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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바벨, 부스러기 인간 역사의 전초전>의 줄거리 :
바벨탑 사건에서 하나님은 동일한 가치 체계를 가진 하나의 언어로 묶인 인류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작은 덩어리들로 쪼개어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쪼개진 덩어리 중에서도 떨어져 나온 한 부스러기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시작하려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과 관계하는 부스러기들이 거꾸로 다시 뭉침으로써 큰 덩어리가 될 정도로 많은 수가 되기를 바라시면서 새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바벨, 부스러기 인간 역사의 전초전
(창세기 11:1~32)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흩으셨다’라는 말씀 뒤에 노아의 첫째 아들 셈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리고 27절부터는 셈의 족보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드디어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래까지도 거명되고 있습니다. 1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굉장히 길게 펼쳐지며,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가 본격적으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려 했으나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이들의 일치단결을 깨뜨리시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부스러기 인간 역사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인류는 거대한 한 덩어리로 뭉쳐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일치단결한 인류에게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게 하셔서 소통이 불가능하게 하심으로 흩으십니다. 그리고 그 흐트러진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한 부스러기 같은 아브라함과 일대일로 관계를 하십니다. 이로부터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실행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본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바벨탑 사건은 하나님이 부스러기 인간인 아브라함과 관계를 시작하시기 전에 있는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1절의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언어와 말이 같은 것 아닐까요? 언어가 하나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언어가 같다는 것이고, 말이 하나였다는 것은 언어 속에 낱말들의 의미가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이들이 하나의 의미 체계를 갖고 있는 하나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까마귀파의 사탄의 언어 체계 속에서 성공이란 건강이나 장수, 흑자 경영, 권력 쟁취, 인기를 누림, 승진이나 합격, 사치가 가능한 삶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반면 비둘기파의 십자가 언어 체계 속에서 성공이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죄악 된 자신을 날마다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죽이는 의로움이 성공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번제의 연기처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만을 유일한 좋음으로써 소망하는 완전함이 성공입니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호흡하는 동행이 성공입니다. 다시 말해 의로움과 완전함과 동행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공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언어 체계 속에서는 돈을 벌었거나 말았거나, 건강하거나 말거나 성공이라는 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유일한 좋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어서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유지되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이라는 한 단어를 가지고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언어 체계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해로부터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그 언어 속에 들어있는 낱말들의 의미까지 똑같게 사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가치관이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마음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좋은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같은 답을 하는 같은 가치관을 가졌기에 하나의 언어 하나의 말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가치관이 같으면 이해관계가 상충 되기에 서로 다툼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흩어짐을 면하고자 탑을 쌓겠다는 발상이 생겨난 것일까요? 다시 예를 들어 봅니다. 된장찌개를 끓이면 저는 된장찌개 안에 들어있는 두부와 호박을 좋아하고 집사람은 감자를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같은 된장찌개를 먹으면서도 싸우지 않습니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입맛의 가치관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감자를 좋아하고 집사람도 감자를 좋아한다면 감자를 두고 싸우게 됩니다. 모든 인간이 건강을 좋아하고 합격을 좋아하고 승진을 좋아하기에 정해진 자리를 두고 싸우고 경쟁합니다.
단순히 언어와 말이 하나이기 때문에 뭉칠 수 있었다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언어와 말이라는 것은 가치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언어와 말이 같다는 것은 하나의 가치관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똑같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인다면 돈 때문에 싸움이 나기 마련입니다. 형제들이 부모의 유산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는 모습은 낯설지 않습니다. 똑같이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나 형제 중에 한 사람이 돈 대신 하나님을 좋아한다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탑의 상황은 어떨까요?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싸움이 일어나고 경쟁이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시체를 좋아하는 까마귀파가 똘똘 뭉친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이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뭉쳐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지역감정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지역감정이 싹 걷힐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드컵 같은 국가대항전이 벌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 뭉쳐서 응원합니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적이 생길 때 똘똘 뭉치게 됩니다.
