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중반이 되어가는 나이에 첫 만남에 바로 친구가 된 사람이 있다. 군포양정초등학교 참사랑땀 반에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며 성장하고 땀 나게 잘 놀기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교사 이영근. 10만 회원이 가입해 있는 ‘초등참사람’(http://www.chocham.com)을 1999년부터 운영해오고 있는 그를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났다.
작년 말에 <교육과정에 돌직구를 던져라> (2014.11. 에듀니티)를 펴내고 출판사 관계자와 몇몇 지인들이 모여 조촐한 축하의 자리를 우리집에서 가졌는데 그때 그가 경기도에서 전라도까지 수업을 마치고 단박에 달려왔다. ‘초참’의 운영자라면 한참 선배일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그는 나와 동갑내기였다. 평소 진솔한 삶을 페이스북을 통해 내비친 그의 첫인상은 낯설지 않았다. 그와 나는 그날 밤 삶을 나누는 동무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지역 강연회에서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그와 함께 공부모임을 하고 있는 ‘으뜸헤엄이’라는 교사모임에서 마련한 새 학기 준비모임을 갖는 자리였다. 모임 끝에 그날 밤은 그의 집에 머물며 많은 이야기를 또 나누었다. 그날 동무는 그가 쓴 책 한 권을 내게 건넸다. ‘아이들과 펼치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와글와글 토론교실>(2015.2.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마음을 담아 친필 사인까지 덧붙인 책을 받고 나니 낱글자 하나라도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그는 ‘학생 자치로 가는 첫걸음, 우리 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요’라며 말문을 연다. 그런 다음 아이들과 함께 살아온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나간다. 이야깃거리는 새로울 것이 없다. 학급 임원 선거 토론회, 학급 어린이 회의, 토의로 여는 학부모 총회, 학급 규칙 만들기, 수학여행, 빼빼로데이, 북녘 수해 돕기, 작은 것도 함께 만들기, 우리 반 10대 사건, 싸움․따돌림을 글과 토론으로 풀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지금껏 살아왔던 내 방식과 사뭇 다르다. 작은 것 하나라도 아이들과 함께 해결해 간다. 이 모든 상황에 아이들은 스스로 뽑고, 지키고, 결정하고, 만들고, 풀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커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지난 십여 년 간 내가 몸담은 학교를 돌아보면 보람도 많았지만 피로감도 만만치 않았다. 보람이야 키워가면 되지만 피로는 풀어야 한다. 그러나 피로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짜증나는 피로’가 있었던 반면에 몸은 좀 고되더라도 무언가 가슴을 채우는 ‘뿌듯한 피로’도 있었다. 짜증나는 피로가 주로 교육 외적인 것들이었다면 뿌듯한 피로는 아이들과 내 마음에 추억으로 남는 것들이었다. 그래, 몸은 고되었지만 이는 피로라기보다 성장이었다. 이런 성장은 스스로 할 때, 함께 할 때 맛볼 수 있었다. 이 책 속에는 이런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그는 분명 많은 피로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여느 교사들처럼 낯설고, 느리고, 어수선하다 말하지 않고 '함께 커간다‘라고 이야기한다. 성장의 기쁨을 알았으니 그에게는 뿌듯한 피로였던 것이다.
학교혁신이 화두가 되면서 학생 자치, 학교 자치, 민주적 자치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자치의 중요성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막상 학교로 들어가면 이 말은 그저 문서에 구호로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몸담고 있는 전북지역은 단체협약을 통해 교무회의가 의결기구로 자리 잡았다. 이런 제도의 뒷받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학교 자치는 속도감을 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아마 경험의 부재가 아닐까 한다. 그동안 학교는 군대와 같은 방식의 학교 운영에 오랫동안 길들여졌다. 이렇게 길들여진 습성이 학생 자치로 가는 길을 터벅거리게 한다.
새로운 길들여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 길들여짐은 어떠해야 할까? 문득 <어린왕자> 속 대화가 떠오른다. “길들여진다는 게 뭐야?” 라는 어린왕자의 물음에 여우는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거지.”라고 대답한다. 새 학기를 맞아 아름다운 관계 맺기를 시작하는 시점이지만 그만큼 교사의 일이 몰리며 관계가 소홀해지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잠시 짬을 내어 이 책을 들여다본다면 익숙하지만 딱딱한 것을 대신하여 말랑말랑한 길들여짐을 맛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