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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과 나의 은혜 계산법>의 줄거리: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이 있고 받는 나의 은혜 계산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 받겠다고 하고 주시라고 할 것이 아니라, 우선 계산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방식대로 은혜를 계산할 줄 모르면 받아놓고도 못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받지 못하고도 받았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의 핵심은 하나님 의존도에 맞추어져 있음입니다.
하나님과 나의 은혜 계산법
(고린도후서 12:1~10)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과 나의 은혜 계산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은혜 계산법”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과 나의 은혜 계산법이 달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머무는 동안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데 은혜에는 주시는 분의 계산법이 있고 받는 사람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조건 받겠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무조건 주실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은혜를 계산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산하는 법을 모르면 이미 충분히 받고도 못 받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전혀 받지 못했어도 많이 받았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을 모르고 나의 방식대로 은혜를 계산하는 것은 모든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을 아는 것은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의 질은 결국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에 달려있습니다. 인생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은혜를 계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자면 은혜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밀물처럼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문제는 그 은혜를 제대로 계산하는 법을 모르면 은혜의 밀물 속에서도 항상 부족하다는 느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심지어 사도 바울도 이 은혜의 계산법을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을 깨닫고 나의 은혜 계산법을 버리면 이상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계산법을 바꿨을 뿐인데 이미 충만하도록 임해있는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계산법을 바꿨을 뿐인데 심지어 저주로 여겨졌던 일조차 은혜와 축복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을 모르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영원토록 받을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은혜 계산법을 바꾸었던 것처럼 우리도 은혜 계산법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완전히 바꿀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이미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고 있음을 느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절은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이라고 명명한 천국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이끌려가서 보았던 환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1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대단한 경험에 대해 왜 무익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가서 본 환상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공개적으로 말하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환상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 있었던 사도 바울 개인에게 국한된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말해봐야 유익이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처럼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은혜를 경험해 보라는 제안인 것입니다. 다만 고린도 교회에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 영적으로 행패를 부리는 상황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였다는 것을 부득불 이야기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조직이나 기관이 발부한 사도 증명서를 가지고 행세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자면 터무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인간에게 보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로 자처함을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았던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4차원 천국의 가장 깊숙한 곳입니다. 천국을 집으로 치자면 안방까지 들어갔다 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경험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 측근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하나님의 측근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서 사도의 사역을 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다만 이것은 사도 바울과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오해가 발생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지극히 높은 자로 여겨서 신격화할 위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대단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풀지 않았습니다.
한편 7절을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개인적 은혜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도 바울은 스스로 교만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해짐을 막으시려고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육체의 가시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일지라도 다른 사람에 비해 우월하다는 자만심이 생긴다면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한 팀을 이루는 조합은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만이란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 주도형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스스로 하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주도형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주체성은 인정될 수 없고 하나님과의 연결은 끊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과 한 팀은 깨어지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 이러한 자만에 빠져들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사탄의 사자라 부를만한 가시를 육체에 두셨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병을 사탄의 사자라 부른 이유는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큰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 병을 간질로 추측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갑자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이 뒤집혀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혀를 차며 ‘바울아, 바울아, 네가 전하는 복음으로 네 병이나 고쳐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병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사탄의 사자라고 별명을 붙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병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로서는 겨우 세 번밖에 간구하지 않았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세 번은 무척 익숙한 숫자입니다. 하루 세끼를 먹으니까 하루 세 번은 기도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새벽기도를 가서 긴 시간 기도하는 것도 한 번이고, 짧은 시간 기도하는 것도 한 번으로 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세 번 간구했다고 하니 별것 아닌 것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에 담겨진 실상은 우리의 생각을 한참 벗어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11장 24절을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서른아홉 대를 다섯 번 맞았다고 하지 않고 굳이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았다고 한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십은 하나의 단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 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세 번만 간구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십일 기도를 세 번 했다는 의미입니다. 또 히브리 어법상 3은 완전한 수입니다. 세 번을 했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간절함을 다 동원해서 기도를 드렸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간절히 간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온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중에 간질로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뒤집혀 쓰러져서 경련이 일어났다고 상상해보시면 어떻습니까? 제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래도 진리를 전하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이 병을 고침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간질병을 충분한 은혜로 계산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병 낫기를 간구한 이유는 간질이라는 병이 있는 한 은혜가 충분하다고 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상태를 포함하여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이로부터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하고 있지만 예수님과 하나님은 한시도 예외 없이 하나가 되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직면하게 됩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가 되는 것이고 한 팀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라는 대전제 아래에서만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후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직면하여 한 팀을 이루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으로 은혜를 주실 필요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삼라만상을 무에서 유로 불러내신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실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함께하십니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그 외에 더 필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떤 능력이나 힘이나 삶을 위해 사용하기 위한 재료가 필요 없습니다.
이 점을 좀 더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광야로 이끄십니다. 광야는 곧 사막입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어떤 요소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막에서 이기고 살아남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아님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사막은 들어가서는 안 될 곳입니다. 들어가면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야 하는 곳이고,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면 물을 잔뜩 준비하고 낙타를 타고 가야만 하는 대비책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남녀노소를 포함하여 200만에서 많게는 250만까지 추산되는 큰 무리였습니다.
