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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판서 백주(白洲) 이공 명한(李公明漢)의 신도비명 병서
고(故) 태재(太宰) 백주(白洲) 이공(李公)을 이미 장사 지낸 다음 해에 그의 큰아들 일상(一相)이 슬픔을 머금고 가장(家狀)을 가지고 석실(石室)의 병사(丙舍)로 나를 찾아와 울면서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묘에 이제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하는데, 한마디 말을 써 주어서 후세에 영원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근세의 공경 세가(公卿世家) 중에 문장으로 크게 이름이 나 온 천하에 가득 퍼졌으며, 부자가 대대로 문단(文壇)의 맹주 노릇을 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이름이 드러난 집안으로는 연안 이씨(延安李氏) 집안보다 앞서는 집안이 없다. 내가 일찍이 태사(太史)의 직을 맡아 있었으니, 명신(名臣)과 현대부(賢大夫)들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국승(國乘)을 돕는 직책이었다. 이에 드디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연안 이씨의 선대(先代)가 중국에서 나온 일은 족보에 갖춰 기록되어 있다. 신라와 고려조에서 대대로 벼슬아치가 나와 높은 지위와 드러난 관직에 있었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뒤를 이었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휘가 석형(石亨)이고 호가 저헌(樗軒)인 분이 있었는데, 초시(初試)와 복시(覆試)와 전시(殿試)의 삼장(三場)에서 장원(壯元)을 차지하였고, 관직은 1품에 이르렀으며,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그의 아들 혼(渾)은 장령(掌令)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아들 순(順)은 장수를 누려 수직(壽職)으로 2품관에 제수되었고, 그의 아들 계(𡹘)는 현령을 지냈는데, 이 양대(兩代)는 모두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현령공(縣令公)은 고문(古文)을 잘 지어서 가문의 명성을 이었다.
그의 아들인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정귀(廷龜)는 우리 소경대왕(昭敬大王)의 인정을 받아 두 번이나 문형(文衡)을 잡았는데, 문장으로 천자를 감동시켜 우리나라의 억울한 무고를 씻었으므로 천하에 그의 이름을 외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월사(月沙) 선생이라고 칭해졌다. 이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공의 휘는 명한(明漢)이고, 자는 천장(天章)이며, 백주(白洲)는 별호이다. 어머니는 권 부인(權夫人)으로, 예조 판서 권극지(權克智)의 따님이다.
공은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28) 3월 16일에 태어났다. 임신하였을 때 달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태어나자 기이한 자질이 있었다. 처음 말을 배울 때 이미 문자를 알았다. 3세 때 대부인(大夫人)께서 도적을 피해 강을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배가 전복되어 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는데, 마침 하늘이 도와서 부인 혼자만 공을 안고 죽음을 면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겨우 10세가 되었을 때 정신이 매우 뛰어나 한 편의 글을 지을 때마다 선배들이 보고는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뒷날 문장으로 대를 이어 흥기할 것을 알았다. 16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으며, 이로부터는 시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높은 순위로 뽑혀 또래들 가운데 재주를 다툴 만한 사람이 없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8)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옥당록(玉堂錄)에 피선(被選)되었다. 아버지 문충공(文忠公)께서 주청사(奏請使)로 갔다 온 공로로 은혜로운 서용(敍用)이 있어 품계를 뛰어넘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좌랑으로 옮겨져 지제교(知製敎)를 띠었다. 당시에 윤기(倫紀)의 변고가 있어 정청(庭請)에 참가하지 않은 자에게 죄를 주었는데, 공은 거기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체찰사(體察使)나 진휼사(賑恤使) 등이 앞 다투어 자신의 종사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얼마 뒤에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으며, 여러 사신(詞臣)들이 문사(文事)에 필요한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을 고르는데, 공이 거기에 들어갔다. 문충공이 중국 조정에 조회갈 때 의주(義州)까지 수행해서 갔다가 돌아왔다. 해서(海西) 지방의 진휼하는 일을 살펴보았으며, 병조 좌랑으로 옮겨졌다.