온 세상의 인간들이 하나의 가치관 속에서도 똘똘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 세상 바깥에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적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흔히 바벨탑은 교만의 상징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단순히 탑을 높게 쌓은 것이 교만은 아닙니다. 모여서 탑을 쌓은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가 된 이유가 1절에 담겨 있습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는 것은 인류가 같은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정된 가치를 많이 가지려면 싸울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이들은 똘똘 뭉칩니다. 마치 대한민국 바깥에 적이 생겼을 때 경상도와 전라도가 한마음이 되는 것처럼 바깥에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온 인간 세상 바깥에 적으로 삼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면 언어를 말했기 때문에 가치관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가치관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좋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간이 추구해야 될 하나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내가 좋아하는 가치들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재물 대신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재물을 좋아하는데, 도움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자녀 대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승진과 합격과 형통 대신에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를 좋아하면서, 승진과 합격과 형통을 좋아하면서, 그것들을 잘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기독교 종교에서는 바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좋음 대신에 하나님을 택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좋음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류가 똘똘 뭉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되 하나님을 좋아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본래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인류는 서로가 적이어야 됩니다. 미국과 중국이 이권 다툼을 벌이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독도를 놓고 일본이 자꾸 도발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영화에서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공하면 미국과 중국이 힘을 합칩니다. 한국과 일본도 독도 문제는 나중이고 일단 힘을 합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까마귀파 인간들이 인간 세상 안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좋음은 정면으로 대치가 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가지려면 인간 세상의 좋음에 대해서는 벌거벗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까마귀파 인간들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만의 리그에서 우리끼리 경쟁할 수는 있어도, 인간 세상 바깥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좋음을 왜 가져야 하느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좋음을 가지려면 세상의 좋음은 다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류가 하나의 가치관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언어를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좋음에 대해서는 반기를 들고 배척하는 데 일치단결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 배척이 왜 탑을 쌓는 것으로 이어진 것일까요? 인간은 높아지려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인간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써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 후에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타락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땅을 떠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만 하는데, 타락 후에는 왜곡되어서 마음을 땅에 붙이고 세상의 가치를 쌓아 올려서 높아지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마음 채움을 위해서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타락 후에는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번제의 연기가 올라가듯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올라가서 하나님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가지도록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땅에 붙인 채 땅에서 높아지려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는 시도는 아예 하지 않고, 그 대신 땅에 머물면서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쌓고 또 쌓아서 높아지려 하였습니다.
여기서 높아짐이란 권력을 갖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장에서 승진해서 상무가 되는 것만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상황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는 마음, 달라지려는 모든 마음이 실제로는 높아지려는 왜곡된 현상입니다. 지금 상황보다 나아진다고 해서 만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주어진 상황을 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가치를 쌓아서 높아지겠다는 시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나는 높아지려 하지 않고, 돈을 많이 갖고 싶어 하지도 않고, 권력을 갖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금 주어진 상황에 대한 불만이 있고 다르기를 바란다면 결국 그 마음은 높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본래 사람은 지금 상황이 달라지기를 바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함 자손입니다. 본래 사람은 지금 상황과는 상관 없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음을 땅에 붙이고 달라지는 높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아예 하늘로 올라가서 높음 위에서 내리 살아야 됩니다. 그래야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이후에는 모든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좋다는 하나의 가치 체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땅에 붙이고 높이 쌓으려는 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내리 삶을 살지 않고 치 삶을 삽니다. 사람은 높아지기 위해서 지금과는 다른 상황을 원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높음인 하나님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높음인 하나님을 놓치고 하나님을 배척할 때 나타나는 일이 세상에서의 삶이 달라지는 높음에 대한 추구입니다. 그것이 탑을 쌓는 것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이들의 일치단결을 깨뜨리십니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여전히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가치관이 똑같아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가치관이 강화될 수가 없습니다. 똘똘 뭉침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부장 승진을 놓고 다섯 명의 과장이 경쟁을 합니다. 이들은 경쟁을 하면서도 하나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무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무리는 곧 하나로 묶여있는 것입니다. 다섯 명의 과장이 하나의 부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이유는 부장 자리가 좋다는 하나의 가치관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니다. 빙상경기에서 쇼트트랙을 할 때 출전하는 모든 선수는 경쟁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쇼트트랙의 우승이라는 가치관에 하나로 묶여있는 무리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경쟁이란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자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쇼트트랙에서 우승하는 것이 좋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경쟁함을 통해 서로의 가치관을 강화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한 사람도 이 무리에서 빼내서 하나님의 좋음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와 가치 체계를 집어넣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면서도 공유하는 가치관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꼭 돈을 벌어야 돼, 내가 꼭 이 자리는 차지해야 돼, 서울대에 합격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경쟁자들과 만나서 소통하는 동안 가치관은 더욱 강화됩니다. 이것을 막으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인류를 흩어버리십니다.