이들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사막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기를 요구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믿고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의 대상으로 삼아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사막을 극복하고 살아남는 일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실 일이었습니다. 사막에서 어떻게 살아남는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막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로 주셨던 것은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이 아닌 하나님 한 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기 위해 기질을 성장시키기 위한 상황들을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산법입니다.
한편 우리의 계산법은 하나님의 계산법과는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많이 주시는 것이 은혜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돈을 많이 달라고 간구합니다. 돈이 없는 삶이 너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집세를 내야 될 때가 되면 걱정을 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빌리다 보니 이제는 더 이상 빌릴 곳도 없습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어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번 달 집세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도 돈을 달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돈을 주셨습니다. 이제 집세 따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집을 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집세에 대한 걱정이 없어지자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명품을 밥 먹듯이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돈 문제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건강합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외모가 출중합니다, 자격증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독립적인 자기 주도형 인간이 되어서 스스로 모든 일을 해나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받은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최고의 은혜인 하나님과 함께함이 이미 깨진 상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최고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갈 때만 허락되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은혜가 깨지는 방향으로 주어지는 일이라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한때 간질병이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아버지, 간질이 나타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4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으로부터 사도 바울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간질이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염려와는 달리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간질이 나타나는 모습을 보고도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고 복음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참 대단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도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간질 때문에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간질이 없어졌다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횟수 자체가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복음을 전하는 동안 간질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필요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치유를 간구하던 사도 바울은 간질이 나타남에도 복음이 전해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힘으로는 간질의 벽을 넘어서 복음을 전할 수 없다고 여겼기에 치유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은 더욱 더 하나님과 하나 되지 않으면 사도로서 역할을 해나갈 가능성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 만큼 치명적인 병을 가진 사람이 사도로서 축복과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탄의 사자라고 별명을 붙인 병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능력 발휘가 축소되면 될수록 하나님의 능력 발휘는 확대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직면한다는 대전제 아래에서만 깨달아집니다. 최고의 은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기에 이 일이 가능하도록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과 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갓난아기를 보면 완전히 무력합니다. 전적으로 부모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걷지도 못하기에 어디를 가려면 부모가 옮겨줘야 합니다. 누워서 스스로 뒤집지도 못합니다. 심지어는 우유나 모유를 먹고 트림하는 것조차 스스로 할 수 없어서 등을 두드려줘야 합니다. 아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우유나 모유를 먹고 소화시키는 것과 배설하는 것뿐입니다. 99%를 부모에 의존하다가 커가면서 의존도가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사춘기가 지나고 청장년이 되면 부모 의존도는 0%가 되어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되는 것이 은혜라고 착각합니다.
사람이 아담 이후에 타락했다는 것은 하나님 의존도가 0%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부를 때조차도 하나님을 부리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해결과 복과 성공과 성취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인이고 결정권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정한 일들을 이루어달라고 하나님을 종처럼 부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같아도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는 0%입니다. 스스로 주체이자 주권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성취의 방법으로 채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이와는 정반대이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갓난아기도 우유나 모유를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는 것까지는 스스로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의존도가 100%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은혜 계산법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강을 은혜로 구하고 돈을 은혜로 구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건강해지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돈을 달라고 간구하는 사람은 돈이 생기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건강해지고 돈 많이 버는 것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필요가 없을 만큼 이 세상 것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계산법과 나의 은혜 계산법이 완전히 다른 상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방식의 은혜 계산법을 터득한다면 우리의 기도와 자랑은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존도를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내게 주어지는 일들을 은혜로 여기며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약함입니다. 나의 부족함이고 나의 무능함이고 나의 무력함입니다. 내가 약하면 약할수록 하나님 의존도는 극대화됩니다. 하나님 의존도가 극대화되어야만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발휘되는 영역이 점점 넓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의 약함과 무능과 무력함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한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의존도를 100% 늘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돈이 없고 건강도 좋지 않으시다면 자랑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없으면 못 살 정도로 하나님 의존도를 높여가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이 유지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은혜입니다. 이 세상 것을 자꾸 달라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것은 은혜일 수 없습니다. 돈 많은 것이 은혜일 수 없고, 건강한 것이 은혜일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 의존도가 낮아진다면 저주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의존도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준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무능과 무력함이 갓난아기보다 더 심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님으로써 나의 무능과 무력을 만들어내면서 하나님의 의존도를 100%까지 올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9절에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큼 무능하고 무력하고 약한 자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상태에서만 하나님 의존도가 100% 될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함이 유지될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무능한 인간이라도 못할 일이 없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이 없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말씀으로 삼라만상을 무에서 유로 불러내신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려 하느냐가 하나님과 나를 갈라지게 합니다. 나는 생각조차 스스로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주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임을 자랑하시며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로 나의 무능과 무력과 약함이 절정에 이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말로는 다 찬양할 수 없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 의존도가 100% 끌어 올려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