신유년(1621, 광해군13)에 교리(校理)에 제수되었다. 홍문관의 동료들과 함께 간적(奸賊)의 괴수를 논핵하면서 처형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사람은 그 당시에 권병(權柄)을 훔쳐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화복(禍福)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말한 것이 비록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사론(士論)이 시원하게 여겼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반정한 뒤에 상께서 공이 명가(名家)의 자손이고 또 평소에 재주가 뛰어나다고 들었으므로 먼저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으로 제수하고, 팔도에 내릴 교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에 이조 좌랑에 천거를 받아 제수되었다. 어사로서 관동(關東) 지방에 가 선유(宣諭)하였으며, 이어 암행어사의 명을 받아 관리들의 정사와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보게 하였는데, 천거를 하고 배척을 한 것이 사신의 체모에 아주 잘 맞았다. 조정으로 돌아와서 다시 옥당에 들어갔다가 이조로 옮겨졌다.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승문원 제술관(承文院製述官)과 한학 교수(漢學敎授),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사국 찬수(史局纂修)를 겸임하였고,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상께서 공주(公州)로 행행하였다. 김류(金瑬)가 총독(摠督)이 되어 공에게 종사관이 되기를 요청하였으며, 체찰사 한준겸(韓浚謙)이 전에 공이 자신의 막부(幕府)에 있었다는 이유로 이서(移署)하지 말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께서 양쪽에 다 참여하라고 명하였다. 어가를 호종하여 공주에 도착하자, 상께서 공과 이식(李植)에게 명하여 어전에서 팔도에 내릴 교서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보는 자들이 빠르게 짓는 것을 보고는 감탄하였다. 서울로 돌아와서 글에 관련된 하찮은 일로 파직당하였다.
얼마 뒤에 응교(應敎)에 승진 서용되었으며, 또 사간(司諫)으로 승진하였다. 혼조(昏朝) 때의 궁인들 가운데 아직까지 그대로 궁궐 안에 남아 있는 자가 있어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세력을 뻗쳐 나갔다. 이에 차자를 올려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은미한 조짐을 막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였으며, 또 궁궐 안의 다스림을 엄하게 해 출입을 금지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상께서 모두 가납하였다. 얼마 뒤에 다시 응교가 되었는데, 형제간에 홍문관에 함께 있게 되었다는 이유로 송(宋)나라 때 소식(蘇軾)의 고사를 인용하여 힘껏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검상(檢詳)으로 옮겨졌다가 사인(舍人)으로 전보되고, 집의(執義)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사간으로 옮겨졌다.
특별히 이조 참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하는 것을 허락받았으며,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가 되었는데, 이는 모두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었다. 간절하게 사임하여 본직인 이조 참의에서 체차되었으나, 여러 겸직은 예전 그대로였다. 얼마 뒤에 다시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며, 사명(使命)을 받들고서 호남으로 갔다가 돌아와서는 폐단을 구제할 10여 가지 계책을 조목별로 올렸는데, 하나하나가 다 적절한 것이었으므로 상께서 표창을 하고 해당 관사에 내려 시행하게 하였다. 문신정시(文臣庭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상께서 직접 하사하는 말을 하사받았다.
당시에 어떤 소인배가 말을 올려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자들을 모두 배척해 일망타진할 계책을 세웠는데, 상께서 속으로는 그자의 마음을 의심하면서도 겉으로는 응해 주는 척하였다. 이에 조정 사람들이 걱정하면서 분하게 여겼으나 감히 따져서 말하지 못하였다. 공이 상소를 올려 간악한 정상에 대해 통렬하게 논변하고는 호오(好惡)의 뜻을 명백히 보이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뭇 소인배들이 공에 대한 원한을 뼛속 깊이 품었는데도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얼마 뒤에 병조 참의로 옮겨졌으며, 또 승지로 옮겨져 사국(史局)의 수찬관(修贊官)을 겸임하였는데, 이는 실로 총재(摠裁)를 보좌하여 재정(裁定)하는 직임으로, 아래에 배속(陪屬)된 자리가 아니었다. 가을에 명을 받들고 의주(義州)에 가서 무과를 시험보이고 돌아왔다. 우승지로 승진하였으나 사임하고서 형조로 옮겨졌다.
