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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믿음은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 2023년 6월 4일 주일 예배
본문 / 디도서 1:13-2:14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이 세상의 영광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성실하게 열심히 공부한다고 다 의사와 검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의사들이 왜 의대의 정원을 늘리는 것에 기를 쓰고 반대합니까?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세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대상을 ‘누구든지’라고 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누구나 오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왜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가는 자들이 많을까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많은데 왜 택함을 입은 자들은 적은 것일까요? 구원을 받는 데는 오직 믿음 하나면 되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이 시대의 성도들의 그 믿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다른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목사들 중에 십자가를 안 믿는 목사들이 있습니까? 다 믿는다고 하는 겁니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다 진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가짜 믿음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이 아닙니까? 주여 주여 한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과 진리에 대해 예리한 지식으로, 재미있게, 열정적으로 전하다고 그게 믿음의 증거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볼 때 그 외모에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그를 버렸다 하시고 외모를 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중심이 어떠냐? 그 중심에 뭐가 있느냐가 이게 문제인 겁니다. 예배, 기도, 헌금, 봉사, 전도, 헌신, 구제, 성경지식과 직분 등으로 정말 그 믿음의 겉모습은 등은 괜찮게 보이는데 그 중심도 그러냐는 겁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교회에 오면 믿음이 그럴 듯한데 집에 가면 전혀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도 정말 아닌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면 전혀 아닌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믿음이 대단해 보였지만 그러나 그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 앞에 위선자와 외식하는 자로 드러난 것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길 원하고,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높아지기 원하는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고 타락한 교만한 자아가 주인의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 얼마든지 종교적인 열심과 선한 행위로 포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인간은 속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내 믿음을 심판합니까? 수많은 사람의 그 인정과 칭찬과 존경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단 한분의 인정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정말 회개하였는지, 거듭났는지, 내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 앞에서 늘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에 있는 사람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는 그들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하게 하여” 말씀합니다. 왜 꾸짖어야 합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말씀합니다.
입으로만 믿음 있는 척 주여 주여 했지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믿음의 열매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이 있고, 성도라는 믿음의 나무로 일컬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가 없으면 불신자와 함께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로 던져지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왜 많은 성도들이 겉은 그럴 듯한데 그 중심을 보시는 심판대에서 하나님께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불법을 행한 자야! 여기는 네가 들어올 곳이 아냐! 라는 소리를 듣겠습니까? 문제는 간단합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회개했는지 어떻게 압니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를 보면 압니다.
정말 회개하였는지 사람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사람이 정말 회개하였는지 말입니다. 같은 시공간에서 예배를 드려도 회개한 사람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예배를 준비하고 대하는 마음과 자세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겉모습은 같아보일지 모르지만 그 마음과 영에서 나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예물을 드리고 봉사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보지 않으면 즉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열심과 행위의 질과 양이 현저히 떨어지고 달라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자신의 영혼과 마음과 잠시 스쳐가는 생각까지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고 대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일 중에 작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다 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종교가 아닙니다. 교만해진 자아를 숭배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우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잠시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 구원이 회개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만나 내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나 나를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했던 하나님의 원수요 죽어야 할 죄인임을 마음과 영으로 깨닫고 그 타락한 삶의 가치관과 방향과 인생의 목적에서 완전히 돌이키는 것입니다.
내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의 중심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회개이며 구원을 받는 믿음인 것입니다. 구원받으신 것 같습니까?
회개만 하면 다 구원받는데 말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해도 못 들어갈 자들이 많다고 하신 것을 보면 그 마음과 영으로 진짜 회개한 사람들은 적은 것입니다. 그 육신의 겉모습은 회개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그 마음과 영의 깊은 곳을 보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과 돈과 영광과 명예와 즐거움과 재미와 쾌락으로 그 타락한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즉 자신의 주인 됨을 교묘하게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도 새벽에 기도할 때마다 묻고 또 묻습니다. 하나님 나 정말 회개했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기 전에 이 세상에 있을 때 모든 죄들이 다 십자가 앞에 드러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내 죄를 낫낫이 다 회개하고 대속의 피로 정결하게 씻음을 받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성도들을 회개시키는데 목회의 운명을 걸어야겠다고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뭘 하겠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다 쇼하는 겁니다.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자아숭배입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성도들을 꾸짖으라는 것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회개의 길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그 마음에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런 성도가 되어서는 결단코 안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는 정말 회개하였는지 물어야 됩니다. 그걸 누가 대신하겠습니까? 여러 번 말하지만 모호함 속에 숨고 덮어놓으면 안 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이렇게 믿고도 회개한 게 맞는지 말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 성도들의 믿음이 직업이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의 믿음을 육신과 세상의 직업에 비유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식주가 걸린 즉 육신의 밥줄이 걸린 그 직업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어떻습니까? 피곤해도 벌떡 일어나 회사에 갑니다. 회사는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아파도 갑니다. 혼나도 갑니다. 사람들에게 듣기 싫은 소리 듣지 않으려고 열심을 냅니다. 인정받으려고 정성을 다합니다. 그 일에서는 보람을 느낍니다.
