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윅 선교사는 미국에서 3년의 재정비를 마치고, 정식으로 목사안수를 받은 다음 한국 선교를 위하여 1896년 다시 내한했다. 그리고 과거에 어학훈련을 받던 소래를 찾아갔다. 그러나 자기가 떠난 뒤, 소래에는 타교단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사실 그 지역에서 터를 닦고 복음의 씨앗을 먼저 뿌린 이는 펜윅 선교사였다. 당시 펜윅 선교사는 소래에서 어학을 훈련하고 한국의 풍속과 예절을 배우는 것 외에도 성경공부반을 조직하여 전도에 힘을 썼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펜윅 선교사는 안(安)씨와 서(徐)씨를 거명하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펜윅 선교사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기독교로 입교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펜윅 선교사가 기숙했던 집주인인 안씨는 국가공무원이었는데, 본교단의 원로목사였던 안대벽(安大闢) 목사의 선친으로 추측된다. 또한 서씨로 등장하는 사람은 후일 펜윅 선교사와 함께 성경번역을 했던 서경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펜윅 선교사가 열었던 2주간의 사경회는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집회였다. 이 집회는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보다 10년 앞서서 일어난 성령이 충만한 집회였던 것이다. 집회 도중, 수년간 불화하던 성도들이 형제를 미워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서로 고백하며 화해하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고, 다음날 주일 새벽에는 무려 300명이나 모였다. 수일 후 펜윅 선교사가 그 사실을 친구 선교사들에게 전했을 때, 아펜젤러 선교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형제여, 나는 죄 때문에 그처럼 눈물을 흘리는 한 사람의 한국인을 볼 수만 있다면 수 천 킬로미터라도 걸어가겠소.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소.”
소래 사람들은 펜윅 선교사가 그곳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지만, 펜윅 선교사는 그 간청을 거절했다. 그들이 사례금을 주고, 큰 집을 제공하고 하인까지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펜윅 선교사는 다른 사람의 터 위에는 씨를 뿌리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그 요청을 뿌리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선교부도 활동하지 않았던 원산(元山)에 선교지를 정했다. 그 일은 펜윅 선교사의 개척 정신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미국 남침례신학대학원의 선교학 교수였던 카버(W. O. Carver) 박사는 1911년 펜윅 선교사의 자서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찬사를 보냈다: “이 책은 하나님께서 희어진 추수밭에 밀어 넣으신 한 강인한 사람의 인격과 역사를 약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으며 기인(奇人)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을 수도 있으며 그가 사역하는 모든 방법을 다 찬성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의 강한 필치에 감탄할 것입니다. 그가 남겨준 유효한 정보로 인해 감사할 것입니다. 여러분 대다수는 이 글을 읽는 동안 그의 은혜와 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펜윅 선교사의 남다른 선교 정신을 네 가지 관점에서 높이 평가한다. 첫째, 펜윅 선교사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았다. 펜윅 선교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말씀에 근거하여 선교의 사명을 다한 사람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선교를 위해서는 학벌이나 교단, 단체의 배경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성령의 권능만이 요구될 뿐이다. 펜윅 선교사는 이 말씀에 힘을 얻어, 오직 주님과 성령만 의지하고, 전도 일념으로 선교 사역에 충실했던 것이다.
또한 펜윅 선교사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 증인은 거짓이 없어야 한다. 주님을 증거하다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할지라도 정직하게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 펜윅 선교사는 사도들처럼,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순교하며 그 가르침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당시 초창기 한국을 선교했던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 사이에는 하나의 조약이 있었다. 그것은 교단 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사전에 전국 선교지역을 분배하고 그것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여 협조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펜윅 선교사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한 번은 일본 관헌이 펜윅 선교사를 총독부로 호출하여, “당신은 선교하지 말고 본국으로 귀국하라. 누구의 허가를 받아서 체한(滯韓) 선교하느냐?”는 압력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펜윅 선교사는 “나는 오래 전 벌써 허가도 받고 명령도 받아 선교한다” 하면서, 사도행전 1장 8절을 열어 보였다고 한다.