정묘년(1627, 인조5)에 서쪽 변경에서 경보가 있어 어가를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가서 상의 명에 의하여 부로(父老)들에게 유시하는 글을 지어 올렸으며, 다시 좌승지에 제수되었다. 상께서 도성으로 돌아와서 친히 사묘(私廟)에 제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공은 올바른 예가 아니라고 극력 진달하여 성상의 뜻을 거슬렀다가 심한 질책을 받았다. 공은 감히 자리에 편히 있을 수가 없어서 재차 상소를 올려 사임하면서 외직으로 나가게 해 주기를 요청해 남양 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자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며, 뒤에 공이 상(喪)을 당한 소식을 듣고는 쌀을 배에 싣고 와서 부의(賻儀)하기를 마치 관가의 명에 따라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다가 대사간(大司諫)으로 옮겨졌다. 차자를 올려 제왕(帝王)의 심학(心學)을 하는 요령을 진달하니, 상께서 가납하였다. 이조에 제수되어서 여러 차례 전조(銓曹)에 들어갔었다는 이유로 간절하게 사임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목릉(穆陵)을 개장(改葬)하는 데 대한 제문(祭文)을 지어 올리니, 상께서 그 내용을 좋게 여겨 말을 하사하고, 이어 대비(大妃)의 진향제문(進香祭文)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며, 승지와 병조, 호조, 공조로 옮겨졌다. 대사성에 제수되었는데, 마침 부제학이 결원이어서 이조에서 공을 첫 번째로 의망하자, 상께서 하교를 내려 전보시키지 말라고 하였으니, 선비를 양성하는 책임을 떠맡김이 이와 같았다.
을해년(1635)에 문충공(文忠公)의 상을 당하고, 다음 해인 병자년(1636)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는 중에도 예제(禮制)를 지킴에 있어서 잘못이 없게 하였다. 처음에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공이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들과는 처지가 다르니 어가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니, 계책을 이미 정하였다.” 하였다. 어가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혹 상복(喪服)을 입은 채로 군중(軍中)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의심하여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그러는 사이에 오랑캐의 기병이 쳐들어와 성문이 막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집안사람들 가운데 먼저 호서(湖西)로 피해 가 있던 자가 배를 구해 와서 맞이해 가려고 하자, 공은 말하기를, “이미 남한산성 아래에서 죽지 못하였으니 반드시 강도(江都)로 가 분문(奔問)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드디어 대부인(大夫人)을 모시고 강도로 갔다. 적이 강도에 이르렀을 때에는 겨우 벗어나 교동도(喬桐島)로 들어갔는데, 대부인을 등에 업고 가면서도 받들고 간 목주(木主)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거의 죽을 뻔한 것이 여러 차례였다. 대부인이 병으로 인해 죽자 상여를 받들고 와 임시로 수원(水原)의 쌍부리(雙阜里)에 장사 지냈다.
공은 상을 치르고 나자 몸이 심하게 상하여 출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마침 병조에 제수되고 또 괴원(槐院)과 비국(備局)의 부제조를 겸임하게 되었다. 승지와 첨지중추부사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도승지가 되었는데, 모두 병을 이유로 사면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강원 감사가 되었는데, 여러 가지 조처를 적절하게 하여 공사 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다음 해에 상께서 조정으로 소환하여 문원(文苑)과 사관(史館)의 일을 전적으로 떠맡겼으며, 이조에 제수하고 전에 겸대하였던 직책을 모두 돌려주었다. 관동(關東)의 백성들이 모두 그리워하면서 비석을 세우기를 남양 부사로 있을 때와 같이 하였다.