그런데 영생이 걸린 그 믿음은 어떻습니까? 내 믿음을 심판하실 하나님은 어떻게 섬깁니까? 대충 적당히 부담 없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겁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도들이 가장 만만하고 쉽게 여기는 것이 구원이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직업을 대하는 것처럼 믿음도 그렇게 하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갈 때 생계의 수단인 그 직업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그 믿음이 비교할 상대가 됩니까?
많은 성도들은 믿음을 잘 못 알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여 주여는 해도 십자가의 은혜에 합당한 믿음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함께 섬기다가 지옥에 가는 겁니다.
이런 성도들이 교회마다 너무 많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교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성도들에게 말하라고 선포합니다. 믿음의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교회가 성도들에게 믿음의 합당한 삶을 가르칩니까? 십자가와 회개가 없는데 뭘 가르치겠습니까? 기껏해야 종교적인 행위와 열심만 강요하여 열심 있는 내 교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성수 잘해라. 십일조 철저하게 드려라. 기도해라. 전도해라. 봉사해라. 구제해라. 선교해라. 그래서 복 받아라. 율법주의자와 기복주의자를 양산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라는 것마저도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물질적인 수준을 요구하는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도에게 성도들에게 뭘 가르치라고 합니까?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 젊은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 종들에게 구체적인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절제, 경건, 신중, 믿음, 사랑, 인내, 행실의 거룩함, 모함하지 말며, 술의 종이 되지 말고, 선한 일을 하며,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며, 가정에서 질서를 지키며, 믿음으로 자신을 단장하고, 선한 일에 본을 보이고, 범사에 순종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신실함을 나타태어 하나님을 빛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도덕과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삶과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를 만난 것이고 그 십자가는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숭배하는 내 자아가 주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고 거듭난 자들을 향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신 겁니다. 정말 음란과 죄악으로 부패한 이 세상에 소금으로, 이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존재하고 있습니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 하겠느냐?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밝힌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까?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면 영광이지만 굴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빛이라 어둠이 된 것입니다.
케냐에서 사업을 하는 한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배관이 문제가 생겨서 수리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 찾아갔더니 계단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고열과 땀으로 죽어가는 겁니다. 폐렴에 걸린 것입니다.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였습니다. 5일 동안 입원한 후에야 이 사람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치료비도 다 대준 것입니다.
다시 배관 수리를 이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감사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배관 수리를 다하고는 있는 돈을 다 뒤져서 훔쳐간 것입니다. 세상에, 죽는 사람 살려놓았더니 자기 보따리가 아니라 남의 보따리를 훔쳐간 것입니다. 은혜는 갚지 못할망정 도둑질을 해간 겁니다. 원수로 갚은 것입니다.
사람이 이럴 때 가장 열 받고 힘듭니다. 자신의 사랑과 자비와 선을 악으로 갚는 배신을 당할 때 가장 치가 떨리는 것입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도둑을 맞으면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쩌면 생명을 구해준 사람의 은혜를 원수로 갚느냐는 것입니다.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배신으로 분노가 진정이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안 놔두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이 장로님에게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런 사람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시지 않았느냐?
당연히 죽어야 할 죄인이며, 소망도 없는 그 불가능하고 벌레만도 못한 나를 살리기 위해 죄 없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 내 죄를 다 아들에게 전가시키고 그 아들을 대신 심판하여 내 죄를 용서해주지 않았느냐?
우리가 그 감당할 수도 없는 한량없는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우리가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았느냐? 기가 막힌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삶에서는 그 은혜를 배신하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않았느냐?
지금이 당신이 받은 하나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다. 그 사람을 찾아가라. 돈을 두둑하게 준비해라. 그리고 미안하다고 해라. 당신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도둑질을 했겠냐고 말하고 돈을 주고 용서해라.