둘째, 펜윅 선교사는 불모지(不毛地)를 찾아다니며 전도했다. 펜윅 선교사는 타교회가 세워진 곳에서는 결코 교회를 세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남의 터에 집을 짓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 까닭에 펜윅 선교사는 도심지를 피해, 산중마을이나, 해변 마을, 섬 등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해외 선교가 타교단에 비해 빨랐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교단해체령을 받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던 동아기독교회를 조국 광복후 재건했을 때, 남한의 약 40여 교회가 하나같이 시골, 산골, 해변 섬 등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을 보면 불모지 선교에 앞장섰던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분포 상황을 살펴보면, 충청지방에서 공주, 강경, 칠산, 원당, 용안(전북), 신영, 태성, 광서, 화계, 담산, 포항지방에서 광천, 화진, 조사리, 계원, 신계, 신평, 가일, 임곡, 울진지방에서 행곡, 척동, 구산, 용장, 장평, 경북지방에서 헌평, 산점, 점촌, 마성, 용담, 서동, 용궁, 개포, 울릉도에서 저동, 도동, 현포, 서달, 태아 등이었다. 그밖에 원산을 위시하여 북쪽으로 경흥, 회령, 간도, 왕청, 연추, 수청, 훈추, 도비허 등에 이르렀다.
셋째, 펜윅 선교사는 토착화 선교의 선두주자였다. 펜윅 선교사는 한국 교회의 선교사에서 보기 드문 토착화 선교의 선구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기독교의 사업은 한국 사람들이 담당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1914년 한국 사람으로 교단을 이끌고 가도록 했다. 당시 교단 안에 쟁쟁한 목사들이 많았지만, 의외로 30대의 젊은 일꾼 이종덕 목사가 제2대 감목으로 임명된 일은 극히 의외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일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인사 정책은 인정과 체면을 초월하여 오직 교단의 발전을 염두에 둔 단행이었다. 그리고 펜윅 선교사는 신앙 자립, 경제 자립을 위해 노력했다. 정규적인 후원금을 받을 수 없는 펜윅 선교사로서는 이러한 자립은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지만, 당초 그는 어느 지역에 들어가든 그 지역 사람들과 더불어 선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 위해 펜윅 선교사는 부단히 한국 사람들과 동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활양식 면에서 펜윅 선교사는 주택을 한옥 초가로 만들고, 음식과 의복까지 한식, 한복으로 바꾸었다. 특히 그는 한복 차림을 좋아했고,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펜윅 선교사는 성별(聖別)된 생활을 강조했다. 제자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모든 교육은 이론보다 실천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실제로 솔선수범하는 본을 보였다. 펜익 선교사가 고집이 대단하여 고집쟁이라고 불린 것도 이런 생활관과 무관하지 않다. 타고난 성품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무엇보다도 보수적인 성경관에서 그런 성향이 나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성서의 진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으며 타협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런 정신으로 제자들을 교육시켰기 때문에, 본 교단 목사들은 대부분 성별된 신앙생활을 했고, 진리 수호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주의 일을 무엇보다도 우선했고, 그 때문에 집안 일이나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다(不顧家事 不顧妻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먼저 굶는 연습도 해야 한다고 선배 목사들은 간증할 정도였다.
펜윅 선교사는 선교 헌금이 들어올 경우, 전도인에게 매월 1인당 10원씩 지급했는데, 그 중 5원은 현금으로, 나머지 5원은 소책자 전도지로 보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송금하는 대신 고린도전서 9장 14절을 전문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었다. 또 어떤 때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는 마태복음 6장 26절을 써보내기도 했다. 그러면 전도인들은 오히려 더 힘을 얻었다고 한다.
펜윅 선교사가 1935년 12월 6일,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우리 교회를 세상에 있는 교회들과 갈라놓으라. 그들에게 물들지 말라.” 펜윅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 평생을 하루 같이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았던 것을 우리는 사랑의 빚으로 알고자 한다. 이제 한국 침례교는 어느덧 성년의 모습으로 날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펜윅 선교사가 남긴 마지막 말처럼, 우리는 얼마나 우리 교회를 세상의 세력과 세상의 자랑으로부터 성별시키고 있는가? 다시 한 번 그 말의 뜻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 땅에서 가장 먼저 침례를 베풀었던 사람은 역사적으로 펜윅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1906년 대한기독교회란 이름으로 교단을 발족시켰다. 당시는 펜윅 선교사의 총지휘 아래 교단이 운영될 뿐 아니라 그는 신앙노선과 자립정신 및 헌신적 선교사역의 사표였다. 그의 신앙신조는 “성경 넉넉하게 보고” “숨님[성령]께 순복하며” “마귀를 대적하라”였다. 초창기 펜윅 선교사를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같이 이 교훈을 철저하게 지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