경진년(1640, 인조18)에 오랑캐의 사신이 의주(義州)에 도착해서 힐문한 적이 있었는데, 상신(相臣) 이하 여러 대관(大官)들의 이름을 지적하여 부르자, 사람들이 두렵게 여겨 혹 틈을 엿보아 모면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공은 본디 응당 가야 할 대상자가 아니었는데도 자청하여 먼저 나아갔다. 오랑캐들이 공의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은 것을 보고는 서로 장자(長者)라고 하면서 곧바로 지레 돌아가라는 말을 받아들였다. 얼마 뒤에 공적인 일에 연좌되어 체포되었는데, 언관(言官)의 말로 인해 다시 병조에 서용되었다.
다음 해 봄에 특별히 한성부 우윤으로 승진되었다가 대사헌으로 옮겨졌다. 가뭄으로 인하여 차자를 올려, 인심(人心)을 단결시키고 민력(民力)을 아끼고 성실(誠實)을 힘쓰고 허위(虛僞)를 밝히며 시종 본원(本原)에 대해 잊지 말라는 뜻을 진달하였는데, 상께서 너그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렸다. 예문 제학(藝文提學)과 동지춘추(同知春秋), 부제학(副提學)의 직을 겸대하였다. 말미를 받아 성묘(省墓)하자 상께서 특별히 인부를 내어 묘를 수리하는 것을 돕게 하였다. 또다시 도승지가 되어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는데, 재차 사임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에 승지로서 문형(文衡)의 직을 겸임하는 것은 관차(官次)에 있어서 구애됨이 있다는 이유로 본직을 해임시켜 주기를 요청하자, 상께서 그대로 겸임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전에 없던 일이었으므로 장고(掌故)가 이 사실을 기록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에 대사헌으로 있다가 특별히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공도(公道)를 힘써 따르면서 적체된 인사를 소통시키자 여론이 흡족하게 여겼다. 겨울에 뜻을 잃고 있던 간사한 자가 마음속으로 조정을 원망하고 있던 중에 마침 잠상(潛商)한 일이 발각되어 오랑캐의 조정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러자 오랑캐들에게 무고하여 여러 재신(宰臣)들을 끌어들이면서 자신은 벗어나기를 구하였다. 이에 공과 서너 명의 중신이 모두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공은 항변하면서 굴하지 않았다. 오랑캐들은 공의 말이 곧은 것을 보고는 기가 꺾여 도리어 어떻게 처벌할 수가 없어 벌금으로 은(銀) 1000냥을 내라고 하였다. 이에 이를 다 실어 보낸 뒤에 송환되었다.
갑신년(1644, 인조22)에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서쪽으로 가게 되었다. 공은 빈객(賓客)으로 있다가 이사(貳師)로 승진하여 따라갔다. 연도(沿道)에서 군민(軍民)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두루 물은 다음 곧바로 혁파하거나 시행하기를 청해, 공사(公私) 간의 비용을 줄인 것이 수백 전 이상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서는 지난날에 함께 무고를 받았던 대신들이 사신의 일로 심양(瀋陽)에 들어갔다가 구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사유를 갖추어 치계하였다.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한가한 자리로 나아갔다.
을유년(1645)에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몇 달 전부터 평상시에 피곤한 기색이 보였는데, 억지로 일어나 친구의 초상에 나아가 곡하였다가 병세가 심각해지게 되었다. 4월 16일에 이르러 성동(城東)에 있는 집의 정침에서 고종(告終)하니, 춘추가 51세였다. 부음을 아뢰자 조회(朝會)를 2일간 파하였으며, 조제(弔祭)하고 부의(賻儀)하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부음을 들은 사대부들은 모두들 애통해하고 상심하기를 친척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안과 밖이 다르지 않고 성실하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백주(白洲)와 같이 하는 사람을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죽은 지 수십 일이 지난 뒤 공의 동생인 참판군(參判君)이 계속해서 죽었으므로, 조야의 사람들이 더욱더 상심하였다.