인류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로 뭉쳐서 하나님이 좋다는 가치관을 배척하는 상황에는 틈새가 없습니다. 서로 경쟁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아닌 세상 것이 좋다는 가치관은 더욱 강화됩니다. ‘저렇게까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그렇게 돈이 좋단 말인가?’라고 생각할 때 ‘그럼 나도 그 좋다는 돈을 벌어보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동산 투기가 유행하는 모습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누가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었다고 하니 너도나도 뛰어듭니다. 일단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이 형성되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라도 인류를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강화될 가능성을 줄이고 하나님이 뚫고 들어가실 가능성을 커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가 한 덩어리가 되어 같은 가치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불가능하게 언어를 혼란하게 하십니다. 바벨이라는 이름에는 ‘혼란’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언어의 소통이 불가능해지면서 똑같은 가치관을 가졌지만 서로의 가치관을 강화하는 만남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치관은 똑같습니다. 세계 각국의 민족들을 보면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좋음의 대상을 살펴보면 똑같습니다. 인도 사람이나 중국 사람은 금에 환장합니다. 독일 사람, 일본 사람, 한국 사람은 돈에 환장합니다. 건강 장수를 좋아하지 않는 민족이 없습니다. 인도나 중국이나 대한민국의 문화는 무척 이질적이지만 자녀가 하버드에 합격했다면 똑같이 좋아서 펄쩍 뜁니다. 그 밖에도 승진, 인기, 명예, 사치를 꺼리는 민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잘게 쪼개신 인류 속에서 셈 족의 족보가 이어집니다. 셈 족의 족보가 기록된 이유는 단순히 셈의 자손들이 누구였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거대하게 하나의 언어와 하나의 가치 체계로 묶여있는 덩어리가 잘게 쪼개졌는데 셈이라는 덩어리가 있었고, 다시 데라의 덩어리에서 하나의 부스러기가 떨어졌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 부스러기인 아브라함과 일대일의 관계를 맺으시는데 우리는 앞으로 그 관계를 살펴볼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는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란 하나님께만 빛이 비추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도 좋음이 필요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으로써 아브라함에게 계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셔서 인류는 흩어졌고 소통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한 덩어리로 묶여있을 때처럼 이 세상 좋음에 대한 가치관이 강화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부스러기로 떨어진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붙잡으십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아브라함에게 계시하십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좋음이라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언어가 형성됩니다. 성경은 이러한 아브라함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며 인생을 살아가는가를 보여주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될 또 다른 부스러기들을 위한 하나의 모형이자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 같은 자손들을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 같은 부스러기들이 많아져서 덩어리가 되고 무리가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좋음에서 배척한 가치관, 세상 안에만 좋음이 있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인류는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높음인 하나님을 갖는 대신 천박한 땅에 마음을 붙인 결과 높아지려는 왜곡 현상이 탑 쌓기로 나타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내려오셔서 인류라는 덩어리를 흩어버리시고 잘게 잘게 잘라버리십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셈 족의 데라의 덩어리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부스러기를 택하시고,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신과 사람이 사랑의 관계를 이어갈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제시하십니다. 또한 이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흩으신 인류는 소통이 되지 않더라도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하나의 가치관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집단에서 떨어져나온 부스러기들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수없이 많은 부스러기들이 다시금 하나의 덩어리와 하나의 새로운 무리를 이룬 것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역사를 위해 셈 족의 데라의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아브라함이라는 미세한 부스러기를 붙잡으십니다. 이 부스러기로부터 온 인류를 지배하는 하나의 의미 체계이자 가치 체계에 맞서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좋음이라는 가치 체계에 맞서기 위해 인류가 똘똘 뭉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흩으시고 흩으셔서 작은 덩어리도 아닌 부스러기를 만드십니다. 데라의 덩어리에서 떨어진 아브라함이라는 부스러기를 붙잡으시고,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가치 체계로 만들어진 언어를 집어넣으시면서 관계를 하십니다. 그리고 부스러기인 아브라함과의 관계가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가치관에 대해 대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라는 가치관이라는 언어 체계를 가지고, 모든 삶의 현장과 모든 순간에 하나님과 연결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부스러기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부스러기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한 집단이 되고 한 무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동서남북 교회를 통해서 그런 작은 덩어리들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십자가 복음 방송을 통하여 아브라함 같은 부스러기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시간을 보내기를 유지했습니다. 이제 네 명이 모이면서 부스러기 네 개가 뭉쳐지는 하나의 덩어리를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들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는 모두 부스러기들입니다. 이 부스러기들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꿈꾸고 계십니다. 교회라는 하나의 덩어리를 위해서 이제까지 부스러기로 있던 위치에서 이제 작은 덩어리를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단체, 덩어리, 무리가 된 인류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좋음을 대적하는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뿐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무리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다행히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소통을 막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강화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셨듯이 나를 한 부스러기로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에서 인류를 흩으신 사건은 나를 이 세상 가치관의 묶음으로부터 부스러기로 떨어져 나오게 하신 사건입니다. 부스러기가 된 나와 하나님이 관계하시기 위해 준비하신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개인으로 섭니다. 한 부스러기로 섭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는 따로 떨어진 부스러기로 섭니다. 홀로 하나님과 관계를 갖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각자 하나님과 관계를 갖는 부스러기들이 모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로 바라보면서 하나, 둘 발맞춰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자 영적인 현주소입니다. 아무쪼록 한 부스러기를 택하여 시작하신 이 구원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대로 이식되는 또 하나의 부스러기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른 부스러기들과 더불어 점점 더 커지는 덩어리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브라함은 거대한 한 덩어리로부터 떨어져나온 부스러기였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또 하나의 부스러기들임을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세상 좋음의 가치관에 묶이고 정복된 상태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와서, 이 세상에 없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임을 알고 그 좋음의 언어 체계로 사는 자들이 부스러기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