 ‘자이언트’의 한 장면과 같았다.
며칠 후 그가 쓰던 몽당 빗자루가 생각나 같은 크기의 손 빗자루를 샀다. 문 앞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 세트를 건네자 갑자기 웃었다. 그거, 우리 할아버지 때부터 쓴 거야. 나 안 바꿔. 그러면서 처음으로 집안을 구경시켜 주었다. 밝은 톤의 불빛이 포근함을 주는 거실에는 할머니가 털실로 뜬 무릎 덮개, 아버지가 손수 만들었다는 식탁, 엄마의 할머니가 만든 도자기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50년이 넘는 물건들이다. 이 집도 아버지가 대학 다닐 때 할아버지가 사준 것을 자기가 물려받아 살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담장도 좀 고치고 살아야겠어.” 잔소리하는 내게 “맞아. 좀 고치긴 고쳐야 하는데, 내가 좀 게을러서…” 자기를 인정하는 그 말보다 자신이 직접 고쳐야 한다는 말에 놀랐다. “우리는 이렇게 직접 뭐든 하려고 해서 호주의 산업이 발전을 못해. 각자가 자기 일만 하면 되는데. 난 내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며 집을 수리하는 것은 목수에게 맡기고 음식은 식당가서 사 먹고 커튼은 커튼 집에 맡기는 것. 그런데 그게 안 되네…” 그러고 보니 나와 수시로 얼굴을 마주치는 창문의 커튼도 떨어져 있었다. 결국 그 커튼은 내가 뜯어와 재봉틀로 고쳐주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때의 나도 이사하며 커튼을 직접 해 달았다. 아토피가 심한 아이의 바지는 순면으로 몸에 붙지 않게 직접 만들어 입혔다. 친구들 가족과 모임을 겸해 식사를 할 때는 식당으로 가기보다 각자 한 접시씩 음식을 가져와 나누어 먹곤 했다.
부엌 옆 아버지가 만들어 둔 선반 위에 소중히 보관해 둔 빵 만드는 기계는 이 집으로 이사 한 그해 가을에 아버지가 사 온 것이었다. 그 주말에 엄마가 빵을 만들어줄 것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이 냄새는 그날의 버터 향기 같다. 엄마는 이 기계를 무척 좋아했다.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 와 모든 것이 현대화 된 집에서 여전히 엄마는 우리들의 이불깃과 베갯잇을 보관하셨다. 엄마가 쓰러진 그해, 호주로 오시면 빵을 만들어 주시기로 했었다. 호주를 다녀간다는 설렘, 딸과 손주들에게 자신의 빵 만드는 솜씨를 보여줄 수 있을 거란 기대로 행복하셨을 터이다. 빵 기계의 뚜껑을 닫으며 나는 다시 선반 위에 소중히 올려 두었다. 버리려고 모아두었던 물건들 중에서 다시 몇 개를 제자리에 놓아두며 제임스 딘의 거실이 생각났다.
전구도 은은한 빛으로 바꾸어야 하나 싶다.
장미혜 / 2015년 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오십에 점을 찍다’, 현재 시드니에서 회계사로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