공의 부인은 이보다 앞서 이미 가평군(加平郡) 조종현(朝宗縣)에 있는 선구고(先舅姑) 묘역의 해방(亥方)을 등진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 묘를 열고서 공과 합장하였으니, 실로 이해 8월 6일의 일이었다.
공은 사람됨이 기도(氣度)가 평탄하고 평온하였으며, 풍골(風骨)이 기이하고 빼어났다. 마음의 문을 열고 피아(彼我)의 구별이 없이 속마음을 시원스레 드러내 보였다.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공(相公)은 사람을 잘 알아본다고 이름났었는데, 공이 어렸을 적에 보고는 나라의 그릇감이라고 칭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순수하게 갖추었으며,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려 기쁘게 하였다. 그 마음을 미루어나가 제매(弟妹)들에까지 미쳐 제매들의 마음을 얻었다. 노소(老少)나 붕우(朋友)들과 더불어 교제함에 있어서는 노소와 붕우들이 기뻐하여 능히 저버리지 못하였으며, 역임한 중외(中外)의 이민(吏民)들은 모두 공이 자신들에게 덕을 끼쳐주었다고 여겨 떠나간 뒤에는 그리워하여 마지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재명(才名)이 세상에서 으뜸이었으며, 묘령의 나이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당대에 명망이 높았던 문충공께서 문하(門下)의 여러 현인들에 대해 저울질을 하여 등급을 매겼는데, 공은 자신의 재주와 그릇을 가지고 공론의 추대를 받았지, 문벌에 의지하여 드러나지 않았으며, 왕왕 성상의 간택에서 나왔다. 국가에서 어진 인재를 대우하기 위하여 설립한 관직으로는 경악(經幄)과 언로(言路)와 두 전부(銓部)와 후설(喉舌)이 있는데, 그 관서의 장(長) 자리는 더욱더 신중히 선발하였다. 공은 이미 이들 자리를 두루 역임하면서 달마다 제수되고 해마다 바뀌어져서 서너 차례나 대여섯 차례를 역임하였으며, 혹 여덟아홉 차례나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에 매번 모여서 주의(注擬)할 때를 당해서는 공이 아니면 이 직임을 감당해 낼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며, 성상의 총애와 조정의 명망이 상하 간에 겹쳐서 쏠렸는데도 여론이 종시토록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관직을 제수할 적마다 힘껏 사양하여 벗어나기를 구하였으며, 반드시 부득이한 이후에야 억지로 명에 나아갔다. 상께서 자신을 알아준 데 대해 감격하여 험난함과 편함을 가리지 않은 채 힘과 지혜를 다하였다. 소장(疏章)과 계사(啓辭)를 올림에 있어서는 일에 대해 지적하고 실정을 아뢰어 명백하고 시원하게 하면서 털끝만치도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없게 하였는데,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로서는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공에게 기대함은 말할 것도 없었으며, 공 역시 스스로 크게 수립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자신의 이름을 세울 것을 기대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더욱더 공의 충성을 믿었다.
공은 평생토록 지나친 행동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았다. 큰일을 만나서는 일체를 모두 의(義)로써 결단하였다. 창졸간에 뜻밖의 일을 당하여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호랑이나 시랑과 같이 사나운 자들이 어슬렁거려 보는 자들이 모두 움츠러드는 상황에 이르러서도 당황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으면서 마치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편안하게 대처하였다. 평소에 기른 바가 없었다면 어찌 능히 그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공은 병을 자주 앓아 때때로 위험한 지경이 되었는데도 상의 옥체가 미령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문득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병중에 있다는 것도 잊었다. 집안에 거처하면서 어버이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어린아이가 부모를 찾듯이 하였으며, 비록 밤중이더라도 퇴근해서는 반드시 부모님이 계시는 곳으로 나아갔다. 형제들이 좌우에 빙 둘러 있으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는데, 늘 그렇게 하였다.
