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도장의 시작
83년 당시는 본부가 서울 경희대 옆 회기동 역에 있는 소위 회기도장이었습니다. 7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안운산 태사부님은 용화동을 중심으로 판을 개척하려고 용화동에 연락을 취해 용화동 통천궁을 가끔 오간 적이 있었습니다. 용화동 증산교 대법사의 지도자 종령 황원택을 위시해 범초 홍성렬 등 구 교인들이 주장하기를, 출교당해 쫓겨난 사람이 2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연원주를 들먹인다 주장하고 무력까지 행사하는 바람에 결국 판을 버리고 아무도 없는 무인지경에서 자제분들을 데리고 새 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해방이후 24세의 태사부님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불과 수개월만에 수천호를 포교하여 발판을 마련하여 송종수씨와 함께 원평에서 구 교인몇몇이 의통을 만들고 있다 하여 가보니 겨우 샘플정도를 만들고 있음을 목도합니다. 누가 주도하는가 했더니 움막집에 방한칸 세들어 사는 병약한 60에 가까운 청음 이상호씨였습니다. 해방이후 오갈곳없는 맹인 이상호씨를 원평에서 만난 20대의 패기만만한 태사부님은 벽촌누항에 청맹과니로서 아무런 경제능력없이 버려진 청음을 일단 경제적으로 거두시고 종교적인 동지로서 손을 잡습니다. 한편 해방이후 남주 이성영(정립)은 갓 50세로 해방과 더불어 감방에서 출감합니다
6.25 이후 태사부님이 용화동과 결별하고 이상호 이정립 형제와 관계가 깨진 후 이러한 내막을 감추고 대법사 일개 조직부장으로 비하해 쓴 증산교사는 자신들의 입지만을 구축하려 한 이정립 자의로 쓴 철저한 왜곡서입니다
그때 안운산 태사부님은 이상호 이정립 형제에게 의통제작을 위해 당시 경면 서너말를 제공했노라(태사부님 표현) 한 표현대로 의통제작에 모든 경비를 올인하지만 이정립은 맹인인 이상호의 권위를 빌어 태사부님을 도외시하고 모든 제작과정을 숨기고 대경면을 상당부분 빼돌려 사적인 용도로 소비합니다.
그들은 태사부님의 존립근거의 흔적을 없애나가는 행각을 벌리는데, 이러한 부분이 태사부님과 이상호 이정립 형제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이상호 이정립은 해방이후 당시 조직연원의 실권을 쥔 젊은 총사수 안운산 태사부님을 배제하고자 증산계 종교통합운동(증산교단통정원)을 벌리는데, 태사부님의 직계인물들을 자신의 조직밑으로 쓸어 넣어 판갈이 하고 젊은 태사부님을 허수아비로 만들려고 합니다. (태사부님 직계 연비 두령들을 내세워 태사부님을 끊임없이 흠집내고 반목하게 하여 젊은 총사수의 지도력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살아생전 66-67년무렵까지 끊임없이 태사부님의 흔적을 지우려고 박복만등을 내려 보내는 바람에 태사부님은 항상 집을 떠난 생활을 하셨고 가족들은 그런 분위기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는 원인이 됩니다.
태사부님은 박공우 성도 쪽에서 전수받은 송종수(80년도에도 괴정동 본부도장에서 신앙하셨고 도모님을 송씨종산으로 모시게 한 분임.) 씨로부터 의통제작비법을 전수받아 소상히 알고 계셨으며 연맥이 부친으로 대순전경에도 (보천교의) 안자 병자 욱자로 나오며 그 연맥은 이치복씨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치복 성도는 천지공사에서 이종물에서 추수공사로 넘어가는 도수를 맡은 상징적 인물로 차경석 성도와 함께 모든 주요 공사에 같이 참여한 성도입니다.
태사부님은 6.25라는 사건을 계기로 의통목이 허망하게 지나치자 20년뒤에 다시 보소하며 친히 작명해준 이상호 이정립이 있는 대법사와 임시작별하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66,67 이상호 이정립 사후 무주공산이 되어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무법천지가 된 용화동엘 20년만에 찾은 태사부님은(당시엔 태사부님 연비 라인인 황원택이 교주) 연비 신도들에게 갖은 폭언과 난무하는 폭력앞에 모든 것을 천지공사임을 아시고 훌훌 던져버리고 새 배포를 꾸미게 된 것 입니다.
이것이 일등방문도수 安家의 세 살림 도수(초복,중복,말복도수)의 첫 단추인 문왕의 도수의 출발입니다.(경만장 세번 부르게 한 도수로 천하불갈 만경강 안 씨 세 살림 천하사 도수)
가족포함 열 댓명 신도가 전부였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도모님도 한복 치마입고 태사부님과 안경전 안원전 선정사 혁명가님 등 모든 자제분들을 동원해 모든 식구들이 총동원해 도청앞에서 대전역까지 홍보지를 나누어주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해 도모님이 불현듯 떠나시면서 지금까지 그저 상황만 소극적으로 바라보던 서울의 대학생이던 안원전이 사생결단을 하고 대학가에 본격적으로 덤벼들게 됩니다.
안원전이 포교를 해 대학생들을 끌어들여 서클을 만들며 키워가던 초기무렵 81년에 소만망종 두미를 내세운 안경전이 81,82년에 개벽이 온다고 엄청나게 어린 학생들을 몰아세우고 하는 바람에 당시 서울 홍익대 서클을 만든 이호신, 이현오 등이 대학생활을 그만두고 대전에 내려오고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개벽이 안와 모두 나가버리는 사태가 됩니다.
