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 1권 참아버님의 탄생과 내적 준비 제6절 해방직전 최종준비 (1943.10월~1945.8월)
1. 조기졸업과 귀국
와세다고등공학교 졸업 1943.9.30., 전기공학과 25회
내가 동경에 가서 학교 졸업하고, 그때는 학병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반 년을 단축해서 졸업했습니다. 왜정 말기에 있어서 우리가 졸업할 때는 공과계통의 학생들은 6개월 먼저 졸업했다구요.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 해서 6개월 단축해 9월에 졸업했습니다.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으로 돌아가게 되어 몇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쳐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표를 무르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관부연락선 ‘곤론마루崑崙丸’피격사건 1943.10.5. 01:15
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하관下關을 거쳐 가지고 한국까지, 서울까지 오는 티켓을 끊었는데 그때 타야 할 것이 곤론마루예요, 곤론마루. 곤론마루라고, 곤륜환(崑崙丸)이라고 하는 배가 침몰이 되었어요. 바로 그 배를 내가 타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가 10월 4일인가 되는데, 그 배를 딱 타게 된 거예요.
몇 시에 배를 탄다고 전보를 쳤으니 딱 그배를 타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거장에 나가 차를 타려고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 배를 탔으면 가는 거지요. 하늘이 벌써 선생님을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그걸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마음이 뒤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당장에 전보를 쳐서 못 간다는 연락을 안 하고 돌아와서 동무들하고 등산을 갔어요. 그때가 가을이었거든요. 부사산에 가자고 해 가지고 등산을 갔어요. 내가 등산 가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갔어요. 일주일 있다가 돌아왔으니 말이예요, 어디 전보를 쳤겠어요? 그러니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본가(本家)의 소동과 모정의 극치
고향에서는 큰일났던 것입니다. 아들이 딱 그 배를 타고, 아무날 몇 시에 온다는데 안 왔으니 큰일이 났거든요. 야단이 벌어졌던 거예요. 어머니가 얼마나 자식을 사랑해요. 그러니 어머니는 환장할 지경이지요. 저 평안북도 정주에서 경찰서에 그저 이틀 간이나 들락날락했던 것입니다. 부인이 치마도 안 입고 홑바지 바람으로 행차했으면 그거 다 된 것 아니예요? 정신이 없었던 거예요. 맨발인지 치마를 벗었는지 그거 볼 게 어디 있어요?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서 정주읍까지는 이십 리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 이십 리 길을 왕발(맨발)로 뛰고, 부산까지 갔다 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 나와 가지고 부산 수상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이래 가지고 그렇게 골똘한 마음을 가지다 보니 왕발로 뛸 때 그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박혀 가지고 곪아 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보름 후인가,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정주에서 서울이 얼마나 멀어요. 580리 길이니까 기차로는 열 시간 걸려야 되는 거예요. 그래, 부산까지 오려니 얼마나 정신이 돌았어요. 그러니 위대한 부모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를 대해서 선생님 자신은 효도를 못 해봤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가진 사람이라구요. 그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 해봤다구요. 왜 그랬느냐? 임자네들을 사랑하려고….
귀국 1943.10월 중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이제부터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은이들은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을 떠나오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지금은 일본 천황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여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가지만, 앞으로는 너희 나라 백성, 너희 나라의 청년 남녀들에게 내가 명령하고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20년 만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청년 남녀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한 5백 명 모였는데 그들이 전부 다 부자집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일본은 우리 한국의 원수인데 내가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밑천까지 대주며 특사를 보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너희 나라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하고 물으니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전부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일본 천황도 다 필요없고 통일교회와 통일교회 문선생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명령하고 들이몰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거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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