공은 한가로이 거처하거나 다른 사람을 접할 적에는 따스한 기운이 흘러넘쳤으며, 술을 마시면서 담소를 할 때에는 풍류가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빈한하고 미천한 자들은 공이 현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함께 쟁론하는 자들은 공이 기뻐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알지 못하였으며, 은혜에 감격하는 자들은 공이 덕을 끼친 것을 과시하는 기색을 보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한 가지 재능이나 한 가지 재주가 있는 것을 보면 친하고 멀고를 따지지 않고 온 마음으로 칭찬하고 끌어주었다.
공은 자제(子弟)들과 가속(家屬)들을 거느림에 있어서는 따스한 말로 감화시켰으며, 엄하고 가혹하게 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산업(産業)을 다스리지 않아 집안이 자못 곤궁하였으나,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상을 차리게 하면서 돈이 있고 없고를 물어보지 않았다. 친구들 가운데 가난한 자가 있으면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병든 자가 있으면 약물로써 구제해 주었다. 강도(江都)에 있을 적에 적들이 추격해 와서 아주 급박한 상황이었는데, 평소에 서로 알고 지내던 자가 강 입구에 배를 대 놓았기에 공이 바라보고서 달려갔으나 그 사람은 노를 저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가 버렸다. 그 뒤에 그 사람의 이름을 묻자, 공은 “나는 이미 그 일을 다 잊었다.”라고 하고는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공은 성품이 영특한 데다가 학문을 좋아해서 일찌감치 집안에서의 가르침을 받아 따로 스승에게 나가 배울 필요가 없었으며, 장성해서는 스스로 터득한 것이 더욱 깊어졌는데, 여러 종류의 서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일가(一家)만을 위주로 하여 파고들지 않았다. 시를 지을 때는 천부적인 문사(文辭)가 넘쳐흘러 재주와 감정이 양쪽 다 아름다웠으며, 옛사람들의 자취를 따르기만을 힘쓰지 않고 스스로 자기 나름의 풍격과 격조로써 아름답게 하였다. 시를 지어주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붓을 휘둘러 그 자리에서 지어주었는데, 혹 미처 탈고를 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이미 전해 외우기도 하였다. 이에 문충공께서 “시는 나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묵적(墨跡)은 굳세고 빼어나서 당송(唐宋) 시대의 명가(名家)들을 따랐으며, 주고받은 서찰 가운데에도 범상한 글씨가 없었다.
부인은 나주 박씨(羅州朴氏)로, 본디 신라(新羅)의 국성(國姓)이었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낸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따님이며, 뒤에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나면서부터 아름답고 지혜로웠으며, 정신과 식견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어려서 여러 언니들의 뒤를 따르면서 여공(女工)을 배우는 여가에 여러 서책을 두루 읽어 통달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글자를 아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다. 시집을 와서는 효성스럽고 공경스러우며 자상하고 순하여서 부도(婦道)를 아주 잘 갖추었다. 이에 내외의 친당(親黨)들이 모두 법식으로 삼았다. 문충공과 공이 양전(兩銓)을 출입한 것이 전후로 10여 년이나 되었어도 한번도 청탁 등으로 누를 끼친 적이 없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2월 25일에 전란을 피하다가 쌍부리(雙阜里)에서 죽었다.
공은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일상(一相)은 17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종(侍從)과 대간(臺諫)을 역임하고 군수(郡守)로 있는데, 아름답고 빼어나서 집안의 풍모를 이었는바, 앞으로 얼마나 더 뻗어 나갈지는 헤아릴 수가 없다. 차남 가상(嘉相)은 20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난리를 만나 효성을 다하다가 죽었다. 삼남 만상(萬相)은 진사로 재행(才行)이 있으며, 공이 병을 앓자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피다가 공이 죽은 지 6일 만에 뒤따라서 죽었다. 사남 단상(端相)은 학업에 종사하고 있다. 딸은 서문상(徐文尙)에게 시집갔다.
