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이 있는 자리- 70
03/10/2024
in 칼럼
부모님을 모신 죄
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월의 시드니 햇살은 성난 바람을 잠재운다. 겨울을 피해 따뜻한 남쪽 나라, 시드니를 선택한 이유다.
한국의 겨울은 항상 추웠다. 시리도록 마음고생을 한 탓일 게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30여 년을 호주에서 사는 동안 겨울이 오는 소리가 두렵지 않았다. 주머니가 두둑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내일이 불안하지도 않았다. 단 하나, 남극에서 시작되는 겨울바람이 어쩌다가 휘몰아치면 한겨울을 실감한다.
방금 다녀간 손님은 내 책상 위에 그런 칼바람을 두고 갔다. 그에겐 이번 겨울이 더욱 추울 것 같다. 부모를 요양원으로 보내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아픔을, 그저 지켜보는 입장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긴 세월, 부모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그의 가정은 금이 갔다. 아픈 부모 앞에 효자 없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하물며 치매 환자를 돌보아야 했던 아들 내외는 점점 심해지는 환자로 인해 되돌리지 못하는 약속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아이들도 다 떠났단다. 부모의 넓은 집에서 살아가는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하소연 말미에 그는 끝내 눈물을 보인다. 60이 갓 넘은 젊은 노인이 “나도 늙을 텐데, 참 나쁘죠”라며 힘겹게 일어선다. 흩어진 통장을 주섬주섬 집어 드는 손길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부모는 호주에 정착한 한인 동포 중 상당한 부를 이룬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형제들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자리 잡았지만 호주의 교육을 받은 그들은 아버지의 가부장적인 사고와 어머니의 무조건적 순종이 이해되지 않았고, 결국 부모와의 사이에 커다란 벽이 만들어졌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그의 형제들은 한국으로 영국으로 모두 떠났다. 얼마 후 호주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실패를 맛보았고, 하는 수 없이 부모의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나라로 떠난 형제들은 그가 부모님과 합류한 것을 반기며 부모님을 모시는 한, 부모의 집을 막내가 유산으로 가져도 좋다고 동의했다. 그리고 꽤 부유한 부모와 같이 살게 되니 본인도 더 이상 고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단다.
한동안은 모두가 행복했다.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부친의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동시에 90세 부친에게 기억이 사라지는 시간이 찾아왔다. 치매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 질병은 진행 상태에 따라 정부에서 지원이 많지만 그의 아버지는 지원 서비스에서 제외됐다. 자산이 너무 많아서다.
그는 한동안 부친의 치매를 숨겼다. 치매라고 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증상이어서 건망증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그의 아내인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서야 ‘치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증상이 더해갈수록 부친의 자산도 빠르게 사라졌다. 어머니의 결정으로 막내인 그가 아버지 자산관리인으로 등록됐다. 부모의 상황이 드러나자 다른 형제들이 속속 돌아왔다. 이어 부친의 남은 재산을 놓고 막내아들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3층짜리 저택은 해외에서 살던 자녀들이 충분히 머물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의 형제들 뒷바라지는 오롯이 막내아들 몫이었고 그의 아내는 한순간 가정 관리사가 되어버렸다. 그나마 처음 몇 주는 형제들이 그의 눈치를 보는 듯 하였지만 어느새 그들은 시드니에서의 삶을 즐겼고, 그의 아내는 지쳐갔다. 끝내 그의 아내는 해외에서 온 손윗동서들과의 갈등을 참지 못하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먹거리 쇼핑부터 집 안팎 청소까지 그가 도맡아 해야 했다. 그동안 부친의 재산을 탕진한 나쁜 아들이 형제들에게 속죄하는 모양새가 됐다. 마침내 재산이 90만 달러 미만이 되어서야 정부 도움을 신청할 수 있었다.
호주에서는 정부 연금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갑자기 불편한 상황이 발생하여 단기 입원하게 되면, 본인 부담으로 사설 요양병원에 묵게 된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장기간 입원시에는 약 50만 달러의 입원 예치금이 있어야 한다. 환자의 집으로 방문하는 요양관리사 비용도 적지 않다.
물론 약은 메디케어 시스템으로 정부 의료지원 하에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지만 곶감 빠지듯 나가는 요양비 지출은,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아버지의 자산을 관리하는 아들의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모든 형제들의 눈길이 감시카메라와 같다고 그는 힘없이 털어놓았다.
그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문득, 아버지를 돌보던 동생에게 혹시라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적이 없었는지 돌아보았다. 그의 하소연은 어쩌면 동생이 내게 하고픈 말이었을 수도 있다. 갑자기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얼굴에 스치는 잠깐의 어둔 그림자를 보았던 것일까. 그가 한뭉치의 은행 통장을 꺼냈다.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부친의 자산상태 감소를 보여주는 통장이었나 보다.
그가 내민 통장의 내역들을 살펴보았다. 내 직업이 현금흐름을 다루는 일이건만, 그가 내민 통장에 나와 있는 각 지출 항목의 타당성을 증빙해 줄 수는 없었다. 치매 환자를 돌보는 동안 그토록 많은 비용이 소요되는지 궁금했지만 다른 이들의 삶을 선뜻 재단할 수 없거니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숫자 행렬을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내민 통장의 난해한 지출들에 꼬리표를 달지 못했다.
호주의 겨울이 춥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워낙 추운 곳에서 살았던 기억 속 체감 온도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그가 입고 있는 에르메스 자켓은 후줄근해 보였다. 드라이크리닝 할 시간이 오래 전에 지난 것 같다. 간병 요양원으로 부친을 모시는 게 당연하다는 말을 해야 했을까. 일반인들의 한달 월급에 버금가는 고가의 옷을 입은 그가 진정 찾고자 했던 답변은 무엇이었을까.
책상 위에는 통장을 넣던 비닐 케이스가 놓여 있다. 더 이상 소중하게 보관할 필요가 없었나 보다.
그를 배웅하려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유난히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다.
장미혜 / 캥거루 문학회 회원. 수필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오십에 점을 찍다’. 현재 시드니에서 회계사로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