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서술하시오. [4점]
(가) (1525년 1월) ㉠세례와 관련하여 오류로 가득한 주장들이 떠돌고 있다. …(중략)… 이러한 주장을 추종하는 이들은 누구든 그의 아내, 아이들 그리고 재산과 함께 마을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박해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1562년 3월) 의회는 ( ㉡ )을/를 오류로부터 구하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맹세와 서약을 거부했을 뿐더러 법률에 도전함으로써 그리고 공공의 권위를 거부함으로써 크리스트교 공동체에 해를 끼쳤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미 투옥되었다. 의회는 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사제가 아닌 신도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세례를 베풀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어기는 자는 누구든 자비 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 - 「취리히 의회의 법령」 -
(나) 새벽 3시경 나는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도처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눈을 떴다. …(중략)… 대피하기로 결정한 나는 학자들이 입는 가운을 걸치고 손에는 책을 든 채 집 밖으로 나섰다. 거리로 나온 후 세 무리의 경비대와 마주쳤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 무리가 나를 거칠게 대하며 책을 빼앗으려 했다. 천만다행으로 그 책이 ( ㉢ )의 기도서였던 까닭에 나는 계속해서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무리와 마주쳤을 때 이 책은 마치 통행증과도 같았다. 계속 길을 가다보니 약탈당하고 무너진 가옥의 모습들, 학살당한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쉴리 공작의 회고록 -
(다) 종교가 원인이 된 아홉 번의 내전이 프랑스를 살육으로 뒤덮었다. 그 사이 한동안의 평화는 전란보다도 더 큰 재앙을 불러왔는데, 그것이 ( ㉣ )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연대기 속에서 결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중략)… 진정으로 반문하건대, 자비나 관용, 신앙의 자유가 그러한 재앙을 초래한 적이 과연 있었던가? -볼테르, 관용론 - |
<작성 방법> ◦밑줄 친 ㉠의 내용을 서술할 것. ◦괄호 안의 ㉡과 ㉢에 해당하는 크리스트교 종파를 순서대로 쓸 것. ◦괄호 안의 ㉣에 해당하는 사건을 (나)를 참고하여 쓸 것. |
해설
∙ ㉠어렸을 때 받은 세례는 무의식 중 받은 것으로 성년이 되어 확고한 신앙을 가졌을 때 다시 받아야 한다.
∙ ㉡재세례파
∙ ㉢(㉣사건 관련이므로, 쫓겨가는 인물은 위그노일 것이고, 다행히 가톨릭 기도서를 가지고 있어서 살 수 있었다고 추론) : 가톨릭
∙ ㉣(자료 (나)를 참고) : 바르톨로메 대학살
▶[2014년 기출] 재세례파
▶쉴리 공작의 회고록 : 위그노 전쟁 내용
[세상의 모든 역사 서양사 김종권 p.150]
㉮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
㉠ 성년이 되면 재세례
㉡ 최후의 심판 도래, 천년왕국설
㉢ 도덕률 폐기론(각자의 양심이 법과 도덕의 원천)
㉣ 계급과 사유재산 부정
㉤ 퀘이커교도, 침례교도, 메노파 등에 영향
[세상의 모든 역사 서양사 김종권 p.176]
① 위그노전쟁(1562∼1598)
㉮ 신・구교도의 대립
㉯ 귀족 간 세력 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왕위계승문제
㉰ 바시의 학살(1562): 가톨릭측이 예배 중인 위그노 학살, 전쟁 촉발
㉱ 영국은 위그노, 에스파냐 가톨릭 원조: 국제분쟁 양상
㉲ 생제르맹 조약(1570): 위그노와 가톨릭 간 타협, 양파 간의 혼인 성립
㉳ 성바르돌로메의 대학살(1572): 결혼식 직후 가톨릭의 위그노 학살
㉴ 앙리 4세(위그노의 지도자) 즉위
② 앙리 4세(1589~1610, 부르봉 왕조)
㉮ 정치파(Politique)의 지원
㉯ 농업장려, 도로와 교량 개축하고 신설
㉰ 파리에 사치품공업과 견직물 공업 육성
㉱ 낭트칙령(1598년): 위그노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허용
[서양사개론 p.317]
이 무렵에 이르러 루터는 종교개혁은 루터 개인을 넘어 전국적인 국민운동과 사회운동으로 확대되었다. 1521년 루터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사회개혁까지도 시도하려는 과격한 재세례파 운동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어렸을 때의 세례는 무의식 중에 받은 것이기 때문에 성년에 달하여 확고한 신앙을 가졌을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지도자의 한 사람인 토마스 뮌처(1490~1525)는 공산적인 사회건설을 주장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그의 주된 사상은 묵시록적인 천년왕국설이었으며, 최후의 심판과 신의 나라의 도래가 가까워졌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농민전쟁의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재세례파는 모든 기존질서에 반감을 갖고, 기존의 법이나 도덕률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이 바로 법과 도덕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다(도덕률폐기론). 그들은 또한 계급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신자들의 공동사회에서의 공동노동과 이익의 공동분배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1535년 네덜란드 출신의 재단사인 라이덴의 존을 중심으로 한 재세례파의 한 집단이 뮌스터를 점령하여 그들의 공동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으나,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등 현실적으로 혼란만 야기시키고 실패한 사례도 있다.
[서양사개론 p.340]
프랑스의 칼뱅계통의 신교도인 위그노는 중남부, 특히 알비 이단파가 강했던 남서부지방에 많았고, 사회적으로는 상인이나 수공업자 등 신흥계층만이 아니라 귀족 사이에도 위그노는 적지 않았다. 위그노전쟁은 신・구교도의 대립이 주축이지만, 귀족간의 세력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그리고 왕위계승문제 등이 엉켜 장기간에 걸쳐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영국이 위그노를, 에스파냐가 가톨릭을 원조하여 국제분쟁의 양상까지 가미되었다. 전쟁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1572년 8월 23일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때마침 위그노 지도자의 한 사람인 나바르왕 앙리의 왕매(王妹)와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들은 구교도의 습격을 받아, 지도자의 한 사람인 콜리니 제독을 비롯하여 2,000명이 학살되고, 지방에서의 피살까지 합치면 ‘聖바르돌로메의 대학살’의 희생자는 만 명을 넘었다. … 이후 나바르왕 앙리가 앙리 4세(1589~1610)로서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종결될 서광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앙리 4세가 위그노의 지도자였다는 점이다. 파리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한 앙리 4세는 “파리는 聖事를 행할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지는 대로, 1593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1598년에는 낭트의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장기간의 종교전쟁을 종결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