이때 초기 안원전이 포교한 선후배 지인 수 십 명 및 대전고교 동창들 연대 포교하던 문상현 및 두 동생 문상훈, 문상인을 비롯해 충남대 서클 만든 금은주(공대) 및 이 호신 이현오 등 그 후배들 4-5명 민영홍, 모연근, 김한기, 김영근등 고려대 맡았던 고교 동창 조한필(중앙일보 기자), 한남대의 김치경, 등 수 십 명이 실망하고 모두 증산도문을 결별하게 됩니다.
광주민주혁명이 있었던 80년에 한양대 충남대 홍익대 서울대 등 대학가를 개척하면서 처음 데리고 시작한 최초의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대에 안원전 고교 동창 배문식(산업공학), 고교후배 허정(전자공학)이었고(이종혁은 배문식이 연원주) 연세대에 문상현(기계공학과), 고려대에 조한필(사학과.중앙일보 기자), 숭전대에 김치경(경영), 홍윤기(경영), 한양대에 김홍배(영문과.삼성물산),서정암(신방, MBC 기자), 민성규(도시공학), 여정수(정외), 양의정(정외), 김남용(공대 강릉), 서병종(공대), 강형석(공대 기계과 삼척), 정해(행정), 라윤준(공대),하종연(공대 마산), 강석규(강릉)이었고, 충남대에 금은주, 민영홍(안원전 동창 민수홍 동생.큰아버지 충대 지도교수로 우주변화원리회로 서클 등록), 문상훈(문상현 동생), 문상인(문상현 동생), 모연근(공대), 김한기(공대), 김영근(공대), (수 년 뒤 금은주 후배 한 장환) 등이었고 홍익대는 금은주(공대)의 지인후배인 이호신(공대), 이현오(공대) 등이었습니다.
81년 안원전은 건국대 대학원(부동산) 다니던 전찬수의 성북동 자택 5층 빌딩(부산제과 빌딩) 옥상 화)옥탑방을 제공받아 신단을 제설하고(배승환, 이용찬(행정:민성규 여정수 친구), 조규동 등 건대 팀 활성 서울 포교소 겸 도장으로 되는데, 이때 도문에 들어온 사람이 안원전 동창 김정환 여동생 김영아를 직접 포교해 그오빠 김석환(안원전 대전고 후배.서강대 사학.친구 김정환 동생. 전라남북도 총 연원주)이 들어와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 김석환의 마포 용강동 대광 아파트에 외대 서반어과 다니는 사촌형이 살고 있었는데 전주고 동창 친구인 김영곤이 들락거려 안원전을 만나 증산도에 입도하는 계기가 되고 김석환이 김영곤을 데리고 그 인맥을 포교해 들어갑니다. 안원전과 김영곤은 전주부터 함께 내려가 진을 치고 원광대에 화랑회라는 서클을 만들고 한국 실바마인드 콘트롤 도입한 삼총사 정신세계사 송순현 사장, 전북 실바마인드 원장 윤세창, 광주 실바마인드원장 민윤기 중 윤세창과과 민윤기를 포교하는데 그 때의 전라도 전주 광주의 마인드 콘트롤 학원 간판은 모두 증산도장으로 바꾸게 됩니다.
그 외 성북도장에 외대출신의 40대 후반의 이태훈(후일 교정 역임), 이종혁(서울공대), 계용암(경희 한의 ),임왕수(경희 한의 윤창렬 연비 ), 이대 정원재(가정), 이기향(이대 불문;후일 임왕수와 결혼 사당동 덕인한의원 경영후 밴쿠버 이민), 송일영(이기향 친구), 배승환(건국 임학),이용찬(건국 행정 건대판 개척),조귀동(건국 행정), 신종현(라즈니쉬 및 밀교로 출교 뒤 정음사 접근 말아먹음) 성북도장 말기82년에 김구연(서울대 공대), 백용아(경희대 한의대.안원전이 경희대 서클명을 동현회로 등록시키게 하여 경희대 서클 초대회장) 등이 드러오고 이후, 허순범(경희 한의대: 원유근의 실제 연원주), 신민식(경희 한의:원유근의 연비), 박재영(경희 한의) 임성호(경희 한의), 원동희(경희 한의) 외 수명, 윤창렬(경희 한의대.), 이준규(경희 법학 윤창렬 연비), 박혜정(이대.모친 옥경자 인도.이대 서클 개척 후일 양의정과 결혼) 등이 들어오며
그 해 겨울 이태훈(외대 졸), 김석환,이종혁,이용찬,배승환, 여정수(안원전 포교),양의정(안원전포교),민성규(안원전 포교) 등이 안원전을 완전히 따돌리고 직접 대전 대사동의 허름한 단간방 태사부님 집으로 쳐들어와 향후 증산도의 청사진을 제시하라 태사부님을 압박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의 이면에는 80년도 안경전의 소만망종 두미 시한부 개벽 사건이 심연에 깔려 허망하게 망한 경험위에 신앙이 일천한 애송이 신앙자의 입장에서 불투명한 개척 포교도장에서 튀쳐나온 돌발 사건이었읍니다. 소만망종 두미사건 에 덧붙여 이 사건 이면에는 당시 성북도장 분위기가 다시 시한부개벽을 안경전이 간간히 주장해 전찬수가 날짜를 정해 그때까지 개벽이 안오면 도장무상 제공을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 한 것으로 전찬수가 임의로 정한 개벽날짜에 아무런 소식이 없자 결국 성북도장을 폐쇄시키고 회기도장 시대를 맞이하면서 실질적인 본부역할을 회기도장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휘경역 위생병원쪽 계단앞82년 후반 겨울에 지하철 1호선 붉은 벽돌로 지은 아담한 45평여의 5층빌딩 3층에 회기도장을 마련하고(뒤에 1층도 함께 사용) 이준규가 자비로 간판을 만들었읍니다. 교통이 아주 편리해 사람을 모으기가 편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