일상은 영의정 완산(完山) 이성구(李聖求)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강도(江都)에서 절개를 바쳐 죽었으며, 1녀를 두었다. 다시 찰방 유인성(柳仁聲)의 딸에게 장가들어 1녀를 두었는데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가상은 참의 나만갑(羅萬甲)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만상은 판서 오준(吳竣)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단상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판서를 지낸 이행원(李行遠)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손자와 손녀는 모두 약간 명이다.
아, 공과 같은 재주를 가지고서 때를 만나 등용되었으나, 재주를 끝까지 다 쓰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이는 대개 거듭해서 상을 당하여 애통한 생각에 속이 타 드디어 불행하게 된 것으로, 군자들이 거듭해서 애석하게 여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마음이 합하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유독 공의 집안과 양대(兩代)에 걸쳐 교분을 맺은 것을 좋아하여 배항(輩行)으로 차이를 두지 않았다. 지난날에 이미 선상공(先相公)의 묘소에 명을 지어 아직 12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지금 또다시 공의 명을 짓게 되었다. 그러니 차마 명을 지을 수가 없으면서도 또한 차마 명을 짓지 않을 수도 없다. 명은 다음과 같다.
연주에다 관적을 둔 연안 이씨는 / 李籍延州
족계 본디 중화에서 흘러왔다네 / 自出中華
대를 이어 아름다운 덕을 이어서 / 世載令德
지금 와선 명문가의 집안 되었네 / 迄爲大家
문강공이 조상의 뒤 이어 태어나 / 文康接之
찬란하게 삼장원의 이름 빛냈네 / 赫赫三元
그렇지만 어사에다 수령 지내어 / 御史知縣
굴한 때가 많았었고 편 땐 적었네 / 多屈少伸
빛나게 앞 이어받고 후손 열어 줘 / 光前啓後
이에 상군 뒤이어서 태어났다네 / 乃生相君
문장으로 이 세상의 종사가 되고 / 文爲世師
덕 베풀어 이 세상을 감싸주었네 / 德爲世毗
상군에게 아들다운 아들 있으니 / 相君有子
그가 바로 태재 자리 있던 공이네 / 是爲太宰
태재 품고 있던 자질 어떠했던가 / 太宰如何
그 마음은 아주 편해 화락하였네 / 其心孔愷
추위 떠는 사람 보면 감싸주려 해 / 寒顔思庇
선비들이 그 아래로 귀의하였네 / 士歸廨宇
은혜로운 정사 펼침 흡족하여서 / 惠政浹肌
백성들은 부모 같다 말하였다네 / 民曰父母
내직 외직 어디에고 마땅했거니 / 外內俱宜
사람들의 여망 모두 쏠리었다네 / 公望攸屬
이조 판서 대제학의 자리 맡으매 / 總銓持衡
그 직임에 진정으로 잘 맞았다네 / 允諧厥職
엄숙하고 또 공손한 저 문원에서 / 肅肅文苑
대를 이어 수석 자리 맡았었다네 / 仍世主席
네 필의 말 바야흐로 달려가다가 / 四壯方驅
중도에서 자취 그만 꺾이어졌네 / 中塗輟跡
공의 재주 풍성하게 준 것은 바로 / 豊公之才
하늘에서 장려하여 주었던 바고 / 天所獎
공의 수명 인색하게 준 것도 바로 / 嗇公之壽
그 역시도 하늘에서 잘못한 거네 / 亦天枉
사람 운명 맡고 있는 저 푸른 하늘 / 彼蒼司命
어찌하여 후히 줬다 박하게 줬나 / 胡厚胡薄
썩지 않고 길이 전할 것이 있나니 / 不朽者存
이 빗돌과 더불어서 안 없어지리 / 與石無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