그런데 이게 쉬운 일입니까? 순종은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못하는 겁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을 때에는 세상이 다 내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만났을 때 그 기가 막힌 빚을 탕감 받은 그 은혜에 대한 믿음이 나왔습니까? 전혀 안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은혜는 받았지만 회개는 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받았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받은 은혜를 내 이웃에게 내놓을 수 없는 겁니다. 십자가의 믿음은 없는 겁니다. 우리는 반드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묻고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것을 구원을 받은 믿음으로 착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만 달란트를 받아도 받은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은혜로 받은 믿음을 내놓지 않을 때 악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잡아다 다시 옥에 가두라고 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구원에 대해 말씀을 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모호한 것도 있지만 그 모호함 안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이걸 집중적으로 다루면 목사도 고통이고 성도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회를 잃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외면한다고 지옥이 천국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던 어떤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엄마가 자살을 하면서 두 아이를 자기 다리로 조여서 붙잡아 맨 것입니다. 같이 죽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살았는데 다리는 못 쓰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 맡긴 것입니다. 병원에서는 빨리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썩는 냄새가 나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을 다 내보내고 붕대를 풀면서 지금 너희들의 다리가 어떤 상태인지 두 눈으로 보라고 했습니다. 붕대를 풀자 썩은 냄새가 나는 다리가 보이자 아이들이 악을 쓰고 울었습니다. 너희들 두 눈으로 똑똑히 봐라. 이게 너희들의 다리다. 그런데 이제부터 하나님이 너희들의 다리를 어떻게 만지고 치료하는지 봐라.
아이들 상처받을까 그저 숨기고 붕대로 감아놓기만 하면 됩니까?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운동회에서 일등하고 오더라는 겁니다. 그 어린아이가 매일 큐티를 하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이가 된 것입니다.
이 교회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적다는 것이 실망입니까? 거의 어떤 교회든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실망이 아니라 인생이 끝장나는 것 같은 절망을 해야 합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절망 말입니다. 언제까지 모호함 속에 숨어 있겠습니까? 이제 내가 만든 그 거짓(다른) 믿음에서 나와 내가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서 어떤 자인지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죄인인지 말입니다. 얼마나 꼴 같지 않은지, 얼마나 괴물 같은지.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지, 얼마나 교만하지, 얼마나 간교하지, 얼마나 음란한지, 얼마나 탐욕스런지, 얼마나 징그러운 죄인인지, 어떻게 이런 게 있을까? 세상에 나 같은 게 또 있을까? 내가 이러고도 사람인가? 그 실체가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이 세상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 앞에 나타난 내 모습을 깨닫는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부르시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심판을 받은 죽은 사자가 아니라 나의 결단과 결정으로 얼마든지 천국을 선택할 수 있는 산 개인 것입니다.
정말 감사하십시오. 나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런데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이 그 기회를 업신여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회개는 하지 못한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귀한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하고 구원을 받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고불고 안 해도 됩니다. 내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회개해야 순종하지만 순종할 때에 진짜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이 전화를 계속해도 받지를 안는 겁니다. 그런데 계속하니 전화가 연결이 됐습니다. 한 번 만나자. 그리고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대로 하는 겁니다. 나는 당신이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미안하다. 이 돈을 가지고 가라. 그 사람이 어떻게 습니까?
아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는데 그 원수에게 더 큰 은혜를 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머리가 뜨거워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장로님에게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살면서 많은 상처를 받고 그 상처를 안고 살았는데 그 순간 그 마음의 상처가 다 씻겨나가더라는 겁니다. 와! 엄청난 기쁨과 평안이 내려오는 겁니다. 생수의 강이 네 배에서 흐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평안과 기쁨은 결코 세상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만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겁니다. 하늘에서만 내려오는 겁니다. 회개하고 순종하는 그 믿음 위에만 내려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지금 지옥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는 자들은 눈도 없고 손도 없고 다리고 없고 말도 못하고 얼굴도 괴물같이 생기고 몸은 병들고 사람들이 보면 기겁을 도망하고 가난하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평생을 살아도 좋으니 한 번만 세상에 나가 믿음으로 살 기회를 달라고 애원을 해도 기회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날에 두려움이 없을 것이고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내 영혼을 구원하고 싶어 환장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든 우리를 지옥에 보내려는 분이 결단코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왜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셨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에 눈이 먼 하나님의 은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를 마음과 영으로 깊이 믿고 내 죄를 대속해주신 그 십자가에 회개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 날마다 나를 못을 박고 죄와 싸우며 말씀에 순종하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회를 잃지 말고 구원을 이루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